每水冥海溟 (매수명해명)
每木會梅檜 (매목회매회)
每人侮人悔 (매인모인회)
每日晦光誨 (매일회광회)
分明合冥(분명합명)
이 수수께끼같은 시를 읽노라면 빙그레 웃음이 돈다. 류영모의 통찰과 생각의 깊이를 유감없이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저 시를 쓰면서, 독자들이 이렇게 정색하고 읽을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물은 어두운 바다를 어둡게 하고
모든 나무는 매화와 회화나무가 모인 것이고
모든 사람은 남을 모욕한 걸 후회하고
모든 날은 그믐빛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읽어도 심오한 의미가 생겨난다. 모든 물이 모인 게 바다다. 바다는 물이 모일수록 깊어지며 어두워진다. 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매화나무와 회화나무의 생태만 이해해도 식물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밝게 돋우려 하지만 그러면서 남을 낮추고 모욕한다. 그래놓고는 다시 후회를 한다. 스스로를 돋우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밝고 환한 모든 날은 결국 어둠으로 돌아간다. 밝음은 밝음만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세상의 밝은 것들에 매몰되어 어둠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인가.
그러나 사실은, 일주일에 한번씩 YMCA 연경반 강의를 해온 류영모가, 요일마다 새겨야할 뜻을 풀어놓은 것이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했고,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재고 활용하는 것을 삶의 방침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류영모는 금요일에 강의를 나간 기록이 있지만, YMCA의 일정에 따라 특정 요일에 출강을 했을 것이다.
수요일마다 어두운 바다를 어둡게 하고
목요일마다 매화와 회화나무를 만난다
남을 모욕한 일을 후회하는 사람들에게
일요일마다 그믐빛을 가르친다
밝음은 부분이고 어둠은 전체다
[다석일지 1958. 11.22]
매주 수요일 강의를 하는 뜻은 무엇인가. 바다의 물을 더욱 깊게 하여 그 어둠의 깊이를 더해주는 일이다. 심오(深奧)함이란 게 바로 이런 뜻이다.
목요일 강의를 하는 뜻은 무엇인가. 나무들이 자라나고 꽃 피우고 열매맺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매화와 회나무의 숲에서 삶과 죽음과 생태계와 우주의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는가? 이렇게 류영모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을 것이다.
일요일 강의는 무엇인가. 일요일은 ‘태양’의 날이지만, 그것은 모두 어둠에서 비롯되고 어둠으로 돌아가는 날임을 일깨운다. 모든 햇빛에는 그믐으로 빛이 가라앉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 가장 밝은 것, 가장 뚜렷한 것은, 어둠 속에 들어있으며 어둠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요일의 공부는, 가장 밝은 날이 사실은 신(神)의 어둠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다.
제목의 '分明合冥(분명합명)'은 무슨 뜻일까. 명(明, 밝음)은 부분이고, 명(冥, 어둠)은 그것까지 포함한 전체라는 말이다. 분명(分明)이란 말은, 하나하나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는 밝음은 어둠의 부분이라는 말이다. 결국 밝음은 작고 모두가 어둠이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어둠에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감동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지만 류영모의 센스는 이쯤에서 더 나아간다. 이 시는 언어를 통한 깨달음과 유희를 추구한다.
어두울 명(冥)자를 잘 보라. 그 속에 해가 들어있다. 해가 들어있는데 왜 어두운가. 가장 밝은 것은 어둠 속에 들어있다는 의미다. 이 글자는 日과 六이 합쳐진 것으로, 16일을 뜻한다고 한다. 음력 16일은 달이 이지러져 어두워지며 그 어둠이 밝음을 덮는 날이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민갓머리(冖, 덮개)를 씌운 것이다. 이 명(冥)자를 생각하면서 시를 썼을 것이다.
시는 이렇게 다시 읽힌다.
每水冥海溟 (매수명해명)
매(每, 늘)와 수(水, 물)의 글자를 합치면 해(海, 바다)가 된다.
늘물은 바다다. 물이 많아서 아무리 가물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바다다. 명(冥, 어둠)에 수(水)의 글자를 합치면 명(溟, 어둠바다)이 된다. 어둠의 바다는, 밝음을 품고 있지만 어둠으로 드러나는 바다다. 신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每木會梅檜 (매목회매회)
매(每, 늘)와 목(木, 나무)의 글자를 합치면 매(梅, 매화)가 된다.
늘나무는 매화와 회나무다. 매화는 가장 춥고 어두운 동짓날 매정(梅精, 매화꽃의 정수)의 첫빛(一陽)을 품기 시작해서 다른 꽃이 피지 않는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스스로 어둠을 뚫고 밝음을 만들어내는 기이한 꽃이다. 목(木, 나무)과 회(會, 모임)의 글자를 합치면 회(檜, 회나무)가 된다. 회나무는 숲을 이루는 나무다. 나무들이 모여(會) 숲을 이룸을 의미한다. 나무는 어둠을 뚫고 빛을 이루며 하나하나 제 뿌리를 박아 하늘로 향하며 숲을 만들어낸다. 신을 향한 인간의 모습 또한 이렇지 않을까.
每人侮人悔 (매인모인회)
每日晦光誨 (매일회광회)
류영모는 아래 2행에서 반전의 묘미를 선물한다.
매(每, 늘)와 인(人, 사람)을 합쳐보니, 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모(侮, 업신여김)가 나온다. 늘사람은 '잘난척 사피엔스'다.
물을 모으면 바다가 나오고, 나무를 모으면 숲이 나오는데, 어찌하여 인간을 모아두니 ‘업신여김’이 나오는가. 이게 우연히 의미없이 나온 문자일까. 인간은 자신의 빛을 돋우기 위해 스스로를 분발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남을 깔아뭉개고 낮춰서 자기를 빛내고 돋우려 하기 쉽다. 그러면서 그 마음(心)은 다시 그 일을 뉘우치니(悔),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매(每, 늘)와 일(日, 태양)을 합쳐보니 회(晦, 그믐, 가장 어두운 날)가 나온다. 늘밝음은 어둠이다.
늘 해가 있는데 왜 그것이 어둠이 되는가. 저 그믐의 어둑한 빛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요 인간의 삶이요 인간의 신앙이다. 모든 빛은 바로 어둠이라는 것. 그 어둠을 바탕으로 밝음을 드러내는 것. 이것을 말(言)로써 늘(每) 깨우쳐야 하기에 회(誨, 가르침)라는 말이 나왔다. 두 구절을 다시 풀어서 생각해보면 이렇다.
모이기만 하면 남들을 낮추면서 자기만 높이려 하다가 후회하는 인간들이여
모든 밝음에는 어둠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교육’이네
모(侮)라는 말에는, 류영모의 또다른 깊은 착안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업신여김'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업신여기는 일도 많이 하지만, 그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은 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신이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가 '없+신(神)'여기는 것이다. 모(侮)라는 말을 파자(破字)하면, '인간이 늘 저지르는 것'인데, 그 행위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신을 없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이다. '모(侮)'를 이렇게 풀면 더 깊은 의미가 생겨난다. 다시 이 두 구절을 풀어보자.
사람은 저마다 신이 없는 것처럼 업신여기다 후회하는 이들인데
모든 밝음에는 어둠이 있듯 세상에는 신이 있다는 걸 가르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교육’이네
수요일과 목요일과 일요일의 의미만으로, 놀라운 신학(神學)과 우주자연론과 믿음의 본질을 후련히 드러내주는 강의. 이것이 류영모의 진면목이다. 우리는 류영모가 밝혀놓은 이 진리들을 얼마나 마음 속에 들여놓고 있는가. 어쩐지 부끄럽지 않은가.
이쯤에서 다시, 왜 제목을 分明合冥(분명합명)이라 달았는지 음미해보자. 우리가 현상으로 조각조각으로 보게되는 현상이나 자각하게 되는 개념들이 '분명(分明)'이다. 그런데 그 편린을 합치면 분명하지 않게 된다. 그 분명하지 않음이 바로 하느님의 자취이며 손길이며 존재이다. 저 말은 다시 풀면, '네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을 합쳐보라, 그러면 전체의 비밀인 신[冥]이 나오신다'는 뜻이 된다. 류영모가 단지 언어유희를 위해 한자를 쪼개고 합치고 했겠는가. 거기에 등장하는 뜻밖의 '까마득한 신'을 영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