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댓글장하리 사지는 寒山寺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절터이다. 다만 관련된 기록이 없어 인근에 있는 장하리 삼층석탑처럼 지명을 따라 장하리 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석탑을 중심으로 북동서남쪽이 낮은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으로 사찰이 있었다면 서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찰과 관련된 흔적은 석탑 외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더라도 상징적으로 모셨다고 여겨진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영향을 받은 백제게 석탑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옛 영토였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이와 같은 석탑이 많이 남아 있는데, 후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지방 호족들이 후원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31년과 196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탑 안에 모셔져 있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931년에는 1층 몸돌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등이, 1962년에는 2층 몸돌에서 사리를 담은 은병과 금동병이 발견되었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부여) 땅에 세워진 만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디테일을 아주 충실하게 모방했다. 1층 몸돌을 보면 통돌 하나를 깎아 만든 게 아니라, 모퉁이에 별도의 기둥 돌(우주)을 세우고 그 판석(판판한 돌)을 끼워 맞추는 백제 전통의 건축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1층 몸돌이 위층들에 비해 유독 가늘고 깁니다. 기단도 매우 낮고 약소하게 만들어져서, 탑 전체가 아래는 좁고 위로 길쭉한 아슬아슬한 비례를 갖게 되었다. 돌을 다듬은 솜씨를 보면 정교하게 딱 맞아떨어지기보다는 다소 거칠고 투박하다. 학계에서는 이를 가리켜 "백제 양식을 모방했으나, 고려시대 지방 장인의 자유분방함과 서툰 손맛이 더해진 결과물"이라고 평한다.
1931년 이 탑을 해체해서 보수할 당시, 1층 몸돌 안에서 아주 귀중한 발견이 있었다. 바로장하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이다. 은으로 만든 사리병, 금동제 판석과 함께 고려시대 지폐인 '삼한통보'와 청자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백제 양식을 너무 똑같이 베껴 베일에 싸여 있던 이 탑의 건립 시기가 통일신라가 아닌 '고려시대'임을 못 박아준 결정적 증거였다. 옛 백제 유민의 후손들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조상들의 위대한 탑을 그리워하며 이 탑을 세웠다는 것을 못 박아준 것이다. 옛 백제 유민의 후손들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조상들의 위대한 탑을 그리워하며 이 탑을 세웠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보통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지붕돌의 크기가 일정 비율로 줄어들어야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장하리 탑은 1층, 2층, 3층 지붕돌의 크기가 거의 비슷비슷하다. 처마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올라가다 보니, 멀리서 보면 탑이 아니라 마치 길쭉한 사각형 기둥이나 비석처럼 보이기도 하는 파격을 보여준다.
첫댓글 장하리 사지는 寒山寺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절터이다. 다만 관련된 기록이 없어 인근에 있는 장하리 삼층석탑처럼 지명을 따라 장하리 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석탑을 중심으로 북동서남쪽이 낮은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으로 사찰이 있었다면 서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찰과 관련된 흔적은 석탑 외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더라도 상징적으로 모셨다고 여겨진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영향을 받은 백제게 석탑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옛 영토였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이와 같은 석탑이 많이 남아 있는데, 후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지방 호족들이 후원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31년과 196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탑 안에 모셔져 있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931년에는 1층 몸돌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등이, 1962년에는 2층 몸돌에서 사리를 담은 은병과 금동병이 발견되었다.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이 백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고려시대에 재현한 '쌍둥이 동생' 같은 탑이라면, 이 장하리 삼층석탑은 정림사지 탑을 한 번 더 모방하면서도, 고려시대 특유의 파격과 투박함이 한층 더 짙게 묻어나는 탑이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부여) 땅에 세워진 만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디테일을 아주 충실하게 모방했다.
1층 몸돌을 보면 통돌 하나를 깎아 만든 게 아니라, 모퉁이에 별도의 기둥 돌(우주)을 세우고 그 판석(판판한 돌)을 끼워 맞추는 백제 전통의 건축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지붕돌 아래에 계단식 받침이 없고, 얇고 넓은 돌이 멀리 긴 처마처럼 뻗어 나가며 끝부분이 살짝 치켜 올라간 모습 역시 전형적인 백제식이다.
정림사지 석탑과 나란히 놓고 보면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정림사지 탑이 완벽한 비례감과 시각적 안정감을 준다면, 장하리 삼층석탑은 가늘고 길쭉해서 위로 껑충 솟아오른 느낌을 준다.
1층 몸돌이 위층들에 비해 유독 가늘고 깁니다. 기단도 매우 낮고 약소하게 만들어져서, 탑 전체가 아래는 좁고 위로 길쭉한 아슬아슬한 비례를 갖게 되었다.
돌을 다듬은 솜씨를 보면 정교하게 딱 맞아떨어지기보다는 다소 거칠고 투박하다. 학계에서는 이를 가리켜 "백제 양식을 모방했으나, 고려시대 지방 장인의 자유분방함과 서툰 손맛이 더해진 결과물"이라고 평한다.
1931년 이 탑을 해체해서 보수할 당시, 1층 몸돌 안에서 아주 귀중한 발견이 있었다.
바로장하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이다.
은으로 만든 사리병, 금동제 판석과 함께 고려시대 지폐인 '삼한통보'와 청자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백제 양식을 너무 똑같이 베껴 베일에 싸여 있던 이 탑의 건립 시기가 통일신라가 아닌 '고려시대'임을 못 박아준 결정적 증거였다. 옛 백제 유민의 후손들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조상들의 위대한 탑을 그리워하며 이 탑을 세웠다는 것을 못 박아준 것이다. 옛 백제 유민의 후손들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조상들의 위대한 탑을 그리워하며 이 탑을 세웠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보통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지붕돌의 크기가 일정 비율로 줄어들어야 안정감이 있다. 그런데 장하리 탑은 1층, 2층, 3층 지붕돌의 크기가 거의 비슷비슷하다. 처마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올라가다 보니, 멀리서 보면 탑이 아니라 마치 길쭉한 사각형 기둥이나 비석처럼 보이기도 하는 파격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