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White Day)는 대한민국, 일본, 타이완에서 3월 14일에 지내는 일종의 기념일이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한 달 뒤인 화이트데이에는 반대로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준다.
화이트데이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가운데에는 1965년 일본의 마시멜로 제조업자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때는 ‘마시멜로데이’로 불리다가 나중에 화이트데이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뒤로 초콜릿 제조업체도 화이트 초콜릿을 판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남자가 마시멜로, 화이트 초콜릿이나 사탕등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선물로 주는 날이 되었다.
[2010년] 작곡가 박춘석 타계
← 작곡가 박춘석과 가수 이미자
1933. 5. 8 서울~2010. 3. 14.
본명은 의병(義秉)이며 춘석은 그의 아명이다. 해방 전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8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피아노 전공)에 입학했다가 1학년 중퇴하고, 신흥대학(지금의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연주활동과 함께 그는 중학교 때 이미 〈황혼의 엘레지〉·〈아리랑 목동〉 등의 작곡과 편곡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연주활동의 영향으로샹송이나 팝송 스타일의 노래와 외국가요의 번안편곡이 주류를 이루었다. 트롯 가요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 후 은성경음악단을 조직해 KBS라디오의 생방송연주를 전담하면서부터이다. 특히1960년대 이후 가수 이미자를 만나면서 완전히 트롯 가요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66년 이후에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고있으며 지금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있다.
40여 년이 넘게 작곡생활을 해온 그의 대표곡으로는 〈비내리는 호남선〉·〈38선의 봄〉·〈섬마을 선생님〉·〈가슴 아프게〉 등을 들 수 있으며, 그외 200편이 넘는 영화주제가 등을 포함해 총 2,500여 곡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아울러 패티김·이미자·남진·나훈아·문주란 등 350여 명이 넘는가수들을 길러내 '박춘석 사단'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태양음향사를 창설, 자신이 음반을 직접 제작하고 있으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을 지냈다./브리태니커
[1999년] 평생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재야운동가 계훈제 씨 별세
← 원로 재야인사인 계훈제(78)씨.
원로 재야인사인 계훈제(78)씨가 1999년 3월 14일 폐렴으로 별세했다. 계씨는 평생을 들판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문익환 백기완씨 등과 함께 재야 운동권의 원로로 손꼽혀 왔다. 1960년대에 한쪽 폐를 잘라내 바짝 마른 체구였지만, 시위 현장과 재야단체 모임에서 늘 앞자리를 지켰다. 세번의 투옥과 네번의 장기 도피생활을 한 그는 "주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속박"이라며 주민등록증을 평생 만들지 않았다.
계씨는 1921년 평안북도 선천 태생. 경성제대에 재학 중이던 1943년 학도병 모집을 거부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시절 반탁운동을 전개했고, 1947년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3공 시절에는 ‘사상계’ 편집장, ‘씨씨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됐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계엄령 해제를 촉구했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2년 이상 도피생활을 했다.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1985년 민통련 부의장 등으로 재야 운동을 이끌었다. /조선
[1991년] 낙동강 페놀오염사건
1991년 3월 14∼15일 8시간 동안 구미공업단지 내 두산전자에서 가전제품용 회로기판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페놀 원액 30t이 배관 손상으로 누출되어 낙동강 수원지로 유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직후 누출사실에 대한 두산측의 보고가 늦어지고 페놀이 원수검사 항목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수원지에서는 원수에 페놀이 함유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균제인 염소를 투입했고, 그 결과 페놀과의 화학반응으로 생성된 심한 악취성 클로로페놀이 대구광역시 내 각 가정에 송수되면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천의 수질관리와 수원지 관리의 문제점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었고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이 고조되었다.
[1966년] '강강수월래'를 무형문화재로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해마다 음력 8월 한가윗날 밤에, 곱게 단장한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일정한 장소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원형으로 늘어서서,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놀이이다.
강강술래를 할 때는 목청이 좋은 여자 한 사람이 가운데 서서 앞소리[先唱]를 부르면, 놀이를 하는 일동은 뒷소리[合唱]로 후렴을 부르며 춤을 춘다.
유래는 임진왜란 때, 당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이 수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군사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하여, 또 왜군이 우리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특히 전지(戰地) 부근의 부녀자들로 하여금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지대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강강술래'라는 노래를 부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뒤 그곳 해안 부근의 부녀자들이 당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연례 행사로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며 놀던 것이 전라도 일대에 퍼져 전라도 지방 특유의 여성 민속놀이가 되었다.
'강강술래'라는 말은 한자의 '强羌水越來'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강강'의 '강'은 주위 ·원(圓)이란 뜻의 전라도 방언이고, '술래'는 한자어로 된 '巡邏(순라)'에서 온 말로서 '경계하라'는 뜻이니, 이는 '주위를 경계하라'는 당시의 구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주위의 뜻인 '강'이 둘 겹친 것은 특히 주위에 대한 경계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술래'가 '수월래'로 들리며, 그렇게 기록되기 쉬운 것은, 진양조(晋陽調 또는 진양)로 길게 뽑을 때 '수월래'로 들리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표기는 '강강술래'라고 하는 것이 옳다.
[1963년] 횡보 염상섭 사망
← 한국문학사에 리얼리즘을 구축했던 소설가 횡보 염상섭.
한국 근대소설사 초기부터 활동하여 1960년대 초까지 인간의 삶을 세밀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묘사한 소설가 염상섭이 1963년 3월 14일 사망했다.
그는 1921년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연 이후 ‘삼대’ ‘만세전’ 등 19편의 중·장편과 1백60편에 이르는 단편을 통해 종횡무진의 현실 비판적인 시각과 사실주의적 문체를 보여주었고,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는 등 한국 근대문학의 뼈대를 세웠기에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높은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해방 후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초대 주필은 정지용)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 ‘일대의 유업’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 등이 있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조선
[1961년] 시인 변영로 사망
1920년대 감상적이며 병적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을 두었다. 호는 수주(樹州). 아버지 정상(鼎相)과 어머니 강재경(姜在卿)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재동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을 6개월 만에 수료하고 1918년 모교인 중앙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며, 이때 명예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발송하는 일을 맡았고, 1920년에는 〈폐허〉의 동인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영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으며,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 공부했다. 1933년 귀국해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주간, 〈신동아〉 편집장 등을 역임했으며, 문우회관(文友會館)을 운영하기도 했다.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취임했다가 1955년 〈불감(不感)과 부동심(不動心)〉이 '선성모욕'(先聖侮辱)이라는 필화사건으로 사직했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30년을 기점으로 해 전통문화의 계승과 고전문학부흥운동을 시조창작으로 구체화했다. 그러나 1940년대에는 작품활동이 저조했으며, 1950년대에는 주로 수필을 많이 썼다. 수필집 〈명정 40년〉(1953)은 그의 솔직한 심정과 풍자·해학·기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그밖에 평론으로 〈메테를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폐허, 1921. 1)·〈종교의 오의(奧義)〉(신천지, 1921. 7) 등을 발표했고, 시집으로 〈수주시문선 樹州詩文選〉(1959)·〈차라리 달 없는 밤이 드면〉(1983) 등을 발표했으며, 수필집으로 〈수주수상록〉(1954)·〈명정반세기〉(1969) 등이 있다. 1948년 제1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1961년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우리 집안은 유명한 영어집안이다.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아버지 3형제가 모두 영문학자로 뛰어난 영어교수들이였다. 나는 영어의 나라 미국에 와서 평생을 영어교육에 바쳐왔다 .“미국식 영어 회화책”을 세 권이나 냈고 지금도 동서 영어 학원원장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 3형제분은 하나같이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신 분들이다.
그중에도 아버지 변영로의 영어공부는 유별났다. 13살에 한문시를 써서 문재(文才)를 인정받은 아버지는 18살에 영시 “Cosmos”를 발표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영어공부를 하게된 사연은 너무나 엉뚱했다. 중앙고보에 다니는 아버지는 체육시간을 질색으로 싫어했다. 체육시간이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교실에 남아있길 즐겼다. 꾀 병 인걸 눈치 챈 체육선생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변영로, 너는 삼태기로 흙을 퍼 날라다가 패어진 운동장 바닥을 메꾸는 일이나 해”
“아니, 운동도 못하는 환자에게 중노동을 시키다니 그런 일이 어디있습니까? 선생님이 뭐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의 공산당 소장이라도 됩니까?”
변영로학생이 어기적거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체육선생은 냅다 변영로학생의 뺨을 후려 갈겼다. 눈에 불이 번쩍 하자 악이 바쳐 올랐다.
“야! 이 개 새끼야, 네깐 놈이 선생이냐? 무식한 깡패 똘만이지”
“변영로, 너 선생님에게 반말로 욕했어. 네가 그러고도 이 학교에 붙어 있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야 무식한 선생새끼야! 그런 걱정 집어치워라! 너 같이 무식한 놈 보기 싫어서라도 이 학교 그만 둘란다”
아버지는 그길로 학교를 뛰쳐나와 자진 퇴학을 했다. 그리고 YMCA 영어반에 들어가 3년코스를 6 개월만에 졸업했다. 1등은 후일 중앙관상대장을 지낸 이원철박사였고 아버지는 2등을 했다. 그런데 이원철은 3년 풀코스를 다녔지만 아버지는 6개월짜리였다. 6개월 2등이 3년 1등만 못하랴!
영어에 심취한 아버지는 고교 영어교사 자격증을 따냈다. 북만주 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와 보니 마침 그가 학생으로 다니다 퇴학당한 중앙고보에서 영어선생을 구하고 있었다. 원서를 제출했다. 보기 좋게 합격한 아버지는 당당히 교직원회에 참석하게 됐다. 체육선생이 깜짝 놀랐다. 얼마 전에 퇴학당한 학생 녀석이 선생님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야! 변영로학생. 너 여기는 왜 왔어? 이 자리는 선생님들만이 참석하는 자리야”
아버지는 대답을 안 하고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여러 선생님들에게 새로 오신 선생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정식으로 교원자격증을 따고 우리학교의 영어선생님으로 들어오신 변영로 선생님입니다. 변 선생님 앞으로 나오시죠”
짝짝짝!
와! 스물한 살 짜리 고교선생님!
그 당시에는 스무한 살이 넘는 학생들이 수두룩했다. 스물한 살짜리 선생님은 섬마을 총각선생님 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기선생의 순서는 영어 수학 국어 역사 순으로 시작하여 체육선생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체육선생은 말이 선생이지 학교 소사보다 조금 낫게 생각해줄 정도였다. 체육선생은 난감천만이였다.
아버지의 영어실력은 대단했다. 3년 코스를 6개월에 끝내고 영어선생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18세에 영시를 써서 당시 미국선교사로 온 장로교의 게일선교사를 놀라게 했다. 스물한 살 나이에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과 유럽에 보내기도 했다. / 아들 변천수 씨의 회고록 중에서
[1939년] 존 스타인벡, 소설 ‘분노의 포도’ 출간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Steinbeck, John, 1902~1968)의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憤怒-葡萄, The Grapes of Wrath)는 1939년에 출판, 1940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설의 무대는 1930년대의 텍사스로부터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대평원으로 대사풍(大砂風)에 의한 피해와 대자본에 의한 농업 기계화로 경작지를 잃은 오클라호마의 농민 조드 일가가 낡은 자동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캘리포니아의 비옥한 토지를 찾아 이주한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던 자유의 땅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착취와 기아와 질병이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또한 사별한다. 갖은 고난을 겪은 후 아들 톰은 파업에 가담하여 살인을 저지른다. 노동자의 싸움에서 깨달은 어머니는 힘차게 살아 갈 것을 절규한다.
농장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을 《구약성서》 중 <출애굽기>의 구성을 빌려 묘사한 서사시적(敍事詩的) 작품이다. 미국사회 전반의 움직임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포괄적인 시야에서 농민의 생활을 극명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이 작가의 소설 중 사회주의적 경향이 가장 짙은 걸작이다.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1940년 J.포드 감독에 의하여 영화화되었다.
[1938년] 러시아 공산주의자 부하린(Bukharin, Nikolai) 처형
1938년 3월 14일 러시아의 공산주의자인 니콜라이 부하린(Bukharin, Nikolai, 1888~1938)이 반혁명·첩보활동 혐의로 처형되었다. 1906년 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으며, 1908년 이후 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크라쿠프에서 레닌을 만나면서 <프라우다 Pravda>지 등을 통해 레닌주의를 앞장서 전파했다. 1919년 3월에는 제3인터내셔널의 집행위원으로 위촉되면서 <역사적 유물론 The Theory of Historical Materialism> 등 다수의 경제이론서를 발표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부하린은 스탈린의 '신경제정책'을 지지했지만, 스탈린은 레온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등 당내 주요 적수를 제거하기 위해 부하린을 잠정적인 제휴세력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1928년에 이르러 스탈린은 부하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937년 1월 부하린은 '트로츠키파'라는 누명과 함께 숙청되었다./브리태니커
[1938년] 브라질의 영화감독 로샤(Rocha, Glauber, 1938~1981) 출생
지방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영화에 전념했다. 도스 산토스 등과 함께 브라질 시네마노보 운동의 기수로 꼽힌다.
로샤는 첨예한 영화 평론가로 출발하여, 감독 훈베르토 마우로의 재평가, 브라질 영화사(映畵史) 등을 재조명하다가 영화감독이 되었다. 16세에 영화 클럽을 만들고 1957년에 영화사를 차려 몇 편의 단편영화를 만든 뒤 장편 데뷔작《바라벤토 Baravento》(1962)를 내놓았다.
그는 비상업적인 영화 언어를 통하여 문화적 민족주의를 각성시키려 했다. 유럽과 미국의 영화에 맞서서 시적이고 풍성한 알레고리로 자기반영적 스타일을 구사한 로샤의 영화는 브라질의 현실과 전통을 바탕으로 한데다 격렬한 카메라워크와 몽타주가 특징으로, 거칠고 공격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유럽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로샤는 브라질의 토속문화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문화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면서 제3세계 민중의 감수성을 탐구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대지의 악마》(1964), 《고뇌하는 땅 》(1967), 《죽음의 안토니오》(1969), 《사자는 일곱 개의 머리가 있다》(1970), 《땅의 나이》(1980) 등이 있다. 정치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뇌하는 땅》에서 그는 인민주의적 좌파와 파시스트적 우파가 다 같이 실패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그의 대표작 《죽음의 안토니오》는 실재인물이자 브라질 민담에 나오는 총잡이 안토니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브라질 민중의 춤, 노래, 전설이 다채롭게 엮어져 있다. 이 영화는 전설, 신화와 혁명의 근친성을 드러내는 가장 시네마노보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1968년 브라질의 군사정권이 그의 시민권을 제한하자 로샤는 외국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이르에서 만든 《사자는 일곱 개의 머리가 있다》 등이 이 무렵의 작품으로, 그의 영화적인 시야도 브라질에서 제3세계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1970년 군부 쿠데타 직후 추방당한 그는 1976년 귀국 허가가 날 때까지 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등지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땅의 나이》는 브라질 정부의 지원으로 제작하였는데, 다음 작품을 준비하던 중 폐질환으로 죽었다.
[1892년] 헝가리의 공산당 지도자 라코시(Rákosi Mátyás, 1892~1971) 출생
러시아 고리키 출생. 헝가리공산당의 창립 멤버이다. 소상인의 아들로 부다페스트의 동양학원을 졸업하였다.1910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1918년 공산당 창당과 헝가리의 10월혁명에 참여하였다. 1919년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 수립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코민테른(Comintern)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나, 1925년 체포되어 장기간 투옥되었다.
1940년 석방되자 소련으로 망명,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서 헝가리해방운동을 지도하다가 1945년 귀국하고, 같은 해 공산당 서기 ·부총리, 1948년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총서기로서 56년까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사이 1952∼1953년 총리를 겸임, 1953년 스탈린 사후 너지파(Nagy 派)에게 눌렸으나, 1955년 재기를 꾀하여 I.너지를 추방하였다. 그러나 1956년 헝가리의거에서 소련의 대국주의에 대한 추종과 관료주의적 지도 방법 등을 비판받고 실각하였으며, 1962년 헝가리사건의 책임자로서 당에서 제명되고 1971년 소련에서 병사하였다.
[1883년] 독일의 공산주의 혁명가, 경제학자 마르크스(Marx, Karl, 1818~1883) 사망
← Karl Marx
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1879년]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1879~1955) 출생
아인슈타인은 매우 작은 소립자들 세계와 전체 우주의 모든 물리현상들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1905년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해 맥스웰의 전자기이론과 뉴턴의 갈릴리안 상대성이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1916년에는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다는 등가원리와 휘어진 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중력이론을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질량과 에너지 등가원리를 내세운 질량-에너지 관계식을 밝히는 등 현대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그는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금지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854년] 독일의 세균학자, 화학자 에를리히(Ehrlich, Paul, 1854~1915) 출생
슐레지엔 슈트렐렌 출생. 브레슬라우(지금의 브로츠와프)·슈트라스부르크·프라이부르크·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아닐린 색소를 응용하여 실험하는 등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 생체조직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아닐린 색소 응용실험에서 일정한 조직에 대한 일정한 색소의 친화성의 상관(相關)이 있음을 밝혔다.
1890년 R.코흐의 전염병 연구소에서 주로 혈청학·면역학의 연구에 전념하면서 디프테리아의 혈청요법을 완성하였다. 이 해에 베를린대학 내과전염병학 교실에서 강의하였다. 1896년 베를린의 슈테그리츠에 신설된 혈청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혈청요법·혈청검사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1899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국립실험치료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1902년부터 악성종양의 연구와 전염병의 화학요법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1904년 트리파노소마에 대한 트리판로트를 발견하여, 1908년에 면역학에 대한 연구로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10년에는 매독에 대한 화학요법제인 살바르산을 발견하였으며, 이것은 실험 횟수가 606번에 해당한다고 하여 보통 606호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이 실험을 담당하였던 일본의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郞]와 함께 《스피로헤타병의 실험 화학요법》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세균성 질환치료에 관한 것으로서, 화학요법의 기초가 되었고, 면역에 대한 연구에서는 측쇄설(側鎖說:sidechain theory)을 수립하였다. 1912년에 네오살바르산을 발견하였고, 이듬해 런던에서 개최한 국제의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681년] 후기 바로크 시대 독일의 작곡가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출생
1681. 3. 14 브란덴부르크 마크데부르크~1767. 6. 25 함부르크.
세속음악과 종교음악을 모두 작곡했지만 독창자·합창단·관현악단을 위한 소규모 칸타타로부터 대규모 작품에 이르는 교회음악 분야에서 뛰어난 작곡가이다.
생애
프로테스탄트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실질적인 음악교육은 받은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가족들은 그가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는데 당시 음악가는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직업도, 보수가 많은 직업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뛰어난 작곡 능력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리코더, 오보에, 비올라 다 감바, 샬뤼모, 클라비어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701년 라이프치히대학교의 법률 학도가 되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법률 공부보다 음악 활동에 더 치중하여 남은 생애 동안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다. 라이프치히는 텔레만의 음악 활동에 디딤돌이 되었다. 시 당국은 그의 음악적 재능과는 별도로 이 젊은 선동가가 조직의 구성에 있어 엄청난 정력·재능·근면성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들은 그를 토마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요한 쿠나우를 도와 격주로 주일마다 연주되는 칸타타를 작곡하도록 했으며, 아울러 대학 부속 교회인 노이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주었다. 텔레만은 학생들의 음악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을 재편성하여 공공 연주회를 갖는 유용한 아마추어 관현악단으로 만들었으며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의 감독이 되어 이 오페라단을 위한 작품을 썼다. 텔레만은 두 공국 궁정에서의 직책을 가졌는데 조라우(1704~08)에서 궁정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있다가 아이제나흐(1708~12)에서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를 거쳐 나중에 지휘자가 되었다. 연주·지휘·연구·작곡 활동을 통해 나중에 그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1712~21)과 함부르크(1721~67)에서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활용한 음악적 지식, 실제적 경험, 작곡기법을 얻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교회의 음악감독을 지내면서 그 도시의 음악을 담당했다. 라이프치히에 있을 때는 학생들의 콜레기움 무시쿰을 재편성하여 그들과 함께 연주회를 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음악 출판을 시작했는데 이때문에 그는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음악가들이 가장 선망하는 지위의 하나였던 함부르크의 음악감독으로 그는 5개 주요교회에 음악을 제공했고 함부르크 오페라단을 담당했으며, 자신이 음악교사로 있었던 함부르크의 유명한 인문주의 학교인 요하네움에 칸토르로 봉사했다. 함부르크에서도 콜레기움 무시쿰을 지도해 공공 연주회를 열었다. 1729년 러시아 궁정에 독일 관현악단을 조직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으며, 그 이전1722년 쿠나우에 이어 토마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와 달라는 라이프치히 시 당국의 제안도 거절했다. 이 자리가 이미 17년 전에 쿠나우가 죽을 경우 그가 계승하도록 시 당국과 약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젊은 텔레만의 높은 명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가 거절한 이 직위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돌아갔다. 함부르크에서의 모든 활동 외에도 계약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시는 물론 아이제나흐와 바이로이트 궁정을 위한 음악도 작곡했으며 계속 자신의 작품을 출판했다.
그 시대의 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주요양식들을 섭렵했던 대가인 그는 그 어떤 양식의 작품도 쉽고 유연하게 작곡할 수 있었으며 폴란드와 영국 음악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그는 오페라와 연주회를 위한 작품은 물론 교회를 위한 작품도 같은 비중으로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자연스러운 선율, 대담한 화성, 쾌활한 리듬이 특징이며 악기 편성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심오한가 하면 기지에 차 있고 가벼운가 하면 진지하며 결코 다양성을 잃지 않고 있다. 출판된 작품 가운데는 유명한 선곡집 〈테이블곡 Musique de Table〉(1733 출판, 관현악 모음곡 3곡, 협주곡 3곡, 4중주 3곡, 3중주 3곡, 소나타 3곡 포함), 최초의 음악 정기 간행물인 〈충실한 음악거장 Der getreue Music-Meister〉(1728~29, 70곡 포함), 〈조화로운 예배의식 Der harmonische Gottesdienst〉(1725~26, 72곡의 교회 칸타타), 하프시코드를 위한 판타지아 36곡이 있다. 그를 열광적으로 맞아주었던 프랑스를 잠시 여행(1737~38)한 것을 제외하고 결코 독일을 떠난 일이 없었다.
그는 2번의 결혼을 통해 8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 첫번째 부인은 출산하다 젊은 나이로 죽었고, 2번째 부인은 그에게 3,000달러의 빚을 남긴 채 스웨덴 장교와 달아났다. 텔레만은 다작하는 작곡가이면서 예리한 문필가이기도 했으며 1718, 1739년에 나온 2권의 자서전은 비교적 사실을 잘 기록한 책이다. 첫번째 아내가 죽자 그는 긴 시를 출판했으며 그의 성악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그가 직접 쓴 가사가 붙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그의 음악 선곡집에 쓴 서문인데 거기에는 그의 음악(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실제적인 충고가 포함되어 있다. 바흐와 헨델의 친구였던 그는 바흐의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의 대부이기도 했는데, 카를 필리프 에마뉴엘 바흐는 텔레만이 86세의 나이로 죽은 후 함부르크의 음악감독직을 이어받았다.
평가
18세기에 살았던 그의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은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였다. 비평가 요한 마테존은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코렐리와 장 바티스트 륄리는 단지 명예를 얻었지만 텔레만은 모든 찬사 위에 있다"고 했다. 공공 연주회를 통해 텔레만은 이전에는 궁정이나 귀족 또는 제한된 수의 시민들을 위해 존재했던 음악을 일반대중들에게 소개했다. 악보로 출판된 방대한 작품들은 독일 전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관현악단들, 여러 부류의 아마추어와 전문 음악가들에게 기악적·성악적 자료를 제공했다. 텔레만의 중첩된 활동과 방대한 수의 작품들은 실로 놀랄 만한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그는 교회음악으로 가장 존경받았다. 그의 교회음악은 집 안에서나 한정된 인원의 교회에 적합한 소규모 칸타타부터 독창·합창·관현악을 위한 대규모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의 세속 성악음악 역시 간단한 노래에서 84세에 작곡한 극적인 칸타타 〈이노 Ino〉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그의 오페라 가운데는 특히 〈핌피노네 Pimpinone〉 같이 희극적인 내용을 갖는 것들이 성공적이었다. 관현악 작품으로는 모음곡(서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음), 합주 협주곡, 협주곡이 있다. 그의 실내악은 작품 수, 다양한 악기 조합, 각 악기에 대한 숙련된 처리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텔레만이 죽은 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새로운 음악 양식이 옛 것을 대체했다. 그리고 바흐와 헨델의 음악이 재평가되었던 19세기에도 텔레만의 명성은 다작가이기는 하지만 실속 없는 3류 작곡가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역사적·미학적으로 보다 정확한 견해가 성립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막스 슈나이더와 로맹 롤랑의 연구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1930년대 이래 그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판들이 출판되면서 연주자, 지휘자, 음악 출판업자들의 관심이 점차 커져갔다.(W.G. Bergmann 글)/브리태니커
그밖에
2003 이창동 문화부장관, 취임 후 첫 기자 회견서 “기자실 폐지” 발표 후 논란
2003 판소리 신동 김주리양, 판소리 9시간 20분 연창. 최연소ㆍ최장시간 신기록 수립
2002 탈북자 25명 베이징 스페인대사관 진입. 한국망명 요청
1997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31대 신문협회 회장에 선임
1995 러시아 소유즈 TM21우주선 발사
1994 일본 신문제작 컴퓨터화(CTS) 선구자 엔조지 지로 별세
1994 상문고 교사들, 상문고 비리를 공개하는 양심선언
1989 교직원노조건설특별위원회 발족
1985 학도 호국단 폐지
1983 니메이리(Nimeiri, Gaafar Mohamed el) 수단 대통령 방한
1980 이슬람공화국 헌법에 의한 이란 국민의회 총선 1차투표실시
1980 한미1군단,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로 개칭 발표
1979 개헌심의위 발족
1979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SS-18 개발
1975 멕시코 대학생 반정부 시위
1975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서 첫 강의
1973 제2차 남북조절위 평양에서 개최
1972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
1963 FAO, 기아가해방에 관한 인권선언
1962 세계 18개국 군축위 개최
1960 동서 10개국 군축위 개최
1958 소련, 핵무기 실험 발사
1951 일본, 상의원 길내내각 불신임안 가결
1950 한국은행법 국무회의 통과
1944 급행열차 전폐
1944 연합군, 몬테 카지노 폭격
1937 무솔리니 리비아 방문
1920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작가 행크 케트첨 출생
1917 러시아 임시정부 수립
1912 창덕궁 박물관 준공
1908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출생
1900 미국, 금본위제 채택
1868 일본 메이지유신 선포
1854 미국의 28대 부통령 마셜 출생
1823 프랑스의 시인 방빌 출생
1820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출생 - 통일 이탈리아 왕국 최초의 왕이 된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