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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4부대'는 우리나라에서 창조한 부대인데,
그들은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훈련 목적은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을 제거하는 것,
그러나 작전개시명령이 떨어지지 않자,
그들의 비극은 시작되는데....
실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龍游洞)에
딸린 무인도로,
섬 대부분이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미도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이 섬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자신(684부대)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을 말한다.
이 부대는 1968년 4월 창설되었고,
일명 '684부대'로 불린다.
같은 해 1월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1·21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목적은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金日成)을 죽이는 것이다.
창설 이후 이들은 실전과 똑같은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하였다.
그 뒤 3년 4개월 동안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던 중
1970년대 초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 23일 6시경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
(나머지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4명만이 살아남았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하였다.
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를 비롯해
많은 점들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왠지 국방부 쪽에서
뭔가를 숨기는 것 같다.
사실은 그 진상을 파해쳐 보면,
실미도 684부대는 치밀한 군사계획이 아니라
북한의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한 감정으로
환김에 만든 부대였다.
북한군이 청와대로 왔을 때
31명의 북한군 중에 29명은 사살,
1명은 자폭, 1명(김신조)는 자백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684부대이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작전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가망이 없던 부대였다.
애초에는 사형수와 무기수로 만들어진
결사유격대로 구상을 했지만
도중에 민간인도 섞여 만들어졌다.
작전이 실행 될 가망이 없자
기간병들이 보안 유지와
그동안 저지른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서
훈련병들을 전부 사살해 버리자는 건의를 했고
그러한 사실을 훈련병들이 눈치 채고
살인 난동을 일으켰다.
복수심에 불타는 훈련병들은 인천에 상륙,
청와대로 향하다가 유한 양행 앞에서 자폭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에 합류하지 않은
몇몇 훈련병의 이탈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들이
실미도에서 탈출한 훈련병임을 아는데도,
무장공비라고 발표했다.
인천지방 주재기자와 신민당의 이재규의
이의제기로 더이상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자,
공군 관리하에 군특수범이라고 발표를 했다.
소설의 배경이 된 강인찬을 비롯해,
최소한 2-3명의 군인들이 생존해 있다.
우리 군의 과거도 부패했고, 비밀이 많았다.
684부대는 사실상
정부군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 청와대로 가던 도중
군인이 바리케이드를 만들어서 그들을 막았었다.
그리고 사살했다.
- 전설의 특수부대 실미도 부대 -
1. 실미도 부대의 창설 배경
☞ 이른바 우리에게 실미도 부대로 잘 알려진
북파공작 부대는 1968년
이른바 김신조로 유명해진
31명의 무장공비 청와대 기습사건,
즉 1.21 사태로 인하여 창설된 부대이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대북 보복공격을 감행하고자
3군 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
보복대응을 지시했고,
이때 최종적으로
열기구 같은 비행기구를 이용하여
특수요원들을 평양에 침투시켜
김일성의 암살을 실행한다는 결론을 내려
그 북파공작원들의 훈련을 공군이 맡도록 했다.
이에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이 내부적으로 지시하여
공군 정보국 산하 2325부대 예하
209파견대 직속으로
특수부대를 창설하게 되었으니
이 부대가 바로 실미도 부대
혹은19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흔히들 684 부대로 불리우게 되는
대북침투공작 특수부대였다.
당시 장지량 공군참모총장 밑으로 해서
정보국장 손경욱 준장을 거쳐
2325부대장 유대령,
그리고 209 파견대장 김응수 소령 아래
209 파견대 교육대가 설치된 것이다.
당시 교육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북파공작 특수임무를 수행해왔던
상사 김순웅이었고
교관들은 3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교육훈련 및 주거 장소로는
서해 무위도 옆 외딴 무인도 실미도로 결정되었고
1968년 4월 부대 창설식이
실미도에서 거행되었다.
2. 실미도 부대원 모집
☞ 당시 실미도 부대는 통제관 정봉선 중령과
공작계획관 김응수 소령의 지휘하에
북파 공작대원을 물색했으며,
당시 내건 조건은
“이북에 침투하여
김일성 모가지를 따오는 대가로
상상을 초월하는 후한 대우를 해주겠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미도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처음에는 북파공작대원들을
사형수를 중심으로 모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형수는 사형이 집행되면
그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인계해야 하므로
보안유지가 어려워진다는 법무부의 반대로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물색관들의 회유에 넘어간
31명이 선발되었다.
3. 선택된 그들
☞ 당시 선발된 3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왼쪽부터 성명, 출신지역, 1968년 당시 나이,
그리고 주요 경력 및 주특기
1 이부웅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26 당수
2 윤태산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25 권투, 깡패
3 황철복
충남 대전시 가양동 25 권투, 깡패
4 이영수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21 권투, 깡패
5 장정길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31 권투, 운전, 깡패
6 임기태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25 전기공, 절도범
7 박응찬
충남 대전시 선화동 23 절도범, 이발견습생
8 정은성
경기도 파주군 23 당수, 깡패
9 장성관
서울특별시 영등포 25 날치기범, 깡패
10 조석구
충남 논산읍 20 합기도, 편물기계수리
11 김용환
충남 공주읍 20 무도
12 전영관
충북 영동군 20 마라톤
13 이서천
충남 대전시 29 축구, 요리사
14 임성빈
충남 연기군 22 당수(5급), 행상
15 김창구
충북 청주시 남문로 29 써커스
16 이명구
충남 대전시 원동 24 당수(2급) 소매치기
17 강찬주
서울특별시 종로구 24 수영, 깡패, 오토바이
18 김종철
충남 대전시 26 수영, 깡패, 소매치기
19 전균
경기도 파주시 나이미상 칼 사용, 깡패
20 김봉용
충북 옥천군 23 권투, 깡패
21 정기성
충북 옥천군 21 유도, 깡패
22 박기수
충북 옥천군 21 유도, 깡패
23 김병염
충북 옥천군 22 권투, 깡패
24 이광용
충북 옥천군 22 당수, 깡패
25 장명기
충북 옥천군 21 유도, 깡패
26 김기정
충북 옥천군 22 당수, 통신, 깡패
27 심보길
주소미상 나이 미상 구기운동, 깡패
28 박원식
경기도 파주군 32 당수, 깡패
29 신현준 개인자료 없음
30 강신옥 개인자료 없음
31 윤석두 개인자료 없음
4. 실미도에서의 훈련
☞ 실미도에서의 훈련은 상상을 초월했다.
북파공작대원들이
북한군 특수부대 124군이 훈련받는 내용을
생포된 간첩 김신조로부터 정보로 제공받아
이들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유하게끔
하기 위하여 상상을 초월한 훈련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아침 구보시나 저녁 구보시
정해진 속도와 시간으로 구보를 하기 위하여
뒷발꿈치에 사격을 한다던가,
제식훈련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틀리면
미군들이 쓰던 야전침대 버팀목으로
사정없이 머리 정수리 부분을 가격한다건가,
사격시 10발을 모두 같은 지점에 쏘아맞추기 등
사실상 이들을
인간병기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다.
5. 실미도에서의 사건 사고들
☞ 실미도에서 은밀하게 부대를 운영하면서
훈련을 하는 동안 많은 사고들이 일어났고
이에 북파공작대원들이 죽어나갔다.
먼저 1968년 7월 이부웅과 신현준이
독도법 훈련 도중 훈련장을 이탈하여
민가에 잠입,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우다가
출동한 기간병들에 의해 체포되어
다음날 교육대장 김순웅 상사의 지시하에
폭력행위로 살해된다.
그리고 1969년 8월 조석구가 수영훈련 도중
수영미숙과 무거운 장비 착용 등에 따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익사하게 되며,
1970년 8월 윤태산이 기간병에게
술을 사줄 것을 요구하며
권총으로 위협한 하극상 사건으로
역시 폭력행위로 살해된다.
그리고 1970년 10월
영화 실미도에서 나온바와 같이
강신옥, 강찬주, 황철복 세명이
무의도에 건너가 초등학교 숙직실에서
이른바 강간사건을 저지르게 되고,
이후 이들의 범행이 도중에 발각되자
황철복과 강신옥은 대검으로 자살하게 되며,
강찬주는 역시 기간병들에 의해서
폭력행위로 살해된다.
이로서 실미도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로는
모두 7명이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시신은 모두 화장해서
그 유골을 실미도 앞바다에 뿌렸다.
6. 파국의 그날
1968년 4월 부대창설 이후 계획되었던
북파공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도
위태위태하게 운영이 계속되던 실미도 부대는
드디어 1971년 8월 23일
그 파국을 맞게 되었다.
먼저 8월 21일의 상황부터 살펴보면
교육대장 김순웅 상사는
부하들인 기간병들에게
토요일이고 주말이어서 부대 사상 처음으로
인천으로 특박을 나가도 좋다고 지시했다.
이에 기간병들이 모여서 의논을 한 결과
신참 기간병 위주로
먼저 특박을 내보내기로 하고
결국 신참 기간병들이 특박을 나가게 되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신참 기간병들은
특박을 마치고 들어오면서
화룡소주를 여러병 사왔고
이를 본 교육대장 김순웅 상사는
고심 끝에 이번만큼은 인정해주겠다며
기간병들의 음주를 허락했다.
그리고 기간병들은 화룡소주로 음주를 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 시간 북파공작대원들은
내무반에 모여서 은밀하게 회의를 진행하였다.
당시 심보길이 무의도의 민간인들로부터
술을 제공받아 음주를 한 사실이 적발되어
기간병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허리를 다치게 되자
모든 대원들이 분개하고 있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실미도를 탈출하자는
의견이 개진되어
교육대장이 실미도에 들어오는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새벽에 작전개시를 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하여 1971년 8월 23일
오전 6시가 조금 못된 시각
대원들 내무반 앞을 김태수 병장이
불침번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갑자기 용변이 마려워 화장실로 갔고
이때를 놓치지 않은 훈련병들이
군복을 착용하고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교육대장 당번병 장선광이
은밀하게 교육대장 침실로 침투하여
교육대장을 둔기로 살해하고
실탄을 탈취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를 신호로 대원들이 기간병들에게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면서
이들의 작전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실미도는 삽시간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살육의 난장판이 되었으며,
이때 전균과 이영수 두명의 북파공작대원이
총에 맞아 사망하며,
기간병들은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기간병은 화장실에 갔다가
화장실 밑 오물더미에 몸을 급히 숨긴 김태수 병장,
긴급히 몸을 숨긴 한상구 병장,
목에 관통상을 입고도 극적으로 살아난
양동수 병장 등 몇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원 22명은 무의도에 건너가
배를 빌려와서 흥덕호에 승선,
인천으로 가려고 했으나
기름부족으로 가지 못하자
하선하여 지나가던 순복호로 갈아타고서
인천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태운 배는
인천 송도 앞바다에 도착하여
대원들은 모두 내려 행군으로
인천시가지 쪽으로 이동을 하였다.
중간에 33사단 소속 경계초소의 경계병으로부터
검문을 당했으나 그냥 통과했으며,
조개고개 야산으로 이동하여 기다리던 중
출동한 육군 병력과 교전이 벌어져
김기정, 심보길, 전영관이 사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대원 18명은 타고 가던
항도여객 버스가 고장나 운행이 어렵자
주원고개 부근에서 하차하여
수원발 인천행 태화여객 소속의 시외버스를
강제로 정차시킨 후 탑승하여
운전자 정영소 씨에게
중앙청 앞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위협하여
결국 정영소씨는 차를 돌려
중앙청 방향으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버스 운전기사 정영소씨는
이들이 무장공비인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경인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통하여
서울의 중앙청 방향으로 운전했으며,
국도로 이동하는 도중
단 한차례의 검문 검색도 받지 않자
자신이 더 이상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지만 않는다면
이들 무장대원들 중에는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라도
더 이상 서울로 진격을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호대기중 기습적으로 버스에서 탈출했다.
그리하여 운전자가 사라지자 할 수 없이
대원 중에서 운전경력이 있던 장정길이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면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노량진
유한양행 앞을 지나갈 무렵
이미 포진하고 있던 육군병력과
총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장정길이 핸들을 급하게 꺾는 바람에
버스는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서게 되었다.
그때 버스안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맞대응 사격을 하고 있던 대원 중 한명이
여차하면 자폭할 기세로 소지하고 있던
세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손에 쥐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들이 타고 달리던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을 때
충격으로 그 대원이 쓰러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세열 수류탄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내 폭발하여 대원들 15명과
몇 명의 승객들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게 되면서
대원들의 최후는 비극적으로 끝났다.
7.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 비극의 그날
극적으로 살아남은 북파공작대원
김병염, 김창구, 이서천, 임성빈 네사람은
공군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 결과
사형이 확정되어
오류동의 공군부대 사격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실미도에서 사살당한 김순웅 상사 외
209 파견대 기간병들은
전원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으며
난동사건 당일 사망한 18명은
벽제공원묘지에 무연고자 묘지에
합동으로 가매장 되었다.
그리고 김태수 병장과 한상구 병장,
양동수 병장 등 실미도 난동사건 당시
살아남은 기간병들은 공군 항공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제대했다.
그리고 실미도 부대 창설시부터 관여한
모든 기간요원들과 장교들은 이후 제대하여
각자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8. 실미도에 대한 오해와 진실들
☞ 실미도 부대의 활약상과 비극은
2004년 영화 실미도로 제작되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흥행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영화속 내용과
실제와의 차이에 대한 궁금증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는데
그 궁금증에 대한 나름의 답은 다음과 같다.
1) 영화속에서 주인공 설경구가 감옥에서
교육대장을 만나 국가를 위하여
칼을 다시한번 들어달라고 요청을 받고
실미도 부대에 입대하는데?
☞ 실제 실미도 부대원 31명중에 단 한명도
복역중인 죄수는 없었고,
처음에는 사형수를 선발하는 계획이 있었으나
법무부의 반대로 보류되었음.
2) 영화속에서 2명의 대원이 탈출하여
무의도 초등학교에서 강간 사건을 벌이는데?
☞ 실제 강간사건을 벌인 대원은
강신옥, 강찬주, 황철복 3명으로
이들은 현장 자살과,
동료들에 의한 살해로 사망하게 된다.
3) 영화에 등장하는 조중사역의 실제 인물은?
☞ 실미도 소대장을 지냈던
김방일, 김이태 소대장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4) 영화 속에서 중앙정보부 간부가
실미도 부대 교육대장에게
부대해체와 함께 부대원들을 모두 사살하여
증거인멸을 하라는 지시가 나오는데?
☞ 실제 그러한 사실이 일절 없으며,
사살명령은 내려오지 않았고,
기간병들을 죽인다는 계획은 없었다.
5) 영화 속 교육대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 실제 교육대장 김순웅 상사는
자신의 당번병이었던
장선광이 휘두른 도끼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음.
6) 영화 속에서 실미도를 탈출한 부대원 전원이
버스안 승객들을 풀어주고 나서
수류탄 폭발 자살을 선택하는데?
☞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대원 중에서
운전경력이 있던 장정길이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면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노량진
유한양행 앞을 지나갈 무렵
이미 포진하고 있던 육군병력과
총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장정길이 핸들을 급하게 꺾는 바람에
버스는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서게 되었다.
그때 버스안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맞대응 사격을 하고 있던 대원 중 한명이
여차하면 자폭할 기세로 소지하고 있던
세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손에 쥐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들이 타고 달리던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을 때 충격으로
그 대원이 쓰러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세열 수류탄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내 폭발하여 대원들 15명과
몇 명의 승객들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사망하게 되면서
대원들의 최후는 비극적으로 끝났다.
7) 영화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실미도의 저자 백동호 씨는 감옥에서
실미도 부대원으로 살아남은 강인찬에게서
실제로 진실을 들었다고 이야기 했는데?
☞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살아남은 기간병들의 증언도 일치하는 것이
실미도 부대에 물색되어 들어온
북파공작대원들 중에는 강인찬이라는
이름을 쓰는 대원은 없었으며,
비극적 사고 이후 살아남은 기간병
양동수 병장이 시신들을 확인하고
이상없음을 확인했음.
도주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확인이 끝났음.
따라서 강인찬의 생존설은
사실이 아닌 허구에 불과함.
첫댓글 어린사람들모아놨었네ㅠㅠ 어릴때실미도 보면서 울었던거생각난다ㅠ
강간;;?
실미도가 이런 내용이엇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