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영화를 읽어내는 결정적 열쇠
영화를 탐구하는 사람으로서, 영화가 건네는 섬광 같은 진심을 기다리는 관객으로서, 누군가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이 있다면?’ 하고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엔딩 크레딧이 뜨는 찰나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 순간은 두어 시간 동안 나를 향해 무수히 쏟아지던 은유와 셀 수 없는 장치들이 파도에 휩쓸려가듯 천천히 귀결될 때, 소강될 무렵 직관적으로 마음에 쾅 찍히는 어떤 ‘감정’이 등장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저는 이 감정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오롯이 나와 그 영화를 내밀하게 엮어주는 첫 매듭이라고 여깁니다. 그 감정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내며 내 세상과 영화 속 우주를 찬찬히 엮어내는 작업은 퍽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일이거든요. 가끔 난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감정의 정체가 확실한데도 도통 그 원인을 머리로 읽어낼 수가 없지요. 오늘 이야기할 〈경계선〉이 그러했습니다. 티나의 읽어낼 수 없는 표정에서 엔딩 크레딧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순간, 마음속에 훅 들어온 날것 같은 감정은 ‘담담함’ ‘외로움’이라는 명확한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런 감정이 드는 이유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수록 실타래가 마구 엉키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영화는 내밀한 관계로 나아가기까지 시간이 꽤 걸립니다. 참 난감하죠. 그러다 문득 이 영화에 흥미를 갖게 했던 포스터를 떠올렸습니다.
어둑한 숲속. 정령을 품은 듯한 오래된 나무들, 여우와 순록, 사슴, 올빼미가 존재하는 이 숲은 밤의 신비로운 기운을 머금고 태곳적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 두 사람이 서있습니다. 제복으로 자신을 감싼 이와 자유로운 방랑자 같아 보이는 이. 이들은 오래전부터 이 숲에서 자연과 함께 어울렸던 존재들이겠지요. 그런데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낯선 외모 때문일까요? 별안간 궁금해졌습니다. 이 완벽해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속, 이들이 유독 어색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미리 말씀드리자면 사실 이 둘은 북유럽신화에 등장하는 트롤입니다.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자신이 트롤임을 모른 채 인간으로 살고 있는 트롤과 트롤임을 인지하고 인간 세계를 떠도는 트롤이죠. 트롤은 신화적, 우화적 존재이며 인간보다는 더 자연과 친숙한 존재일 텐데 여전히 어색함을 느끼고 있다면 내 안에 과연 어떤 시선과 판단 기준이 존재하는 걸까요. 이런 질문과 의구심은 앞으로 머릿속으로는 읽어내기 힘든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 결정적 열쇠가 되어줄 겁니다.
이하 사진: 〈경계선〉 스틸컷
다름이 주는 상처, 같음에서 얻는 위로
항구에서 출입국 세관 직원으로 일하는 티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후각을 통해 사람의 감정 상태를 읽어내는 능력이지요. 특히 수치심, 죄의식, 분노 같은 불편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기에 불법으로 이곳을 넘으려는 자들은 전부 티나에게 적발됩니다. 심지어 티나는 아동 성 착취 영상물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감춰서 들고 온 이에게서 지독한 범죄의 냄새를 맡고는 관련 범죄 집단을 모조리 잡아들입니다. 이렇게 특출난 능력이 있음에도 티나는 항상 어딘가 위축되어있고 매사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같습니다. 티나는 스스로 말하지요. “나는 기형이에요.” “나는 남들과 많이 달라요.” “평생 내 외모를 미워했어요.”
사실 티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외모와 흔치 않은 신체 구조를 지녔습니다. 여성이지만 숨겨진 남성 성기가 있고 엉덩이 위에는 꼬리가 존재했던 흔적이 있죠. 때론 인간이 혐오스러워하는 것들에 갈급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티나는 자기 모습을 평생 수치스럽게 여기며 살아온 듯합니다. 그러기에 외모에 대한 무례한 말을 들어도, 티나의 집에 얹혀살며 그녀를 이용하는 롤랜드를 향해서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라도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롤랜드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아빠에게 고백하지요.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시간은 산속에 혼자 있을 때입니다. 그녀에게는 물기 어린 땅에 얼굴을 대고 동물들과 교감하며 호수에 조용히 몸을 담그는 일만이 유일하게 숨 쉬는 삶이자 기쁨입니다.
어느 날 모호한 냄새를 풍기는 보레가 그녀 앞에 등장합니다. 문제는 분명 냄새가 나는데 어떤 감정의 냄새인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죠. 티나는 처음으로 당황해하다가 결국 보레에게 무례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평생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받아온 이 외톨이 여성은 보레가 지닌 꼬리의 흔적과 번개 모양 상처를 마주한 이후 그를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낍니다. 나와 똑같은 상흔을 지닌 이를 만났다는 데서 티나는 형용할 수 없는 위로와 안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보레로 인해 자신이 인간이 아닌 트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티나는 보레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며 크나큰 자유와 행복을 느낍니다. 얼마 만에 느끼는 행복이었을까요. 영화 첫 장면에서 티나는 곤충을 집어 가만히 관찰하다가 내려놓습니다. 스스로 기형이라고 느끼며 트롤의 본능을 애써 외면하는 티나의 모습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구더기를 음미하고 벌거벗은 채 기이한 괴성을 지르며 숲속을 질주하는, 인간 기준이 아닌 트롤로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만나는 티나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이곳을 떠나 보레와 함께 트롤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길 고대하죠. 이런 티나를 보며 보레는 진심으로 말합니다.
“당신은 정말 완벽해요.”
다름과 같음이 아닌 경계를 선택하기
여기까지만 보면 주인공이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희망찬 영화로 보이지만 실상 이후부터는 끔찍한 클라이맥스로 치닫습니다. 이제 힘겨운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었네요. 이야기는 보레로부터 출발합니다. 외형은 인간 남성처럼 보이지만 여성의 성 기관을 가진 보레는 주기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난자, 즉 ‘히시트’를 낳고 있습니다. (히시트는 수정된 난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기와 비슷한 형태를 띠지만 곧 죽게 됩니다.) 그는 수년 동안 히시트를 인간의 아기와 바꿔치기하고, 바꿔치기한 아이를 아동 성 착취범들에게 건네는 끔찍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티나가 붙잡았던 범죄자들과 결국 한통속이었죠. 사실 보레는 인간을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인간은 트롤들을 정신병원에 감금해 끔찍한 실험을 한 후 죽이기를 반복해왔고 보레와 티나의 부모님 역시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보레는 인간 자체가 끔찍한 존재라고 믿으며 티나와의 유성생식을 통해 트롤 자손을 이어나가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을 알게 된 티나는 슬픔과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티나는 정말 보레에게서 인간에 대한 분노나 죄의식의 냄새를 맡지 못했던 걸까요? 보레는 이미 티나를 만나기 전부터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왔을 텐데 왜 티나는 짙은 범죄의 냄새를 감지하지 못했을까요. 정답은 없지만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죄의식이 윤리적 인식과 양심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보레는 어쩌면 죄의식을 느낄 수도 없는, 즉 인간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당위가 너무나 명확해 자기 행동을 죄라고 여기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았다면, 보레의 또 다른 냄새에 가려 티나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다른 생각은 어쩌면 보레에게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분노와 죄의식을 티나가 무의식중에 외면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첫 번째 생각이 강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두 번째가 티나를 더 이해하는 접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제가 영화를 본 후 처음 느낀 ‘외로움’은 무엇보다도 지독하게 공허의 냄새를 풍기는 감정이 아닐까요. 이는 티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강력한 감정이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 겁니다. 보레에 대한 티나의 호기심은 평생 지닌 외로움의 냄새를 잠시나마 옅게 만들면서 범죄의 냄새를 희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니에요. 선착장에서 만나요.” 보레는 티나에게 쪽지를 남긴 채 사라지고 티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잠시나마 보레와 함께 트롤의 삶을 꿈꾸던 티나는 아기가 뒤바뀐 채 망연자실한 인간 친구의 모습을 보며 혼란에 휩싸이죠. 친구에게 보레의 짓이라고 말하지 못한 티나는 결국 보레와의 만남에 경찰을 대동합니다.
“난 못 해요. 악마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난 인간인 건가요?” 친구를 향한 미안함, 보레의 범죄를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 어쩌면 그날 티나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풍기는 짙은 죄책감의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릅니다. 인간 사회에서 끊임없이 소외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방인의 존재로 인간 사회에 남기로 한 티나의 결심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녀는 정말 인간이 된 것일까요?
두 세계의 껄끄러움을 고스란히…
영화의 엔딩은 다시 외톨이가 되어버린 티나의 모습에 주목합니다. 롤랜드가 떠난 빈집은 폐허가 되었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외로움의 문제가 그녀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영화 오프닝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 즈음, 소포 하나가 배달됩니다. 트롤들이 산다는 핀란드 어느 지역에 대한 정보와 함께 꼬리가 달린 트롤 아기(아마도 보레와 티나의 아이가 아닐까 싶습니다)가 상자 속에서 티나를 보며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이윽고 티나는 무언가 결심한 듯 아이에게 분유가 아닌 벌레를 먹이고 가만히 아이를 바라봅니다. 아마도 티나는 인간 세계에서 트롤 아이를 키우겠지요. 물론 ‘인간으로 보이게끔’이 아닌 트롤 그 자체의 모습으로 말이죠.
처음에 읽어낼 수 없던 티나의 표정과 해석되지 않았던 ‘담담함’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경계에 서기로 한 티나의 결심과 함께, 경계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담대함이라는 감정으로 새롭게 번역되는 듯했습니다. 위태롭고, 치우치기를 종용하며, 둘 중 하나를 결정하지 않으면 양쪽으로부터 버림받는 철저하게 구석진 자리가 ‘경계’라는 이름일 텐데, 자기 모습을 인정하고 다름의 시선을 선택하면서까지 두 세계 사이에 고독하게 서있는 티나의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위엄이 있습니다. 또다시 외톨이로 추락하는 것 같지만 삶 자체가 가진 고독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담대함이란.
우리 역시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경계가 있을 겁니다. 한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양발을 한쪽씩 댄 채 버틸 수도 있겠지요. 위태로운 경계에 서서 조금씩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두 세계의 껄끄러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행위, 이질적인 충격을 내 몸에 쓴 채 살아가는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또 다른 방법일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