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나의 이야기 23)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그의 저서 '사색의 광장'에서
'인생은 평화와 행복 만으로 살 수는 없으며 괴로움이 필요하다.
이 괴로움을 두려워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
인생의 희망은 늘 괴로운 언덕 길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했습니다.
또한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도 가득하다' 했고요.
이 두 말은 저의 삶을 뒤돌아 보면 저에게 꼭 맞는 말인가 싶기도 합니다.
안 병욱 교수 님이 쓴 '인생론'에서 언급한 세 가지 선택 중 마지막 말씀인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인생관, 가치관의 선택)"에 대해 저의 이야기를 남기려 합니다.
'중단 시킬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요,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미 8 순의 중턱을 넘은 제가 백구과극(白駒過隙) 이란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간 세월 앞에 뒤돌아
보니, 제가 살아 온 세월은 제가 불러서 온 세월도 아니었고, 제가 가라고 허락해서 왔다 간 세월도
아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몰래 왔다가 사라진 세월이었습니다.
미국 작가 오 헨리(O Henry 1862~1910)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았는가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얼마 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잡을 수도 없는 과거 잡히지도 않는 미래를 보면서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저는 대체 어떤 인생 관을
가지고 살았을까요?
테네시 윌리암스(Tennessee Williams 1911~1983) 말 대로
'돈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는 있지만 돈 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는 말이 저의 삶에 큰 깨달음을
주는 지금입니다.
스티브 코비(Stephen Richard Covey)가 '노력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
의 공통점은 모두 다 노력을 하였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많은 말 모두에 옮기게 된 것은 오늘의 저의 삶이 저 말들과 하나하나 다 느낌과 반성을 갖게 하는 말이
었기에 미리 옮겼음을 밝힙니다. 그럼 저는 과연 어떤 인생관 가치관을 갖고 살았을까요?
첫째, 제 운명은 제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날 때 마당 귀퉁이에 있는 두엄 자리에서 태어나 제 어릴 때 이름은 장영(場永)입니다.
제가 어려서 살던 집은 방에 멍석이 깔려 있던 집이었고 그때 거의 다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끼니를 메
우기 어려워 굶기를 밥 먹듯 하였고요. 학교를 다니면서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하고 고구마 몇 개 가지고
가다가 산(山) 어느 자리에 숨겨 두었다가, 하교 시에 찾아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습니다. 심지어 열매란
열매는 다 먹을 것이 되었고 벼 이삭 하나 뽑아 까 먹으면서 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었지만 중학교에 갈 형편이 안 되어 1 년을 쉬다가 80 리나 되는 통학 길을 지각,
조퇴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다닌 초능력의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을 갈 때도 마찬가지로 1 년을 쉬다가 무작정 상경하여 운 좋게도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여 대학을
마쳤습니다. 제 삶에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었다 생각되는 것은 무작정 집을 나와 상경한 바로 그 '운명
을 바꾼 외출'입니다. 극단적 선택을 하고 겨우 살아나서 집을 나와 방황하다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결과였으니까요. 그 선택이 없었다면 제 운명은 어떤 결과였을까요? 그로 인해 제 목숨과 바꾼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대학 생활에 매달려 군 기피자의 불명예까지 썼다가 군 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구해
5 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힘든 직장 생활도 견디며 살았습니다.
이 모두가 80 리를 걸어 다니며 얻은 '쇠뭉치'라는 별명 하나의 힘이었습니다. 오직 나의 온 힘을 다해
개척 정신, 극복 정신으로 살며 일군 삶이었습니다.
둘째,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이 있습니다. "내 가슴 속에는 피곤한 심장이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을 착한
양심이 있다"
언제인지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아주 오래 전에 우연히 어느 글에서 본 말로써 미국에 어느 사형수가
사형 장에서 최후 진술을 하라는 형 집행 관의 말에 답한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사형수
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그처럼 사형을 당할 만큼 죄를 지었지만 그에게도 그런 양심이 가슴 속
에 있었다는 것은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지침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결코 제 양심을 접고 살지는 않겠다 다짐하였고, 그래서 거짓을 못합니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자 하는
마음으로 살았지요.
어느 정치인이 그랬지요. '나는 약속을 어긴 적은 있어도 거짓 말을 한 적은 없다' 는 말입니다.
착한 거짓 말일까요? 아니면 부끄러운 거짓말 일까요? 그 분을 떠올리면 그 말의 참 의미를 다 짐작
하리라 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양심을 저버리고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오죽하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하였기에 살아가면서 편법을
써서 양심을 버리며 살아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랬기에 양심을 삶의 지표로 삼고 살자 하는
마음이었나 봅니다.
몇 가지 삶을 뒤돌아 보겠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를 했지만 가정교사를 하면서
결코 나의 시간을 얻기 위해 가르침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시작한 가정교사 생활
을 7년을 넘게 하면서도 겨우 7일 정도 쉬었다 하면 인정하시겠습니까? 방학도 없었고 시험 때도 없었습
니다. 하루에 3 시간 꼬박 꼬박 가르치면서 쉬지 안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 할 때까지 술 한 잔 안 했지요.
못했습니다. 마지막 졸업 시험이 끝난 후 친구들이 '영(永) 아, 너 이제 졸업했다. 오늘은 그 기념으로 술
한 잔 하자." 하여 제기 역 냇가에 들어 서 있던 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 넘긴 것이 제 대학 생활에서 처음
마신 술이었습니다. 제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가르쳤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제 양심을 속이지 못한 기막힌 에피소드 두 개 더 올립니다.
직장 생활 때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자동차 여행 보험을 개발했을 때 방송국에서 나와 자동차 여행 보험
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밤새 외워 인터뷰 한 적이 있습니다. 자료를 앞에 놓고 답변을 해도
되는데 '미리 다 써와서 쳐다 보고 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더구나 라디오 방송인데 그랬습니다.
또 한 번은 직장 입사 시험에서 면접 관이 '영어를 잘 하느냐?' 는 질문에
'예 조금 밖에 못합니다' 그게 사실이었기에 그렇게 답변한 저입니다. 좀 멍한 제가 아닙니까? ㅎㅎ
군대 생활에서 이야기 하나 남기겠습니다.
군대에서 좀 멍한 사람을 고문 관이라 하지요. 1964년 군에 막 입대한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군 생활에서 관물(개인에게 지급된 물품) 도둑(?)이 많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오면
관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선임자들이 훔쳐다가 팔아먹고 관물 검사를 하면서 모자란 물품을 추궁
하면 돈을 주고 사서 채워야 했지요. 여러 번 당했습니다.
그 뒤 7 사단에 배치되기 까지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군 신병 훈련만 4 개월을 받는 제 생애 제 체력
으로 감당하기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본부 중대 서무 병으로 근무할 때입니다. 군 신병 생활 4개월이나
받은 보상이었나요? 군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다 아시겠지요. 군은 계급이 아니라 직책이라고요. 당시
서무 병이면 좋은 자리였습니다.
저녁이면 꼭 점호를 하지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전우들의 신상 이상 유무를 점검하고 취침하는 시간
이지요. 본부 중대에는 4 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2과(정보과) 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점호를
불참하는 것입니다. 제가 용서할 것 같습니까? 저보다 선임자도 있었지만 용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이 정보 장교(박 근 중위)에게 건의를 하였고, 정보 장교는 저를 부르더니 정보 과 사병들은
바쁘니 점호를 면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기에 응할 사람이 아니지요. 꼬박꼬박 참여 시켰지요.
그랬더니 정보 장교가 일직사령이었던 날에 본부 근무자에게 불 호령이 떨어졌습니다.상의는 벗고 한
쪽은 고무신, 다른 한 쪽은 군화 차림 완전 무장한 채로 10 분 이내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 말입니다.
참으로 가관이지요. 점호를 시켰다는 데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운동장 몇 바퀴 돌고 나니 맨 살인 등
허리가 벗겨져 쓰라려 왔습니다. 때가 겨울이었습니다. 그러나 항복할 제가 아닙니다. 그 후유증으로
제 등에는 커다란 흉 자국이 크게 남아 있습니다.
군대 이야기를 남기면서 자랑스러운 7 사단 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 더 남기겠습니다.
제가 군 이야기 하면서 꼭 '자랑스러운 7 사단' 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제가 직접 모셨던 사단장 님은 아니지만 굶주린 백성을 가난에서 구해 주신 불 세출의 대통령
박 정희 대통령 님이 저희 사단장 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김 계원 장군 님, 정 승화 장군 님 등 5. 16
혁명의 주역 들이 7 사단 사장 님이셨습니다. 또 한 분 자랑스러운 장군 님정 봉욱 장군 님은 제 머리에
영원히 남을 훌륭한 장군 님이셨습니다. 정 장군 님은 6.25 사변 \때 북한 포병 사령관 이셨는데 귀순
하신 장군이십니다. 장군 님이 오시자 마자 급식으로 올라 오던 육류(소고기)를 가루로 만들어 납품하
도록 하셨습니다. 이유는 납품 된 육류를 선임자들이 많이 가져가던 때입니다. 그러니 부대에서 급식을
할 때는 좋은 고기 대신 기름기만 떠 다니는 국물이었고, 그나마 선임자들이 떠 있는 고기 떠 가면 사병
들은 물만 마시었는데 가루로 해서 납품하니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정 장군님은 그처럼 청렴하셔 박 정희 대통령님께서도 큰 신임을 하셨다 합니다. 자랑스러운 장군이십니다.
세 번째, 저는 결코 구차하게 살지 안 했습니다.
주어진 삶의 환경이 평범하게 살다가는 저를 삶에서 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우리 세대에 있어 가장 위대한 발견은
마음 가짐을 바꿈으로써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했지요.
물론 스티브 코비(Stephen Richard Covey)가 말한 것처럼 "노력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
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노력을 하였다" 했습니다.
물론 제가 부모님과의 약속 '중학교에 넣어주면 걸어서 다닐 것이며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겠다' 는 약속은 비록 지키지는 못하여 천 추의 한으로 남고 불효 지심에 울면서 살고 있지만, 애쓰
고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오면서 Why me? 하고 얼마나 외쳤던 가요? 어찌 왜 저에게만 이 시련을 주시냐고 한탄하였던 가요?
그러나 이 모든 시련 다 저의 선택에 의해서 생긴 결과 아니었나요? '잘못된 만남'에서 시작한 저의 불행은
제가 만든 선택에서 비롯되었지만 제 탓을 접고 남의 탓으로 생각하고 살았네요. 지금까지 살아보고 얻은
교훈은 '잘못된 만남' 은 그 인생의 행과 불행을 결정 짓는 가장 큰 선택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떤 후회를 해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일 뿐입니다.
제가 살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나 에피소드 남기겠습니다.
어머니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가난하였을 때 동네에서 잔치가 있는 날이면 부모님들은 꼭 자식을 불러
먹도록 했고 떡 몇 개는 가져 오셔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남에게 손 부끄러운 일은 하시지 않으셨고 저도 그랬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흑석 동에서 안암 동에 있는 K대학을 다닐 때인데 차비가 없었지만 주인에게 차비를
빌려 달란 말을 못해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1966년 4월 10일 결혼하여 56년을 살면서 아내에게 용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저입니다.
제가 K대학을 선택한 것도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 정의, 진리라는 모교의 교훈이 지금 퇴색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노인 4고(苦) 라는 말씀 들으셨지요. 즉 빈고(貧苦), 무위고(無爲苦), 고독고(孤獨苦), 병고(病苦)
이 네 가지 괴로움 중에 저를 벗어난 괴로움은 없었습니다. 태어나면서 만난 가난은 평생 저의 그림자
처럼 저와 함께 살았습니다.
무위고를 달래기 위해 직장 생활을 마치고도 27년 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85 세가 되어서 놓았습니다.
고독고는 참으로 더 했네요. 인생 3대 불행의 하나 인 고독고 중년의 고별(苦別)을 하기도 했습니다.
병고는 면했냐고요? 삶에 지쳤을 때 심혈관 앞에 져서 조영 술 두 번에, 관상 동맥 우회 술 까지 받았는
걸요. 그래서 가슴에 커다란 흉터는 삶의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얼마 전에 생의 마지막 지침으로 삼고 살라고 "그림자를 보지 말라. 등을 돌려 태양을 바라 보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한평생 그처럼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괴롭히던 Why me? 에서 벗어나 자랑스럽게 열심히 살아온 삶
쇠뭉치 같이 살아온 삶 기억하며 남은 삶 살라 하네요.
그래요. 부끄럽지 않게 극복하며 참으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은 주어도 좋고 안 주면 그러려니 하고 남은 인생 살다가 가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