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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드라마 | 피터 하벨러-라인홀트 메스너]
인류 최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후 깨진 찰떡궁합 글·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페터 하벨러-라인홀트 메스너 자일 파트너의 등반기록오스트리아의 유명 산악인 페터 하벨러는(Peter Habeler)는 1942년 이탈리아의 티롤에서 출생해 6세 때 등산을 시작했고, 21세 때 우등으로 등산가이드 자격증과 스키 강사 자격증을 획득했으며, 1972년 30세에 유명한 마이호펜(Mayhofen)등산학교 최연소 교장이 되었다. 하벨러는 20세 때, 알프스의 사우스 티롤 등반 중 메스너(당시 18세)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4년 뒤인 1966년 하벨러-젭, 메스너-프리츠 2개조는 돌변하는 기상 변화와 뇌우(雷雨)로 악명 높은 그랑드조라스 북벽의 워커 스퍼(Walker Spur : 캐신 루트) 등반에 나섰다. 워커 스퍼는 해발 3,000m 지점에서 최고봉 워커 푸앙트(Waker Pointe·4,208m)까지 이어지는 수직고 1,200m 높이의 빙설암벽이다. 북벽 하부 빙벽을 오르면, 주요 등반 지점으로 ‘레뷰파 크랙(Cracks)’과 ‘캐신 비박지’가 나오고, 이어 ‘8m 압자일렌(abseil : 현수하강)’ 구간과 ‘15m 트래버스’ 구간이 이어진다. 다시 난이도 V급의 루트를 돌파하면 ‘블랙 슬랩(Black slaps)’ 지대와 ‘그레이 타워(Grey Tower)’가 나오고, 삼각설원을 지나면 ‘80m 쿨와르’, 그리고 난이도 V급의 암벽을 오르면 ‘레드 타워(Red Tower)’가 나타나고, 이어 그랑드조라스 북벽의 최고 정상에 올라선다. 1935년 독일 클라이머 피터스와 마이어가 그랑드조라스 북벽의 크로 스퍼(Croz spur·4,101m)를 초등했고, 1938년 이탈리아의 캐신, 티초니, 에스포지토가 3일 만에 그랑드조라스 북벽에서 가장 가파른 ‘워커 스퍼’를 초등했다. 1963년 보나티와 차펠리가 ‘워커 스퍼’ 동계 초등에 성공했고, 1968년 고그나(Gogna)가 이 루트 단독 등정에 성공했다.
▲ 마터호른 북벽을 등반 중인 페터 하벨러(메스너와 함께).
당시 페터 하벨러의 암벽 등반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호리호리하고 약한 체격은 극한 등반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그는 일단 암벽에 붙으면 어떤 난코스라도 대담하고 숙련된 자세로 고양이처럼 쉽게 돌파했다.
그들은 그랑드조라스 북벽의 하부 빙벽을 프런트포인팅(front-pointing)으로 올랐다. 하벨러 조가 워커 스퍼의 ‘레뷰파 크랙’ 밑에서 메스너 선등 조와 등반을 교대했다. 북벽 3분의 1 지점에서 시작되는 소위 ‘75m 다이히드럴(dihedral, 불어 diedre, 이면각)’은 얼음으로 꽉 메워져 기존 피톤들이 모두 얼음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젭(Sepp) 대원이 크랙 위로 두 다리를 넓게 벌려 등반한 후 하벨러가 선등을 넘겨받아 최선을 다해 이 난구간을 돌파했다.
2개 조가 ‘펜듈럼 트래버스(pendulum traverse : 자일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행하는 트래버스)’를 해 ‘캐신 비박지’에 도달했을 때, 어둠이 찾아왔다. 두 개의 가파른 레지(ledges, 바위 턱) 위에 두 사람씩 앉아서 비박 색을 뒤집어쓰고 졸다가, 강풍이 옷 속으로 파고 들면 한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들은 온몸이 혹한으로 얼어붙어, 발가락에 감각이 사라지는 고초를 감내하면서 지루하게 새벽을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 메스너가 자일을 묶고 한 피치를 선등했을 때, 밤새 수면과 깨어남 사이에 존재했던 지옥의 변방(邊方)이 사라지고, 등반이 훨씬 수월했다. 그들은 워커 스퍼의 ‘투르 그리제(Tour Grise, Grey Tower, 회색 탑)’의 슬랩 지대와 이어지는 암릉을 빠른 속도로 등반했다.
그들은 설원을 지나 ‘붉은 침니’를 돌파하고 탈진 상태가 되었다. 기존 피톤들이 얼음 덮개 속에 파묻혀 있어 얼음 속의 크랙을 찾아내고, 거기에 새로운 피톤을 설치하며 등반하는 것은 대단한 고역이었다. 그들은 늦은 오후에 워커 스퍼의 정상 바위(4,208m)를 움켜쥔 후 남벽에서 비박하고 귀환했다.
하벨러와 메스너 두 사람이 최초로 자일 파트너가 된 것은 1969년 남미 페루 안데스산맥의 예루파하 그랑드(Yerupaja Grande·6,645m)를 등반할 때였고, 마지막 자일 파트너 역할은 1978년 에베레스트 남동릉의 무산소 등반에서였다. 예루파하 그랑드의 가파른 북동벽에서 메스너가 메스꺼움의 발작을 일으켰을 때, 하벨러가 선등을 교대하고 너무나 훌륭한 파트너 역할을 수행해 메스너를 감동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는 텔레파시 작용으로 무언중에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잠재했다. 두 사람이 절벽에서 동시에 등반을 진행하면서도 상대방이 추락 등 여러 가지 위기에 봉착하면, 즉시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는 찰떡궁합이었다.
▲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마치고 하산한 페터 하벨러.
그러나 그들은 자일 파트너 역할을 할 때만,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환상적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하벨러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세상의 인기나 평판 따위엔 무관심한 정통파 산악인이고, 메스너는 최초로 7급을 돌파한 유능한 클라이머로서 다변가이고 사교적이며 자신의 등반 성과에 관해 자화자찬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벨러는 메스너에게 자신의 실패를 포함한 등반 경험담, 등반의 공포감, 희망, 갈망 등에 관해 털어놓았다. 반면, 메스너는 하벨러에게 자신의 인간성,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 수수께끼 같은 신비를 지닌, 즉 불가해(不可解)한 인물로 남아 있었다.
1970년 피터 하벨러는 더그 스코트와 미국 요세미티의 살라테 월을 프리클라이밍으로 등정하기도 했다.
마터호른(Matterhorn·4,478m) 북벽에 2개의 루트가 개척되었다. 하나는 1931년 프란츠와 토니 슈미트 형제가 초등한 ‘슈미트 루트’이고, 다른 하나는 1965년 보나티가 동계에 단독으로 등정한 ‘북벽 직등 루트(Direct North Face Route)’, 즉 ‘보나티 루트’다. ‘슈미트 루트’는 북벽의 3,400m 지점의 베르그슈룬트(bergschrund, 가로 크레바스)에서 출발해 경사 60도의 빙원을 오르고, 난이도 IV급의 ‘만곡(彎曲) 쿨와르(Curving couloir)’와 난이도 IV급의 ‘정상 벽(Summit Wall)’을 지나 정상(4,478m)에 이르는 표고차 1,100m의 암빙벽이다. 1959년 마르차르트(Marchart)가 단독으로 이 루트를 등정했고, 1962년 알멘과 에터가 이 루트를 동계에 초등했다.
폭풍과 낙석 속의 마터호른 북벽 등반
1974년 7월 하벨러와 메스너는 마터호른 북벽의 ‘슈미트 루트’를 등반하기 시작했다. 메스너는 1965년 동계에 마터호른 북벽의 ‘보나티 루트’를 재등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 ‘슈미트 루트’는 매년 전 세계 산악인들이 50회에서 100회까지 등정하는 마터호른 북벽의 노멀 루트다.
하벨러와 메스너는 새벽 2시가 지나 마터호른 북벽 밑의 플라토(plateau)에 도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수백 m의 눈 죽을 헤치고 전진하여 베르그슈룬트 밑에 도착했다. 그 거대한 크레바스 위쪽으로 가파른 얼음 방패, 즉 강철만큼 단단하고 매끄럽게 솟아오른 빙벽, 대빙원(Great Ice Field)이 만곡 쿨와르(Curving couloir)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자일을 묶고 크레바스를 무사히 돌파했다. 대빙원의 얼음은 유리질의 매끄러운 빙벽이어서 등반이 매우 위험했기에 그들은 피톤을 계속 설치하며 등반할 수밖에 없었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아침마다 마터호른 정상을 감싸는 회색구름이 예외 없이 나타나, 4,000m 위쪽의 능선들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벨러와 메스너는 곧 ‘만곡 쿨와르’의 마지막 악명 높은 ‘베르글라(verglas, 얇은 얼음층)’로 뒤덮인 암벽 피치를 돌파했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커다란 눈송이들이 펄펄 날리는 가운데 가파른 슬랩(slabs)지대에 도달할 때까지 마터호른 북벽 등정에 관해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이 슬랩 지대는 우측의 매끄러운 정상 벽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복병이 나타나 그들을 괴롭혔다. 그동안 계속 내려 쌓였던 심설이 북벽 위의 모든 작은 레지들(little ledges, 바위 턱들)과 크랙들을 뒤덮어 풋홀드(footholds, 발판)와 핸드홀드(handholds, 손잡이)를 찾아내기 힘겨웠다. 중간 확보물 설치도 난항이었다. 게다가 신설 속의 암벽은 베르글라가 덮여 있어, 선등하던 메스너는 그의 주특기인 프리클라이밍(Free Climbing)은 말할 것도 없고, 마찰 등반법(등반화 밑창을 암벽에 밀착시키며 행하는 등반법)도 구사할 수 없었다. 그는 루트를 찾기 위해 벽의 좌우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가파른 절벽의 슬랩 위에서 홀드를 찾아낼 수 없었고, 그래서 수평이동도 불가능했다. 그는 매끄러운 사면에서 여분의 자일마저 떨어진 딱한 처지였다. 그는 어렵사리 머리카락 같은 실 크랙(cracks) 두 개를 찾아냈고, 거기에 6개의 칼날 피톤을 때려 박아, 자신의 몸을 겨우 안전하게 확보했다.
▲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한 페터 하벨러.
유능한 하벨러가 그곳까지 올라와 선등을 교대하고, 우측 심설지대를 오르고 다시 좌측으로 이동해 바위 스퍼(rock spur : 돌출 암릉)의 가장자리까지 돌파했다. 그 스퍼 우측으로는 끊임없이 눈사태가 쏟아져 내렸다. 돌출 스퍼는 부근의 벽에서 가장 가파른 루트였지만, 낙석 위험이 적어 등로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스너가 좌측을 바라보니 크랙들이 회른리능선(북동릉)의 숄더(Shoulder)로 이어져 탈출로 구실을 할 성싶었다. 그러나 그 크랙들은 눈사태의 통로에 위치해 위험했다. 그들은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 가파른 바위 스퍼를 사력을 다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등자 메스너가 홀드마다 눈을 제거하고, 그것을 움켜쥐고 자신의 몸을 끌어 올렸다. 가루 눈사태가 폭포수처럼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몸을 홱 구부리고 얼음 소나기(icy shower)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눈 속을 휘저어 얼음이 뒤덮인 홀드를 찾아냈다. 그는 두 개의 펙(pegs)을 때려 박아 확보지점을 마련한 후, 베르글라가 뒤덮인 홀드를 놓친다 해도 추락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심설 속에서 좁은 바위 턱을 찾아내고, 그것을 밟고 공포로 숨을 죽이며 좌측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메스너는 추락의 공포에 계속 노출되어 시달렸다. 확보자 하벨러는 메스너에게 2,3m만 더 전진하면, 안전한 오버행 밑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고취시키고 격려했다. 폭풍은 이제 허리케인(hurricane, 초속 32.7m 이상의 강풍) 급으로 변하여, 사방에 가느다란 눈가루 장막(눈보라)을 휘날렸다. 등산복 속으로 파고든 눈보라는 체온에 의해 녹아 옷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고, 그래서 그는 가중된 혹한의 고통으로 등골이 오싹하게 떨렸다.
또 한 차례의 가루 눈사태가 우르르 소리를 내며 메스너의 몸 위를 스치고 미끄러져 내렸다. 은신처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바위 스퍼 상의 오버행은 너무 작은 규모여서, 그들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눈 폭포의 방패막이 구실을 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하벨러가 선등을 교대했으나 힘이 장사인 그도 지속적인 가루 눈사태 포격 속에서 등반하느라고 탈진 일보직전이었다. 그들 앞의 절벽의 루트는 얼음 투성이, 그리고 또한 눈 투성이였다. 게다가 번개의 섬광(벼락)이 정상 바위 위를 내려칠 때마다, 낙석들이 발생해 휙 소리를 내며 재빨리 그들 옆을 스치듯 지나가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때마다 그들의 몸은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들은 최대 난코스, 정상과 숄더 사이의 스퍼를 어렵사리 등반하고 있었다. 이제 북벽에서 등정길만 존재했고, 후퇴는 불가능했다. 정상 벽에서 번개와 낙석들이 계속 발생해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하벨러가 사력을 다해 가파른 걸리(gully)를 등반하면서 혼잣말로 자신에게 “여기서 지금 추락하면 안 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메스너 귀에 들려왔다. 가루 눈사태가 다시 그를 삼켜 버려 몇 분 동안 그의 모습이 흰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그가 메스너에게 소리쳤다.
“조심해서 등반해!”
하벨러는 추락을 피하기 위해 홀드마다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등반하고 있었다. 등반기술이 미숙한 다른 클라이머라면, 벌써 이 루트에서 추락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하벨러는 결코 추락하지 않았다. 폭풍이 연속해서 난타하고 있는 마터호른 정상 벽에서,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준 것은 로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벽 위에 벼락이 떨어질 때마다, 낙석들이 비 오듯 쏟아져 돌사태가 되어 그들 옆으로 맹진한 후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상호 신뢰감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음 두 피치를 무사히 등반했다. 갑자기 경사도가 낮아지고, 바위들도 단단히 박혀 있었다. 눈은 계속 내렸고, 사방에서 천둥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아비귀환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구름과 눈보라 속에서 정상 능선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과 폭풍우의 사투는 등반을 시작한 지 8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그들은 마터호른 정상을 밟았다.
1974년 하계에 하벨러와 메스너는 마터호른 북벽 등반 1주일 만에 악명 높은 아이거 북벽의 높이 1,800m(해발 2,200~3,970m)의 헤크마이어 루트(초등 루트)에 도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당시의 영국 최고 기량의 클라이머인 듀갈 해스턴을 만났는데, 그는 할리우드 영화 ‘아이거의 징벌(Eiger Sanction)’ 촬영에 등반기술 고문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거 북벽의 기상상태가 나쁘니까, 기상이 호전될 때까지 등반을 연기하라고 충고했다.
▲ 남미 안데스산맥의 예루파하 그랑드 북동벽(메스너와 하벨러의 루트).
10시간 만의 아이거 북벽 완등과 히든피크 무산소 등반
그러나 하벨러-메스너 조는 다음날 아침 5시에 악천후 속에서 등반을 시작해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를 어렵사리 횡단했다. 그들이 ‘제2설원’의 바위 스텝을 등반할 때, 암벽에서 40m를 추락하고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폴란드 산악인이 스위스 헬기에 의해 구조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벨러와 메스너는 낙석과 낙빙의 집중 포화를 피하기 위해, 제2설원 위쪽 가장자리, 즉 오버행 지대를 가로질렀다. 그들의 머리 위 오버행에 기다란 고드름들이 ‘다모클레스의 칼날(the Sword of Damocles : 한 개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칼)’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공포감을 조성했다. 가끔 위쪽 벽의 ‘스파이더(하얀 거미)’에서 떨어지는 낙석들이 아래쪽 제2설원의 빙벽을 강타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그들은 마음을 졸이면서 ‘플랫아이언(Spur)’ 상부의 ‘죽음의 비박지’에 도달하고 ‘제3설원’을 지나 오전 9시 람페(Ramp) 밑에 도달했다. 그들은 람페 중단부의 ‘폭포 피치’를 등반하느라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그들은 ‘신들의 트래버스’를 통과하고, 등반을 시작한 지 7시간 만인 정오에 ‘화이트 스파이더’와 사투를 벌였다. 빙벽의 모든 크랙과 침니들은 신설로 메워져 등반이 힘겨웠다. 아이거 북벽의 최대 난코스 구간인 ‘엑시트 크랙(Exit Cracks, 탈출로 크랙)’ 위는 얼음 벌창이어서 프리 클라이밍은 불가능했다. 하벨러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엑시트 크랙의 첫 번째 피치를 선등했다.
메스너는 다음의 얼음이 덮인 피치, 즉 ‘엑시트 크랙’의 최대 난코스 구간 ‘석영 크랙(quartz crack)’을 선등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유명 산악인 헤르만 불(Hermann Buhl)이 이 구간에서 여러 번 추락했다는 사실을 교훈 삼고 있었다. 먼저 손가락의 온기로 홀드 위의 얇은 얼음층을 녹인 다음, 그것을 움켜쥐고 다음 홀드로 이어가는 등반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손가락 굵기의 작은 홀드 위에 장시간 서 있었기 때문에 장딴지 근육이 몹시 쑤셔 댔다. 양손으로 홀드에 매달리느라 한 손이 자유롭지 못해 피톤 설치가 난항일 때도 있었다. 그는 추락의 위험 앞에서 여러 번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이 구간의 등반에 많은 시간이 허비되었다.
하벨러의 격려를 받으며 메스너는 ‘석영 크랙’ 등반을 무사히 마쳤다. 녹초가 된 메스너 대신에 하벨러가 다음 두 피치를 선등했다. 그는 오버행 위에 걸터앉아 통과했고, 때로는 녹슨 피톤을 발견해 내기도 했다. 오후 2시 북벽의 일부가 햇볕에 노출되자마자 낙석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침니와 크랙들은 작은 수로(水路)로 변해 작은 낙석들과 고드름을 방출하기 시작했고, ‘화이트 스파이더’로 무시무시한 돌사태가 쏟아져 내렸다. 이 돌사태는 굉음과 함께 제3설원과 제2설원 위로 쏟아져 내리며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로프를 묶고 100m를 더 등반한 후, 자일을 풀고 정성 설원을 지나 오후 3시 정각에 아이거 북벽의 정상을 밟아, 등반 시작 10시간 만에 등정을 완수했다. 이 등정 기록은 1983년 오스트리아 부벤도르퍼가 헤크마이어 루트를 4시간 50분에 만에 돌파할 때까지 아이거 북벽의 노멀 코스 최단 등정기록이었다.
▲ 요세미티 엘캡의 남서벽 (살라테월)을 프리로 등반하는 페터 하벨러(영국 클라이머 더그 스코트와 함께).
1975년 두 사람은 가셔브룸1봉(히든피크, 8,068m) 북서벽을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하려고 했다. 즉 그들은 무산소로, 고정 로프나 고정 캠프를 설치하지 않고, 고소 포터(셰르파)도 고용하지 않고, 오직 두 사람의 힘만으로 8,000m 고봉에 도전할 작정이었다. 이런 등반은 히말라야 등반사상 유례없는 모험이었다. 메스너는 하벨러에게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고산 등반을 속행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메스너의 등반 철학을 요약하면, 등산가와 산 사이에는 어떤 인공적인 보조 수단도 배제(排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속제 피톤이 암벽 등반의 묘미를 감소시켰듯이, 8,000m급 고산 등반에 산소를 사용하는 행위는 실제로 산의 고도를 낮추는 것과 같은 나쁜 효과라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산악인들과 달리 고소 포터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고산을 등반하기를 고집했다.
하벨러는 메스너의 등산관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이 등산관은 순수 알피니즘의 선구자인 영국 산악인 알프레드 머메리와 오스트리아 산악인 헤르만 불의 순수 알피니즘을 계승한 것이다. 1957년 브로드피크(8,047m)에서 오스트리아의 유명 산악인 헤르만 불과 디엠베르거, 그리고 2명의 독일 산악인들은 셰르파를 고용하지 않고, 4명의 대원들만의 힘으로 무산소로 초등에 성공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등반 방식을 ‘웨스턴 알파인 스타일’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등반 방식은 순수 알파인 스타일 등반법의 효시였다. 알파인 스타일과 다른 점은 난코스에 고정 자일을 설치했고, 3개의 고정 캠프를 구축한 점이었다.
그러나 하벨러-메스너 조는 고정 자일과 고정 캠프를 설치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텐트를 짊어지고 등반했고, 셰르파의 고용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먼저 가셔브룸 라(Gasherbrum La·6,600m)에 올라가 그들의 등반 대상지인 가셔브룸1봉 북서벽을 자세히 정찰했다.
그들은 8월 8일 아브루치빙하 상의 베이스캠프(5,100m)를 출발, 가셔브룸계곡의 5,900m 지점에서 첫 번째 밤을 보냈다. 이튿날 두 사람은 빙하로 등반을 이어가는 동안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자취 없이 사려졌고,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발밑에 밟히는 눈과 좌우의 절벽의 세계, 그리고 그들의 보행의 리듬만 존재했다.
그들은 25발자국마다 가쁜 숨을 돌리며 북서벽의 하부 빙벽을 프런트포인팅으로 돌파하고 록스텝 밑에 도착했다. 록스텝은 6,900m 지점에서 7,100m 지점까지 가파르게 치솟아 있었다. 그들은 걸리, 침니, 리지, 크랙, 설벽, 슬랩 등으로 등로를 바꿔가며, 이 가파른 록스텝을 돌파하고, 탈진한 몸으로 비탈진 자갈밭에 도달했다. 그들은 7,100m 지점에 두 번째 비박 텐트를 설치했다.
그들은 다음날 오전 8시에 등반을 재개해 설벽을 오르고, S자 걸리, 바위 립, 바위 걸리를 돌파하고 정상 벽인 빙벽 밑에 도달했다. 그들은 200m마다 선등을 교대하며 정상 능선 밑에 도달했다. 그들은 드디어 죽음의 지대(8,000m)를 넘고, 정상 스노돔(Snow dome, 8,086m) 위에서 서로 포옹했다. 그들은 순수 알파인 스타일로 표고차 2,200m의 히든피크 북서벽에 신 루트를 개척한 것이다.
하벨러에게는 최초의 8,000mm급 봉우리 등정이어서,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메스너에게는 낭가파르바트(8,125m) 루팔 벽(남벽), 마나슬루(8,163m) 남벽에 이어 세 번째 8,000m급 봉우리 등정이었다. 메스너는 그때까지 히말라야에서 자신이 이룩한 위업에 탄복해 자아도취를 만끽했다. 그들은 정상에서 넋을 잃고 가셔브룸 2봉, 가셔브룸 4봉, 브로드 피크, K2 등이 연출하는 파노라마(Panorama)에 심취했다가 오후 늦게 제2비박지로 무사히 귀환했다.
다음날 두 사람이 텐트 밖에서 하산을 준비하는 동안, 갑자기 돌풍이 엄습해 그들의 비박 텐트가 산산이 찢긴 채 풍선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들은 북서벽을 마주 보고 아이스 액스로 빙벽을 찍으며 하산했는데, 탈진 상태로 배낭을 짊어질 기운조차 없었다. 그들은 배낭을 벗어 낭떠러지 아래로 굴려 떨어뜨렸다.
그들은 베이스캠프에서 폴란드 여성 등반대장 반다 루트키에비치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메스너와 하벨러의 히든피크(갸셔브룸 1봉) 무산소 등반은 3년 후인 1978년 에베레스트의 무산소 등반의 전초전이었다.
▲ 1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 스퍼의 레뷰파 크랙을 등반하는 하벨러. 2 마터호른 북벽 정상 부근을 등반하는 메스너. 3 아이거 북벽 엑시트 크랙의 석영크랙을 선등하는 메스너.
인류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1977년 봄 하벨러는 메스너의 세계 6위 고봉, 네팔 다울라기리(Dhaulagiri·8,167m) 남벽 등반대에 참가했다. 미국 프리 클라이밍의 달인 커빙턴과 독일 청년 클라이머 비데만도 참가해 등반대원은 모두 4명이었다. 그들은 다울라기리 사우스 필라의 수직 걸리로 등반을 시작했다. 하벨러와 메스너는 이어서 200~300m 높이의 람페로 등반했는데, 그 람페는 또 다른 수직 바위 버트레스(buttress, 버팀 벽)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위쪽으로 60도 경사에 달하는 가파른 빙원이 교회 지붕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흔들리는 검은색 바위 위에 쌓인 적설량이 많지 않아, 그들은 크램폰을 착용하지 않고 등반했다.
미답의 신비하고 유혹적인 코너(corner, dihedral, 이면각)를 오르는 것은 감격적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다울라기리 정상 부근에서 발생한 눈사태의 후폭풍이 산악인들을 통째로 2km 떨어진 곳까지 날려버린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갑자기 가루 눈사태가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등반의욕을 상실하고 눈사태의 공포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알프스의 드루아트 북벽(Droites North Face)의 하부를 방불케 하는 경사의 절벽이 나타났다. 그리고 록밴드 위쪽에 얼음 방패가 나타났다. 가루 눈사태가 발생했다가 사라지자 그들은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고 등반을 재개해 해발 6,150m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이 가파르고 단단한 얼음 방패(빙벽)를 등반할 때, 우지끈 소리가 나며 빙벽이 갈라져 얼음 사태가 발생했다. 메스너는 1975년 로체 남벽에서 수천 톤의 얼음 사태의 후폭풍으로 베이스캠프가 초토화될 때 생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하벨러와 메스너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해 다울라기리 남벽 등반을 중단했고,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등반을 포기했다.
하벨러와 메스너는 에베레스트의 사우스 필라(South Pillar : 웨스턴 쿰에서 시작해 남봉으로 직등하는 빙암 루트. 당시는 미등 루트였으나 1980년 폴란드대가 신 루트 개척)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할 꿈을 꾸었다. 그러나 당시 에베레스트의 모든 루트는 등반 선약 때문에 등반 허가를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여서, 두 사람은 독립 팀의 자격으로 나이르츠(Nairz) 대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에베레스트 남동릉 등반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현지에 도착해 현지 상황을 살펴보니, 두 사람의 힘으로 쿰부 빙폭과 웨스턴 쿰을 돌파하고, 바위 절벽, 사우스 필라를 알파인 스타일로 돌파한다는 것은 거의 역부족이라고 판단되었다.
메스너와 하벨러는 에베레스트의 동남릉으로 루트를 변경하고, 오스트리아 팀과 협동해 남동릉에 고정캠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스트리아 팀에 등정 우선권이 주어졌고, 그 다음에 하벨러-메스너 조가 무산소로 이 루트에 도전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벨러-메스너 조는 3명의 셰르파와 함께 로체 벽에 제3캠프를 구축했다. 하벨러는 식중독 때문에 제2캠프에 머물고, 메스너는 2명의 셰르파와 강풍 속에서 사우스 콜에 도착해 제4캠프를 구축했다. 밤에 텐트 밖에서는 시속 200km의 강풍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온도는 영하 40℃였다.
다음날 새벽에 그들이 설치한 텐트가 강풍에 찢겨, 그들은 사력을 다해 새로운 텐트를 설치했다. 그들은 이틀 밤낮으로 계속되는 제트 기류 속에서 텐트와 함께 통째로 날려갈 것 같은 공포감에 시달리고, 쫄쫄 굶으며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하산했다.
며칠 뒤 나이르츠 대장, 로베르트 샤우어(훗날 폴란드의 쿠르티카와 가셔브룸 4봉의 ‘빛나는 벽’ 서벽을 등반함), 호르스트, 베르크만 대원들은 셰르파 앙푸와 산소를 사용하며 남동릉 상 8,500m 지점에 제5캠프를 구축했고, 이어서 등정에 성공했다.
▲ 다울라기리 남벽을 등반 중인 페터 하벨러.
5월 7일 하벨러와 메스너는 카메라맨 존스와 사우스콜에 도착했고, 다음날 존스는 사우스 콜에 남고, 두 사람이서 긴 걸리 속의 40도 경사 설벽을 교대로 리드하며 등반해 제5캠프에 도착했다. 메스너가 제5캠프 텐트 속에서 차를 끓일 때, 하벨러는 혼자서 오른쪽 캉슝벽(동벽)의 단단한 설벽을 프런트포인팅으로 오르고, 높이 2m의 록밴드를 돌파했다. 하벨러는 탈진상태가 되어 배낭을 메고 갈 힘마저 없어 눈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배낭을 데포(depot, 보관)시켰다.
그는 드디어 구름 낀 지대를 벗어나 푸른 하늘 속의 남봉(8,760m)에 도달했다. 사진 촬영을 하면서 뒤따르던 메스너도 남봉에 도착했다. 하벨러는 그때 불가항력적인 어떤 사건이 발생해 퇴각하더라도 떳떳한 변명을 할 수 있는 일이 제발 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열렬히 빌었다. 등정 후 당시 외과의사들의 주장대로 반신불수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봉에서 그의 눈앞에 푸른 하늘 속으로 뻗어 오른 칼날 능선을 대면하고, 등반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자일을 묶고 눈처마가 늘어선 좁은 설릉, 칼날능선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힐러리 스텝(Hillary Step, 높이 12m)에서 메스너가 선등했다. 그들은 정상 설원의 눈밭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아 한참동안 꼼짝 않고 누워 원기를 회복했다. 그들은 기력을 되찾은 후 왼쪽의 눈사태 위험이 있는 설사면 지역을 피해 오른쪽 눈처마 쪽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은 두 서너 발자국 오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다시 두서너 발자국 전진하기를 계속했다. 하벨러는 지금 자신이 걸음을 계속하고 있다는 생각 외에는 모든 것이 망각 상태였다. 정오에 남봉을 출발한 그들은 정상설원을 지나 정상에서 몇 m 아래 지점에 도달했다. 메스너는 심한 호흡곤란 증세와 실어증을 느꼈다. 그는 사고력 기능저하로 얼음 제거를 위해 벗었던 고글(goggles, 보안경)을 다시 쓰는 것을 잊곤 했다.
두 사람은 체력이 바닥난 상태로 마지막 몇 m를 두 팔꿈치와 두 무릎으로 기어서 오후 1시 드디어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중국대가 설치한 3발짜리 측량대에 도달했다. 그들은 서로 포옹하고 흐느껴 울며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 하벨러의 고글 밑으로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턱수염을 적시고, 뺨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었다. 그들은 다시 서로의 목을 얼싸 안고 웃다가 울다가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올라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었다.
그런데 하벨러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라는 인류 최대의 위업을 달성하고도, 승리감이나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대신 공허함, 슬픔, 실망감을 느꼈다. 그의 몸을 꽉 채우고 있던 중요한 무엇인가가 증발해 버린 느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려 마음속이 텅빈 느낌이었다. 하벨러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증거로 자일을 잘라 삼각 측량대에 묶어 두었다. 나중에 에베레스트를 유산소로 등정한 오스트리아 대의 불(Bull)과 라인하르트 칼(Reinhard Karl) 대원이 그것을 기념품으로 가지고 내려 왔다.
메스너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이제 자신의 원대한 꿈이 이룩된 마당에, 희열 대신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환멸감을 느꼈다. 하벨러는 당시 과학자들의 주장대로 뇌세포 파괴로 식물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정상에서 한시 바삐 탈출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사진촬영과 녹음을 위해 뒤처진 메스너를 남겨두고 몽유병 환자처럼 비틀거리며 먼저 하산했다.
메스너가 자일을 힐러리 스텝에 남겨두라고 부탁했지만, 하벨러는 자신의 피켈을 힐러리 스텝 상부에 박지 않으면 자일을 안전하게 앵커(anchor)시킬 수 없어서, 그냥 자일을 가지고 내려왔다고 말했다. 산소가 희박한 상황에서 기억력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스너는 하벨러가 정상에 자일을 남겨 두었다고 주장하여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하벨러는 기어서 남봉 위로 올라온 후 난코스인 남동릉으로 하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는 메스너가 볼 수 있도록 눈 위에 자신의 하산 방향으로 화살표 3~4개를 그려 놓았다. 그러나 나중에 하산한 메스너는 하벨러가 남봉에서 자신을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그 기대는 어긋났고, 남봉 상부에는 아무런 하산 흔적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벨러는 동벽 쪽의 눈밭에 앉아서 아이스 액스를 키(key)로 삼고 발끝으로 제동을 걸며 글리사드(glissade, 제동활강)했다. 그는 자신이 글리사드하면서 일으킨 작은 눈사태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동벽으로 조금 내려가면 높이 3,962m의 가파르고 무시무시한 낭떠러지가 나온다는 사실도 망각했다. 하벨러는 198m를 단번에 제동활강해 제5캠프(8,500m)에 도착했다.
그는 남동릉으로 트래버스한 후, 다시 제동할강을 했는데, 때때로 글리사드를 중단하고 암벽지대를 두 발로 걸어서 하산했다. 다리가 떨리고, 심장박동수가 높아졌다. 하벨러는 사우스 콜 위쪽 눈밭에서 넘어져 서너 차례 공중제비를 돌고, 오른쪽 복사뼈가 돌멩이에 부딪쳐 부상을 당했다. 그의 이마도 찢기고, 고글이 벗겨진 그의 눈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서 산송장, 즉 유령의 몰골로 존스의 마중을 받았다. 하벨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사우스콜의 제4캠프까지 등정에 8시간 걸린 구간을 한 시간 만에 미친 듯이 하산했다.
한 시간 뒤 메스너도 남동릉으로 하산하여 제4캠프로 돌아왔는데, 그는 하산 도중 사진촬영을 위해 고글을 벗는 바람에 설맹에 걸려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메스너는 밤새도록 충혈된 눈의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흐느끼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는 그 고통으로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밤을 지새웠다.
에베레스트 등반 후 찰떡궁합 깨져
다음날 하벨러, 메스너, 동상에 걸린 존스는 폭풍우 속에서 하산을 감행해 제네바 스퍼 옆에 설치한 고정자일 구간에 도달했다. 메스너는 설맹에 걸려 가시거리가 10m였는데, 몽유병자처럼 걸어서 악몽 같은 하산을 하며 제2캠프로 내려 왔다. 하벨러도 설맹 초기 증상이 나타났고 발목 통증이 심했지만 설맹에 걸린 메스너를 정성껏 보살폈다.
하벨러와 메스너는 인류가 오랫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 즉 1924년 노턴 소령이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북벽의 8,580m 지점까지 진출하고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라는 과업을 인류역사상 최초로 완수해 세계 산악계를 경악시켰다. 하벨러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에베레스트가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고 겸손하게 생각했다. 영국 유명 산악인 틸만은 하벨러-메스너 조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에베레스트의 유일한 등정이라고 주장했다.
자존심이 강한 메스너는 자신이 하산 중에 설맹의 고통으로 울고불고 난리쳤다는 하벨러의 말을 자신을 폄훼(貶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에베레스트 남동릉의 무산소 등정 이후 하벨러와 결별했고, 그 결과 그들의 찰떡궁합 같은 파트너십이 무너졌다.
첫댓글 옛 사람들은 정말 강했다는 생각밖에..
"그러나 두 사람은 상호 신뢰감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음 두 피치를 무사히 등반했다." 에서 감동했는데 마지막 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