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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3:12-18)-2024.4.21
복음은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우리를 복음으로 연결해주는 몽학선생입니다. 새 언약은 첫 번째 언약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시는 언약인 셈이지요. 새 언약은 우리 마음의 심비에 새겨진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어느 날 갑자기 약속하신 언약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약속되어진 언약입니다(렘31:31, 겔36:26). 하나님은 우리를 새 언약으로 구원하십니다. 물론 옛 언약으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하십니다. 옛 언약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비참한 존재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이루실 중보자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세우신 것입니다(히9:15). 예수님은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요1:14). 새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듣고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새 언약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안에서 새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그 언약을 지킬 수 있도록 역사해가십니다. 예를 들어,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솔직히 내가 사랑하려고 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냥 사랑의 흉내만 낼뿐입니다. 그나마도 시간이 지나거나 사랑의 위기가 오면 그 사랑은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좋은 때는 사랑하는 척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랑은 금방 깨지고 맙니다. 그만큼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갖는 믿음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매우 이기적이고 타산적입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믿음을 주시는 주님의 믿음을 갖게 되면 나의 상상을 초월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을 내안에 계시는 주님이 나로 하여금 하게 하십니다.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이 이루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인 것이지요.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언약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옛 언약이 주는 성격입니다. 옛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존재임을 자각시켜 줍니다. 그래서 옛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 또 다른 은혜가 새 언약입니다. 만일 우리가 옛 언약으로 자기 자신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새 언약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른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무슨 은혜의 법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지요. 스스로 죄 없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복음은 결코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복음이신 새 언약을 만나기 위해서는 옛 언약의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옛 언약으로 자신을 조명해 보지 못하면 절대 새 언약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만나기 위해 옛 언약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옛 언약도 하나님이 만드신 법입니다. 세상이 만들어서 내놓은 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은 거룩한 법이지요. 로마서7장12절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을 지키는 인간이 문제인 것이지요.
히브리서3장은 사도 바울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면서 먹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영으로 쓴 편지라고 말씀합니다(3:3). 여기서 먹으로 쓴 편지는 옛 언약의 방식이요, 영으로 쓴 편지는 새 언약의 방식인 것이지요. 또 한 가지를 덧붙이기를 그 편지를 돌비에 쓴 것이 아니라, 육의 심비에 쓴 편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돌비에 쓴 편지는 옛 언약의 방식이지만, 심비에 새긴 것은 새 언약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만족하지 말라고 주문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이지요. 여기서도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라는 말은 옛 언약 안에서 자란 것을 의미하나,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표현은 새 언약 안에서 자랐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새 언약의 일군되는 것은 의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영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의문으로 하는 것은 옛 언약의 방식이요, 영으로 하는 것은 새 언약의 방식입니다.
또한 7절에 나오는 의문의 직분은 옛 언약의 일군이요, 8절에 나오는 영의 직분은 새 언약의 직분입니다. 9절에 정죄의 직분은 옛 언약의 직분이요, 의의 직분은 새 언약의 직분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수건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건은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하고 있었으면서도 장로들의 유전이나 전통을 가지고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얼굴에 수건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건은 모세가 율법을 하사받을 때 사용했던 도구입니다.
(1)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의 수건
수건에 대한 말씀의 근거를 알려면 먼저 출애굽기34장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34장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 십계명을 하사받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받았던 두 돌비는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진노하던 모세가 던져서 깨뜨려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두 번째 돌비를 하사하시게 되지요. 첫 번째 돌판과는 달리 두 번째 돌판은 모세가 직접 깎아야 했습니다. 모세가 직접 깎아 만든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에 올라 언약의 말씀을 받아 내려옵니다. 그것도 무려 사십일 동안 금식하면서 말입니다(출34:28).
그런데 모세가 증거판의 두 돌비를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는데 얼굴 꺼플에 광채가 났습니다(29절). 문제는 모세 자신은 자기 얼굴에 난 광채를 모릅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에 난 광채를 알아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아론과 어른들을 불러서 이야기합니다. 그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함을 느끼고 모세 곁으로 다가 갈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했습니다(32절). 그 때 모세가 행동한 것을 보십시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후에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33절).
모세가 수건을 벗는 경우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였습니다. 그 외에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었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모세의 행동에 종교적인 의미를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가면을 썼다는 것이지요. 모세가 자기를 신적 존재와 동일하다는 의미로 가면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는 정반대 이유 때문에 수건을 사용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 백성들이 모세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절대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수건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의 광채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권위를 확립시켜주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것임을 잘 알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만 사용되어져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반드시 보고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상당수의 지도자들이 자기 얼굴에 광채는커녕 약간의 빛만 투사되어도 자랑하기 급급합니다. 혹은 그런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속이는데 이용하기도 합니다. 쇼를 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모세의 수건을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정죄하는 율법으로 비유했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질 것으로 본 것이지요. 당연히 그런 수건은 벗겨져야 합니다. 수건은 상징에 불과하거든요. 아직도 유대인들은 율법에 집착하여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유대교인들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벗겨져야 할 수건을 그대로 쓰고 있는 셈이지요. 이유는 복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광채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전적으로 수건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모세가 쓴 수건은 일시적이었던 것입니다.
(2) 수건이 벗어진 복음
율법의 수건이 벗어지려면 반드시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면 율법의 수건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내가 벗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오면 벗겨지는 것이지요. 수건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고, 율법은 주님께서 완성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와 주님을 영접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들이 성취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른바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 앞으로 나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수건이 벗어지지 않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는 능력이요, 수건을 벗기는 힘입니다. 복음 안에서 수건이 벗어짐이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가 복음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려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율법의 수건을 쓴 채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입으로는 복음을 말하면서 신앙의 행위로는 여전히 율법의 옷을 벗지 못한 자들이 많다는 말이지요. 그런 자들은 마음이나 생각도 율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입니다. 물론 행동도 마찬가지구요. 문제는 마음의 수건입니다. 마음에 수건이 벗어지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자들은 아직도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을 만나면 수건은 벗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마음의 수건입니다. 복음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의 수건을 칭칭 감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런 자들은 복음을 단순하고 싱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공로나 의가 추가되어야 구원받는다는 포만감을 갖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들의 업적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헌신으로, 헌금으로, 혹은 열심으로, 자기들의 공로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삭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뭔가를 추가하려는 의도는 율법이라는 수건이 벗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은 그런 사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유대인들은 유대교인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대교인으로 태어납니다.
자동적으로 유대교에 입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율법을 경전으로 믿는 신앙인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무엇보다 그들은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물론 자신들이 소유한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도 모든 율법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치고 사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누구에게나 자신들이 소유한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합니다. 율법도 수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들이 대표적으로 여기는 율법은 할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가장 먼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을 전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그들이 하는 행동은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방인들을 먼저 육신의 할례를 통해 유대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사람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할례자와 무할례자들만 있을 뿐이지요. 유대인은 할례 받은 자요, 이방인들은 모두 할례 받지 못한 무할례자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은 무할례자는 상종치 아니하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사상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고집하는 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갇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로마서2장28절과29절의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므로 신약성경을 본적이 없을 뿐 아니라 믿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수건이 벗어지지 않은 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덮어진 율법의 수건이 벗어지지 않은 한 그들은 복음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복음을 만난다면 율법의 수건이 벗어질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6절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수건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복음이신 주님께로 돌아오면 율법의 수건은 벗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주님은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한복음8장32절로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거기다가 주님은 이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마태복음11장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낑낑대며 고통스럽게 살지 말고 예수 앞으로 나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친히 우리의 무거운 짐을 다 들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무거운 짐은 율법의 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율법이라는 짐입니다. 율법의 짐을 내가 지켜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쳐도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율법의 한 가지 계명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키지 못한 무력감과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아무도 자기 짐을 벗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가지의 계명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계십니다. 율법을 다 성취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께로 나오면 그분으로 인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다 지킨 것과 같은 효력이 발생합니다. 주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죄의 값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만족시켜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우리는 자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자유함을 얻습니다. 율법이라는 수건이 벗어지기 때문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가 벗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히12:1).
(3) 여전히 수건을 벗지 못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문제는 아직도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율법과 복음의 경계선 사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율법과 복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율법으로 정죄하며, 때로는 복음으로 위로하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거리며, 때로는 복음을 빙자한 자유를 노래하면서 말입니다. 미안하지만 교회가 그 모든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말로는 복음을 외치면서 율법이라는 가두리를 치고 마치 양식하듯이 하는 것은 아닐는지 모릅니다.
너무 지나친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정할 수 있는 교회가 드물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세상에 있는 교회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율법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닐는지요? 율법이라는 수건을 씌운 채 교인들을 인도하려는 것은 아닐는지요?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짐들을 교인들에게 지우려는 것은 아닐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주변에 믿는 자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 예수님에게 실망했다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나요? 아마도 그런 사람을 만나 본 적 없으실 것입니다. 저도 한번도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교회의 정책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파하고 실망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복음 때문에 실망한 자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 때문에 실망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율법 때문에 실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실망하는 이유는 율법을 지키려다가 실망하거나, 혹은 율법을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부작용 때문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인 것입니다(약1:25).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자유케 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율법으로는 자유함이 없는 것이지요.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율법 안에 있는 자는 율법의 굴레에서 속박당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듣기에 따라서는 율법이라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습니다. 상당수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자기들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의 교회를 떠나면 좋지 않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은근히 겁박을 주는 교회도 보았습니다. 교인들에게 현대판 율법의 수건을 만들어 씌어주는 것이지요. 교인들은 그 수건을 벗지 못한 채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들이 쓴 수건을 벗어버리면 큰일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자유와 기쁨 없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이비 종교집단에서는 헌금을 많이 바쳐야 천국에 간다고 꼬드깁니다. 어떤 집단에서는 전도하지 않으면 천국갈 수 없다고 겁박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오나 포교하러 나갑니다. 눈물겨운 방식으로 그들의 종교적 열심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것들이 이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속칭 기성교회에서도 정신적인 압박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으로 포장된 채 말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발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율법적인 성향입니다. 인간적인 꼼수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기성교회와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는 상관없는 열심은 율법적인 기질이요, 성향입니다. 반드시 버려야 할 복음의 독소입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꽁꽁 묶어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의도가 불순하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을 빙자한 율법입니다. 물론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복음도 불순한 의도로 사용되면 얼마든지 율법의 굴레가 됩니다. 반대로 율법도 복음을 위한 의도로 사용되면 복음의 능력이 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교회에서 복음을 위한 수고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것도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수고는 할수록 좋습니다.
상당수 교회들이 교인들을 프로그램화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프로그램 속에 가두어버린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합니다. 혹은 그 조직에서 믿음이 없다고 아웃사이더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상당수가 그 조직에 적응하기 위하여 마지못해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이나 영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이 없습니다. 의무감 때문에 맞추어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복음 없는 종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최고로 불쌍한 사람은 복음을 모른 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은 주님은 없고 사역만 있습니다. 주님은 없고 열심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없고 자기 공력만 드러납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종교생활은 인간을 최고로 비참하게 만듭니다. 결국 영혼을 파멸로 인도합니다. 절대 이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의 수건을 벗으라는 말입니다. 율법이라는 수건은 우리 스스로 벗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주님께서 친히 율법의 옷을 벗겨주시고, 율법의 비늘을 벗겨주십니다. 주안에서 율법의 수건이 자동적으로 벗어진다는 말입니다. 복음 안에서 율법이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으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이루어주기 때문에 율법이 복음 안에서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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