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
11: 1-10
Ⅰ. 섭리하시는 하나님(1-3)
느브갓네살 왕이 꿈에 본 사람모양의 우상에 대하여 다니엘이 해몽하였습니다.
머리의 정금은 바벨론시대 가슴과 팔의 은은 바사시대 배와 넓적다리의 놋은 헬라시대 종아리의 철은 로마시대 발과 발가락의 철과 진흙은 로마시대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시대 뜨인돌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하나님의 왕국시대임을 정확히 해석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인류 역사를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데 하나님이 해방시키시고 종살이의 품삯을 받아 갖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때 받은 은금패물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계획과 섭리하게 되어진 일입니다. 이처럼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선민의 영광입니다.
우리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이 됩니다.
Ⅱ. 개입하시는 하나님(4-6)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아담을 만드시고 구체적으로 그의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먼저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관리하는 일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만들어 아담과 짝지어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한 선악과 사건 후에 가죽옷을 지어 입혀 메시아의 구원을 약속 하셨고 아벨이 죽은 후에 아벨 대신에 셋을 주어 믿음의 대를 잇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은 아담에게 영광이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여호와께서 밤중에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애굽은 선민에게 고난의 현장이요 애굽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선민을 구출하시려고 애굽에 대한 심판에 직접 개입하십니다. 이 사실은 선민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Ⅲ. 구별하시는 하나님(6-10)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양을 제물로 바칠 때 아무것이나 드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제물이 될 양은 흠이 없고 살지고 색깔이 순수한 것으로 무리 가운데서 구별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로 구별해 놓은 양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만민 중에 선택된 백성을 성민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백성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겨야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들이 노예로 삼아 자기들을 위하여 혹사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죽이시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을 철저히 보호하사 구출 하신 반면에 애굽인에게는 전무후무 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즉 애굽이 재앙을 당할 때 선민은 안전하였습니다.
이렇게 구별하시는 하나님은 선민(우리)의 영광이 되십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출 11: 1-10
대부분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공연을 감상하는 자세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입니다. 바울을 일찍이 말씀을 통해 설교듣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기 욕심을 따를 것이며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교사들의 말을 들으려고 그들에게 모여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3-4, 현대인의 성경)
예레미야 시대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평강하다 평강하다'만을 외치며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었을 뿐이지 결국은 멸망이었습니다. 우리는 설교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설교 방송, 설교 테이프, 설교집, 인터넷 설교 수많은 설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설교의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루한 것같고, 어나운서 같은 듣기 좋은 음색이 아니고, 개콘처럼 즐겁지 않으며, 대형 뮤지컬처럼 감동적이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 문을 열고 아멘으로 화답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10번째 재앙에 대한 예고입니다. 하나님께서 길고 자세하게 예고합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아홉 번이나 기대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홉 번이나 기대한 것을 이루지 못하면 대부분 사람은 낙심이 됩니다. 특히 아홉 번째는 바로가 모세에게 떠나라고 했습니다.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 다시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40세 때처럼 자신의 혈기로 나아간 길도 아니고 80이 되어 하나님께서 불러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나아간 길입니다. 그러나 아홉 번씩이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되면 낙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분문에는 낙심이라는 말도 냄새도 나지 않지만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약속 붙들며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잡았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약속붙들고 사명을 감당하지만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여,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신앙인들은 이 땅에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때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은 반듯이 이루어질 때가 있으니 약속 붙들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1-3). /하나님의 때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낙심합니다. 특히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모세였다면 낙심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홉 번 시도했는데 아홉 번 실패했습니다. 약속 믿고 교회 건축을 시작했는데 아홉 번 실패했습니다.
저는 심하게 낙심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홉 번이 아니라 두세 번만 연속 실패해도 쉽게 낙심합니다. 교회 건축을 한다고 하니까 10여년 동안 새벽기도회를 모시고 다니며 기도했던 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저는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더 열심히 기도해 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했습니다. 무슨 약속을 했는지 출애굽기 3장 20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출 3:20-22)”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 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이나 쳤는데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에게 은혜를 입어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 믿고 위험을 무릅쓰고 바로에게 나아가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아홉 번이나 재앙이 내렸는데도 애굽 사람들이 재물을 주며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바로 앞에 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기 전에 모세에게 임하셔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야.”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정령 다 쫓아내리니”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합니까? 강조점이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앞으로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린 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홉 번째까지 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1년이나 새벽기도회를 나왔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홉 번이나 전도했는데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잘해 주었는데 떠났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계속 실패만 다가온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마지막 한 가지가 더 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스스로 여러 번은 두 번이라고 다섯 번이라고 아홉 번이라고 기준을 삼고 그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수는 그 여러 번이 열 번이었습니다. 이루어질 때까지였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다시 말씀합니다. 백성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 말을 들으면 황당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출 11:3)”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노예로만 보던 사람들입니다. 멸시하고, 조롱하고, 핍박하고, 자신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등인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애굽 백성들이 노예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의 필요를 따라 극진히 대접해 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세를 어떻게 본다는 말입니까? 아주 위대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모세를 더 무서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권위보다 더 권위 있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심히 크게 뵈었더라”라는 것 입니다.애굽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바로가 여러 번에 걸쳐 모세 앞에 용서를 구하며 재앙을 중지시켜 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입니다(10:16, 17). 하나님께서 "너로 바로에게 신(神)이 되게 하리라" (7 : 1)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결국 대적자들이 인정해 주고 무시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인정해 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개 미디안 목동에 불과했던 모세, 살인자 도망자인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세의 말을 듣고 은금 패물을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결국 나올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장 35-3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출 12:35-36)” 이것은 이미 출애굽할 것을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해 주었는데 그 약속을 하나님이 성취시켜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4을 보세요.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4)”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이루어집니까?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민족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자주민이자, 마치 전쟁의 승리자처럼 많은 재산과 명예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 붙들고 일하면서 기대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야 정령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은 결국 보상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주십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들이 하는 선한 사업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들이 품고 있는 가족 구원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들의 비전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은 내 능력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에 약속 붙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4-8)./자신의 무능력
사람이 낙심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입니다. 낙담하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없구나, 나는 별 수 없구나.”라고 포기합니다. 낙담이란 담력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낙망합니다. 소망이 떨어져 버립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꿈을 잃어버리고 포기해 버립니다. 나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아홉 번에 걸쳐 시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안 된다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바로는 아홉 번이나 시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주기는커녕 자신 앞에 나타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경고합니다. 자신의 무능력 앞에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애를 쓰지마 능력부족을 늘 느낍니다. 기도할 수 밖에 없어 기도하지만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장로님 건물 문제로 수년동안 기도했습니다. 좋은 결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이제 민족 해방은 물 건너 간 일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 번만 더”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이제까지 안 되었는데 또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낙심하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출 11:4)” 바로에게 담대히 나아갑니다.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재앙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네가 나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한 간접 재앙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재앙이 어떤 재앙이라는 말씀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왕의 장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감히 누가 바로의 후계자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바로가 모세를 죽이기 전에 왕의 후계자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백성의 장자, 몸종의 장자까지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너는 나 만나면 죽인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 당신의 장자를 당신 백성의 장자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가축의 처음 난 것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생축'이란 그들의 재산입니다. 종교적인 성수(聖獸)로 여겨져 사육되고 보호받던 모든 종류의 동물입니다. 결국 애굽의 종교와 경제와 문화 전반에 걸친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전무후무한 부르짖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고역으로 탄식하였지만 이제 애굽 백성이 슬픔으로 울부짖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개 한 마리도 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위에 가장 민감한 것이 개인데 애굽의 큰 곡성과는 완전히 상반되게 이스라엘 각 집에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고요한 평온만이 깃들 것이기 때문에 개조차 조용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바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보호하신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신하 앞에서 모세는 어떤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서 내게 절하며”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3절에서 모세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에게 심히 크게 뵈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실제적으로 모세 앞에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완전히 굴종하며 예의를 갖추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세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할 것이고 신격화 되었던 바로의 명예가 처절히 추락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시하고 비난하고 조롱했던 사람들이 모세 앞에 무릎을 끓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모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 : 10)라고 했던 모세가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능력 없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힘이 없다고, 지능의 부족하다고, 재물이 없다고, 건강치 못하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말을 사람들이 들어 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족하고, 변두리 인생같고, 연약한 것같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 주시면 위대한 사역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약속 붙들고 나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의 능력을 행함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만듭니다. 약하다고 부족하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어부입니다. 무식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쓰시니까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니 그는 메시야의 계보에 들어갔습니다. 야곱은 여러차례 사기를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를 붙들어 쓰니까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한갓 목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받는 성군이 되었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자식도 없이 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니까 예수님의 족보에 든 여인이 되었습니다. 폐품도 예술가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인 "황소의 머리"도 자전거의 좌석과 손잡이로 만든 것입니다. 이
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전 영국 런던 다리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한 노인이 바이올린을 켜며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한 외국 사람이 지나다보니 그 노인이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해 그 노인에게 바이올린을 좀 만져보자고 했답니다. 그렇잖아도 손이 시렸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낡은 바이올린을 그에게 건네주었는데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순간 행인들의 발길은 멈췄고 한 푼 두 푼 노인의 모자에는 던진 돈이 수북하게 쌓여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고 군중 속에서 “파가니니다! 파가니니!”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이태리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였답니다.
똑같은 악기이지만 누구의 손에 쓰임받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집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부족함도 은혜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부족함을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라고 고백했습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속 붙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9-10)/방법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일하다가 때때로 왜 낙심합니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원치 않았습니다. 원수들이 다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박 넝쿨 밑에서 낙심되어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워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아홉 번이나 재앙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로가 계속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도 모세는 아홉 번까지 계속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약속 붙들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바로의 마음은 강퍅합니다. 자녀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을 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녀들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해도 안 되는 구나, 별수 없구나, 포기할 수밖에 없구나.” 모세도 기대했을 것입니다. 두 번 세 번하면 바로의 마음이 변하여 민족을 내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 번이나 재앙이 내렸는데도 여전히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고 이제는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밤에 바로의 장자를 죽인다는 경고를 하는데도 모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정도면 들을 줄 알았는데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애굽 땅에 나의 기사를 더하리라.”라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이 약속한 기적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바로가 이렇게 재앙을 당하면서 이스라엘을 보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기사 즉 지금까지 내려졌던 아홉 재앙 뿐 아니라 최종적인 재앙 열번째 재앙을 내렸는데도 바로의 마음이 강퍅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은혜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유기해 놓았기 때문에 강퍅한 대로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호렙 산 소명 사건 이후 근 6개월 이상 지연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바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당장이라도 출애굽이 가능했으나, 그토록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푸신 이후 출애굽을 시킨 것은 분명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출애굽기 9장 16절을 보세요.
“네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9:16)” 여러 차례 바로가 징계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10장 2절을 보세요.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10: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확립시키고 후손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을 초토화시키고 결국 광야 생활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 창세기 3장 15절부터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적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10번째 재앙이 없었다면 유월절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최종적으로 유월절 어린양에게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셔서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형이 구약에서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유월절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7)”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의 모형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성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결국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될 예수님께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내 방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끔 물이 동하는데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 나았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가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치는 방법이 물에 들어가야만 낫는 줄 알았습니다. 그 방법으로 낫지 못하니까 실망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 병자는 말합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 그러나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물에 들어가는 방법이 아니라 말씀 한 마디로 치료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내 방법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가 원하는 방법으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교인들이 목회자가 자신의 방법과 다르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목사님이 유능해야 부흥된다고 생각하면 우리 목사님이 유능하지 못하니까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님 한 분 한 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사업이 사장님이 무능해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원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업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그 과정을 꼭 필요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입덧도 생명을 출생시키는 과정입니다. 수술을 받는데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통도 치료의 과정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단 두 차례 재앙으로 부드러워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10번째까지 경고했는데도 여전히 강퍅한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작은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 계셨답니다. 열심히 사역을 하였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웠고 진리에 대해 적대적이었답니다. 목사님이 섬겼던 기간 동안 회심하거나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낙심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 중 헌금 쟁반이 돌려지고 있을 때, 한 어린 소년이 쟁반을 바닥에 놓고는 일어서서 그 쟁반 위로 올라섰답니다. 드릴 헌금이 없어 자신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했답니다. 쟁반 위에 올라섰던 소년이 바로 181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간 최초의 선교사 보비 모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내 방법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실을 맺어주실 것입니다(갈 6:9).
우리는 내 방법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방법을 기대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약속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 3:13)”
구원을 위한 준비
출 11: 1-10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내어 아홉 번이나 그들을 내보내라고 하셨지만 바로의 마음은 얼마나 완고한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열 번째 재앙을 준비하셨고, 그 재앙으로 애굽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것은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가지려고 고집을 부리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서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니까 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게 아들을 주어 큰 민족을 이루고, 그 민족으로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만들어주신 백성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지 바로의 백성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로 붙들려 온 것이 아니고, 전쟁에 패해서 잡혀온 사람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애굽에 7년 흉년이 있을 때에 그 심각한 기아에서 애굽 전 국민을 구원해준 공신의 집안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존경하고 보호하고 도와주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억류하고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쟁 한번 하지 않고, 화살 하나 쏘지 않고 엄청난 인원을 노예로 삼아서 오래 오래 부려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내 백성을 내 보내라고 하셨지만, 바로는 여호와가 대체 누구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내어 놓지 않는 바로를 대항하여 능력으로 싸우시어 그들을 파멸케 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거듭 말씀하셔도 마음이 굳어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대적이 되시어 그와 싸우십니다. 그리고 그를 파멸시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어리석게도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가 소유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적이 되었고 결국 철저하게 망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11장에서 13장까지 석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재앙의 준비와 시행, 그리고 결과로 얻은 구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을 향한 결정적인 재앙인 열 번째 재앙은, 그들에게는 멸망의 재앙이었지만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는 구원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건으로 두 가지의 일을 이루어 내시는 분입니다. 본11장은 열 번째 재앙의 서론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그 예고는 다섯 가지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1. 이번 재앙으로 모든 애굽 사람의 장자가 다 죽는 다고 하십니다.
1절에 보면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고 하셨습니다. ‘이제 한가지 재앙’ 이라는 말은 ‘더 이상의 재앙은 필요 없다.’ ‘이것은 마지막 재앙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 한 가지 결정적인 재앙은, 그들의 장자를 모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중에 애굽인 가운데 들어가셔서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들을 치되 바로의 장자로 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애굽 전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이렇게 예고하신 하나님은, 12장 29에서 보면 말씀하신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그들의 장자만 아니라 그들의 짐승이 첫 새끼까지 다 죽이셨습니다. 첫 아들, 첫 새끼는 한 마리도 피해가지 못하고 철저하게 죽었습니다. 이유는 바로가 자기 것이 아닌 이스라엘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 죄입니다.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 내어놓아야 하는 것을 가지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사람은,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과 싸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결국 철저하게 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 이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한 명도 죽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사람과 너희 사이에 구별하는 줄 너희가 알리라" 7절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동네는 집집마다 초상이 나서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별별 기가 막힌 사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사대독자 집에서 신부의 나이 사십에 간신히 아이 하나를 얻었다고 그렇게 귀하게 여겼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장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대가 끊어졌습니다. 얼마나 난리가 났겠습니까? 내일 결혼할 신랑이 장남인지라 갑자기 죽어버리자 신랑의 가족들은 통곡을 하고, 신부는 망연자실 실의에 빠져 있다가, 자기 아버지와 큰오빠도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게 웬 난리입니까? 집집마다 초상이 났으니 문상 올 사람도 없었고, 자기네 가족 장례도 감당을 못하는 형편이니, 남의 집 장례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재앙은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거역하고 도전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사망의 재앙이 휩쓸고 가고 있는 중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너무 고요하여 개들도 짖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시는데 이스라엘을 죽게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백성을 넘어서 당신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권세입니다. 패배할 수 없는 권세,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고 영광을 얻을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녀가 됩시다.
하나님은 왜 하필 장자를 죽이셨을까요? 그 뜻 전부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라는 것입니다. 출 4:22에『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언하신바 있습니다. 믿는 사람 중에서 이스라엘은 장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도전하는 애굽의 바로와 싸우셔서 승리하시고 대적의 가장 중요한 사람인 장자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장자는 지키심으로 당신이 승리 하셨음을 만 천하에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이 하나님을 과연 당할 수 있을까요? 그 누구라도 하나님과 다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들은 체 하지 않으면 마음이 강퍅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것을 달라고 하실 때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날,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물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영광,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감사,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내가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과 싸우자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것을 분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날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쫓아 낼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그렇게 강퍅하던 애굽 왕은 열 번째 재앙으로 장차 왕이 될 아들인 황태자까지 잃고 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된서리를 맞은 들풀처럼 낙담 되어서, 어떻게 하든지 저 이스라엘을 당장 내어 보내야만 우리가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이스라엘을 긴급히 쫓아 보낼 것이라는 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사를 움직이시는 하님의 예고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다가 온갖 매를 다 맞고서야 결국 풀어주는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참 딱한 일입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말씀을 순종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가 처음에 기적을 보았을 때나, 두어 번의 재앙을 만난 뒤에라도 즉시 항복했다면 왕의 체면도 그렇게 손상되지 않았을 것이고, 국력도 손상이 없었을 것이며,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남았을 텐데, 바로는 맞을 매 다 맞고서야 항복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지난 주 심방하면서 한 가정에 갔는데 한때는 사업도 잘되고 잘 나가다가 사업도 무너지고 몸도 병들어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갔었습니다. 이제 겨우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가정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보았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그때 목사님이 하라 하시는 일을 했어야 하는데 순종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뒤늦은 후회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희망이 있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의 실패로 신앙의 기초가 든든해졌으니 이제 다시 일어서고 하나님의 바른 일군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매를 맞기 전에 아버지가 회초리를 드는 모습만 보아도 벌벌 떨며 울면서 잘못했다고 비는 아이는 매를 덜 맞고 도리어 사랑을 입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만 부리는 아이는 매를 맞게 되고, 매를 맞으면서도 잘못했다고 빌지 않는 아이는 더 맞게 되고, 성격도 삐뚤어집니다. 그래서 히12:5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경계를 무겁게 듣고 두려움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됩시다.
4. 그날에 은금 패물을 얻어가지고 나오게 되리라고 예고하십니다. (2)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자기네 노예처럼 되어 노동하던 일군들을 몸만 내보내는 것도 아까워서 못 보낸다고 그렇게 버티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과연 이스라엘에게 패물을 주면서 나가라고 할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그들이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제는 이스라엘이 보기도 싫어졌을 것입니다. 그들을 부려먹을 때는 정말 좋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세가 나타나더니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라고 했다면서 당장 해방시켜달라는 겁니다. 그들을 내보내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궂은일은 이제 누가 합니까? 그래서 안 보내려고 그동안 버텼는데, 귀한 장남들을 하루아침에 다 잃고 나니까, 이건 손해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이라도 살려면 그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들을 조금 더 붙들어 두었다가는 남아 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달라는 것을 다 주면서 제발 빨리 나가달라고 애원하게 된 것입니다.
12장 35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사람에게 은금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 24:35에『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좀 너무한 것 같지 않습니까? 자식이 죽어서 통곡하고 있는데, 위로금을 주고 오지는 못할망정 그 사람들에게 금은패물을 달라고 하라니, 하나님이 너무하지 않으셨나요? 재앙을 당해서 들판에 곡식이 다 망가졌고, 짐승들도 다 죽었고, 노예들도 죽었고, 이제는 자식까지 죽었는데 그들에게 또 다시 재산까지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심한 것 아닌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네 가지 이유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①그들은 애굽에서 고된 노동을 다 했으나 정당한 보수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임금을 받아야 합니다. 그동안 수고한 품삯인 셈입니다.
②더구나, 이것은 하나님과 바로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왕은 패한 왕에게 당연히 전리품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왕들은 패전국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약탈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점잔케 달라고 요구하게 하셨고 애굽 사람들은 저항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내어주었습니다.
③뿐만 아니라, 은금 패물의 참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동안 애굽 왕에게 맡겼던 것을, 이제 더 필요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것뿐입니다.
물질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은 주인이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맡겨 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든지 그가 받아 관리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관리를 잘 못하면 당연히 주인이 찾아갑니다.
④그 보물은 장차 이스라엘이 시내산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데 사용 될 재료였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을 섬길 성막 지어야 하는데, 그들은 아직 알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벌써 그들이 장차 해야 할 일을 위하여 준비를 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되었을 때, 애굽에서 가져왔던 물품을 자원하여 넘치게 드려서 성막 건축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목숨만 살아나왔어도 감지덕지 할 텐데, 애굽 사람들의 금은패물을 달라고 해서 받아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은 사실뿐 아니라, 자기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패물도 자기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성막을 짓자고 할 때 얼마나 즐겁게 봉헌하는지 이제는 그만 좀 가져오라고 할 정도로 넘치게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주님의 요구에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그것을 아는 사람만 바른 헌금을 드릴 수 있고, 바른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를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성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지금의 기회와 지위와 가진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주신 도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자세를 청지지 자세라고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됩시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앞으로 이렇게 되어 질 일을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물론 나중에 말씀그대로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를 다 전달해 주고는, 바로의 반응을 살필 것도 없이, 심히 노한 모습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모세가 바로를 향하여 노했다는 것은, 그동안 당하기만 했던 모세가 드디어 큰소리를 쳤다고 통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왜 바로에게 노했을까요?
바로가 그동안 보여준 미련함과 강팍함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알려주고 충고해도 듣지 않던 사람이, 결국 완전하게 망하게 된 것을 미리 알게 된 모세는 그동안 바로가 무지하고 미련해서 지은 죄가 하도 어이없고, 너무나 불쌍해서 그 어리석은 영혼을 향하여 분노한 것입니다. “망하면 네가 망하지 내가 망하냐? 내말을 그렇게 안 듣더니 잘되었다.” 고 고소해 한 것이 아니라, 너무 속이 상해서 분노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모세 다운 모습입니다.
나중에 광야에서 살아가던 시절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벌을 받게 되었을 때도 모세는 너무 속이 상해서 그들에게 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다가 망하는 사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떠나서 살다가 세상에서 실패하고 조롱당하고 하나님께 매를 맞은 사람을 볼 때 속이 상해서 분노합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굴다가 망했냐는 동정이요 아픈 가슴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대상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5. 이스라엘과 모세는 그날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국에서 심히 크게 뵈었더라."(3)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들 앞에서 심히 크게 보이도록 하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는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로 단 한명도 죽지 않는 이스라엘이나, 그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모세라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애굽에서 실패한 경험자였고, 한때 살인자가 되어 애굽에서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한다고 왔을 때 이스라엘도 그를 거부했었고,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못하겠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강하게 압박하시니까 순종하긴 했지만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습니까? 그러나, 이제 모세가 그들 보기에 신처럼 뵈었습니다.
모세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니까,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 위대하게 보이고, 대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대단히 높여 주십니다.
주님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면 자기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고 습관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비워 버리는 낮아지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도 멸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바로에게 많은 멸시를 받았고 백성들에게도 반대를 받아서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 모세는 그들의 눈에 신처럼 보였습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을 하나님이 높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를 하실 때 그분께 붙들려 순종한 사람도 덩달아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출세를 하고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잘나고 잘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높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높이시는 것은 그를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도구로 쓰시려고 그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보다 은혜를 입었다면, 내가 이 지위, 이 물질, 기회로 어떻게 주님을 섬길까 하고 기회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주인에게 은총을 입은 것이나, 그가 감옥에서 간수장에게 사랑을 받은 것이나, 바로의 꿈을 총명하게 해석하다가 총애를 받아서 총리가 된 것이 다 하나님이 그를 귀히 쓰려고 은혜로 관리하셨기 때문이지, 요셉이 훌륭해서만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죄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라고 억울했고 낮아졌는데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고 골리앗에게 대들었던 태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사람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학대받던 민족입니다. 의지할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고 해방의 길도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 중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그들이 기도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구원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승리에 동참시켜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여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 싸워 기필코 꺾어 버리시고, 당신께 속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구원하시는데, 그가 아무리 약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그를 구원하고 높여 주십니다.
지금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더라도 이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의지하여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