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로마서 13:1~7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지난 주일이 어린이 날이었고 어버이 날이 지난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날이 이번 주 수요일입니다. 이러한 기념일들은 부모와 스승의 권위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탈 권위 시대요 반 권위 시대입니다.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 기성 세대와 어른들과 노인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일명 꼰대로 취급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반 권위 시대, 탈 권위 시대 문화 풍조 속에서 권위를 존중하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받기 십상입니다. 온라인상에서는 노인들과 기성 세대들은 발언도 하지 말고 투표도 하지 말고 그냥 입을 다물고 살고 충고는 절대 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와 각종 권위에 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하고 반발하며 냉소적인 반응을 하며 그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풍조가 매우 일반화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역시 어느틈엔가 세상의 주류 문화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결국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사야 40장 8절 말씀에 이르기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고 하신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습니다. 요한일서 2:17 말씀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고 하신 말씀도 진리임을 믿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1:15 말씀에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기를,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하신 말씀이 성취될 그 날이 올 것도 우리는 믿습니다. 온갖 무질서와 혼돈과 악이 점점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의 나라가 다 불타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워진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고 그 위에 우리 부활의 주님과 그를 믿는 주의 백성인 우리가 앞서 간 성도들과 함께 영원한 영광스런 불멸의 몸을 입고서 주님과 영원히 영광 중에 살아가는 그 나라가 장차 펼쳐질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도도히 흐르는 시대 정신의 탁류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영원하신 창조주시며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과 그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신 교훈들에 언제나 주목하며 그 가르침을 지켜 행하고자 늘 힘쓰는 참된 제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신앙의 본질을 살펴본다면, 신앙이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가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그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고 그의 뜻과 그의 계획을 따라 만사를 운행하신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지엄하신 권위를 깊이 깨닫고 그를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깊이 인식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며 자기 삶을 그에게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어긋난 것은 추호라도 싫어하거나 감히 거역하려고 절대로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스러운 신앙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 말씀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
라고 하였으며, 잠언 9:10 말씀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를 깊이 인식하고 범사에 행하는 사람이 곧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자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감정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그의 마음에 부합되게 살아가는 것이 곧 훌륭한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늘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고 묵상하며 그 모든 가르침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탈권위주의 시대, 반권위주의 시대 속에서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계명이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살피고 그 모든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먼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세상 권위자들의 권위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3:1~7 말씀은 세속 권세자들에 대하여 복종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기록할 당시는 사도 바울이 삼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고린도교회에 머물면서 차기 선교지인 서바나로 가는 중간 경유지로 택한 로마 성읍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입니다. 그 때는 주후 57년으로서 네로 황제가 황제에 오른 지 4년째입니다. 그 때 황제 네로의 상태를 보자면,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재혼한 자기 남편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여 죽이고 자기 아들 네로를 그 대신 황제 자리 올려놓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 황제는 실로 악하여서 황제가 되자 마자 하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아내를 여러 명 얻었는데, 얻고 나서는 다 죽입니다. 남자 아이를 거세하고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따 다른 남자를 자기 아내로 삼고 성대한 결혼식을 치릅니다. 밤중에 몰래 나가 남의 아내를 겁탈하기도 하고 사람을 마구 죽여 로마 하수구에 던져넣는 악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자기 집에 들어옵니다. 이런 기가막힌 악행과 기행들을 저지르고 다니기 때문에 그 어머니 아그리파나도 도저히 감당 안되어 네로가 황제에 오른 지 2년만에 자기 아들을 황제 자리에서 쫓아내야 하겠다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될 정도였습니다. 수에토니우스라는 사람이 쓴 「열 두명의 카이사르」라는 책을 보면 네로의 사악하고 잔인하고 비천한 악행과 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시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를 비롯한 권력층들이 거의 다 악하고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무질서한 시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하던 중에 삼차 고린도교회에 머물고 있던 중에 성도들에게 쓴 로마서에서 이렇게 로마 제국의 정치적 체계를 이루는 모든 법질서를 존중하고 그 제국 내에서 세워진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신약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한 개인에 의하여 통치되는 것보다 로마의 법체계와 오랜 통치 질서 체계에 의하여 다스려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했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통체 체계 내에 세워진 수많은 위임 권위자들에 대하여 그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라고 가르치는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 악하고 교만하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자기 가문과 사두개파의 파벌적 유익만 추구하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앞에서 묵묵히 그의 권위 아래서 신성 모독 죄로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 악한 대제사장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강한 독설과 저주를 퍼붓지 아니하고 그 불법 재판의 모든 절차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그 교만하고 유다 민족에 대한 애정은 손톱만큼도 없고 영적으로 무지하고 사악한 로마 제국의 앞잡이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도 주님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님께서 심문 받을 때에 빌라도가 자기 변명을 하지 않는 예수님이 답답하여 예수님께 말하기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가 더 크다”(요한복음 19: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도가 가진 총독의 자리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위로서 인정하시고 복종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삼차 전도 여행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유대인들 폭도들에게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 나가 여러 공회의원들 앞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의장석에 앉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뜸 노기 띤 말로 명하기를
“그 입을 치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 속에 의분이 솟아나서 자기를 치라고 말한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독설과 심판의 말을 퍼붓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재판 자리에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불의하게 폭력 행사를 명하는 그릇된 행위를 자행하도록 명하는 그 대제사장에게 정의로운 심판을 선고한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천사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자이기도 한 지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순간적으로 그렇게 내뱉어진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곁에 선 사람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고 책망하는 말로 사도 바울에게 말하자, 사도 바울은 곧장 이렇게 대답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23:5)
사도 바울은 자기를 향하여 치라고 명한 사람이 대제사장인 줄을 알자 출애굽기 22:28 말씀에서 명한 말씀 곧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고 하신 말씀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자기가 모르고 내뱉은 말이라고 자기의 말을 거두어들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실제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권위들 곧 세속 권위나 종교적 권위에 대하여 실제 삶 속에서도 존중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준 실례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여러 규례들과 우리 주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삶의 모범과 사도의 재판 자리에서 행한 언행들을 통하여 그 위임 권위자들의 인격이나 신앙이나 삶이 비록 악할지라도 그 권위를 함부로 부정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고 거역하는 행동이 성경적인 교훈에 맞지 아니함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임 권위자들이 불의하고 악하고 더럽고 형편없을지라도 우리들은 그들에게 악담을 퍼붓거나 저주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과 사도들이 보인 본보기임을 기억하고 우리도 본받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저지른 악행들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응분의 심판을 하나님의 정한 때에 그들에게 내리시고 갚으실 것이지만, 우리가 그 권위를 부정하고 대적하고 저주를 퍼붓고 속으로 부글부글해 할 필요는 절대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성경의 모델을 들자면 구약 시대 다윗의 처신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경외하는 소년 목동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어 그를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받은 어린 소년 다윗은 그 후 얼마 있다가 블레셋 민족의 침략을 맞아 전쟁에 나간 자기 형들을 위하여 물품을 전달하려 아버지 이새의 보냄을 받아 전쟁터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적장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모독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는 말을 듣게 되자 거룩한 의분에 사로잡혀서 적장 골리앗과 맞서 싸워 이기고자 하는 거룩한 의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물맷돌 다섯 개를 골라 3미터에 가까운 거인 골리앗과 맞서 싸워 그 물맷돌로 적장의 이마를 꿰뚫어 넘어뜨리고 골리앗의 칼을 빼어서 그 목을 잘라 이스라엘의 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큰 인기를 얻어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춤추며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사무엘상 18:7)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귀에 들은 사울 왕은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그 날부터 그 어린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시도를 하게 됩니다. 아마 사울 왕이 다윗을 만난 지가 그 나이 60세요 다윗은 열 살을 갓 넘은 때 좀 나이를 쳐주면 열 다섯 살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년 티가 너무 나는 어린 시절에 다윗은 인생의 거센 풍파를 온 몸으로 맞이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 같은 왕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도 부족한데 그 어린 아이, 소년을 가지고 자기와 자기 아들의 미래 권력의 경쟁자로 삼고 그를 제거 대상으로 삼아 죽이려 드니 그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다윗은 하루 하루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숨어 달아나면서 하루는 이 굴에서 내일은 저굴속에서, 또 하루는 무너진 광야 요새의 허름한 한 방 구석에서, 혹은 수풀 속에서, 혹은 이방 나라로 숨어들어가서 잠을 청하는 길고 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기를 잡으려고 수백, 수천 명의 수색대를 이끌고 온 사울 왕이 다윗이 숨어 있는 깊은 굴속에 들어와서 대변을 눕고자 들어와서 대소변을 보거나 혹은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를 받으면서 들판에서 쿨쿨 잠을 잘 때에 몰래 그 곁에 다가가서 칼을 한번 내려 꽂으면 단번에 사울 왕을 죽을 수 있는데도 그때마다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다만 사울의 겉옷 자락 한쪽 귀퉁이를 단검으로 조용히 잘라내고 혹은 사울 왕의 머리맡에 놓인 물병과 창을 조용히 손에 쥐고 빠져나와서 왕을 불러 자기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그가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그는 자기의 원수 사울 앞에서 절하고 이렇게 사울에게 말합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가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사무엘상 24:9~1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들었던 불의한 사울 왕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자기는 직접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이는 왕으로 기름부어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권위를 대적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37편에서 다윗이 교훈으로 노래한 다음 내용은 그의 행적과 일치합니다. 그가 시편 37편 1절 이하에서 교훈으로 이렇게 가르치며 노래로 삼아 부르게 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을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 37:1~11)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인들이 권세를 부리고 형통하며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일을 볼진대 그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 자신이 불평과 불만과 분노로 충만하여 악인을 죽이겠다고 분기 탱천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친히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악인들을 맡기고 잠잠하게 참고 기다립시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길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에 맡기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온유함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살아갑시다. 그리할진대 때가 되면 하나님은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요 악인들은 사라져서 다시 있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여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들로 하여금 화평을 누리며 기업의 땅을 상속하도록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에 악한 자들은 맡기고 우리의 믿음의 길, 순종의 길, 감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복된 은혜의 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임 권위자 중에 가장 중요한 분이 부모님이십니다.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아들 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임 권위자들입니다. 부모에게 자식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며 사랑함으로 공경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도 차서를 따라 사랑하며 아끼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십계명 중에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가 바로 부모 공경의 계명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 20:12)
이 말씀이 그 뒤에 이어지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인간 간의 계명들의 근본 계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공통의 양심과 지성에 새겨진 불문율적인 근본 계명이기에 모든 나라와 사회에 다 부모 공경과 형제 사랑이 양심법의 근본으로 가르쳐지곤 합니다. 정약용 선생의 편지 모음에 보면 아들들에게 쓴 교훈에 모든 도덕의 근본을 ‘효제’라고 가르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효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리키고 제는 형제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도 가르치기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4:8)
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효를 행하고 형 오빠 누나 등에 대하여 항상 존중하고 사랑하여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귀하게 쓰임받았던 야곱의 열한째 아들 요셉이 하나님께 귀하게 사랑을 받고 높이 쓰임받았던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모를 공경하며 사랑하며 형제들을 품고 봉양하며 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나이가 더 많은 연장자와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자의 합당한 태도입니다. 성경 말씀 레위기 19:32 말씀에 이르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진실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하는 참 신자는 당연히 이 땅에서 오래 사신 연로한 어르신들과 연장자들을 존중하며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노인 앞에서 자리에 앉았다가도 일어서고 인사를 하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무시하지 않고 잘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함부로 패고 덤비고 조롱하는 자들은 불한당이요 패역한 자입니다. 그러나 노인들을 공경하며 그분들이 시대 감각도 떨어지고 부족하고 고집스러워도 그들의 부족함을 이해해주고 잘 섬기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장이나 사회에서 직위가 높은 상사들도 역시 존중하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는 주인과 종의 개념이 있었고 신약 성경 시대도 역시 노예 제도, 종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지금 우리가 볼 때 시대 착오적인 불합리한 노예 제도가 있었지만 사도들은 그 제도의 불완전함과 악함을 알면서도 그 종들로서 기독교인이 된 노예 성도들에게 주인에게 반항하고 그 노예 제도가 악한 것이므로 주인을 속히 떠나 자유를 쟁취하라고 부추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고린도전서 7:20 이하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린도전서 7:20~24)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는 적법한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하되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종 된 신분, 노예 된 신분이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쳐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인의 신분일 때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실상 영적으로 볼진대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의 노예요, 육신적으로 종, 노예 신분일 때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육신적으로는 노예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예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가 속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여전히 충성되게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으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고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주인과 종의 종속 관계는 오늘날 회사나 상점이나 공무원이나 군대 내에서 여전히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직무적 관계에서 여전히 우리는 그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복종하고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수도사는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자기가 복종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을 습관화했다고 합니다. 수도사는 순결, 청빈, 그리고 복종을 가장 큰 덕으로 삼고 평생 이 세 가지 덕을 쌓으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들은 사람을 겉으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 속 마음, 진심으로 그 직무 관계에서 상사의 권위를 존중하며 일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22,23 말씀에서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씀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하 직원으로서 직장 상사를 대할 때에 그 사람을 대하고 그 지시에 대하여 언제나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며 자원하여 실행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요 주님을 섬기기 때문이며 그 직장 상사를 대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섬기는 것으로 주님은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직장 상사를 대하는 수고에 대하여 주님께서 장차 갚아주실 것입니다.
물론 모든 관계가 아래에서 위로만 복종하고 그 권위에 일방적으로만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들도 그 행하는 일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라고 권위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지도자는 그 백성을 자애롭게 섬기고,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형들도 동생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돌보고, 스승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가르치고, 직장의 상사들도 부하 직원들을 동생처럼 아끼고 돕는 일을 해야 합니다. 즉 모든 권위 질서는 상호 사랑과 섬김이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4;1 말씀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를 가진 자들은 곧 그 권위를 베푸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랑과 자애와 성실함으로 군주는 백성들을 돌보고 부모는 자녀들을 돌보고 주의 종들은 주의 백성들을 섬기고 노인들도 젊은이들의 부족함을 감싸고 기다려주고 스승도 제자들을 사랑과 모범으로 가르치고 상사들은 부하 직원들을 배려하며 격려함으로써 자기가 받은 권위에 합당한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장차 최종 권위자요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 앞에서 장차 셈을 할 때에 상을 받는 길입니다.
오늘날 모든 권위가 부정되고 진심을 가지고 권위를 존중하는 정신이 다 사라진 탈 권위 시대, 반 권위 시대 풍조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성경은 명백하게 모든 권위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세상 속에 그의 뜻대로 배열하신 것이라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이 우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야 상관없어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만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실존과 그의 통치하심을 확고하게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권위들을 항상 인식하며 존중하며 살아감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상의 위임 권위자인 정치 지도자들, 대통령, 국회의원, 사법부의 판사, 검사, 교육자들, 선생님들, 교사들, 부모님들, 연세드신 어르신들, 직장 상사들, 나보다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연장자들, 형제 자매들 중에 차서가 먼저인 형, 누나, 오빠 등 모든 자들에게 권위를 발견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위에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권위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위임 권위자들에게 항상 하나님을 섬기듯이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여 받들어 복종합시다.
그리할진대, 성경에 권위를 존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수많은 축복들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한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은 에베소서 6:3 말씀에 이른 대로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고 하신 말씀입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자 역시 장수하게 될 것이며 스승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에게 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주의 종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에게 신령한 복과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에 이른 축복의 경로에 대하여 이르기를
히브리서 7:8 말씀에 이른바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고 하신 말씀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전쟁에서 동방 왕들을 다 물리치고 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 멜기세덱을 만나자 곧 그에게 전리품 중에 십분의 일을 드리면서 복을 받기를 구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이 크게 축복하였으니, 이는 많은 왕들을 쳐부신 아브라함이 여전히 하나님의 위임 권위자인 주의 종의 권위를 인식할 줄 알았고 그 권위 아래 복종하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요, 한평생 어느 곳에 가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자기가 복종해야 할 권위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찾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 권위를 인식하여 잘 존중함으로써 모든 권세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들을 다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