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예수살기
어렵게 예수를 믿었다.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었다.
신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4대째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예수도 믿지 않으면서 교회를 다녔다.
내 기억으로는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은 적은 없었다.
무신론자로 교회를 다니는 모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친께서 너무 엄하셔서 가기 싫어도 가야하는 곳이 교회였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내가 누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진저리나게 너무 싫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고 싶었으나 나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였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인생을 살기가 어려웠다.
맨 정신으로 살기가 힘들었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취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술에 취해 산 적이 있었다.
인간의 유함함을 극복할 길을 찾지 못했다.
인생의 무의미와 허무가 깊어졌고 결국 인생을 포기하게 이르렀다.
이 때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알아가는 순례의 길이 시작되었다.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를 경험했다.
예수가 믿어졌을 때 굶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나이 설흔에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 때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목회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나의 삶에서 모든 소유격을 버렸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것이라 고백을 했고 그렇게 믿고 살았다.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것이라 믿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았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장애인들이 사는 재활원에서 5년을 살았다.
그들은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증거했다.
그리고 1980년도에 장애인들과 장애인교회를 개척을 했다.
1년 후에 재활원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었다.
결혼한 첫날 아내를 장애인들에게 ‘여러분들의 식모’라고 소개를 했다.
아내와의 갈등의 시작이었다.
혼자 살 때는 예수의 말씀대로 살기가 가능해 보였는데 결혼 후에는 어려워졌다.
그래도 아내는 날 잘 따라왔다.
그렇게 살기로 약속하고 시작한 결혼이었으니까...
목회를 시작하고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유지향적인 삶이 아닌 존재지향적인 삶을 산 세월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음을 힘들어하고 있다.
어느 순간 호흡이 끊어지는 날 나는 존재하지 못함을...
잠들면 아무 것도 의식할 수 없다는 것이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내가 살기로 선택하고 사는 삶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다.
지적장애인들을 만나면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자의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일까?
세상으로부터 수없이 거절당하는 삶을 경험했다.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해도 살아야하는 이유를 찾았다.
믿음과 사랑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따라 살았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목회를 했다.
그것이 나의 존재이유였다.
성린재활원, 인천미문장애인교회(개척), 온양온천감리교회(분쟁중에 있었던 교회), 이화감리교회, 대전보문감리교회, 동강감리교회, 미문선교회, 진남제일감리교회, 성린재활원 원목, 대전미문장애인교회(개척), 인천보육원 원목, 벌교원동감리교회, 성프란치스코교회, 엘림감리교회, 대전빈들감리교회, 툴루즈사랑교회, 개봉감리교회(분쟁중에 있었던 교회), 몽펠리에예사랑교회, 장애를가진사람들의모임, 하종감리교회. 지난 34년동안 섬겼던 교회와 기관들이다.
5년 전에 몽펠리에예사랑교회를 사임하고 한국으로 나올 때 여행가방 두 개를 들고 나왔었다.
갈 곳이 없어서 가방을 재활원에 맡기고 두 달 동안 동가식서가숙을 했다.
그 후 1년 동안 후배목사가 마련해준 - 주방도 화장실도 없는 - 지하방에서 생활을 했다.
1년 동안 아내와 화장실은 공중화장실을 사용하고 주방은 2층 어린이집 주방을 사용하며
지하방 생활을 했었다.
1년 동안 오십대 장애인들 20여명과 함께 <장애를가진사람들의모임>을 모였었다.
가난을 벗삼고 사는 삶을 살았다.
예수살기를 하자고 했다.
예수살기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는 삶이 예수살기라는 말을 한다.
과연 그런가?
아랫글은 7년 전에 프랑스에서 목회할 때 예수살기 홈페이지에 쓴 끌이다.
<예수따라살기
천박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요즈음 자주 예수를 따라살기를 하려는 모임을 보게 된다.
예수따라살기를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나도 처음 예수를 믿은 후 부터 겉으로는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내심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예수를 따라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책임이 없었고
예수님의 목회현장이라는 것이 나의 목회현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공생애를 짧게 사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웃기는 생각이지만 1-3년정도는 공생애의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28년 동안 목회를 했으니...)
나에게는 사생애와 공생애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혼자 살때에는 공생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혼하고 부터는 공생애라는 것이 없어진 것 같다.
목회자의 생활을 공생애라고 할 수 있을까?
결혼하고 예수님을 따라살겠다고 하면서 살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사는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예수따라사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통치가 않았다.
땅 문제 때문에 다투다가 흩어지고 마는 모습을 보았었다.
복장들을 독특하게 입는다고 예수를 따라사는 것은 아닐터인데
예수를 따라살겠다는 사람들의 복장은 좀 독특했다.
가정을 버리고 사는 것이 예수를 따라 사는 것도 아닐 것 같은데...
그래서 결혼한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살겠다고 하면 궁금해지는 것이다.
나는 처음 예수를 믿고 목회의 길을 가려면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소유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사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살지 않으면 목회를 그만 두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여러번 글을 통해 말한 것처럼 혼자 살 때에는 가능해 보였는데
결혼하고 나니 무소유로 살기에는 걸리는 일이 너무 많이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교육문제도 만만치가 않았다.
내 아이나 남이 아이나 같다는 생각을 해도 내가 돌봐야할 아이는 내 아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 먼저 돌봐야한다.
그래서 나는 냅다 기도만 한다.
(무소유의 사람을 살기로 결심한 때부터 내 사전에는 소유격은 없다고 했으니
내 아이라는 표현도 틀린 표현이다. 그래도 소유격을 없앴지만 혹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가족들이다.)
예수따라살기는 나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예수따라살기를 하는 사람들이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살까?
나는 지금도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다.
프랑스에 올 때 큰 여행가방 두개를 가져왔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살림살이가 많이 늘어났다.
나의 무소유의 기준은 예금된 통장을 갖지 않고 나의 소유의 집을 갖지 않고
나의 소유의 재산을 갖지 않고 항상 빈 손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생활이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만 기대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을 돕는다.
그러나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면 예수를 따라살기는 점점 더 멀어진다.
최소한 것을 가지고 산다고는 하지만 교인들이 마련해준 살림살이가 만만치가 않다.
천박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소유한 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회에서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은 무모해 보인다.
아니 거짓되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얼치기다. 얼치기 예수쟁이다.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예수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아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주님 보기가 부끄러워 냅다 기도를 한다.
주님이 부르시면 훌훌털고 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순천에 내려온 지 4년이 되었다.
목회하면서 한 지역에서 4년이나 있는 일은 처음있는 일이다.
잛으면 6개월 길면 2년 6개월이었으니까...
예수살기 모임을 하자고 했다.
예수살기도 모임이 있나?
혼자 가기 힘드니 함께 가자는 말로 이해를 했다.
타락한 교회를 보면 달리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아 예수살기를 함께 하기로 했다.
순천에 와서 촛불집회도 참석하고 버스를 대절해서 서울에 가서 거리시위도 참석했었다.
그러나 시위에 참석하는 것이 예수살기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촛불집회나 거리시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도리어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예수살기가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예수살기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소유나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살기는 존재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없이 사람들과 헤어지며 하는 말이 있다.
“가는 길이 같으면 다시 만나겠지요.”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이 예수살기의 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