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54
6월12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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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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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YfpLZFQT2c (김용호 베드로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5214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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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사제들에게 언제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삼위일체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매년 어떻게 하면 신자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어떤 때는 얼토당토않은 ‘이단’으로 빠진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이레네우스 교부)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 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너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신비와 관련된 박준양 신부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신비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몸으로 살아 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성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어 내주(內住)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느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삶의 자리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기도드리면 됩니다. 한 위격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바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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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hMSU8Nyq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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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사랑 참여 방법: 기도와 말씀 봉사>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실 모든 사랑은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사랑하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면 창조자가 되고 그러면 영원히 삽니다.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방암 투병 중인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기 마지막 날, 제자들의 선물을 받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학생들의 노래가 강당 가득 울려 퍼집니다. 교단에 앉아있던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부르는 제자들의 모습에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유방암 투병 중인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께 바치는 사랑의 세레나데입니다.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학생들이 부른 곡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한 미국 가수의 노래, 원곡 멜로디에 자신들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로 가사를 바꿔서 불렀습니다. 합창단 감독인 그렉 브라인버그는 로페즈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헌신적인 교사입니다.” 합창을 마친 학생들은 힘찬 응원과 격려로 스승의 쾌유를 기원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응원 때문이었는지 치료를 잘 마치고 완쾌하였습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있습니다. 분명 그렉 선생님과 로페즈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의 사랑을 만들고 있습니다. 먼저 그렉 선생님이 로페즈 선생님에게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렉 선생님의 사랑에 동참하였습니다. 노래를 배우고 꽃을 준비하고 깜짝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로페즈 선생님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들여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여기서 예수님은 그렉 선생님입니다.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본인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도와줄 성령을 동원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렉 선생님에게 순종하였듯이, 성령께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시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3-14)
‘그렉 선생님 – 아이들 – 로페즈 선생님’이 삼위일체이듯이 ‘그리스도 – 성령 – 교회’가 삼위일체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성령과 같은 아이들의 역할에 의해 완성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비가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처럼 그렉 선생님으로부터 노래를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또 그것을 로페즈 선생님에게 불려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기도와 말씀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배우는 시간이고 말씀 봉사는 그 배운 것을 가르치는 시간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바빠서 부제 일곱을 뽑았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삼위일체 신비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기도와 말씀 봉사로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개는 훌륭하다’에서 개를 키울 자격이 없는 수준의 견주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코비라는 보더콜리를 키우는 모녀인데 강형욱 훈련사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코비가 활동량이 부족하여 옷도 찢고 사람도 무는데, 말도 없이 또 다른 강아지 담비를 입양한 것입니다. 코비는 담비를 괴롭히고 담비는 변기 뒤에 숨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쟤네 원래 저렇게 놀아요!”라고 말합니다.
보더콜리는 워낙 지치지 않는 활동량을 자랑하기 때문에 하루에 3번 정도는 산책시켜줘야 하고 엄청난 애정을 쏟아부어야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 조련사는 모녀에게 무릎을 꿇고 담비를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은 그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도 촬영을 이어가기 위해 훈련장으로 코비만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모녀는 담비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훈련을 하는데도 견주는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촬영이 중단됩니다. 모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배우러 온 건데…. 그런 쪽으로 훈련을 한 게 없고…. 잘 모르겠어요.”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아드님께 순종하시고 아드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어주십니다. 배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분께 무릎 꿇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배운 순종을 알려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령의 역할을 할 때 삼위일체에 속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입니다. 순종 없는 사랑은 그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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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6월12일 [삼위일체 대축일]
우리는 지난주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지내며 부활시기를 마쳤는데, 이제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모든 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미 드리기 위함이다. 즉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신 구원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동시에 삼위일체의 신비의 영광에 대해 흠숭의 예를 바쳐드리는 것이다.
복음: 요한 16,12-15: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살아 계신 실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구원 업적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삼위의 신비는 소위 ‘위격’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개체성을 통해 실현되는 구원업적들에 의해 그 신비가 드러난다.좀 더 쉽게 말하자면,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삼위의 신비에 가까이 가지를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삼에 대한 계시는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학적 이론으로 연역되거나 또는 그렇게 정립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의 구원사명을 완성시켜줄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5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위격의 ‘다양성’이 나타나지만,원초적 ‘단일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되지만 모든 것이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것이며,그 아버지의 것을 아드님과 성령께서 이루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위격적 특성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는 역할과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려주는 역할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진리’는 철학적 개념의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물이 되신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말한다. 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을 동반한 ‘신앙’이다. 즉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진리’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그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12절)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원업적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14절) 성령이 오셔야 했다.
성령은 유일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케 해주시는 분이시고, 그 진리를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은 ‘생동케 하는 성령’이 되신다. 그래서 우리 모든 신자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살도록 노력함으로써 자신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는 “연대기적 차원에서의 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에 비추어 현재를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그 종말의 빛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비록 지금 당장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끝날지라도 그 때에는 승리의 카드가 사랑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부활하셨다. 분명히 패배한 그 사랑만이 유일한 승리의 실체가 된다.”(B. Maggioni, in I Vangeli, Assisi 1975, 1614)
제2독서: 로마 5,1-5: 사랑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여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1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보증해주시는(5절)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2절)의 은총을 누린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충실히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차지하시어 우리 행위의 내적 원리가 되고자 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내적 원리가 되신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우리의 삶을 모두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에 대한 확고한 기다림 속에서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 안에 살려 노력하는 삶이 요청된다. 즉 삼위일체의 신비는 추상적인 앎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성령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서 하나이신 분이심을 잊지 말고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그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하느님, 저는 당신의 삼위일체적 생명을 믿습니다.당신 사랑을 통해 그것을 믿습니다. 그 생명의 신비는 당신의 진리를 지켜줍니다. 만일 그 신비가 버려지고 만다면 그 즉시 당신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 생명의 평화가 우리의 본향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적 이유에서라도 그 생명을 믿습니다.그것은 곧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보다 높이 보다 멀리 그리고 그처럼 거룩한 빛을 비추어주는 그 희망의 빛을 저에게서 꺼버리지 마소서. 오 하느님,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R. Guardini)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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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용어들이 어려운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어서 비현실적인(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라는 느낌을 줍니다. ‘위격, 본체, 본성’을 좀 더 쉬운 말로 바꿀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다른 적당한 용어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고 어떤 사물로 예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물은 우리 인간 세상에는 없습니다. 억지로 설명하다가 교리를 왜곡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라고 그냥 넘어가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안 되어도 무조건 믿어라.”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알아듣기 어려운 교리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오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머리가 좋거나 나쁜 것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무슨 공부를 많이 하고, 무슨 학위를 딴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이 가장 중요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이 말은, ‘삼위일체의 신비’ 같은 ‘하느님의 신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고 이해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그래도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라는 말은,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라는 말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면,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면 누구든지 그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온몸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받아들인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성모님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 말을 보면,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아들 예수님이 구분되어 있고, 하시는 일도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한 일인 ‘동정 잉태’와 ‘메시아 강생’이라는 일 안에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천사의 말만 듣고서 곧바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알아듣고 이해하셨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몸으로, 또 ‘온 삶’으로 받아들이셨고,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의 본성에 속한 것이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가 우리에게 계시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1-6)
위격으로는 ‘삼위’이지만, 본체로는 ‘한 분’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으면(그 신비를 왜 우리에게 드러내셨느냐고 물으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가 구원받아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니까,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표현을 하든지 간에 말장난으로 들리겠지만, 믿고 사랑하는 우리는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점점 더 깊이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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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 귀가 먼 사람은 보고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셨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나눔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아낌없이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는 만큼 하느님께서 넉넉하게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근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과 더 멀어졌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서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요한 1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요한1서 4장 7-12)
성령의 친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행전 2장, 4-11) 성령의 친교는 교회의 직분에 다양한 은사를 주었습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복음을 선포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심령의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친교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체험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학이 되고 교리가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성호경을 할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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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제1독서는 심연이 생기기 전,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지혜’가 있었음을 전합니다. 영원에서부터 계시는 그 지혜는 바로 ‘말씀’(로고스)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요한 1,1-2 참조)
창세기는 한 처음에 ‘하느님의 영’이 함께 계셨음을 전합니다.(1,2 참조) 이런 까닭에 한낱 미천한 인간 피조물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복음 말씀은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언제나 일치를 이루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는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 계시의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시고 이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자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며 은총 속에 머물게 됩니다. 세상의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그 희망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먼저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모든 발걸음은 믿음, 희망, 사랑으로 지극히 충만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바랍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에 감사드리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시편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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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권순호 야고보 신부님]
<삼위일체의 신비 - 사랑의 선물>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하여 흩어졌던 제자들은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각자 체험하면서 다시 모여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하신 말씀과 일을 함께 회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함께하며,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신 것처럼 자신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생명 안에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 자녀 됨에 참여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안에 일어난 새로운 변화를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 안에 나타난 진리, 곧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에 관해 제자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제자들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을 살아있게 하여, 그들이 예수님 안에 보았던 삶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성령)을 우리 안에 주셔서 그 숨결로 우리가 당신의 참다운 자녀로 살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삶의 귀감으로, 성령의 숨결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시는 아버지의 전능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아들의 사랑과,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일치는 바로 우리를 위한 선물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만의 하나 됨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이루시는 일치 안에 우리가 묶여서 우리도 성부처럼 세상에서 창조의 삶을 살고, 성자처럼 사랑으로 서로를 구원하며, 성령처럼 서로 하나가 되어 거룩해지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신비입니다. 三位(삼위)가 一體(일체)인 신비는 우리 안에서 하나 됨의 신비로 실현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겉의 나와 속의 내가 하나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생로병사의 길을 가는 초라한 내 삶 안에는 참으로 존귀한 하느님의 숨결이 담겨있습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어 나의 본모습을 되찾으라는 초대이며, 더 나아가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속에서 때로 미워하고 때로 그리운 나의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이를 믿고 받아들이며 실행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임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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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진효준 요셉 신부님]
<가정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자주 표현하세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고사성어는 종교적 심성에 기반을 둔 인간관계에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종종 상정되곤 합니다. 눈빛만 바라봐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방이 척척 헤아려 준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요?
이처럼 누군가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고 공감하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나의 이기적인 욕심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혼인을 앞둔 예비부부들에게 카나혼인강좌를 할 때,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감정을 자주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올바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상대방은 결코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알아서 내 전부를 이해해주겠지’라는 바람으로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누적된다면, 서로를 향한 서운함과 오해가 증식되어 가정 안에서 갈등의 장벽으로 마주하게 될 순간이 분명 찾아오게 됩니다. 아쉽게도 ‘나’는 온전한 ‘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때도 기준은 ‘너’가 아닌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때, 기쁘고 행복할 때, 고마울 때, 슬플 때, 미안할 때 등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나와 함께 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솔직히 표현하고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2021-2022년)를 선포하며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세 가지 표현만 적절히 한다면 가정의 성화를 이루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십니다. 그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타인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존중하며 양해를 구하는 “~해도 될까요?”, 가정 내 봉사에 감사하는 “고마워요.”, 꺼내기 쉽지 않지만 상처받은 이들에게 진심을 전하는 말인 “미안해요.”입니다.
가장 작은 배려와 사랑이 가정 안에서 시작될 때 이 빛은 세상을 비추는 찬란한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마시고, 기대하지 마시고, 기다리지 마시고 나의 마음을 용기 내어 자주 표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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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님]
지난 주일 우리가 기념한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의 파스카 신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파스카 신비로 사람을 구원하고자 섭리하신 하느님의 신비 자체를 기념한다.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다.
삼위일체는 어려운 교리 용어이지만 신자들이 체험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다. 먼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며 기도하는 성부 하느님께서 계신다. 또 역사상 유일무이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나에게 구원과 의로움을 가져오신 성자 하느님께서 계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 머무시고 교회에 머무르며 우리가 예수님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성령 하느님께서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은 각자 따로따로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령의 움직임을 느낄 때는 항상 성부와 성자께서도 함께 계신다. 우리가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할 때는 성부와 성령께서도 거기 늘 함께 계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실 때도 언제나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시공간의 한계 속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세 분이 구별되어 보이지만, 영원과 무한 속에 계신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끈으로 묶여 계신다. 성 요한은 아예 하느님은 사랑 자체라고 말했을 정도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짝사랑도 대상이 필요하다. 사랑이란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려는 움직임이다. 유한한 인간의 사랑도 서로 하나되게 하고 서로 닮게 하듯이, 무한한 하느님 안의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을 완전히 하나되게 하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셋이면서 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철학자의 사색에서 나오지 않았다. 무당의 접신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학자의 공식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삼위일체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 드러난 신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스승을 통해 하느님의 진면목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부르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억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활의 영광으로 바꿔 주셨듯이 우리도 각자가 진 십자가의 무게 아래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원망과 분노의 감옥에 갇혔던 노예의 기억을 자유의 기억으로 변화시켜주시고, 과거의 상처를 구원의 기억으로 바꿔 주신다. 예수님을 위해 행하셨던 것을 우리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 주신다. 못과 창으로 무참히 뚫린 예수님의 상처들이 성령의 힘을 통해 자비의 강이 되었다. 악에 의해 깊게 파인 흉한 상처들이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얼굴을 비추는 빛나는 상처가 되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 상처의 자리로 초대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이런 일을 행하신다.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성부 하느님께서 허물어진 우리 영혼의 집을 다시 세우신다.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성자 하느님께서 빗나간 길을 바로잡아 올바른 삶의 길로 이끄신다. 희망을 가져오시는 성령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향유로 나쁜 기억들에 기름을 발라주시어, 상처의 악취를 희망의 향기로 바꿔 주신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고 버티어 서며,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도하며, 다시 건설한다. 고통을 겪기도 하겠지만, 나와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하여 늘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도하며, 다시 건설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환난마저 자랑으로 여기게 한다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놀라운 권고를 의지 삼아, 이번 한 주간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푹 잠겨 보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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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 둘 셋 둘 하나>
요한 16,12-15 (성령께서 하시는 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하나 둘 셋 둘 하나>
나를 빚으신 하느님
내가 되신 하느님
나와 사시는 하느님
너를 빚으신 하느님
네가 되신 하느님
너와 사시는 하느님
나와 더불어 한 분 하느님
너와 더불어 한 분 하느님
우리와 더불어 한 분 하느님
하느님처럼 나는 너에게
하느님처럼 너는 나에게
하느님처럼 우리는 서로
하느님 너 나 우리
오롯이 모두 하나
마침내 모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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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이웃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 시간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계시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빚어 만드시는 조소가 이시고 아들은 조소가의 손이시며 성령은 빚어 만든 흙덩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며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 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 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며 또한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삼위일체로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과정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 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라고 적혀 있습니다. 세례 때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고 하시며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받아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4).하시며 역시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14) 하셨는데 요한 17,17에 보면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아들과 성령께서도 하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무한히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을, 아들은 무한히 수용하는 사랑을 성령께서는 무한히 자신을 남에게 연결하고 전달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 움직이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성자는 기도를 도우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성부는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영적 생명 안에 활동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비가 사랑 안에서 확인되고 체험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부부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표현합니다.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한 마음이 되고, 한 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사랑하면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능력이고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되고 믿음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많이 행하게 되고 주님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혹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신비와 그리스도 신비’의 핵심은 사랑이며 그 사랑에 대한 고백이 신앙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살고,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산답니다. 그리고 신부는 신자들의 불평, 불만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체면이나 기념일, 불평 불만을 먹고 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살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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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
<사랑의 신비!>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이해하려고 아우구스티노가 바닷길을 걸으면서 묵상하고 있을 때,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오히려 작은 조개 껕데기로 모래 구덩이에 바닷물을 퍼담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말해주고 있듯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온전하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재적 삼위일체 신비'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삼위의 한 마음인 '구원경륜적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교리(신비)는 사랑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교리이며, 사랑 안에 그것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아가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교리입니다.
'시노달리타스!'
이는 3천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화두'입니다. 이 용어의 의미는 '함께 가는 공동체', '함께 가기', '함께 살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신적 사랑(내리사랑)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교회 현실 앞에서, 십자가 사랑인 아가페 사랑을 한다는 것, 내 것을 내려놓고 '내리사랑'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3.5)라고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노력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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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3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는 역대급 선거라는 말을 합니다. 2위와의 득표율 차가 0.73%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몇몇 분으로부터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0.73%라도 더 지지받았다는 것을 왜 잊을까요?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 모두 사라져서 자기가 지지했던 후보가 100%의 지지로 당선된다면 어떨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견제 세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발전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0.73%의 득표율 차는 양측에 큰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잘 하지 않으면 더 큰 반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새로운 변화로 지지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서로 이념의 차이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을 떠나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이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의 삼위일체입니다. 잘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사랑만을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그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이처럼 참사랑을 주시기 위해 성격이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 역시 이제 후회할 짓을 하지 않고, 특히 우리 신앙의 공동체가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삼위일체의 삶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이 얼마나 삼위일체의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사랑 없이, 자기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면서, 세상에 하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그런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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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삼위일체를 꼭 믿어야 하나?>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은 삼위일체를 얘기하지 않는데 만일 하느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말아야 할까요? 바꿔 말하면 삼위일체의 하느님만 믿어야 할까요?
과격하게 얘기하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꼭 믿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꼭 삼위일체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시면 안 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면 더욱 안 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면 안 믿어도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이 삼위이시건 아니건, 하느님이 한 분이시건 아니건 상관없으며,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마치 사랑치 않는다면 부모가 열이든 하나든 우리에겐 상관없는 것과 같고, 사랑한다면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부모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삼위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면 삼위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당신들이 창조한 피조물을 삼위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사랑이시라면 삼위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경우 외톨이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외톨이가 되는데 그래도 사랑하고 싶으면 개라도 사랑하듯이 사랑에는 짝이 있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삼위일체이신데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성부라고 하고, 사랑받으시는 하느님을 성자라고 하며, 성부와 성자 간에 오가는 사랑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부간의 사랑처럼 하느님 안에서 내재적으로 이뤄지는 사랑이라면 부부의 사랑이 자녀를 생산하듯 하느님에게서 발출하는 사랑이 창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랑은 어떤 사랑이건 이처럼 늘 창조적이고 생산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목과 같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임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지 않지만, 그 사랑이 불완전할 수도 있고, 이 불완전한 사랑이 미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고 애를 낳았지만 그 사랑이 불완전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어 서로를 파괴하고 자신을 소모하며 더 나아가 자녀에게 부모로서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하여 아이를 망칠 수 있지요.
이 경우, 엄마로서 또는 아버지로서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다했어도 부모로서는 사랑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데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그 사랑이 완전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끝까지 그리고 완전하게 사랑하시는데 그것을 일컬어 우리 교회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적으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를 뒤이어 성령을 보내셨다고 믿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먼저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편부 또는 편모의 사랑이 아니라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느낄 것이고,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작용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또한 느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할 것은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과 행동으로 느낄 수 있게 사랑할 것입니다. 성령처럼 기도로 그 사람 안에 힘과 기를 북돋는 사랑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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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삼위일체 하느님 예찬禮讚-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주변의 온갖 아름다움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계신 아름다운 천국이 됩니다. 휴가를 접은 지 참 오래됐습니다. 세상 떠나면 아름다운 하느님 계신 곳에서 영원한 휴가일 것을 생각하면 내심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아까운 시간들 휴가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예수성심성월 6월, 첫주 성령강림대축에 이어 둘째 주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 모든 대축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로 압축 요약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가 참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예수성심성월 6월, 첫주 성령강림대축에 이어 둘째 주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 모든 대축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로 압축 요약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가 참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사전례를 사랑합니다. 어제 성가연습시간후부터 계속되는 기쁨의 원인이 뭣인가 했더니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 대축일을 앞둔 기쁨이었습니다. 이 하느님이 좋아 수도생활을 택했고, 지금도 이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날로 깊어가는 그분께 대한 사랑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시편이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시편89,16-17)
얼마나 좋습니까! 그대로 미사축제를 사랑하는 우리 가톨릭 교회 신자들을 지칭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아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허무나 무지가 아닌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인간의 본질임을 잊고 허무와 무지의 어둠속에 안타까이 방황하는 뭇 사람들입니다. 아침 시간경 전례중 초대송 후렴과 찬미가는 얼마나 고무적이고 아름다웠던지요!
“삼위에 일체이시고 일체에 삼위이신 참된 하느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영원한 천사성인들 성부와 말씀이신 독생성자와
거룩한 숨결이신 성령삼위를 한분의 주님으로 고백하도다.
성삼의 그신비는 깊고도 깊어 누구도 알아들을 길이 없으나
하늘의 시민들은 성삼뵈옵고 드높이 노래하며 기뻐하도다.”
어제 곧 출간될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To Iove and Be Loved)”이란 저자의 인터뷰 기사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인도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에 관한 전기로 오랫동안 성녀를 알았던 저자입니다. 감동적인 내용을 나눕니다.
“그녀는 성인이 되었다. 그녀의 인간성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인간성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녀의 용기, 단호함, 유머 감각, 그녀는 실로 살과 피를 지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성인들을 그들의 인간성이 배제된 플라스틱 형상으로 만든다. 아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웃는 것을 사랑했다. 화도 냈다. 초콜렛을 사랑했다. 너도 알다시피 울기도 했다. 그녀는 완전히 인간이었다. 바로 그것이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녀를 통해 참 잘 작용했음을 느낀다. 바로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이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생명과 힘으로 가득한 소녀같았다. 그녀는 내가 지니지 않은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집중했고, 희망에 넘쳤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이들은 인류의 희망이자 구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복음화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공할 외로움을 영적가난으로 꼽았다. 그녀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라 말했다. 사람은 먹을 것을 지녔어도 사랑에, 환영에, 인정에, 수용에, 관대함에, 용서에 굶주릴 수 있다.
그녀는 실제 세상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실로 어머니였고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모성애를 표현했다. 그녀의 직업은 사랑하는 것이었다. 카톨릭인들은 더욱 가톨릭이 되게 하고, 무슬림은 더욱 무슬림이 되게 했고 그들을 하느님께 맡겼다. 그녀는 단지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그들을 알았고 사랑했다.
그녀의 삶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성체성사에 대한 사랑, 복되신 어머니와의 연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 아니곤 무가치하다 말했다. 그녀는 처녀였고 어머니였다. 마리아이후 가장 마리아를 닮은 분이셨다. 그녀는 도대체 두려움이 없는 분이셨다. 그녀는 그가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나를 ‘성공적이 되라(to be successful)’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실하라(to be faithful)’고 부르셨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앞둔 참 귀한 감동적인 선물이라 길다 싶지만 나눴습니다. 정말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을 많이도 닮은 성녀 마더 데레사입니다. 어제 가톨릭 신문 삼위일체 대축일 특집기사와 강론도 읽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쉽고도 중요한 삼위일체 하느님을 어렵게 설명하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온통 하느님 충만한 사랑안에 살고 있다는 신비체험의 고백이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이론이나 교리로 이해하려니 그리도 힘든 것입니다. 사랑의 신비가, 사랑의 관상가의 마음에는 즉시 와닿는 사랑의 체험이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모두의 눈높이에 맞게 모두에게 활짝 열린 하느님이란 고백입니다. 성령의 사랑안에서 성자 예수님과 함께 성부 하느님을 향한 여정중의 우리들이란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당신 사랑을 활짝 모두에게 개방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요, 참으로 공동체 안에는, 우리 하나하나에는 일치의 모범이자 원천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성부 하느님의 사랑이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성자 예수님의 사랑이요, 우리를 일치에로 이끄는 성령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성부 하느님의 위업을 노래한 화답송 시편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바로 우리 성부 하느님의 진면목입니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으로 빚으신 하늘하며,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바라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시편8,4-7)
바로 성부 하느님 아버지는 이런 분입니다. 이어지는 제1독서 잠언의 말씀은 성자 예수님의 모습이고,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형제인 우리 원래의 순수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수록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그대로 하느님의 지혜이자 진리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성자 예수님의 육성 고백을 듣는 듯 합니다. 그대로 평생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본래의 천지무구天眞無垢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의 지상에서도 이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주어지는 사랑이 참으로 우리를 백절불굴의 사람으로, 언제 어디서나 기쁨과 희망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퍽이나 고무적이고 감동적이라 힘을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평생 자랑으로 여길바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통해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이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완전히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얼마나 하나로 깊이 결속되어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 성령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부-성자-성령-우리로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아, 이 모두가 체험적 사랑의 고백입니다.
오늘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모두의 눈높이에 처지에 맞게 모두에게 활짝 개방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중에 살고 있음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성호경 기도를 바칠 때 마다 ‘십자(+)’ 성호를 전존재에 깊이 각인하며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 은총을 간절히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호흡에 맞춰 “오소서, 주 하느님”-“오소서, 주 예수님”-“오소서, 주 성령님” 끊임없이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호흡하며 살게 하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끝으로 제 “평생 소원” 기도문중 일부 내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오소서
주 예수님!
오소서
주 성령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제가
하느님이
예수님이
성령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제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89myL9l7f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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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 15)
사랑의
위대한 힘을
믿는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들
생명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이기에
소중하고
고귀한
품위를 지닌
사랑의 값진
존재들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온전한
사랑이시다.
사랑은
사랑의 관계로
흘러간다.
사랑의 관계는
신뢰와
내어드림
확신으로
더욱 깊어간다.
이렇듯
사랑의 본질은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친밀감과 열정
헌신으로
드러난다.
성부의 선의와
성자의 나눔과
성령의 일치로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신다.
삼위일체의 삶에
응답하는 삶이
하느님 자녀들의
올바른 삶이다.
올바른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끄심에
순명하는
삶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우리의 현실을
전적으로
봉헌하는
은총의
신비이다.
삼위일체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가장 좋은
사랑의 나눔이다.
우리의
나눔 안에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김상우 비오로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성신교성)]
<두려움에 관한 단상>
총종 우리 안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발견합니다. 건강 염려로 인한 두려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상대에게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자리를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 타인과 관계가 훼손될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우리는 다양한 보습의 두려움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있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사랑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성부. 성자. 성령의 친교와 일치,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우리가 직면한 두려움의 현실에 비추어 돌아봅니다.
제1독서(잠언 8, 22-31)는 특별히 '하느님의 지혜를 의인화하여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잠언 8, 22,30-31) 구약성경 잠언서에 모사된 이 하느님의 지헤는 나중에 신약성경 요한복음서의 '로고스 찬가'에 이르러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재해석되어 표현됩니다.
제2독서(로마 5,1,5)는 바오로가 로마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신앙 공동체를 향해. 바오로는 성부. 성자. 성령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역설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봉하여 하느님과 더붙어 평화를 누립니다. ... 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쳤기 때문입니다.(로마 5.1.5)
복음(요한 16.12,15)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는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3,15)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은 어쩌면 내 안에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싹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성부 하느님.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성자 그리스도,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치럼 주어진 위로자 성령.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러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내면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샘물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저 깊숙한 곳에 있어서. 자주 꺼내 보지 않아서. 마르지 않는 그 사랑의 샘물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일상 속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두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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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헝기
[춘천교구 김길상 다니엘 신부님]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감사송)
우리의 기도에서 가장 짧으며, 가장 완전한 기도는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즉 성호경이다.
성호경으로 시작하고 성호경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성삼위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왜?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데 세 분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배려이며(구원 경륜), 인간이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신 것임을 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인 것(내재적)이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모습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모습 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큰 은총 속에서 살아가게 한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인간은 한 가지 구조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닌 복합적 존재이다. 따라서 그 구성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이 따로 분리되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생각과 말과 행위'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믿는 것을 고백하고, 고백한 것을 실행하고, 실행한 것을 전하는 삶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삶,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비로 남겨 놓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뜻에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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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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