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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잎가시꽃과 땅유리꽃
늦가을에 생뚱맞게 봄 이야기 하나를 할란다.
시간으로는 60년 전 1960년대. 공간은 한반도 남쪽의 한 시골 깡촌. 주인공은 열 살 전후 계집아이들이다. 그 나이쯤이면 자의식에 왠만큼 눈뜨면서 세상 물정을 알아갈 무렵이것지. 거울 앞에서 나름 뽄을 지길(멋을 부릴) 나이.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갈 때 ‘오늘은 무슨 옷을 입지?’라는 고민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끝동 모서리마다 헤어지고 때에 쩐 흰 저고리 검은 치마, 기껏 한 계절에 한 두 벌뿐인 그 차림 그 구색.
당시는 한국전쟁의 상채기가 채 가시지 않던 시절, 세계 최빈국으로 바닥을 기던 시절이었것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아이들은 너나없이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부황(浮黃)으로 얼굴은 누렇게 붓고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아프리카 빈국의 기아들 모습 참조). 1961년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며 발표한 ‘혁명공약’ 전문 중 “절망과 기아(飢餓)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란 구절이 그 시대의 참상을 대변한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갈 수 없어 점심시간이면 슬며시 교실을 빠져나와 학교 뒤란 우물로 가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맹물로 벌컥벌컥 주린 배를 채웠던 이야기는 요즘 젊은 것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라사람들의 90%가 노동집약적인 농업으로 생계를 버텼는데 농사지을 땅이 넓기나 했나? 국토의 75%가 산지였다. 먹을 입이 적기나 했나? 당시 인구밀도는 세계 2~3위를 다투었다. 경작가능지역만을 기준으로 하면 세계 1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니 노동 강도가 악명 높았다. 남해섬의 다랭이논, 전남 완도 청산도의 구들장논이 왜 생겼겠는가? 생각해보라. 세계에 유례가 없는 난방시스템인 온돌을 구상한 선조들의 지혜가 기특하기도 하지만, 비탈논의 용수 공급을 위해 온돌의 원리를 벼농사에까지 적용한 차원을 생각하면, 감탄과 경이를 넘어 눈물겹기까지 하잖은가?
가파른 비탈에다 돌을 날라 석축을 쌓아 손바닥만 한 땅뙈기를 확보하고, 어디서 구했을까, 구들장 깔기에 적당한 넓고 편편한 판석을 날라다 깔고, 그 위에 흙을 퍼 날라 다져서 논을 만들고, 멀리 떨어진 수원(서울 아래 水原이 아닌 水源)에서 논까지 도랑을 잇대어 만들어 물을 끌어오고, 모판 조성, 모내기, 물대기, 수차례의 땡볕 아래 김매기, 해충 퇴치, 잡초 제거, 메뚜기떼 쫓기, 가을 수확, 건조, 탈곡, 도정 등등을 거쳐 드디어 그 땅의 쌀알로 밥을 지어, 주린 배로 칭얼대는 자식들의 입에 한 숟가락 물렸을 그때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웃픔! BTS야, “피 땀 눈물” 노래 예사로 부르지 마라, 부동산/주식 투자족들아, 제발 함부로 ‘영끌, 영끌’하지 마라, 그 시절을 살아낸―‘살면 살아진다’―어버이들의 ‘시지프스적 형벌’을 3초간만 묵상해 보라!
(서론이 길었다. 내가 말이 많기도 하지만 아는 게 많은 탓이다. 오늘 아침 내가 설거지한 그릇에 기름때가 남아있다고, 설거지 때 쓰는 앞치마를 제대로 개켜놓지 않았다고 마누라한테 꾸지람을 들은 탓도 있다. 삐졌지만 맞을까봐 앞에서는 말 못하고 돌아서서 꽁알대는 나의 습성 탓.)
그래도 하던 이야기는 매조짐하자. 그러하니 농사일에 남녀노소가, 밤낮이 따로 없었다. 문화도 예술도 철학도 없었다. 오로지 굶어 죽느냐, 피죽으로라도 살아남느냐는 생사의 문제였다. 시골 물정 모르는 초임 교사가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준들 아무도 숙제할 여력이 없어 다음날이면 선생님 매질을 몸으로 때워야 했다.
특히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칫밥 먹어야 하는 여자애들 사정은 더 열악했다. 모자라는 일손을 보태느라 겨울철이면 얼음이 꽝꽝 언 개울로 나가 얼음장을 빨래방망이로 깨뜨려 빨래를 하였고, 걸레질/빗자루질로 집안 청소를 도맡았고, 개/닭/돼지 같은 가축들을 먹여 거두었고, 땡볕 텃밭에 쪼그려 앉아 가시덩굴에 긁혀가며 호미질하랴, 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하니 손등이 얼어 부르터서 갈라져 그 틈새사이로 검붉은 핏자국이 박혀 있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수줍음 많은 여자애들은 남 앞에 나설 때면 그 손이 부끄러워 등 뒤로 감추기 바빴다. ‘부지깽이도 아이 본다’는 한창 농번기에는 집안어른들이 모두 들일을 나가버리니 어린 동생을 돌보는 일은 그네들의 몫. 그런데 학교는 가고 싶으니 할 수 없이 포대기로 동생을 싸서 등에 업고 등교하는 일이 흔했다. 수업 시간에 느닷없이 울어대는 동생을 선생님 눈총을 피해가며 달래고, 기저귀까지 갈아대어야 했다. 아부지가 장날 사 오신 새 고무신을 막 신기 아까웠다. 그래서 집에서 학교 앞까지는 맨발로 와서는 근처 시냇물에 흙발을 헹구어서 신발을 제대로 신고―남들이 보니까―교문을 조신조신 사뿐사뿐 들어서던 지지배들.
부끄럼 많고 수수하고 수더분하고 유순하고 무던하고 울기 잘하던 여자아이들,
도라지꽃 같은 아이들, 고려가요 ‘가시리’속 화자(話者)와 같은 목소리, 같은 표정을 지닌 순정과 아량의 그네들, 김유정의 《봄봄》과 《동백꽃》 속의 천진난만한 그녀들, 윤석중의 동시―이를테면 “엄마야 누나야”―와 동화 속에 살아 뛰노는 따듯하고 포스라운 그녀들......
자, 여기부터가 본론이다. 이 이야기 무대배경은 이렇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교정이다. 큰 키로 무성하게 자란 검은 둥치의 벚나무 여러 그루가 운동장을 빙 둘러싸고 서있고, 그 바깥으로 운동장을 중심으로 마치 두 겹 동심원을 그린 듯 탱자나무 울타리가 빙 둘러서있었다. 무대 막이 오르면 봄이다. 개막을 알리는 북소리.
때는 봄. 만물이 소생하고 만화(萬花)가 방창(方暢)하는 봄의 한허리 중간. 울울한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도록 벚나무 꽃잎들이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훈풍 봄바람, 서쪽 하늬바람, 남쪽 마파람, 갈지(之)자 꽃샘바람에 함박눈송인 듯 하얀 나비 날갯짓인 듯 하늘하늘 춤추며 허공을 유영하면서 온 하늘을 아스라이 덮었다가는, 이윽고 중력의 이끌림에 따라 이 땅위에 사뿐히 내려와 하이얗게 속절없이 깔리던 낙화의 그 시절 그 계절. (이런 경지를 형용하는 ‘갱’상도 말은 ‘천지 삐까리’라 하지.)
이제 주인공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여나므 살 이쪽저쪽의 소녀들. 점심시간이거나 쉬는 시간 잠시마다에도 운동장으로 부리나케 쏟아져 나온다. 이들의 목적은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닌, 단지 ‘벚꽃잎가시꽃’―마땅한 이름이 없어 이렇게 부르자―을 만드는 일이다. 이런 이름이 생경한 이들을 위해 이 특별한 꽃의 제작 과정을 나열해본다.
① 진초록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나무의 곁가지 하나를 어른 한 뼘 정도의 길이로 꺾는다. 꺾은 가지에는 손가락 두 마디 길이쯤의 뾰족한 가시가 대여섯 개쯤 방사형, 어긋나기로 달려있다.
② 벚꽃잎이 쌓인 땅바닥 위에 쪼그려 앉는다.
(쪼그려 앉아 ‘벚꽃잎가시꽃’을 만드는 그녀들의 머리위에 등위에 어깨위에 벚꽃잎들이 여기저기 내려앉는다. 그녀들의 목덜미에 떨어진 꽃잎은 저고리 옷깃 안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어떤 얘는 무심히 깨끗한 꽃잎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가만히 맛을 보기도 한다.)
③ 뾰족한 대여섯 개의 가시 중 한 가시 끝으로 낙화한 벚꽃 잎의 한가운데를 콕콕 찔러서 한 꽃잎, 두 꽃잎, 세 꽃잎, 가운데가 가시에 뚫린 꽃잎이 한 가시줄기에 밀려 차곡차곡 쌓여 그 가시의 뾰족한 끝까지 가득 채워지게 만든다.
④ 나머지 너 댓 개의 가시에도 같은 방법으로 꽃잎을 가득 채운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 못 다한 작업을 중단하고 그 가시 가지를 어느 돌 더미 아래, 어느 나무 둥치 뒤에 놓아두고 교실로 달려간다.
⑤ 완성.
학교가 파하면 그 꽃을 아무 생각 없이 버린다. 같이 ‘벚꽃잎가시꽃’을 만든 친구에게 보여줄 일도 자랑할 일도 없다. 방치기하다, 고무줄놀이 하다 어느 순간 어디에서 손에서 놓아버린다. 불가에서 말하는 ‘무념과 무작위’의 끝 간 곳 어디쯤이다. ‘돈도 사랑도 명예도 아’닌, 그 자체로서는 아무 물질적 가치나 존재적 의미가 없는, 행위 자체로 완결되는 행위.
하지만 대자(對自)를 대하는 즉자(卽自)로서, 마르셀 뒤샹의 소변기 작품을 보는 감상자로서, 우리는 혼신의 힘을 끌어 모아 모종의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부여 여부는 나의 실존이 걸린 문제다. 하여, “제 한 생애의 목숨이 다해 땅에 떨어진 부질없는 벚꽃잎들이 소녀들의 어여쁜 심성과 서정성, 감수성, 심미감을 통하여 다시 가시 가지 끝에서 ‘벚꽃잎가시꽃’으로 부활하는 이 경지! 분명 예수가 증거한 기적이다, 마법이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영원회귀다!”라고 결론한다.
(한심하고 또 한심하도다. 이렇듯 크낙한 인류 대사가 전개되는 현장에, 그 벚꽃나무 아래 같이 어울렸던, 언제나 대책 없는 머스매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오불관언(吾不關焉), 기껏 꽃 진 자리에 열린 버찌 열매나 따먹으려고 돌팔매질하다 나무 주위 놀던 아이들의 머리통을 깨놓기 일쑤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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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녀들의 또 다른 예술 행위 하나를 기억한다. 그 결과물을 명사로 하여 아리따운 그 행위를 이렇게 이름하자. ‘땅유리꽃’.
그 시절엔 유리가 매우 귀했다. 단단한 구체물인데 시선이 안팎으로 두루 통하다니. 값비싸고 귀한 선진문물의 부속품으로 유리가 우리 일상에 들어 왔다. 이를테면 학교를 비롯한 관공서 창문들, 거울, 안경, 사각등, 호야등불, 고급 가구의 창유리 등등. 유리로 된 물건을 부주의로 깨트리면 그날은 쫓겨나 밥을 굶어야했다.
‘땅유리꽃’의 설치 과정을 설명한다.
① 시골 아이들이 이 바닥, 저 동네를 하릴없이 오다가다―이상(李箱)의 소설 「날개」 중에, 권태와 무망으로 인해 담벼락 앞에서 똥을 누고, 그 똥을 헤작거리며 노는 아이들―유리 조각을 발견한다. 그 당시 어린 아이들은 TV도 스마트폰도 없었기에―아주 초보적인 장난감도 없었기에 손으로 직접 사물들을 자르고 깎고 휘게 만들어야 했기에―아이 손바닥 크기의 유리조각을 구하면 이건 로또 당첨이었다. 명함 하나 크기만 해도 감지덕지다. 어느 쓰레기 더미, 전날 밤 부부 싸움한 집 앞 쓰레기통, 큰물 지난 후의 개울바닥에서 햇살에 반짝! 하고 빛을 퉁기는 물체를 발견하면 사나흘이 행복하다.
② 비정형으로 삐쭐빼쭐한 유리조각을 가능한 한 원형 또는 사각 모양으로, 그리고 모서리는 둥글게 다듬는다. 뾰족한 모서리는 돌판 위에 얹어놓고 다른 돌맹이로 가볍게 톡톡 쳐서 깨트리고, 섬세한 가공이 필요한 부분은 맷돌같은 경도가 높은 돌에 문질러 갈기도 한다. 유리조각 원형 자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모양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국민학교 고학년 형님들, 또는 상급학교 진학은 못했지만 격물치지에서는 한 일가를 이룬 삼촌 급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소문을 듣고 일없는 마을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③ 나뭇가지나 뾰족한 돌로 땅을 파서 작은 구멍을 만든다. 구멍(=홈. ‘갱’상도 방언으로는 ‘굼티’)의 직경과 깊이는 획득한 유리조각의 크기에 달려있다. 유리조각이 크지 않기에 구멍 공간은 기껏 아이 주먹 하나 들어갈 크기? 그리고 굼티의 원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래가 많이 섞여 부스러지기 쉬운 사질토보다는 찐득한 진흙으로 이뤄진 질토 바탕이 좋다.
④ 굼티 내부를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정성스레 다진다.
⑤ 이 굼티 작업을 하는 동안 나이 어린 아랫것들은 따로 임무를 부여받는다. 들판에 이름 없이 피어난 야생화를 채취해오는 것이다. 선별 조건은 첫째, 크기가 크지 않아야 하고, 둘째, 꽃빛깔이 원색 위주로 선명해야 한다는 것. 이 조건에 적합한 종류로는 봄철, 붉은 빛 분홍개미자리, 노루귀, 깽깽이풀, 노란 빛으로는 미나리아재비, 젓가락나물, 개구리자리, 하얀 빛깔로는 홀아비꽃대, 나도물통이, 여름/가을철에는 붉은 빛 고마리, 며느리밑씻개, 산여뀌, 노란 색 쇠비름, 개연꽃, 노랑투구꽃, 흰 빛으론 싱아, 나도하수오, 흰꽃여뀌 등이 있다.(내가 이 야생화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야생화 관련 도감을 참고하였다.)
⑥ 원색으로 붉고 노랗고 하얗게 선명한 꽃대가리들을 굼티 안에 적절히 배치한다. 이 작업에는 전문적인 플로리스트, 또는 유수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문 큐레이터들의 심미안이 필요하다.
⑦ 마지막 작업. 굼티 위에 가공된 유리조각을 경건히 덮고 주위의 흙을 끄러 모아 유리의 가장자리가 적당히 덮이면서 ‘땅속 꽃밭’이 환히 제대로 드러나도록 유리판 위를 정결히 정돈한다. 모인 아이들 모두 제각각 감상과 품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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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날리던 봄날, 허리 굽혀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벚꽃잎가시꽃’을 만들던 그녀들, 그토록 시난고난한 시절에도 인간 본연의 심미감과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어린 나이의 그녀들, 올망졸망 귀엽고 깜찍했던 그녀들, 지금은 어언 모두 70대, 지금에야 에코페미니즘 운운하지만 그때까지도 엄혹한 권력이었던 성리학 찌꺼기, 가부장제의 인습과 억압 속에서 한 목숨으로서의 독립 자존감, 자아 정체성 따위는 남의 나라 이야기, 다들 어느 누구의 딸,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지어미,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할머니로서의 관계망 속에서 희생과 인고로 점철된 한 세상을 살며 오늘까지 허위허위 건너왔을 것이다.
2024년 연말, 그들 모두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기는 한지?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 흐릿한 망막위에 반세기 전 그 시절 그 봄날의 분분한 낙화, 그 꽃잎의 난무(亂舞)가 지금도 어른어른 비쳐 보이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