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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한국신화의 수수께끼 ?
박혁거세신화의 비밀
이태희
신라의 박혁거세신화는 고조선의 단군신화나 고구려의 주몽신화와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단군신화나 주몽신화와 마찬가지로 박혁거세신화 역시 건국신화로 신라의 건국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앞의 두 신화가 건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박혁거세신화는 건국보다는 왕과 왕비의 탄생, 성장, 즉위, 혼례, 죽음에 이르는 일대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을 보인다. 아울러 왕과 왕비를 둘러싼 6부의 조상과 왕의 장례에 얽힌 큰 뱀의 이야기는 박혁거세신화가 단순한 건국신화에 머물지 않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신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 육부 조상의 등장
박혁거세신화는 혁거세 왕의 혈통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고 이씨, 정씨, 손씨, 최씨, 배씨, 설씨 등 6부 조상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박혁거세의 부모에 관한 별도의 서사가 없다는 점이다. 단군신화의 경우 단군의 탄생에 앞서 아버지인 환웅과 어머니 웅녀의 이야기가 선행하고, 주몽신화의 경우에도 주몽의 탄생에 앞서 아버지인 해모수와 어머니인 유화의 이야기가 길게 펼쳐진다. 그러나 박혁거세신화에는 인격화된 부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박혁거세는 부모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애 고아로 그려진다. 오직 하늘에서 강림했다는 점만 강조될 뿐이다.
신성한 존재의 부모가 어찌어찌 만나서 건국 영웅을 낳았다는 서사가 없는 대신에 박혁거세신화에는 새로운 왕의 출현을 고대하는 육부 촌장의 이야기가 먼저 펼쳐지는 것이다. 단군신화나 주몽신화의 경우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신을 건국 영웅의 아버지로 그리고 있는데 박혁거세신화에서는 박혁거세와 혈통을 달리하는 육부의 조상들이 먼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다. 진한 땅 여섯 마을의 조상이 되는 알평, 소벌도리, 구례마, 지백호, 지타, 호진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각 표암봉, 형산, 이산, 화산, 명활산, 금강산으로 내려왔다. 건국 영웅의 등장에 앞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이들 6부의 조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이 박혁거세신화에서 풀어볼 첫 번째 수수께끼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에 관한 기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전하는데, 그 내용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는 『삼국유사』에 비해 간략한 편이어서, 육부 조상들의 천강 내력에 관한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는 진한 육부가 조선의 유민들이 마을을 이룬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혁거세와 알영의 탄생담은 다루면서도 육부 조상의 탄생담은 취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사로써의 『삼국사기』가 역사적 사실성에 주목하고, 가급적 신화적 성격을 배제하려는 서술 태도였다는 점에서 이해된다. 진한 땅 육부의 조상이 맨 처음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보다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각각 마을을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훨씬 현실적이기는 하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육부 촌장의 내력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육부의 조상이 박혁거세신화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으로 씨족연합 초기 우리나라 남부 사로족의 발상과 관련하여 박혁거세신화가 성립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신화서사에서 보면 건국영웅의 등장에 있어 부모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고 여겨진다. 즉, 한 인간의 탄생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의 탄생은 전적으로 그 부모의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단군이 환웅과 웅녀의 적극적 의지에 의하여 탄생되었고, 주몽 또한 해모수와 유화의 온갖 시련을 극복한 초인적 의지에 의하여 탄생되었다고 한다면, 박혁거세의 탄생은 육부 조상의 적극적 의지와 염원의 결과인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박혁거세는 이러다할 건국 영웅으로서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의 탄생이 육부 조상의 염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배우자와의 결합도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육부 조상의 염원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주어진다. 이처럼 무기력한 건국 영웅이 있을까? 좀 심하게 말하자면, 박혁거세는 추대된 꼭두각시 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박혁거세가 부족국가의 왕으로 즉위하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씨족사회 연합세력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즉위 후에 박혁거세는 어떤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었는가? 이 점에 대해 신화 서사는 침묵하고 있다.
마치 박혁거세신화의 주인공은 박혁거세나 알영이 아니라 육부의 조상이 주인공처럼 여겨지는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러한 박혁거세신화의 공백은 오히려 이 신화를 신라 신화답게 만들고 있다. 건국, 즉위, 혼례, 국호의 변경, 치국에 이르기는 모든 일들이 절대적인 어떤 한 존재의 힘에 의존해 있지 않고, 다수의 염원과 의지에 의하여 진행된다는 것, 이는 달리 말하면, 부족국가 시대의 민주주의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백제도로 표상되는 신라 문화의 중요한 특질을 박혁거세신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2. 혁거세의 탄생
육부 조상의 하강 내력이 차례차례 소개된 연후에 비로소 혁거세 왕의 탄생이 소개된다. 전한 지절 원년 임자 3월 초하루 육부의 조상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에게 임금이 없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니 어찌 덕 있는 분을 찾아서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그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땅에 비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흰 말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찾아가 보니 한 붉은 알 한 개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알을 깨고 어린 남자 아이를 얻었는데, 그 아이는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이윽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이에 아이를 혁거세 왕이라 이름지었다.
박혁거세 왕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네 장면으로 나누어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양산 기슭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하늘로부터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비쳤다 : 하늘로부터 빛이 내려온다는 것은 일상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빛은 범상한 빛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번갯빛[電光]과 같다고 했다. 번갯빛은 순간적이면서 매우 강렬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햇빛이 땅으로 드리워졌다는 것은 원시심상에서 남신이 여신에게 사정하는 성행위’로 보기도 한다. 이를 토대로 ‘천신과 지신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서 천상적 요소인 햇빛이 드리운 곳은 다름 아닌 양산 기슭 나정이라는 우물가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물은 생명적 원리이면서 동시에 여성적 원리를 뜻한다. 특히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는 ‘자궁’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양산陽山이 남성적이고 천상적이라면, 나정蘿井은 여성적이며 지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고사기』에 등장하는 천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일본 열도를 창건할 때, 하늘로부터 커다란 창을 들고 내려와 바다를 휘휘 저었다는 이야기 역시 원형 상징적 의미로 보면 동일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긴 창은 남성 원리를 나타내고, 넓은 바다는 여성 원리를 표상한다. 혁거세뿐만 아니라 알영도 우물가에서 탄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신라사회의 형성이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흰 말이 꿇어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나타나자 길게 울고 하늘로 올라갔다 : 말은 여러 논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하늘의 사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말이 어디서 왔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당초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늘의 말, 혹은 하늘을 나는 말로써의 ‘천마’는 신라의 대표적 고분인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를 떠올리게 한다. 천마총의 천마도는 순백의 말이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모양을 그리고 있다. 천마총은 신라 지증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발견된 ‘천마도’는 “혀를 길게 내밀고 목덜미의 갈기와 힘차게 뻗쳐 올라간 꼬리털은 바람에 날리는 생동감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고고학 사전의 설명이다. 또한 “네 다리에는 날개가 있고 몸통 곳곳에 반월형의 문양이 돋혀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마치 신화에서 백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실제로 옮겨놓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천마가 지상에 내려와서 무엇을 했는가? 나정 우물가에 이상한 빛이 드리웠을 때, 무릎 꿇고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가, 사람들이 다가오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날아갔다. 비록 이상한 빛이 드리웠다고는 하나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기에 사람들이 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마의 1차적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알을 발견케 하는 일이다. 그 다음 사람들을 본 백마는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 울음은 널리 알리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신성한 존재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 천마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자줏빛 알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 신화적 영웅의 난생담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서 주몽신화를 다룰 때 상세히 언급한 바 있으므로 반복적인 부분은 가급적 피하도록 한다. 다만, 주몽의 경우 알에서 태어나더라도 유화라는 어머니로부터 직접 태어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박혁거세와 김수로왕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건국 영웅에게 있어 어머니라는 존재는 건국 영웅이 우뚝 설 수 있도록 하는 조력자요 혹은 배후 세력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혁거세신화나 김수로왕신화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배후와의 단절을 나타낸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실질적인 부모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천부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서사적 장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혁거세신화나 김수로왕신화에서 건국 영웅의 어머니가 감춰지는 대신에 그의 배우자 곧 왕비가 그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어머니 모습은 강하게 드러나지만 아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며, 주몽신화에서도 주몽의 아내가 언급되기는 하나 그 이름조차 명시되지 않은 부수적 존재로 전락해 있다. 반면, 혁거세의 아내가 되는 알영이나 김수로왕의 아내가 되는 허황옥은 그렇지 않다. 당당한 주인공으로서 신화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넷째, 사내아이를 목욕시키자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 여기서 목욕을 시킨다는 것은 흔히 정화의례의 성격을 지닌 ‘계욕’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목욕의 과정, 즉 입수과정을 통해 물 속으로부터 신이한 힘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실패로 끝나지만,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가 강물 속으로 들어가거나, 김동리의 「무녀도」에서 주인공 모화가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모두 물로부터 신이한 힘을 얻기 위함이었다. 반면, 주몽의 경우 강을 건넘으로써 졸지에 도망자의 신분에서 건국 영웅으로 도약하고 있다는 점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장면은 강물에 목욕한 후에 혁거세의 몸에서는 광채가 났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는 대목이다. 이는 ‘빛나는 자’로서의 혁거세라는 이름을 얻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이면서, 혁거세의 독특한 신격을 보여주는 요소로 생각된다. 즉, 새와 짐승으로 포괄되는 자연과 나아가 온 천지 만물이 조화를 꾀하게 되는 자연신적 요소를 암시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신화전설에서 용의 얼굴을 하고 눈이 4개나 달린 창힐이 문자를 창제하였을 때, 낮에는 하늘에서 곡식비가 내리고 밤에는 귀신들이 모여 곡을 하였다는 얘기 역시 천지 만물의 감응 모티브로 읽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끝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이지만, 이 장면은 혁거세의 독특한 신격과 관련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3. 알영의 탄생
혁거세의 배우자가 되는 알영은 혁거세와 같은 날, 우물에서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혁거세와 알영을 동년으로 그것도 같은 날 태어난 것으로 그리는 것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시기는 약 15년의 차이가 난다. 즉, 혁거세가 10살 무렵에 왕에 올랐고, 재위 5년이 되는 해에 알영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알영을 낳은 존재도 『삼국사기』에서는 용으로, 『삼국유사』에서는 계룡으로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두 책 모두 알영이 신비한 존재의 옆구리에서 출생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일치한다. 옆구리 탄생담 역시 주몽신화에서 따져본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알영의 탄생담이 우리나라 건국신화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 영웅의 탄생담이라는 점이다. 웅녀의 경우 재탄생에 가까운 극적인 변신의 드라마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렇다 할 탄생담이 없고, 유화나 주몽의 아내 또한 탄생담이 전하지 않는다.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는 허황옥 역시 극적인 도래담이 전하지만, 탄생담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알영의 탄생담은 매우 보기 드문 서사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은연 중 남성의 우위를 그리고 있다면, 『삼국유사』에서 혁거세와 알영의 탄생을 같은 날로 잡고 있는 것은 여성 영웅을 남성 영웅과 동등하게 그려내려는 의식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알영의 탄생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입술 모습이다. 계룡이 왼쪽 옆구리로 알영을 낳았는데, 얼굴은 아주 고우나 입술이 닭의 주둥이와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월성 북쪽의 냇물로 데려가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졌고, 그래서 그 내를 발천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영과 닭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닭의 주둥이 같은 알영의 입술은 유화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해모수가 떠나버리자 유화는 아버지 하백으로부터 벌을 받아 입술이 석 자나 늘어나게 되었다. 온갖 고초를 겪고 금와왕에 의해 긴 입술이 잘리고 나서 유화는 비로소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주몽을 출산하게 된다. 즉, 유화의 긴 입술은 입사식의 통과의례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닭의 부리 같은 입술을 가지고 있다가 목욕에 의해 그것이 떨어져 나가고 고운 얼굴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알영의 이야기 역시 입사식의 통과의례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알영의 경우 웅녀나 유화 등과는 달리 그 입사식의 장면이 아주 압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알영이 닭의 부리를 달고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그 차원에 따라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가장 직접적인 것으로 계룡에게서 태어났다는 상징적 표지이다. 알영은 계룡의 옆구리에서 출생하는데 이는 조지프 캠벨이 부처와 이브의 탄생에 대해 언급한 바와 같이 영적 탄생의 의미를 지닌다. 즉, 계룡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의 영적 계승자라는 암시인 것이다. 둘째는 계림국, 곧 신라의 어머니, 국모로서의 상징성이다. 맨 처음 나라 이름을 서라벌, 사라, 계림국 등으로 불렀다고 하면서 이는 계룡이 상서를 나타내기 때문이라 하였다. 신라는 부족국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왕을 배출한 유일한 왕조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지는 대목이다. 셋째는 ‘닭’에 투영된 문화적 혹은 역사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닭은 우물과 함께 농경문화를 상징한다.
4. 오릉에 읽힌 수수께끼
박혁거세신화의 마지막 장면은 왕의 승천과 능에 얽힌 이야기다. 박혁거세의 죽음은 탄생만큼이나 신비롭다. 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레 후에 유해가 흩어져 떨어졌다. 혁거세가 당초 하늘로부터 내려온 존재이니 죽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왕의 유해가 흩어져서 떨어졌다는 점이다. 더욱이 사람들이 이 유해를 합하여 장사를 지내려 하니 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방해하므로 다섯 부분으로 나뉜 왕의 유해를 각각 다섯 능으로 장사지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왕의 유해는 왜 흩어져 내렸으며, 이를 모아 장사지내려 할 때 방해한 큰 뱀의 존재는 무엇인가? 이 점이 박혁거세신화에서 풀어볼 마지막 수수께끼이다.
박혁거세 왕의 유해가 흩어져 떨어지는 장면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를 연상시킨다. 대지의 남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 사이에서 출생한 오시리스는 누이동생인 이시스와 결혼했고 파라오로서 백성들에게 농업 기술을 가르치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런데 어질고 순한 오시리스에게는 포악하고 질투심이 많은 세트라는 동생이 있었다. 세트는 오시리스가 나일강변의 기름진 옥토를 물려받고, 자신은 거친 모래사막을 차지한 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오시리스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시리스가 먼 여행에서 돌아올 때, 오시리스의 신체 치수에 꼭 맞는 멋진 관을 준비해 두고는 그 관에 딱 맞는 분에게 관을 선물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손님들이 그 관에 누워보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고, 드디어 오시리스가 누웠을 때 세트는 얼른 관 뚜껑을 닫고 못질하여 나일강에 버렸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가 어렵사리 관을 찾아내 숨겼으나, 이를 발견한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신을 열네 토막으로 잘라 다시 나일강에 버렸다. 이시스는 다시 오시리스의 시신을 수습하고 끝내 부활시켰다. 비로소 오시리스는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 그들의 왕이 되었다.
박혁거세의 유해가 흩어지는 것과 오시리스의 시신이 나뉘는 것은 신성한 몸의 나눔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모티프로 여겨진다. 오시리스는 지하세계를 통치하는 죽음의 신이면서 동시에 농업과 생명의 신이기도 하다. 신화 연구자들은 오시리스의 신체가 찢겨지고 흩어지는 것을 곡물의 파종과 연관시킨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성한 몸의 훼손과 흩어짐은 근원적으로 곡식의 씨앗이 땅 위에 뿌려지고 그것은 다시 땅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죽음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자연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박혁거세신화의 끝자락에 곡물이나 새로운 생명의 탄생 이야기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대신화에서 죽음과 생명이 순환된다는 사유는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박혁거세의 시신을 모아 장사지내려 할 때 나타나 방해한 큰 뱀은 죽음과 생명의 순환적 원리를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로 여길 만하다. 특히 뱀은 고대 신화에서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는 대표적 동물이라는 점에서 박혁거세를 곡물과 농경신으로 읽으려는 견해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박혁거세신화는 왕의 신비한 탄생과 죽음을 다룬 건국신화인 동시에 신라가 농경국가로써 지니는 위상을 드러내며, 나아가 국가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이태희 / 196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래 익은 사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