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종공군 영웅 '정율성' 이야기를 하다보니 6.25가 나왔다.
이야기를 나눈 친구는 고향이 함안이었다.
함안을 점령했던 인민군 6사단은 군기가 엄해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전사들이 소를 한 마리 잡아먹더라도 주인에게 소 잘 키워주어서 고맙다고 칭찬을 하고 조국이 통일되면 꼭 두 배, 세 배로 갚아주겠다며 영수증을 써주었다. 사단장 방호산은 그만큼 투철한 애민, 애족주의자였다고 한다.
방호산은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군사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중국에서 조선족들로 이루어진 팔로군 166사단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남침을 앞두고 김일성이 탐내어 모택동에게 간절하게 부탁하여 방호산 부대가 '조국통일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주력군은 서울에서 사흘 동안 머물렀지만 서부로 진격한 방호산 6사단은 충청, 전라도를 거침없이 진격하여 하동, 함안까지 점령했다. 진격하면서 충청, 전라 지방에서 반공주의자, 기독교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해 악명을 날렸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한다. 공산군을 등에 엎은 지방 빨갱이들이 잘 아는 지식층, 지주, 에수쟁이들을 예배당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등 처참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개전 초기, 방호산 사단의 마지막 전투는 함안군 여항산과 창원군 서북산에서 벌어졌다.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사수하고 있던 미군의 입장에서는 여항산이 무너지면 곧 마산이 함락되고 마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부산이 위험했다. 그래서 왜관?을 방어하고 있던 미24사단을 급거 차출하여 진동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던 이 전투가 유명한 '갓데미 산' 전투이다. 얼마나 지독했으면 '갓뎀,마운틴!'이라고 이름지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수 년 뒤, 나는 서북산 자락에 있는 진북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봄이 되면 학교 뒷산 중턱에 붉은 진달레꽃이 만발했다. 동무들과 꽃을 꺾으러갔던 나는 흙속에 반 쯤 드러난 인민군 군화짝를 보고 기겁을 했다. 귀신이라도 나타날까 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질쳤다. 군화의 주인은 아마도 인민군 돌격대였던 모양이다. 전투가 한창일 때 진북국민학교 운동장은 미군 포병이 박격포를 쏘는 최전방이었다고 한다. 나는 포탄 상자 뚜껑을 하나 얻어 겨울철 앉은뱅이 스케이트로 사용하며 보물같이 아꼈다.
그때 방호산은 일개를 중대를 별동대로 구성하여 통영으로 보냈다. 거제도를 점령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한국군은 김성은 해병대를 통영에 상륙시키고 함포사격으로 지원하여 인민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를 취재한 미국 여 기자 '히킨즈'는 한국 해병대를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격찬하며 세계 만방에 알렸다.
진동 전투가 한창일 때 우리 동네에도 미군과 한국군으로 구성된 합동 정보, 수색대가 들이닥쳤다. 언제 마산이 함랃될지 모르니 피란을 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수소문하여 빨갱이를 색촐하기도 했다. 인근 김해 진영읍에서는 빨갱이 용의자를 트럭으로 싣고가서 산골짜기에서 처단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 소문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바로 그때 나타난 사람이 '단발이'였다.
일본에서 거주하다 해방이 되자 고향 마을로 돌아온 그 여자를 동네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것없이 아지매라는 존칭도 없이 그냥 '단발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단발머리를 하고 왔기 때문이었다. 단발이는 일본에서 뭘 해먹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귀국할 때는 달랑 '바리캉' 하나만 들고 왔다. 그래 쇠똥냄새 나는 동네 머스마들 대갈몽생이를 꿀밤같이 빡빡 밀어 주고 가을에 곡식을 받고 먹고 살았다.
난리가 나기 전까지는 단발이가 영어를 잘 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동네에 들이닥친 합동 수색대는 눈빛이 무서울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마산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만약을 위해 미리 밀,보리를 볶아 미싯가루를 만들어 피란갈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군들이 나타나자 단발이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환한 얼굴로 앞장을 섰다.
"헬로우, 월컴..... "
단발이가 영어로 뭐라고 씨부렁거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발이가 웃는 얼굴로 떠들자 미군들의 굳었던 표정이 단박에 펴지며 반갑다고 단발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결론적으로 단발이 덕분에 동네 사람들은 피란을 가지 않게 되었다.
그때 미군들이 잔칫집에서 새신랑 다룬다고 띠로 묶어 대청마루에 매다는 것을 보고 빨갱이를 처단하는 줄 알고 총을 쏘아 죽이려는 것을 단발이가 말려 목숨을 구했다는 소문도 있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에 다닐 때, 모내기 철이 되면 내가 못줄을 잡았다. 단발이도 동네 아낙네들 틈에 끼여 모를 심었다. 피로를 잊으려고 아낙네들들은 이앙가를 부르고 입담 좋은 아지매들은 우스개소리를 했다. 그럴 때 외설스런 와이담에는 단발이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구릉논에 발이 빠졋다가 뺄 때 나는 소리가 꼭 이불 밑에서 밤일 하다가 서방 거시기 빼는 소리하고 우째 그리 닮았을꼬!" 하고 능청을 떨면 순진한 동네 새댁들은 뒤늦게서야 무슨 뜻인지 알고서는 웃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며 제풀에 흥분해서 입고 있던 몬베가 젖는 줄도 몰랐다. 단발이가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요코하마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는 클럽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말게 되었다.
방호산 부대는 후퇴할 때도 패잔병답지 않게 군율을 지키며 퇴각했다고 한다. 그후 방호산은 중장으로 진급하여 현리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이중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인민들에게 신망 있는 그의 존재를 두려워한 김일성은 방호산의 부하부터 숙청시키고 그를 좌천시켰다가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가족들과 함께 숙청시켰다고 한다.
중국 영웅이 된 정율성도 북한에 남아 있었다면 비참한 말로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가 직곡한 인민군 군가가 남침 시 서울 하늘에 울려퍼지고 침략군 군악대장을 엮임한 사람을 그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해서 영웅시하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