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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7일
말씀 : 삼하15:12-14
제목 : 지성소를 두게 된 의미
저번주에 ‘지성소의 자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영혼이 주님을 찾는 자유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언제든지 지성소를 찾을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지성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곳, 어디든지 지성소를 만들 수 있는 자유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성소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여러 가지 상황이 몰아닥친다 할지라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우리에게 엄청난 복입니다. 인간이 나약하고 연약해서 교만하기 쉽고 하나님을 말씀에서 벗어나기 쉬운 존재인지라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우리를 불러내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창조의 목적과 소명의 목적을 위해 왜 고난을 주신다는 말입니까? 동기부여를 위해 더 좋은 것, 더 놀라운 것을 주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왜 고난을 주십니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해석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말씀 가운데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는 자들과 자기중심에서 해석하는 자들의 차이가 고난을 이기며 고난을 통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나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사느냐의 차이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실천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올바른 실천적 삶을 사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고난을 올바로 해석할 때 지성소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귐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풀어볼 계획입니다. 저번주에 확인한 것처럼 시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여기서 ‘사랑’이라는 히브리어는 ‘라함’인데요, 사랑의 용어 중에 이 단어는 ‘사귐’을 통해 나타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0절을 보면 압살롬이 반역을 꾀하는데요, 사실 반란은 백성들의 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압살롬을 지지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12절에 의하면 다윗의 조언자였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이 헤브론으로 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으로 기울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따라서 아히도벨이 헤브론의 압살롬의 제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다윗 대신 택하셨다고 오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그 결과 많은 백성들이 압살롬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긴밀한 사태를 다윗이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면, 13절의 다윗의 ‘전령’즉 히브리어로 미드가인데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심, 민심과 동태 등을 보고하는데 이스라엘의 민심이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음을 보고하게 됩니다. 전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기드’는 문자적으로 정보를‘전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무엘하1:5에서도 ‘마기드’는 사울의 죽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무엘하18:11에서는 압살롬의 죽음을 전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니 왕이나 장군들은 미드가, 즉 전령들이 전하는 말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다윗이 이 현실의 상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궁에서 도망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내었느냐 하는 부분을 우리가 유심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들이 배신을 한 것입니다. 참 황당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더니 나중에는 나 몰라라 할 때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여기서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칼날을 높이 세우고 추격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굉장히 큰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시편 3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지은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뿐만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은 어떻게 대처하며 이런 위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리고 동일하게 우리에게 닥치는 위기와 어려움을 어떻게 해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윗은 이 절망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탄원하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전령이 모든 백성들의 민심을 전했습니다. 백성들은 압살롬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전령의 말에 몰입되어 환경과 상황만 바라보며 대책을 논의하는 일들이 일반적인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환경과 여건을 바라보지 않고 전령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전령의 말에 따라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황급히 도망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냥 앉아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기다리는 막연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할 것은 하고 모든 것을 동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의존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실질적으로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닥치면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닙니까?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문제에 정신을 빼앗기고 문제에 집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고 분주할 수밖에 없지요. 나름대로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 즉 문제에 집착한 기도이지 문제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여러 가지 난관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할까요? 문제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교리적인 하나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알면 하나님을 실질적인 하나님, 실질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너무 막연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상한 것은 우리가 교회를 들락날락거리면서 하나님을 향한 관심도,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관심도, 영적인 삶의 관심도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도 표현을 하지만, 간절함이 자꾸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리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면 즉, 형식적이고 관습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면 그 틀에서 신앙생활이 습관화될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이 습관화되지는 않았습니까? 기계적이 되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간절함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은 안 보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만 집착하게 되어서 삶에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만 쏟아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간절함, 절박함, 긴장감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간절함이란 어디에서든지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사업이나, 공부나, 운동선수도 어떤 상황에서도 이 간절함은 절실히 요구됩니다,
만일 무엇인가 부족해서 어떤 목표치를 이루지 못했을 때, 누구나 하는 말이 ‘간절함이 없어서 그래’, 이런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간절함이 없어서 실패했다는 것을 압니다.
저 자신을 생각할 때도 절박함이 없었구나, 간절함이 없었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절박함, 간절함, 긴장감을 회복시키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셨다고 믿습니다.
이 간절함은 목마름으로도 표현될 수가 있는데요, 사실 미래를 바라보면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미래에 수없는 신앙의 도전들이 엄습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디지털시대, 다양한 중독, 독선, 이기주의, 가상세계에서 매몰, 젠더문제, 등) 미래세대에 대한 절박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실질적으로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교회가 미래세대를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그렇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함과 간절함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금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세대 아이들은 어떤 기준이 사라져서 혼란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어떤 교육청 공무원이 자기 아이 담임에게 ‘우리 아이는 왕의 DNA를 가지고 있다’고 선생님에게 편지로 전달한 것으로 인해 아이 부모인 공무원은 대기발령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글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부모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고 봐야 합니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가정의 질서는 이미 붕괴되고 기준이 사라진 상황에서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기준이 아이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 말을 듣습니다. 학원 가기 싫다고 하면 안 가고, 학교 가기 싫다고 해도 안 보내고,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1차적으로 들어줍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서열 1위가 자녀들이고, 아이 본인도 서열 1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서열 1위인 아이의 말을 부모가 안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자기 수준에서 할 표현을 다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서열 1위가 자신인데 선생님이 지시하고 간섭합니다. 그러니까 욕도 하고 침도 뱉고 때리기도 하고 그런다는 말입니다.
어떨 때는 서열 1위인데 야단도 맞고, 매도 맞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어떨 때는 내 말을 잘 듣는데, 어떨 때는 야단도 치고 때리기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다윗과 함께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항상 왕의 수준에서 대우만 받다가 다윗의 눈에 멀어지니까 반역을 꾀한 것 아닙니까?
사실 미래세대에 대한 이 절박함과 간절함이 3040으로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3040이 미래를 향한 간절함과 절박함에 동참하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수요예배 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하루만 산다면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까?’여기에 내가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면 다급히 그 나라의 것을 준비할 수밖에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간절함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내가 하루밖에 못 산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에 대해 간절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절박함과 긴장감과 간절함으로 나아가야 될 부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때가 하나님을 절박하게 만나고 이런 위기, 자녀의 위기, 교회의 위기, 가정의 위기, 국가의 위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 하는 절박함을 가지고 지성소를 찾는 심령들이 되셔야 합니다. 지성소를 찾아 하나님과 사귐의 삶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하나하나 풀리는 은혜를 교회가 함께 누릴 줄 믿습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사귐’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적대로 사귐의 삶을 살면 문제가 창조사역의 관점에서 회복되고 고침을 받고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의 본질도, 천국에 가서 계속할 일도 ‘사귐’에 있습니다. 사귐은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먼저는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이웃과의 수평 사귐은 온전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귐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성소에서 수직적 사귐을 통해 임재를 누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아는 은혜가 분명히 있습니다. 지성소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만이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고 준비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바로 사랑과 충만함과 신비함과 은혜와 감격과 기적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각 지체가 유기체적으로 연합되어 교회가 된다는 것을 아시죠. 이 연합의 삶을 이루는 것은 바로 지성소의 기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랑을 공급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적 세계, 영적 삶의 시작은 지성소의 기도로 말미암아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전도, 봉사, 구제, 선교, 성경공부 이 모든 것은 지성소의 기도로 시작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행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귐을 통해 예배, 성찬예식, 복음 전파, 선교와 구제, 이웃 사랑 등이 행위로가 아니라 온전히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히10:22 하반절에 보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도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방해하는 의심과 나태함과 부끄러움과 형식적인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혹시 아시나요? 우리는 노아보다 아브라함보다 에녹보다 더 친밀하게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구약에서 노아나 에녹은 염소의 피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염소 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아갑니다. 누가 당할 자 있으며, 누가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낍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통제를 받는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간섭받기 싫고 나 혼자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구속당하고 속박당하는 것 같아서 내 삶이 그리스도께 묶여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영적인 자유를 누리려면, 생명의 충만함으로 채워나가려면, 천국을 기대하는 삶이라면 반드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 말을 지성소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 마음속에 새겨지지 않으면 생명의 소생함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지성소에서 멀리 떨어져서 주변만 맴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십시오.
왜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구하라고 하십니까?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이 땅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누리며 가장 비싸고 거룩한 위로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실패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현재 여러분의 마음을 낙심하게 하는 상황 때문에, 불신앙적인 생각들이나 사탄이 심어주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백만 하면 죄를 씻을 수 있는데 이 죄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주님을 찾고 구하는데 망설이며 주저하십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엉켜있는 실타래는 그리스도 안, 즉 지성소에서만 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지성소를 찾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부르고 찾아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감사와 기쁨과 영광과 축복을 누리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