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목(草木)을 그리며 — 이민홍
세월이 밀어낸
흑백의 기억 끝에서
문득 그곳이 나를 부른다
이제는 걸음을 늦추어
하늘을 보고 흙을 만지며
가끔은 뒤돌아보리라
산천은 말없이 그 자리에
바람은 오래전 이름을 기억하듯
초목 사이를 스친다
마중 나온 강아지의 꼬리
가늘한 염소의 울음
새벽을 훼치는 닭의 목소리에서
잊었던 나를 다시 깨우리라
삼월에는 씨앗을 놓고
익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하늘을 향해 빈손을 펴보리라
푸른 초목을 벗 삼아
계절의 숨결을 듣는
산기슭에 작은 집 한 채
나는 이제 가리라
내 마음이 처음 머물던 곳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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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멀리 가는 것보다
돌아갈 곳을 생각하게 된다.
젊은 날에는 앞만 보고 달렸지만,
이제는 하늘도 보고 흙도 만지며
지나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고 싶다.
산천은 변하고 사람도 변했지만
바람 소리와 흙냄새,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과
마당을 서성이는 강아지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불러낼 것만 같다.
그래서 이 글은
고향을 그리는 노래이면서
잃어버린 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마음의 귀향이다.
더 움켜쥐기보다 빈손을 펴고,
더 높아지기보다 낮은 곳에 머물며
초목과 사계절을 벗 삼아
마지막에는 내가 꿈꾸던 삶의
그림 한 폭을 조용히 그리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이
가장 먼 길이었음을 알면서도
나는 이제 그곳으로 가려 한다.
— 이민홍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