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1892~1971)
7. 혁명을 통한 정의
대공황을 겪으면서 혁명은 중간층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었지만, 그 수행 방법은 여전히 기피되었다. 폭력과 혁명은 일반적으로 사회 변화의 도구로서 일단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도덕론자들은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데 주로 실용적이면서 공리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럼 궁극적이고 더 포괄적인 가치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 직접적이고 덜 포괄적인 가치는 무시해도 되는가? 폭력을 통해 평등을 수립하고, 이렇게 얻어진 평등이 확실히 유지되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같은 문제들은 분명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제기된 것들이다. 폭력과 같은 사회 정책이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가정해버리면, 위에 열거한 그 어떤 문제도 적절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 폭력이나 혁명을 본성상 비도덕적이라고 가정하는 두가지 잘못된 견해
첫번째는 폭력을 악의지의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표현으로, 비폭력을 선의지의 당연한 표현으로 간주함으로써 폭력은 본질적으로 악의 범주에 속하고 비폭력은 본질적으로 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다. 이 견해는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집단 간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단 우리가 강제력의 요소를 윤리적으로 정당한 범주에 귀속시키게 되면, 그것이 항상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폭력적인 강제성과 비폭력적인 강제성을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폭력과 비폭력 간의 차이를 구별을 할 때는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비폭력을 주장했던 간디의 영국 면화 배격운동은 결과적으로 맨체스터 지방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게끔 했으며, 전시 중 연합국의 독일 봉쇄로 인해 독일의 수많은 어린이가 기아에 시달렸다.
두번째 잘못된 견해는 전통에 의해 답습된 도구적 가치들을 본질적인 도덕적 가치와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는 데서 기인한다. 도덕적 가치는 어느 순간 다른 도덕적 가치를 위해 희생될 수 있다. 환자에게 진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 도리어 환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사회는 이 포괄적인 목적들과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위험한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모든 도덕은 이 원칙을 따르고 있다.
◆ 프롤레타리아와 중간층 간의 차이점
■ 스스로를 일차적으로 독립된 개인으로 간주하느냐
■ 집단에 대한 충성과 결속을 강조하는 경향- 전체 사회의 복지를 위해 소유권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폐기할 것이며, 집단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는 대화와 타협보다는 투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 ■ 스스로를 일차적으로 사회집단의 한 구성원이라고 느끼느냐
■ 자유와 개인의 생명의 존중, 소유권, 상호 신뢰와 이타심을 중요시하는 경향- 개인적 도덕의 규범들을 모든 사회적 관계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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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층은 자유를 신뢰하지만, 만일 이 때문에 자신들이 사회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와 지위가 위협받게 되면, 단호히 자유를 부정한다. 사랑과 이타심의 도덕을 주장하지만 특권 없는 계층을 사랑하고 이타적인 집단적 태도를 보인 적은 거의 없다. 폭력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이 위협받는 국제분쟁과 사회적 위기가 닥치게 되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폭력을 사용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성과 중간층의 도덕성 간의 모순은 곧 잔인성과 위선, 냉소주의와 감상주의 간의 모순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개인들의 도덕적 자원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층에 맞서서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들의 도구를 사용하여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
폭력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제도가 확립되고, 또 그 제도를 보존할 수 있다면 폭력과 혁명을 배제할 윤리적인 근거는 없다. 진정한 문제는 폭력을 통해서 정의를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적 가능성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 파시즘
파시즘은 곤궁한 중간층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가 도래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급진주의를 반공 및 민족주의라는 정치적 전략과 결합시켜, 급속도로 부상하는 노동계급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경제적 지배계급의 지지를 얻어냈다.
가장 부유한 계층과 가장 궁핍한 계층이 공동의 목표 하에 결성한 정당에 중간층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파시즘의 정치적 지략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잘 보여준다. 중간층은 경제적 기반이 파괴되는 경우에도 심리적인 이유나 동기들로 인하여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에 귀속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있다.
◆ 혁명의 조건
영국이나 독일처럼 발달한 산업국가들에서는 의회사회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대변하고 있다. 독일에서처럼 설사 비참함이 증대되어 중간층 일부가 공산주의 대열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혁명론자보다는 중간층의 숫자가 훨씬 많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거둔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성공이 모든 서구 산업국가에서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아서도 안된다.
트로츠키는 프랑스의 혁명가 마라의 말을 흥분에 차서 인용하고 있다.
“하나의 혁명은 가장 낮은 사회 계층에 의해, 후안무치한 부유층들이 천민 취급을 하고 과거 로마인들이 냉소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라 불렀던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유지될 수 있다. “
아마도 노동자들은 과거의 비교적 안정되었던 생활에 비해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태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결코 혁명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가 아닌 굶주림이 혁명을 낳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확실하다.
러시아의 귀족주의적 관료제의 철저한 무능과 전쟁에 의한 귀족계급의 철저한 와해, 상업적인 중간층의 위신 결핍, 농민층의 정치적 무방비 상태 및 토지와 평화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생겨난 노동계급과의 잠정적인 이해관계의 일치, 교회의 중세 봉건적인 무지, 경제적인 소외감으로 인해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혁명적인 결속, 사멸해가는 국가의 야만적인 테러 등으로 인해 정당화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냉소주의, 이 모든 요소가 러시아 혁명의 기초를 닦았으며, 산업 문명에 비해 훨씬 더 완벽하게 마르크스의 공식(그것도 주로 서구 사회를 위하여 고안된 공식)에 딱 들어맞는다.
새로운 세계대전의 결과가 이 같은 전반적인 궁핍화를 가져올지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서구 세계에서 혁명에 의해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공산주의는 공업화된 서양보다는 농업 중심의 동양권에서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더 크다.
장차 세계는 공산주의적인 동양권과 반사회주의적인 서양권으로 나뉘게 될지 모른다. 서양 세계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향해 꾸준히 움직여가고는 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에 또 다른 재난과 파국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개인과 사회
인간이란 항상 최소한의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욕구를 확대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다 모든 사회는 상충하는 욕구들을 역사의 목적에 맞도록 조정하는 방법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은 사회에 비해 훨씬 강한 정당성과 적은 위험으로 절대자를 추구한다. 하지만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절대적인 것을 얻고자 달려들면, 수백만의 생명과 재산은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강제력은 사회정책의 일정한 수단이므로 절대주의는 이 도구를 독재와 잔혹성으로 바꾸어버린다. 개인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고 열정적인 기행 정도로 비치는 열광주의도 정치적 정책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인류에 대한 자비와는 전혀 무관해져 버린다.
8. 정치적 힘에 의한 정의
사회 공동의 부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정당한 몫을 탈취당했다고 느끼지만 어느 정도의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어서 완전한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는 집단은 보다 완화된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식과 입장을 표출한다. 이 집단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집단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방법을 버리고 의회주의적, 진화적 방법을 채택한다.
정치권력의 강압적인 탄압이 없더라도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경제적 무기는 그리 강하지 않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힘만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바위에 계란 치기와 같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려면 노동계급은 필연적으로 정치권력도 소유해야 한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잠시나마 국내 최대 정당이 된 적이 있고, 프랑스나 벨기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정당들은 힘의 크기와 관계없이 정부에 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다. 사회주의는 의회주의 활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달성될 수 있다는 희망이 정당화된 예이다.
정치에서 순수한 원리가 가지는 한계와 고귀한 정치적 이상의 계급적 이해 관계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이유로, 정치 영역에서 이성과 양심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치적 압력도 병행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사회에는 수많은 계급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그들의 입장을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직접 도출하거나 그것에 의해 일정한 제약을 받는다.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보면, 보다 나은 특권을 가진 계급에서도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상주의에 의해 스스로를 소외받는 계급과 동일시하며 정치투쟁을 전개해온 개인들이 언제나 있었다. 영국과 독일의 중간층만큼 지적으로 잘 훈련되고 높은 사회의식을 가진 나라의 중간층도 사회 전체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급진주의를 버리고 보수주의로 돌아섰다. 영국의 노동당이 쓰라린 참패를 맛본 1931년의 총선이 그러했고, 독일에서는 파시즘적 정책을 통해서 중간층이 자신들을 표현했을 때 그러했다.
◆ 농민들
유럽의 경우, 아직도 잔존해 있는 강력한 중세적 전통과 지주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으로 인해 농민들은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로 기울어진다. 미국에는 이러한 전통이 없기 때문에, 농민들은 도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농민들도 개인주의적이다. 위기가 닥치면 정치적 보수주의로 기울든지 아니면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한다.
미국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동맹을 기초로 한 제3의 정당이 출현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농민 계층은 자본주의 체제로 인하여 큰 고통을 당하더라도, 집단주의적인 정치 목표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문명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농민 계층의 요구 사항들과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 열광주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로서 그 목표의 순수성과 목표 달성의 가능성을 신뢰함으로써 영웅적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감상주의적 수준을 넘어 너무나 광신적이다. 절대주의나 열광주의가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필요하다.
열광주의의 위험성과 기회주의의 위험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지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방법은 없지만, 사회는 일반적으로 무모한 모험보다는 타성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합리주의자의 달콤한 정당성보다 절대주의의 과감한 도전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산주의도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공산주의 세력의 존재는 끊임없는 비판을 통하여 의회사회주의가 완전히 기회주의나 무의미한 언동에 빠져들지 않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해낼 것이다.
◆ 의회사회주의
의회사회주의는 순수한 프롤레타리아적 사상을 특징짓는 종교적 절대주의의 상실과 그것이 추구해야 하는 실천적인 전술들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유혹들로 인해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 의회사회주의 정당은 정권을 잡더라도 정부 운영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다른 정파들과 연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의회사회주의의 역사는 끝없는 배신과 변절의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영국에서의 맥도널드와 스노든, 프랑스에서의 비비아니와 브리앙, 독일에서의 샤이데만과 노스케 등의 변절은 때로는 사회주의 정당으로부터의 완전한 탈당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주의의 원칙을 포기하고 노동자에게 해악을 주는 국가 정책에 대한 옹호를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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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국가의 자기 보존 충동으로 인해 국내 평화는 신속히 이루어지지만, 불필요한 대외 전쟁이 조장된다. 국가가 말하는 평화는 이러한 평화를 저해함으로서만 제거될 수 있는 사회적 불의와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불의는 국제적 분쟁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복종은 계급투쟁보다 국제적 분쟁을 선호한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결코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국제분쟁은 국내의 사회적 불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계급투쟁은 그러한 불의를 철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론적 사회주의의 차이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워낙 크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전통적인 사회적 악폐로부터 어느 정도 고통받느냐, 또는 사회가 처해 있는 위기의 심도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