북한에서는 라면을 “꼬부랑 국수”라고 한답니다. 백열전구를 불이 켜지는 알맹이라고 해서 “불알”이라고 한다네요. 형광등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긴~ 불알”입니다. 그러면 형광등 속에 스타트 전구를 뭐라고 할까요? “씨~ 불알”입니다. 웃고자 한 소리입니다. “소문만복래” 이 말을 듣고 웃은 분들과 집에 가서 웃을 분들 모두에게 만복이 깃드시기 바랍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고 하셨습니다.
2009년 새해를 맞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25절의,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너희를 향해 미소짓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분노하는 짓을 하기도하고, 말로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기도 합니다(말2:17). 하나님이 기뻐서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기가 엄마를 기쁘게 하는 것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됩니다. 그러면서 무럭무럭 자라가면 그것이 엄마를 미소짓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미소짓게 할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24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그 복이 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미소짓는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에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하나님의 복을 받은 증거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합”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연합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결속된 형제애의 연합입니다. 머리에서 수염으로 옷깃까지 흐르면서 몸 전체에 하나님의 복이 흐르고 있습니다.
참된 연합이란 규제와 강제로 형성되는 조화가 아닙니다.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연합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많은 악기가 성능도 소리도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음악을 위해 봉사하여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통일된 음악을 연출합니다.
머리로부터 지체 모두가 헐몬의 이슬로 젖어진 상태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참된 교회입니다. 기름 붓는 일은 부요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부요하고 기뻐하는 교회가 하나님을 미소짓게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말씀을 달게 받습니다. 말씀마다 아멘입니다. 그 말씀을 묵상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파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했다(행17:11-1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과 상고한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성경을 파고들어 연구하는 단계입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의해 새사람 된 공동체가 하나님을 미소짓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절)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자녀 된 내가 있어야 미소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그의 자녀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집은 두 번째 손자가 태어났지만 곁에서 두고 바라보는 기쁨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사니까요 사진이 수시로 옵니다. 그 손자의 할머니가 사진을 보며 이쁜놈 이쁜놈 그러며 손으로 사진을 만지고 볼에 비빕니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나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까지 내려가 전도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으로 바나바를 파송하였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행11:23)고 권했습니다.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여 계심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여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은혜란 “주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주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속에 머무르는 것이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다는 것과 성령이 너를 덮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떤 사람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고 어떤 사람의 얼굴은 해같이 빛납니다. 신선한 느낌, 생기를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심령에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심령에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중풍병자 한 사람을 네 사람이 메고 와서 예수님께 올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믿음을 일으키고, 전도를 하게 합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9:4)고 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입니다. 똑같은 “왜” 이지만 어떤 사람은 “왜 고난을 주십니까?” 어떤 사람은 “왜 구속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항의가 아니라 감격입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 아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찬송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하나님은 미소짓습니다. 밤에 피는 꽃처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6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면 하나님은 미소짓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는 것이 자신에게는 복이고 하나님께는 기쁨입니다. 내게 없는 평강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평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면 하나님이 미소짓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마음에 근심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는 것이 평강입니다. 근심할 일 두려울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평강이 있어서 두려움도 근심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골수를 녹여서 면역력을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잠17:1)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식탁에는 고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가 깃들어 있는 다니엘의 채소뿐인 식탁은 사랑과 자비가 결여된 벨사살왕의 산해진미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 함께 먹고 그의 평강을 누렸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룻과 나오미는 밭에 나가 추수꾼이 떨어뜨린 이삭을 주어다가 연명했지만 행복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채소를 먹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고 고기를 먹는 사람은 모두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를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이것이 사도행전 교회 모습입니다. 내전이 있는 나라, 분쟁이 있는 교회, 다툼이 있는 가정은 하나님의 얼굴에 슬픔을 짓게 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여러분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가 주장하시게 하세요.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면 내 얼굴의 평화 하나님의 얼굴은 미소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큰 장애물이 없으리로다”(시119:115) 장애물이 없는 인생, 장애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장애물이 없는 인생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사랑하며 사는 자에게 주신 평안입니다. 말씀과 평강으로 장애물이 없는 큰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시려면 돌이켜 어린 아이가 되세요. 어머니의 젖을 빨아먹는 아기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께 붙어 있고 주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밥이 되느냐 가나안 족속을 밥으로 삼키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달렸습니다. 열두 사람 중 두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받아 누리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미소를 짓습니다. 하나님을 웃게 하려면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데 두고 사십시다. 그러려면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안에 있고 그 평강으로 장애물이 없는 세월을 살며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