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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년, 한왕조 최대의 농민봉기가 일어납니다. 전국에 걸쳐 수백만의 농민들이 머리에 황색 띠를 두르고 천자의 권위를 뒤엎기 위해 반정부 무력행사를 실시합니다. 이 농민봉기는 그동안 황실과 조정의 무능력한 통치와 방기, 그것도 넘어서는 수탈이 원인이었고, 근본적인 원인은 조정의 파벌에 있었습니다.
후한시대는 지방에 대한 통치력이 점차 상실되는데, 이는 조정 안에서 당파싸움이 원인이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당파는 재화를 축적하거나 권력을 보다 길게 유지하기 위해서 조정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려 했고, 여기에 아부하여 모여든 유지, 재산가들이 돈을 주고 관직을 얻고, 그때 쓴 재산을 다시 충당하기 위해 민중을 수탈했습니다. 그래서 과세가 이중삼중으로 과중되어 농민들의 생활이 피폐해지고 쌀값(지금으로 치면 유가)이 폭등해 일상생활이 붕괴하기에 이르릅니다. 이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사람보다 못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게 되는데, 여기에 희망을 준 것이 종교적 구원이었고, 그것이 태평청령도였습니다. 이것이 수백만이나 되는 민중이 봉기하게 된 배경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라면 이때 황제는,
1. 권력을 농단한 인사들을 파직
2. 청렴한 인물들로 조정을 쇄신
3. 방을 내붙여 전면사면을 원칙으로 항복을 받아내고
4. 중앙의 정규군을 파견
5. 동시에 장각에 대해 반역죄를 묻고
6. 황제의 친정
을 단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외척인 하진을 대장군에 제수하고 전체 군권을 준 뒤 토벌을 명합니다.(이때 병졸을 얻으려고 대사면을 하는데, 관우가 이 기회로 사면되어 의병에 참가합니다.) 헌데 이때 영제는 다른 일도 같이 실시합니다. 서원팔교위를 설치하여 환관 건석을 원수로 앉히고 대장군인 하진도 그 아래에서 명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본래 한왕조의 국가 체제는 관료제와 측근정치(비서)를 혼합한 형식이었는데, 승상이나 삼공이 필두가 되는 외조는 관료제였고, 상서령이 필두가 되는 내조가 측근정치였습니다. 후한시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점철하는 외척과 환관의 다툼은 바로 이 내외조의 권력 싸움이기도 했고, 황제가 측근을 중심으로 정치를 할 지, 재상 중심의 정치를 할 지를 선택하는 기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후한은 4대째인 효화제 이후로 계속해서 나이 어린 태자가 제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초기에 수렴청정이나 대리청정이 불가피했고, 그래서 재위 초기에 외척, 권신이 권력을 장악하다가 황제가 서서히 장성하면서 주위에서 시중을 들던 환관들을 통해 권력을 찾으려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던 사람이 효환제로, 그는 장성했을 때 권력을 되찾지만 곧 붕어합니다. 그리고 다시 13세의 유굉(12대 효영제)이 제위를 계승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효환제에 의해 권신들이 모조리 숙청당해 권력의 공백상태였으므로, 곧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해버립니다. 이런 상태가 영제 재위기간 내내 이어졌고, 그래서 내조에서만 존재했던 환관들이 그 권력을 폭발적으로 늘려 이윽고는 군사력까지 장악하는 사태가 일어나 버린 것이었습니다.(황건봉기도 이 비대한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 산물.)
그러나 이 과정도 결코 쌈박하지 못합니다. 대장군이라는 외조 최고위에게 전군 최고통수권을 내어준 뒤에 그들보다 숫적으로 적고 정통성도 없던 내조의 환관을 수장으로 세웠기 때문에, 양측은 황제가 존재할 때는 권력의 줄다리기가 가능하지만 환관을 총애하던 황제가 죽으면 외조의 대신들에게 내조가 잡아먹히는 관계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즈음 조조가 낙양의 북문을 관할하는 관직에 오르는데, 건석의 집안사람이 법을 어기자 법령대로 집행해서 죽인 일로 정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원소, 조조, 순우경등이 서원팔교위를 각기 하나씩 차지한 것도 이런 관계를 대변해주는 예입니다. 또 환관들이 재화보물을 축적하는데 관심이 있었을 뿐, 그 원천인 권력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은 결핍되어 있었다는 증명입니다. 그나마 생각이 있던 건석은 이 온전하지 못한 군권에 불안해 했으므로 하진을 중상모략했습니다. 이것이 막대한 군권을 쥐고 있던 하진을 자극하게 됩니다.
황건봉기를 간신히 진압한 한나라는 사실상 통치력을 상실합니다. 서북에서는 마등과 한수가 강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고, 강남에서는 구성이 황제를 자칭했으며, 유주에서는 지역 유지들과 태수들이 오환족과 결탁하여 봉기합니다. 그리고 황건봉기도 그 지도부가 사라지면서 세력이 와해되었을 뿐 사면령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도의 무리로 남아 여기저기 계속 도적질을 하는 식으로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다녔습니다. 한마디로 칼 찬 유랑민으로 만들어 산으로 들로 내몬 것입니다.
당연히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군대가 지방으로 유출되면서 중앙에 비해 지방이 군사적으로 더 성장하는 등, 중앙집권식 체제에서 반드시 갖춰져야 하는 중앙의 군사권 제어가 그 고삐를 놓게 됩니다. (유언의 주목설치 건의를 윤허하면서 더 가속화됩니다.)
4년 뒤, 마침내 황제가 붕어하고, 환관들은 공황에 빠집니다. 이는 그간 오만가지 삽질로 나라를 공사장으로 만든 환관들에 대한 숙청 여론이, 뒤를 봐주던 황제의 죽음으로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제는 죽기 전에 마지막 테크를 탔는데, 그동안 여론이 지지해 온 서자인 진류왕 유협을 건석에게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영제는 평상시에도 유협을 후계로 생각했지만, 황건봉기때 하진에게 많은 권력을 이양했고, 하황후도 건재했기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태자 유변과 진류왕 유협, 두 명의 후계자를 두고 내외조가 서로 갈려 파당을 이루는 형세가 됩니다. 하진은 대세를 얻기 위해 사세삼공의 원가를 포섭했으며, 방소, 하옹, 순유등의 재사를 끌어 모아 당파를 형성합니다.
서원팔교위는 엄밀히 말해 궁궐을 수비하기 위한 친위대였고 이들을 쥐고 있던 건석은 자신이 장악한 대궐 안으로 하진을 불러들여 그를 주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건석의 장병이었던 반은이 하진에게 이를 알려주어 일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결국 태자 유변이 제위에 오르고 외척인 하진이 권력을 잡자 그의 최측근이 된 원소가 환관숙청을 앞서 주장합니다.
지금까지의 권력다툼은 엄밀히 말하면 군권을 쥔 건석과 하진, 쌍방의 다툼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그래서 하진도 처음에 죽이려고 한 것은 건석 하나뿐이었습니다. 환관들도 권력을 잡은 하진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건석을 하진에게 팔아넘기고 건석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환관들이 얼마나 아둔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유일하게 군권을 쥐고 있던 자가 건석이었는데, 내분으로 그와 그가 가진 권력을 잃으면서 환관들은 무방비상태에서 계속 하진에게 끌려다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양새는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하황후(이하 하태후)와 환관들의 관계입니다. 환관들은 오랜세월 대궐에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고 심었기 때문에 궁안의 사람들은 환관의 사람들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환관파는 황제에게 아름다운 후궁을 선보여 환심을 얻거나 그렇게 총애받는 후궁과 결탁하여 권력을 얻었습니다. 하태후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키워진 환관들의 첨병이었습니다. 유협의 생모인 왕귀인이 독살되었을 때 하태후를 구원해준 것도 환관들이었습니다. (하진의 권력획득 자체가 환관파의 힘이었다는 것이 옳습니다.)
환관들은 여기에 착안해 그간 모은 재화를 하태후와 하진의 동생인 하묘에게 쏟아부으면서 구명을 탄원했고 결국 이 숙청은 흐지부지 됩니다.
이렇게 되자 원소가 초조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원소가 방침을 바꾼 것이 한왕조를 벼랑으로 몰고 갑니다. 하진에게 숙청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원소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유력 제후들을 모조리 불러모아 그들의 군대로 하태후와 환관을 압박할 계획을 꾸미고 아이러니하게도 하진이 여기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동탁, 정원을 비롯한 제후들이 중앙으로 군사를 가지고 몰려오게 됩니다.(사서에 원소가 하진을 닥달하여 권한을 위임받은 뒤에는 동탁을 재촉하여 빨리 오도록 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놀란 하태후는 그간 부리던 자들중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제외하고 환관 모두를 파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는데, 원소가 이를 알고 하진에게 이들을 모두 주살할 것을 요청하지만, 장안까지 나온 동탁이 명을 거부하면서 사태가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여기서 먼저 행동한 건 칼자루를 쥔 하진이었습니다.
황후의 처소에 가서 환관들을 모두 파직하여 참하고, 위병들도 제 사람들로 채우겠다는 계획을 말했는데, 이를 들은 단규, 필람등의 환관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진에게 황후의 거짓조서를 보이며 다시 불러들였고, 하진을 주살합니다.
이제부터 낙양은 혼란 그 자체로 치닫습니다. 정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환관들의 낌새를 눈치챈 노식과 원술은 황후전의 환관들을 위협하지만, 황제와 진류왕에 태후까지 볼모로 잡은 환관들은 숙청의 칼날을 피해 궁밖으로 피신합니다.(이 도중에 노식이 단규를 위협해서 하태후는 풀려납니다.)
원소는 숙부 원외와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환관파 숙청을 단행합니다. 이때 환관이 아닌데도 죽은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2천여명의 사람들이 대궐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또 오광이라는 자는 하진의 사람이었는데, 평소에 하진의 동생인 하묘가 환관들과 결탁한 것을 못마땅히 여겼다가 그 환관들 손에 하진이 죽자 폭주합니다. 군사를 이끌고 동탁과 연합하여 거기장군이었던 하묘를 공격해서 참수합니다.
왕윤은 민공을 보내 황제를 인질로 삼은 환관들을 추격하는데, 강가로 도망친 환관들은 주륙을 당해내지 못하고 물에 빠져 모두 죽습니다.
이 혼란속에서 정권을 잡은 것은 결국 군사가 가장 많았던 동탁이었습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조정은 유력인사나 외척, 환관들의 조직적인 활동에 의해 좌우되었는데, 이때 지방에서 힘을 키워온 군벌에 의해서 조정이 장악되면서 무단정치로 완전히 선회하여 나아갑니다.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비극을 불러 들인 것은 첫째가 영제이지만, 그 다음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원소입니다. 환관들이 실각되면 사실상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이 민중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돌아다니고 있던 황건봉기군만 해도 수십만이었습니다.
또 권력을 이미 장악했던 하진이 죽음으로서, 황제와 태후가 동탁에게 죽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지는 무단정치도 없었을 것입니다.
ps.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일방적인 권력행사는 반드시 뒤탈이 있다는 것. 그러니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우리시대에도 없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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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는 돌고 돌죠. 인간의 삶과 문화는 발전하지만 인간의 기본 본성과 욕구는 변하지않고 인간이 만드는 삶이기에 역사는 또다시 반복되죠. 그래서 역사를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때 20번 가까이 삼국지를 읽었던거 같은데...봐도봐도 재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