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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1 -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코펜하겐을 거쳐 바르샤바로 들어가다!
5월 9일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의 공항 (Bratislava Airport) 에서 저가항공인
라인에어 비행기 를 타니 13시 05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1시간 45분을 날아서
14시 50분에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 에 도착해야 하는데 딜레이 가 되니 마음이 바쁩니다.
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트랫짓 (정확하게는 트랜스퍼) 구역으로 들어가서는 물어서 SAS 항공 부스
를 찾아가서 이메일로 부쳐져온 e- 티켓과 여권을 내보이니.... 여긴 브라티슬라브의 라인에어
항공사 와는 달리 사전 체크인 여부 따위는 묻지도 않고 너무 간단하게 보딩패스를 발급해 줍니다.
대기실 옆에 맥주 숍 이 보이기로 마침 갈증이 심했던지라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는 맥주 한잔을 시카는데....
여기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이니 유로를 사용하지 않고 덴마크 크로네 를 사용하는데 맥주 한잔이
69 크로네라? 10유로를 주니 72.15 크로네로 환전 이 되는 모양인지 가스럼돈으로 3.15 크로네를 내어 줍니다.
2시간후 16시 50분에 코펜하겐 공항 을 이륙한 스칸디나비아 항공 SAS 비행기도
저가항공인지 크기가 작아 좌석도 협소 한데, 동쪽으로 날아 1시간 20분 만인
18시 10분에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 공항 Warszawa /Warsaw 에 도착합니다.
입국 수속을 하고는 밖으로 나와 100유로를 365로 즈위티로 환전 한 다음 시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택시 를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긴지라 버스를 타기로 하고 살펴보니 153번과 155번이 바르샤바 기차역 으로 가는데,
어느 신사분의 도움을 받아 하나 카드를 사용해 2명분 티켓을 끊으니 1인당 4.4유로 합계 8.8 유로가 나옵니다.
버스는 30분 이상을 달려 시내로 들어가 바르샤바역 에 내렸는데.... 이제 우리가 인터넷으로 에약한
호텔을 찾아가야 하니, 역 안에 인포메이션 을 찾아가서 물으니 컴퓨터에서 지도를 출력 해 줍니다.
인포에서 준 지도 를 들고 인터넷에서 예약할 때 본 호텔 지도 와 또 구글 지도 에서 살펴본 기억을 더듬어서
방향은 잘 잡았는데... 한참 걸어도 호텔이 보이지 않기로 (나중에 보니 도보 29분 거리였는데 20분 정도
걸어서 졸갑증에 물어본 것임) , 어떤 아주머니에게 호텔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고 물어봅니다.
아주머니가 소비에스키? 하며 자신이 잘 안다면서 우리가 왔던 방향 을 가리키는데.... 하도 자신
있게 말하는지라 긴가민가 하면서 다시 되돌아 올라가서 기차역을 지나 주변을 살펴
보았지만, 행인에게 물어보면서 아무리 찾아도 그런 호텔은 없으니 배낭이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이 아주머니가 우리가 종이에 인쇄해서 보여준
호텔 주소는 아예 보지도 않고 그냥 호텔 이름 소비에스키 만 듣고는 엉뚱한 곳을
가리켜 준 것이네요? 하기사 인간은 보고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싶은 것만 들리는 것 일까요?
저 위쪽에도 ‘소비에스키’ 라는 이름을 가진 호텔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되돌아
오다가 조금전에 아주머니를 만났던 장소를 지나서 5분쯤 더 걸어내려
가니 비로소 저만치 보이는게 바로 우리가 찾는 “래디슨 블루 소비에스키” 호텔 입니다.
Radisson Blu Sobieski : Plac Artura Zawiszy 1 Ochota 02-025 Warsaw 은
2인 1실로 이 호텔에서 사흘 밤 을 잘 예정인데.... 총 금액은 Breakfast 포함
해서 우리 돈으로 43만원(하루에 14만원) 이고 폴란드 돈으로 1,500 zł 즈위티입니다.
이 나라 폴란드는 서기 966년 에 게르만족의 동진 에 대항하기 위해 가톡릭 을 받아들여서 피아스트 왕조 를
열었는데, 1385년에 야드비가 여왕이 미개한 이교도인 리투아니아 대공과 결혼했으니 한국과 일본이
합쳐진 것 처럼 이질적인 결함 임에도 불구하고.... 200년간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 은 번영을 누렸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 은 유럽의 지리적 중심부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했으니 16세기 지그문트 1세 때는 폴란드 르네상스로,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를 지나 흑해 연안 까지 진출하고 예술과 문학이 융성하며 코페르니쿠스의 활약도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1473년- 1543년) 는 진리처럼 믿어온 지구중심설(천동설) 의 오류를 지적하고 태양중심설
(지동설) 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을
가져온 폴란드의 천문학자로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를 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중북부 한자동맹 도시 토룬 (Toruń, 독일어 Thorn) 에서 태어나 열살 되던해 아버지
를 잃고 외삼촌 밑에서 자랐으며.....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의 크라카우
(크라쿠프) 로 가 대학에 입학해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 을 공부했고 볼로냐대학의 신학과에 입학합니다.
성직자가 된 코페르니쿠스 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하여 논의에만 몰두하던 스콜라학의 학문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 천체관측과 궤도 계산을 하던 천문가 였으니,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성질에 대한 통념이
변한 것이 없었으니 그의 등장으로 암흑기에서 과학혁명 으로의 길로 나아갈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 으로써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 했는데,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 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으며, 이 도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가 우주의 중심 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 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인간 중심의 지구 중심설 에서 객관적인 입장의 태양 중심설 로의 발상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
적 전환’ 이라고 부르니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이르는 말로 쓰이는데,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 을 주었으니..... 저놈이 마귀에 씌였나?
이탈리아 유학때 플라톤주의와 고대문헌 조사로 태양중심설을 구상 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
오몬타누스가 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핵심적 문제제기가 실린 책 "요약" 을 접하고
자신의 우주 모델에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 1510년에 태양 중심의 천문체계 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고는 "짧은 해설서 Commentariolus" 라는 요약본 형태 원고를 지인들에게 돌립니다.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를 발표하니 우주와 지구는 모두 구형 이며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처럼
지구도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원운동을 할수 있다고 주장했고, 행성을 따로 생각한게 아니라 태양
을 중심으로 한 행성 체계 로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과 큰 차이점을 두었습니다.
1616년 로마 가톨릭교회로 부터 금서 목록에 추가 되었으나 후대 천문학과 물리학이 발전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줌으로써 혁명적 씨앗 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당대에 가톨릭계 는 지동설을 별로 탄압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가톨릭 사제들 에 의해 직접 그의 저작들이 탄압당한 정황들 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론을 규탄한 쪽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맹신하던 교수 들 (상당수가 성직자 임) 이었고,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출간을 40년이나 미룬 것도 교수들의 비난 이 두려웠기 때문이며,
하지만 그의 학설에 매료된 가톨릭계 인사들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서 출판이 이루어지긴 합니다.
하지만 책은 1616년에 가톨릭 금서 목록 에 들어갔으며, 4년후 아홉 문장을 삭제 하는 조건으로
재출판 가능하다는 결정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가톨릭 주교들이 태양중심설(지동설)
을 이단 이라고 선고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는 내용을 정정 해도 여전히
금서로 지정 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니...... 그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 으로 취급된 것이지요?
폴란드 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왕위 계승싸움 때문에 약화되어 스웨덴의 침입 을 받아 점령되었으며
러시아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와의 전쟁에 패해 국토가 3분할 되어 식민지 가 되니
폴란드 라는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고..... 1차 세계대전후 독립했으나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과 소련에 분할 점령 당하여 500만명이 죽는 등 고초를 겪고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합니다.
폴란드는 지도상에서 서쪽으로 수평이동 했으니.... 즉, 동부지방을 소련에 빼앗기고 대신에 소련은 독일 동부
영토를 빼앗아 폴란드에 주니 폴란드인은 재산을 뺏긴 피란민으로 독일령에 이주당하는데, 아시아에서
가정한다면 중국이 미국과 연합해 일본 점령후 한국은 중국의 속국으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중국령이 되고
대신에 중국은 일본 규슈를 빼앗아 한국에 주는 식이니, 전쟁에서 패한 국민은 인간대접 받기는 어렵다는....
가자의 팔레스타인인 들이 사람대접 못받는 현실이 그러하니 결국 전쟁에는 이겨야 한다는..... 반드시 이겨야!
NEWSIS 정혜승 기자에 따르면 “1000년 전 바이킹인이 사용했던 검 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발견됐다.” 는데... 폴란드 북부 브로츠와베크시의 강 에서
굴착 작업 중이던 인부들이 검을 발견 했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보도했습니다.
니콜라스코페르니쿠스대 연구팀이 엑스레이로 촬영한 결과, 검은 서기 950년 이전 제작된 바이킹의 검 으로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진흙 속에 있었는데도 훌륭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는 것이 놀랍다” 고 말했습니다.
검엔 ‘울프베르트 (Ulfberht)’ 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으니 바이킹인들이 사용했던 검의 종류 중
하나로 유럽 전역에서 170개가 발견됐는데, 울프베르트 검은 “역사상 위대한 검 중
하나” 이며 “이 검은 힘과 유연성 이 좋아 바이킹 전사들이 선호했다” 고 데일리메일은 전했습니다.
바이킹 시대에 자유인들은 자신의 무기를 소유 해야 했으니 이때 검은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신분의 상징 으로도 쓰였다는데, 그중에서도 울프베르트 검은
“탄소 함유량과 금속 순도 가 높아서 현대 고고학자들이 당황할 정도” 라고 매체는 전합니다.
화폐는 즈위티 이니 1유로 EURO € = 4.63 PLN zt 이고 1 폴란드 즈위티 = 288원 인데
국내에서 환전하기 어려우니 보통은 유로화로 환전해서 가져가는데.... 크라쿠프
등지에서 환전할 경우에는 기차역 보다는 구시가지에서 환전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교통패스는 바르샤바 패스 24시간용이 7.2 즐로티 이고 바르샤바 1회권은 2.4 즐로티로 버스, 트램, 지하철
모두 같으며, 크라쿠프 1회권은 2.5 즐로티 인데 버스나 트램을 탄후 바로 각인기에 펀칭 을 해야 합니다,
바르샤바 중앙역 Warszawa Centralna 은 외국에서 오는 기차는 모두 정차하나 종착역이 아닌
경우도 있으니 주의해야 하며.... 여기도 시내이기는 하지만 올드타운 구시가지 로
가려면 역 정면의 메리어트 호텔 앞에서 175번 버스 를 타야하며 도보로는 25분 정도 걸립니다.
폴란드 음식으로는 전통 만두 Pierogi~ 가 있으니 Zmiesem(고기만두) 와 Zserem(치즈만두)
로 나뉘고, Golonka(골롱카) 라는 돼지족발 은 기름기가 없으며 40즐로티 정도 하고,
Plackizlemniaczune (감자전), Szasziyk(샤스윅) 에 꼬치구이, 오스취펙(치즈) 등이
있으며, 폴란드 식당의 현지식은 맥도날드 보다 훨씬 싸다는데 내일은 먹어볼수 있으려나.....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보니 무슨 뮤지컬이 나오는지라.... 재미있게 보다 보니 문득 국제신문에 명작 고전산책
에 실린 라블레 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이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탐욕스러운 전제 군주로도 인용
됐으니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1841년 발표한 석판화 ‘가르강튀아’ 가 그런 예다. 루이 필립 1세
를 풍자했다. 관료 부르주아 등에게서 공물을 받은 이 프랑스 왕이 작위와 상을 무더기로 하사하는 내용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2014년 발표한 영화 ‘인터스텔라’ 엔 거대 블랙홀 이 등장한다. 이름이 ‘가르강튀아’.
라블레 소설 서명(書名) 에서 따왔다. 이 책을 읽은 이라면 적절한 명명이라 느낀다. 블랙홀은 무엇이나
흡입하는 공간을 가진 우주 ‘거인’ 이니까. 라블레 소설 속 주인공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거인
이다. 이 작품은 ‘즐거운’ 블랙홀. 독자는 낄낄대며 소설 속으로 무방비로 빨려들지만 저항하지 않는다.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은 지력을 갖추고 왕국을 다스리는 거인 왕과 아들 이다. 그들 가족만 덩치가 산 같고
백성은 보통 인간이다. 이 연작은 두 거인 왕이 태어나 성장하고 죽는 일대기 순으로 얘기를 풀어놓는다.
라블레는 ‘19금’ 풍자로 폭소 를 터지게 하고, 산만한 필체도 보인다. ‘걸리버 여행기’ 를 쓴 조너선 스위프트도
내로라 하는 풍자가 였다. 스위프트는 씁쓰레한 여운을 준다. 라블레는 유쾌하다. 당시 유럽 저자들은 책
도입부에 자기 색깔을 내보였다. 저술 목적도 드러냈다. 라블레는 ‘가르강튀아’ 서문에 “고명한 술꾼,
문란한 환자에게 바친다” 고 썼다. ‘맛난 음식과 신선한 포도주를 진탕 먹은후 시원하게 싸는 게 인생’ 이랬다.
작가는 시대에 반응한다. 16세기 프랑스에 문예부흥(르네상스) 이란 훈풍이 불었다. 한편엔 으스스한 구체제인
화형(火刑) 불길 이 넘실댔다. 누구나 이단·반역죄로 몰려 한순간에 숯덩이 가 될 위험을 안고 살았다. 이럴 때
라블레는 풍자·비판 정신 을 숨기지 않았다. 르네상스는 인문주의로 번역된다. 영어론 휴머니즘, 프랑스어로
위마니슴. 라블레 가슴 속에서 이글거렸던 위마니슴 불길이 펜촉을 통과해 원고지 한칸 한칸을 뜨겁게 달구었다.
당대 종교 권력인 가톨릭을 비판 한 라블레 저서는 여러 번 금서 로 지정됐다. 1543년 3월 소르본대 신학부
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불어판 성경, 칼뱅· 에라스뮈스 저서들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라블레도 몸을 사렸다. 1·2권을 발표할 때 연금술사 이름 같은 ‘알코리바스’ 라는 가명을 저자명으로 썼다.
본명 철자 순서를 슬쩍 바꾼 필명. 저자는 2권 ‘가르강튀아’ 를 낸 뒤 1546년 ‘제3서’ 를 내기까지 12년간
출간하지 않았다. 제3서를 낼 때 라블레는 본명을 썼다. 여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르본대
신학부가 이 책에 또다시 ‘금서’ 딱지 를 붙였기 때문. 그해에 친구이자 출판사 대표인
에티엔 돌레가 화형 을 받아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라블레는 자기 목이 붙어 있는지 자주 만져보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답게 이상향도 제시 한다. 2권 가르강튀아 끝에 나오는 ‘텔렘 수도원’ 이 그것
이다. 플라톤 공동체 처럼 라블레도 유토피아 사회 를 설계했으니 의미심장하다. 여기선
시대를 앞서가는 평등 사상이 번뜩이며 육체와 정신이 균형을 이뤄야 인생이 편안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