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월을 보내는 마지막 주말입니다. 가을의 정점을 향해 가는 시점이기도 하고요. 여기저기 옷 갈아입은 산들이 손짓하고 있습니다. 꼭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산이 없는 곳이 없으니까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 어디를 가도 금수강산 아닙니까? 물론 그래도 가고 오는 즐거움이 따로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거죠. 더구나 대한민국 고속도로 휴게소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니까요. 때로는 관광의 목적지가 되기도 한답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 있습니까? 하기야 여느 관광지보다 아름다운 휴게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거기에 숙박시설은 없는 줄 압니다. 그러니 며칠 묵을 수는 없겠지요. ㅋㅋ
그 동안 한 3년 여행이 어려웠습니다. 비단 해외여행뿐만 아니라 국내여행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나가봐야 마스크로 얼굴 반은 가리고 다녀야 했습니다. 불편한 여행이었습니다. 이제는 대부분 옛날처럼 맨 얼굴 보이며 다닐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마스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코로나는 물론 독감까지 덩달아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말입니다. 달라진 것은 마스크 안 썼다고 도끼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요. 각자 알아서 조심하며 사는 겁니다. 또한 이제 코로나쯤 별 것도 아니다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좀 아프기는 해도 죽지는 않을 자신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ㅋㅋ
뭐 아직은 그다지 쌀쌀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감기는 만병의 시작, 조심해야지요. 건강하게 신나는 주말을 보내기 바랍니다. ^)^
2023년 10월 28일 김종우 목사 드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 : 10)
<플라워 킬링 문>
사랑보다 좋은 게 있다면 뭘까요? 묘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나요? 반대로 사랑을 빌미로 돈을 얻을 수는 없나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교과서 같은 대답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요지경 세상이니까요. 예전에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사랑에 허기진 부자과부를 만나면 돈방석에 앉는다고요. 또 부잣집 딸과 결혼하면부자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랑 잘 만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가 하면 부자라면 상대를 선택하는데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사랑을 생성할 만한 낭만적인 분위기를 맘껏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돈과 사랑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질문한다면 대부분은 일단 돈을 먼저 택할 것입니다. 그가 지금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시작부터 가난을 택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자란 사람이지요. 사실 돈이 없다면 사랑을 하기도 불편하고 어렵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흔히 하는 말 ‘엔포’가 그것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경제력이 없으면 연애도 힘들고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요. 그러니 일단 여유자금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고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랑을 시작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요. 빈 주머니 가지고 감히 연애할 생각이 나겠습니까?
움직이면 돈이 듭니다. 마냥 걸어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굶어가면서 사랑놀이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요즘 차 한 잔 마시려 해도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연애를 기피하는 모양입니다. 딱하지요. 아무튼 세상 살아감에 돈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구든 많을수록 좋아합니다. 돈은 너무 많아서 걱정하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돈이 많은 사람들의 신이 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막힌 길이 열리기도 하고 안 되던 일도 해결됩니다. 사람들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도 부드럽게 변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도 척척 해냅니다. 요물이지요.
전후 제대하고 돌아온 ‘어니스트’는 삼촌이 거하는 곳으로 일자리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삼촌 ‘헤일’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꽤나 잘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언어까지 구사하면서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곳 인디언들은 이전에 백인들에게 쫓겨나서 그곳으로 이주해왔지만 어느 날 그 지역에서 기름이 솟구쳐 나오는 덕에 부자가 됩니다. 얕잡아보던 백인들이 오히려 인디언들의 시중을 드는 격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기름 회사들이 들어서고 그에 따른 노동자들이 들어옵니다. 얼마 안 되는 인디언들은 그들에게 상전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속에서 백인들이 가만있겠는가 말입니다.
어니스트는 삼촌이 내준 차로 택시운전을 합니다. 그리고 인디언 여자 ‘몰리’를 알게 됩니다. 삼촌 헤일이 조언합니다. 몰리의 집안이 대단한 부자라고. 그러니 관계를 잘 맺게 되면 덕을 볼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나저나 어니스트와 몰리는 사랑에 빠집니다. 결국 결혼까지 하고 아이들도 낳아 기릅니다. 어니스트는 돈에 맛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삼촌의 적극 조력자가 됩니다. 몰리의 집안을 넘겨받을 계획을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되는 일입니까? 한 집안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상속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 상속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독차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주변 관계되는 가족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몰리의 엄마가 죽고 다음으로 언니가 죽고 이어 동생도 죽습니다. 병으로 또는 알코올중독 등등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몰리마저 당뇨병에 걸려 허약해지고 있습니다. 비싸게 약을 구해서 치료를 하고 있는데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악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처리하는데 어니스트가 개입된 것이 드러납니다. 사실 큰 죄책감도 없이 삼촌의 말만 따라하면서 끌려들어간 셈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갈등합니다. 이게 옳은 일인가 그거죠. 결국 이 모든 일에 삼촌이 개입되어 있음을 증언하기로 합니다. 삼촌의 협박, 회유도 소용없게 됩니다. 더구나 몰리의 약에도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맥이 풀립니다.
악은 악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악은 선의 가면을 쓰고 활동합니다. 사람들은 그 가면을 진실로 보며 따라갑니다. 환호하고 지지합니다. 얼마나 가증한가요? 그것이 악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간해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다만 겉으로 나타나는 선을 보며 손뼉을 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노동 없는 횡재가 얼마나 위험한 복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인디언 족장은 앞을 내다보며 걱정합니다. 우리 씨가 소멸하고 있다. 부를 탐내어 인디언과 결혼합니다. 부도 사라지고 씨도 사라집니다. 자유로운 총기 소지는 지금도 말썽이지만 그들의 문화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 대가를 계속 치르고 있습니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을 모았습니다. ‘꽃을 죽이는 달’ 인디언들이 키가 큰 나무들의 그늘이 작은 나무들을 숨막히게 하여 죽인다고 5월을 그렇게 부른답니다.
물 가운데 하늘이 있다고요?
오늘은 ‘하늘’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요,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창 1 : 6 - 7 “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한자로 어렵게 ‘궁창’ 이라고 하였는데 쉽게 우리말로 그냥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물 가운데 하늘이 있다’는 말이고 우리가 보는 하늘에 물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수증기나 구름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만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흔히들 구름 아래의 하늘과 구름 위의 하늘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유식한 척하여 대기권 안의 하늘과 대기권 밖의 하늘로 구분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였더니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세계 구분의 하나인 하늘. 원래 금속판을 두드려 얇게 늘려 편 것을 의미하는 말로, 별들과 행성들이 매달려 있는 둥근 천장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나 강 등의 아래의 물과, 수증기로 올라가 비나 눈 등으로 내릴 위의 물을 구분하는 하늘이다.>(인터넷 사전)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과학적으로 우리가 아는 한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하늘이 왜 중요합니까? 신자들이 바라는 나라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하늘나라’라고 합니다. 물론 지금 여기 창세기에 말씀하는 궁창 곧 하늘은 그 하늘과는 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에 물이 있다니 아무래도 하늘의 물은 구름이나 수증기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태 그 이상의 설명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마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 창세기를 세상 창조로만 보았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해 달 별 창조가 넷째 날에 나오는데 첫째 날 이미 빛이 있으라 하셨다는 이 말씀에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 빛이 물리적 빛이라기보다는 추상적 상징적인 빛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늘은 그렇게 볼 수 없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답답해도 시원한 답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하늘’과 ‘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본 사람이 있나요? 이런 유머가 있지요.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선생님이 기대한 답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켜야 해요, 예수님을 믿어야 해요,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 잘 들어야 해요 등등입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죽어야 간다니 왠지 서글퍼집니다. 죽기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태여 소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요? 어차피 죽을 테니까. 그렇습니까? 아무튼 죽어야 가는 천국이라면 차라리 안 가도 좋으니 죽지 않게 해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성도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죽어서 천국에 가겠습니까, 천국에 가지 않고 죽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대답을 듣는다면 우리 하나님이 서운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천국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천국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바에는 천국에 가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서 ‘나는 지옥에 갈 거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군대 훈련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지옥훈련이라고 이름이 붙은 유격훈련입니다. 그리고 유격훈련이라고 하면 ‘피티체조’라는 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름이 체조이지 소위 기합입니다. 정말 힘들지요. 그렇게 힘들어도 군대에서 확실한 것은 휴식 시간입니다. 50분만 지나면 10분간의 휴식이 있습니다. 그래, 조금만 참자, 곧 휴식 시간이 다가온다, 이 바람이 있기에 그 힘든 훈련의 시간도 지나갑니다. 지옥을 가보지는 않았어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계 14 :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그곳에는 쉼이 없답니다. 그래서 지옥이겠지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지옥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없기를 바랍니다. 천국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천국은 가보기 전에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되어 있습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그러므로 이 비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아는 사람은 천국 백성이고 모르는 사람은 해당이 안 되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모두 해당되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일단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보겠습니다. 마 13 : 47 - 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천국을 말씀하시며 바다에서 물고기 잡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유지요.
그까짓 비유, 모른다고 대수냐?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막 4 : 11 - 12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무슨 뜻입니까?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한 마디로 외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인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 말은 곧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복음’일뿐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하고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런 단순한문제가 아닙니다. 그럴진대 예수님이 구태여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천국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천국을 말씀하시는데 바다와 그물과 물고기가 등장합니다. 모두 비유지요. 그러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찾아야 합니다. 우선 ‘바다’에 대해서 알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바다를 비유로 사용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계 21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바다가 없어집니다. 우리 복음송에 보면 참으로 이상한 가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알고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가사는 물론 성경에서 취한 것입니다. 사 11 :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합 2 : 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다도 엄청난 물의 집합체입니다. 그런데 무슨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말입니까? 이미 물바다인데 또 무슨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말인가요?
그러면 이 바다에 무엇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마 13 : 47 - 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렇습니다. 각종 물고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 13 :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그 바다에서 짐승이 나옵니다. 바다에는 물고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짐승도 있군요. 그런데 해괴망측하게 생겼습니다. 머리가 일곱에 뿔은 열이나 됩니다. 머리와 뿔이 서로 짝도 맞지 않습니다. 이런 괴상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답니다. 그러면 이 바다는 도대체 무슨 바다입니까? 지구상에 이런 바다가 있나요?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짐승의 정체가 나옵니다. 계 12 :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이 짐승은 바로 용입니다. 그런데 용이 무엇입니까? 9절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용 또는 뱀, 그는 다름 아닌 사단 마귀입니다.
이제 바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창 1 : 6 -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조 둘째 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궁창 곧 하늘을 만드신 이야기지요. 그런데 하늘 위의 물이 있고 하늘 아래의 물이 있습니다. 위의 물을 상수라고 한다면 아랫물은 하수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물을 사용합니다. 상수를 사용합니까, 하수를 사용합니까? 우리가 먹고 사용하는 물은 상수라 하고 버리는 물을 하수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수는 먹을 수 없는 물입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물이지요. 9 - 10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천하의 물’ 곧 하늘 아래의 물이 모인 곳을 가리켜 ‘바다’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 아래의 물 곧 하수가 모인 곳을 바다라 하였습니다. 즉 ‘바다’는 먹지 못할 물이 모인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물을 먹으면 죽습니다.
이제 물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4 :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세상에 이런 물이 어디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이 말씀을 듣고는 대뜸 대답합니다. 15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도대체 이 물이 어떤 물입니까? 이 물이 물입니까? 신 32 : 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하나님의 교훈 곧 말씀은 비요 이슬이고 단 비입니다. 모두 물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요 17 :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 백성은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아무튼 물에도 먹지 못할 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아담이 먹지 말아야 할 물을 마셨습니다. 창 3 :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것은 뱀이 하와를 미혹하려고 한 말입니다. 이 말을 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물을 마셨습니다. 즉 뱀의 한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한 마디로 거짓말입니다. 여기 뱀이 뱀입니까? 계시록에서 보았습니다.(계 12 : 9) 뱀이라고도 하고 용이라고도 하는데 마귀 또는 사단이라고 하지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뱀 곧 사단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말 곧 비진리를 따른 것이지요.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실을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곧 진리를 먹어야 삽니다. 하나님 말씀이 영생의 말씀입니다. 반대로 마귀의 말을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게 먹어야 할 물인지 먹어서는 안 되는 물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먹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목마르다고 해서 독극물을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바닷물을 마시겠습니까? 아무리 목이 탄다고 해도 바닷물을 마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먹기 전에 검사해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말씀을 그렇게 먹고 있습니까? 의례히 진리라고 믿고 받아먹고 있지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처음 세상에 세우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누가 나타납니까? 뱀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였습니다.
오늘날 마귀가 어디에 나타납니까?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에 나타나서 스스로 하나님의 종임을 자처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 백성을 미혹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그의 하는 말은 하나님 말씀보다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창 3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습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이지요. 그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고, 하나님 말씀이 아닌 마귀의 말이고, 진리가 아닌 비진리입니다. 우리가 그 말을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십니다.
사단 마귀인 뱀 곧 용이 어디서 올라옵니까? 계 13 :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이 짐승이 용이라는 사실은 계 12 : 3절에서 보았습니다. 이 용이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하니 이 바다는 곧 비진리의 세상입니다. 계 17 :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많은 물’이라고 하였으니 곧 바다입니다. 거기에 음녀가 앉아 있습니다. 이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데 바로 용을 타고 있는 것입니다. 3절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이마에는 바벨론이란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바벨론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나라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한 나라로 대표되는 것이지요.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대조하여 사단이 주관하는 세상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곳이 바다입니다.
처음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을 만드십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지요. 창 1 :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이로써 물이 둘로 나뉩니다. 하늘 위의 물(천상수)과 하늘 아래의 물(천하수)로 나뉘지요. 먹어야 할 물과 먹지 못할 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로 나뉜 것입니다. 비진리가 모인 곳이 바다가 됩니다. 9 - 10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들입니다. 물고기도 비유입니다. 마 4 :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사람을 물고기로 비유한 셈이지요. 그런데 그 물고기에는 좋은 것이 있고 못된 고기가 있습니다. 마 13 : 47 - 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사람을 모으는 그물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을 그물처럼 던집니다. 그런데 그 그물에 걸려서 들어와도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서도 나뉘는 것이지요. 교회 들어왔다고, 예수 믿는다고 무조건 천국행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중에 못된 고기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께 ‘주여, 주여’하고 부르짖는 것을 보니 분명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라다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3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말씀을 들으면 우선 말씀을 분별해야 하고 진리의 말씀이면 좋은 밭이 되어서 그 말씀을 잘 따라 인내로 결실해야 합니다.(눅 8 : 15)
마지막 때는 노아 때와 같다고 합니다. 다시 홍수로 뒤덮여 바다에 엄몰될 것입니다. 일단 홍수가 발생하면 제일 큰 문제가 바로 식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물 천지가 되었는데 정작 먹을 물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진리의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세상천지 교회도 많고 말씀도 홍수가 날 지경으로 많은데 정작 먹을 말씀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원하기만 하면 24시간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 하나, 우리는 진리의 말씀, 그물에 잡혀서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말씀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 그것부터 분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다 해도 헛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별이 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