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의한 허구적 상상물
구조주의자로서 알튀세르의 면모는 그의 이데올로기론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1970)에서 그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주목하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구조주의자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은 그가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주체의 생산으로 본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 주체라고 믿는 것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본 대로 알튀세르가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인간 혹은 개인이라는 범주를 관념적 산물로 본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해서 주체를 생산하는 기능을 담당하는지 살펴보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호명(interpellation)’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호명이란 말 그대로 누군가를 부르는 행위이다. 길을 걷다가 앞에서 걷던 한 젊은 여성이 지갑을 떨어트린 것도 모른 채 계속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치자. 우리는 그녀를 향해 “아가씨!” 하고 외칠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볼 것이다. 만약 남성이라면 돌아보지 않거나 혹은 돌아본다 하더라도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가씨라는 말은 앞의 여성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그리고 그 여성은 아가씨라는 말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의식하며 동시에 자신을 아가씨라고 생각한다. 그 여자는 자신을 아가씨라는 말의 주체로 생각하였을 것이며, 주변의 남성이나 나이가 많은 여성은 자신을 아가씨라는 말의 주체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명칭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하며, 명칭이 부여된다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사회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한국 사회에서는 동사무소에 신분을 등록하지 않으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설혹 물리적으로 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계좌를 만들 수 없으며 투표를 할 수도 없다.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체가 되기 위해서 신분을 등록할 때 본인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명하게 결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선택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성정체성의 혼란을 낳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태생에 따라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 결정된다. 이제 경상도 사람은 자신이 경상도 사람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기도 하지만 경상도 사람이기도 하다. 어느 자리에서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닌 경상도 사람으로 호명될 것이다.
바로 이렇게 호명이 된다는 것은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실제로는 그 자신의 모습과는 상관없는 호칭이 자신과 동일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축구선수는 어디서나 축구선수일 수는 없다. 포지션을 부여받을 때만 그라운드에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왼쪽 수비수 혹은 오른쪽 공격수 등의 특정한 포지션을 받지 않은 축구선수는 그라운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왼쪽 수비만을 담당하던 선수가 엄청난 돌파력으로 상대 수비수를 제치고 골을 넣는 경우를 보고 놀란다. 그가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과연 수비수일까, 축구선수일까? 수비수라는 포지션으로 그를 호명할 경우 그의 공격력은 예외적인 것이 되지만 축구선수라는 점에서는 뛰어난 축구 실력을 지닌 선수일 뿐이다. 수비수라는 호칭이 곧 그 자신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 호칭을 부여받으며 비로소 주체가 되지만 이 주체는 인격 그 자체가 아닌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한정된 기호일 뿐이다. 그러나 개인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호칭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생물학적 근거에서 자신을 여성과 동일시하며, 태생적 이유에서 자신을 황인종으로 동일시한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호칭이나 지위는 역사적 시기마다 혹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말은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위적 산물에 불과하다. 자신을 여성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 간주한다는 허구적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인간이 세계의 주체라는 근대적 신화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마르크스주의를 탈근대화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탈근대화하려는 그의 이러한 시도는 앞서 헤겔의 변증법이 지닌 본질주의의 특성을 비판하고 모순을 중첩결정으로 대체하려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구출하려는 알튀세르의 이론적 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알튀세르의 이론에서 정착 최종적인 심급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구조주의일지도 모른다. 이는 알튀세르의 이론이 마르크스라는 인형을 통해서 구조주의자인 알튀세르가 구조주의를 설파하는 복화술일 뿐이라는 독설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라는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의한 허구적 상상물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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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권력이론
알튀세르의 권력이론편집
알튀세르는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의 형성과정을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설명하기 위해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을 사용하였다. 그의 이론에서 모든 사회는 사회생활의 물질적 수단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혹은 주체를 재생산하기 위한 기제를 발전시켜야한다. 그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조건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드러낸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상대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알게 하여 개인이 사회적 규범 내에서 표출할 수 없는 욕망이 실현되고 있다는 착각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개인은 그 자신을 자유로운 개인으로 상상하게 되며 주체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구조의 생산물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