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People-모두랑의 추억
돌이켜보니 어언 4반세기 세월이 흘렀다.
내 나이 40대 초반으로,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살던 시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거기에 이른 내 삶의 이력을 짚어본다.
1973년 10월 1일 국가공무원 9급 검찰서기보시보로 대검찰청 총무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그 당시에는 청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북아현동에서 자취방을 하나 얻어 살았고, 1년 뒤 지금의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전신인 서울지방검찰청영등포지청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하숙을 했고, 1978년 6월 3일 결혼하고 나서는 양천구 신정동에서 방 1칸 전세를 살다가, 아내가 양품점을 내겠다고 해서 가게 딸린 방 1칸 월세로 옮겼다가, 연탄가스를 맞자 죽을 고비를 넘기고는, 방 2칸 전세로 옮겼다가, 맏이를 낳고는 제대로 살 집을 찾아 간다는 것이 안양 석수동 13평짜리 주공아파트를 생애 첫 내 집으로 마련했고, 아내가 둘째를 잉태하면서 그 둘째가 태어났을 때 아내를 도울 손길이 필요해서 서울 구의동으로 단독주택을 얻어 이사를 했고, 한 번 더 평수를 늘려 이사를 했다가, 그리고 두 아들의 먼 미래를 생각해서 제대로 된 학군을 찾아간다는 것이 바로 그 목동의 신시가지 아파트 6단지였다.
검찰조직에서의 내 계급도 올라, 그때는 6급 국가공무원인 검찰주사의 신분으로 대검찰청중앙수사부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밤샘 수사를 하느라, 제 시간에 귀가하지 못하는 날들이 숱했고, 몇 날 며칠을 집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내가 속옷을 챙겨서 서소문 대검찰청 청사까지 나를 찾아오고는 했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활기찬 삶을 살 때가 바로 그때 그 시절이었다.
검찰조직 내에서도 말단을 상징하는 ‘주임’이라는 호칭에서 벗어나 책임자를 뜻하는 ‘계장’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여서, 그때로 좀 잘났다는 주위 친구들 보기에도 내 신분이 부끄럽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회에 얼굴을 내미는 횟수도 늘어났고, 중학교 동창회에서는 재경 총무에 부회장을 거쳐 회장의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부르주아지 운동이라고 비난을 받던 골프까지 입문을 해서, 그때까지 즐겨하던 운동인 테니스에 별 재미를 못 붙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집안에서도 맏이로서의 역할을 다해서, 피를 나눈 내 형제자매들뿐만이 아니라, 삼촌에 고모에 처가에 사돈의 팔촌까지 섭섭하지 않게 두루 챙기던 시절이었다.
주위 모두를 하나로 엮어내는데 내 총력을 다 했다.
더해서 한 동네 사는 이웃들까지도 챙겼다.
마음으로도 챙겼고, 물질적으로도 챙겼다.
나만 그리한 것이 아니다.
아내도 남편인 내 하듯, 주위 모두에 대해 온갖 정성을 다 했다.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감사해 하는 그 마음 하나였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마음의 낭비이고 물질이 낭비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시절에 아내와 함께 한 네 친구가 있다.
원래는 여섯이었는데, 하나는 남편이 큰돈을 버는 전문 자격사임에도 베풂이라고는 하나 없이 그저 자기 잘난 척을 하다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고, 또 하나는 내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친구와 이혼하면서 또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남은 아내와 다른 네 친구가 늘 어울리던 곳이 있었다.
목동 6단지 건너편의 ‘모두랑’이라는 생맥주 집이었다.
나도 숱하게 그 생맥주집을 드나들었다.
‘모두랑’이라는 그 이름 자체에서 느끼는 정감어린 운치 때문이었다.
500cc 시원한 맥주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치기도 했지만, 때론 얼굴 붉혀가며 부부싸움을 한 판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랑의 추억’을 만들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내의 친구들만 그 집을 드나든 것이 아니다.
누군가 나와 아내를 만나겠다고 하면, 꼭 그 집으로 찾아오게 했다.
언뜻 기억에 그곳에서 가까운 이화여자대학교의과대학 부속 목동병원 치과과장인 내 중학교 동기동창 김명래 박사도 소속 의사들과 같이 그 집을 찾은 듯하다.
검찰수사관 후배로 지금은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수사과장으로 있는 김승현 검찰수사서기관은 그 즈음에 이화여자대학교의과대학 부속 목동병원의 여자 의사와 교제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된 그 만남의 장소도 거기 ‘모두랑’ 생맥주 집이었다.
그렇듯, ‘모두랑’ 생맥주 집에 쌓아놓은 추억은 한둘 아니다.
바로 그 추억의 ‘모두랑’ 생맥주 집에서 어울리던 아내의 친구 중 하나가 아들 장가보내는 혼사가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인 2015년 2월 7일 오전 11시의 일로, 서울 중구 필동 남산 자락의 라비두스 예식장에서였다.
“영상 좀 찍어주세요. 서울법대를 나온 아들이 나이 서른여덟이 된 이제야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 엄마가 얼마나 기쁘겠어요. 당신 사진 찍는 것 좋아하시니, 그 기쁜 순간을 영상으로 찍어서 선물해줬으면 해서요.”
혼사가 있기 며칠 전부터 아내는 이날의 혼사를 영상으로 남겨달라고 내게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그럴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늘 아내에게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해주던 친구였고, 또 감사할 줄 아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한 말이 이랬다.
“당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