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 생각도 문화의 차이라고 봅니다. 미국의 문화로서는 용납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짓말은 의도가 어떠하든 말 그대로 거짓말이지요. 혹 결과에 대한 책임 문제를 따질 경우 정상참작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되는가? 그것은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 쪽을 위해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또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행동입니다. 사실 나중에 발각된다면 오히려 더 큰 충격이나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 보안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개인 대 개인이라면 당사자 한 사람만 지키면 되니까 크게 어렵지 않겠지만 관계된 사람이 많다면 어려운 일이지요.
이 문제는 우리도 종종 문제시 되었습니다. 암 말기를 진단 받은 사실을 밝히느냐 숨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양쪽이 다 해당될 수 있습니다. 환자가 가족에게 숨길 수도 있고 가족이 먼저 알고 환자 당사자에게 숨길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합당한 일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환자는 환자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마지막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을 주지 않으면 그 날을 당하여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차이는 문화와 의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할머니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손녀 ‘빌리’는 수시로 고향 중국에 계신 할머니와 통화합니다. 어쩌면 부모보다도 더 가까이 지냅니다. 하기야 부모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거워서 딸이라도 대화의 시간을 갖기 쉽지 않습니다.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빌리가 안쓰러워도 맘껏 도와주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빌리 자신이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한다는 것이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 애씁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그런 딸이 못마땅합니다. 그것은 딸을 향한 마음이면서 또한 자신을 향한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배울 만큼 배웠으니 앞으로 팍팍 전진하면 좋을 텐데 맘대로 되지 않지요. 안쓰럽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바람만 있고 현실은 없으니 말입니다.
할머니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만 빼고 간답니다. 감정이 여린 빌리가 행여 할머니 앞에서 그대로 표현하면 소위 산통 다 깨집니다. 그러니 도저히 동행할 수 없습니다. 변명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빠서. 할머니도 얼마든지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만 떠납니다. 형제자매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갑자기 빌리도 나타납니다. 모두 놀라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누구보다 반가워합니다. 그 상황에서 누구도 뭐라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빌리가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해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물론 빌리는 그 바람대로 잘 이겨나갑니다. 모임에 어울리도록 스스로 애쓰며 따라갑니다. 때로 어려워하지만 그래도 견딥니다.
가족 친지가 다 모이게 된 이유는 빌리 사촌 ‘하오하오’의 결혼입니다. 어쩌면 결혼도 할머니를 위해 모이려고 급조한 예식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두가 즐거이 함께 합니다. 대단한 잔치가 준비되고 성사됩니다. 오랜 만에 대가족이 모여서 며칠을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고 친지들입니다. 반갑고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같은 문화권이 아닌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던 사람들의 모임이니 생각과 의식의 차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충돌이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공동체 의식은 변함이 없어 그런 이질감마저 이겨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 또는 문화의 차이이면서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 자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편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긍정적이라 표현하기는 과하지만 아무튼 크게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 듯합니다. 삶의 연장이면서 좀 다른 세계로의 이전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기로 이사하는 정도? 다만 여기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서로 인정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후에도 추억하며 기념합니다. 다만 그 정도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과 그 문화권에서는 대단한 제례를 행합니다. 그러나 서양권에서는 꽃다발 정도 남겨둡니다.
죽음은 물론 이 세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경험일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당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설령 겨우 몇 개월의 한정된 생명을 선고받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자막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6년이 지난 지금도 잘 계시다고 말입니다. 영화 ‘페어웰’(The Farewell)을 보았습니다. 2019년 작품인데 우리는 좀 늦게 개봉하였군요. 미국 영화인데 중국어가 반 이상 나오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도 대부분 중국인이고요.
첫댓글 사는것 자체가 고난인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래서 웃음을 주신 듯합니다. 이기고 살라고. ^^
감사합니다
좋은 아침, 복된 한주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