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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를 가든 꼭 시장을 둘러본다. 시장에는 보고 듣는 것 말고도 후각, 미각, 촉각이 더하여져 오감 육감이 제대로 발동을 하여 삶의 생김이나 일상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조선족 시장, 과연 이곳은 어떠할까. 말투가 달라지고 사는 모습은 달라도 입맛이란 게 우리도 미처 모를 DNA가 전적으로 작용하여 여간해서는 전통을 잃지 않는다는 게 내 지론이다. 고향의 흙냄새는 인간의 본능으로서 먹고사는 삶의 본연을 말하는 것이다.
지구촌이 하나로 뭉쳐지지만 동네마다 특성은 여전한 것이 다 그 연유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특출 난 전통이라는 것도 무뎌지고 융화되어 또 다른 양상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조선족 시장이다. 큰 길을 돌아 들어가는 시장, 조선족 개장 집인 수상명월 반점이라는 가게를 돌아서자 쭉 펼쳐진 좌판들과 상점들이다. 우리를 말하면 무엇이 맨 먼저일까. 고추 말린 푸대 자루가 우선 눈에 들어 왔다.
가게 집에 부친 글귀 '고추 현장 가공' 고추를 빻는다는 방앗간인데 말이 이채롭다. 그 옆에 '잠장, 고추장 팝니다.'란 말은 또 어떠한가. 잠장! 묻지는 않았지만 나는 으레 된장의 다른 표현이거니 했다. 그리고 늘어진 갖은 작물과 반찬들. 장뇌삼, 오미자, 송이버섯. 메주, 북한산 북어포, 순대 ,깻잎. 아마 중국시장이라면 깻잎은 없었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민족만이 유일하게 먹는 음식이 깻잎이라는 것을 나는 얼마 전에 알았다. 소 힘줄을 따로 팔고 있었으며 개고기를 토막 내어 고구려 고분에 나오는 모습처럼 쇠고리로 해서 허공중에 걸쳐 놓았다.
깍두기가 보이고 인절미하고 송편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7원 주고 인절미를 샀다. 인절미를 무게로 달아 판다. 이것은 순전히 중국식이다. 우리는 대충 손에 쥐어 이정도다 싶으면 계량이 끝인데. 콩을 빻아서 고명으로 쓸 생각을 한 것은 그만큼 콩 장류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인절미는 홍제원 인절미가 유명하다. 아마 연암도 연행 가는 길에 그곳에서 인절미를 얻어먹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시대 중국 연행 길에 오를 때 모화관에서는 삼사신과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홍제원에서는 해당 관아의 관리들이나 가족, 친지들의 전송이 이어졌다. 모화관 옛 터는 현재 우리은행 독립문지점이며, 인근 서대문 독립공원에 독립관과 영은문 주초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행은 전별연을 마친 후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해가 뉘엿거릴 때쯤 고양 땅으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두운 녘에 고양 관아의 별관인 벽제관(碧蹄館)에 들었다. 대부분의 연행록은 “이날 30리를 가서 벽제관에 들었다.”라고 소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지금은 홍제원아파트가 들어서고 주택이 난립하여 옛 터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의 홍제원은 인왕산과 무악재아래 대로변에 위치하여 한양 서북지역을 오가는 공용여행자들의 숙박시설이자 휴식 터의 역할을 했던 공간이었다.
특히 사행단이 중국으로 향하거나 돌아올 때면 이곳은 환송하고 맞이하는 가족, 친지, 동료들로 북적거리고 자연스럽게 시장이 열리곤 했다. 지금도 먼 여행길에 나서는 이에게 여비를 보태주거나 하는 미덕이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노자(돈)보다 특히 ‘홍제원인절미’를 여행자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간편하게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인절미만한 것도 없다. 먼 길 떠나는 이들에게 조선의 인절미는 음식으로서뿐 만 아니라 고향을 그리는 매개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홍제원과 홍제교 사이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떡집이 많다보니 이지역의 지명 또한 자연스럽게 ‘병전(餠廛)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홍제동의 떡집들은 유명하다.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명태포라고 한자로 써 놓고 그 옆에 한글로 ‘짝태’라고 적었고 랄백채(辣白菜)라 적어 놓고 김치라고 한글로 적어 놓았다. 김치에 대해 주석을 달자면 우리의 농림수산부가 김치를 중국어 ‘신기 辛奇(신치)’로 이름 지었지만 잘 지은 이름이 아니다. 아마 ‘맵고도 신기한’ 음식이라는 취지겠지만 현대중국어에서 ‘辛’은 ‘맵다’는 뜻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맵다’를 ‘랄辣(라là)’라고 하며 김치를 랄백채(辣白菜)라 한다. ‘辛’은 고생하다, 수고하다의 뜻이니 이는 우리만의 작명법이 되고 만 셈이다.
설사 ‘辛’의 ‘맵다’는 뜻이 잘 전달된다고 해도 김치의 이름으로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지역은 서남쪽의 사천, 운남, 귀주, 호남 등 몇 개 성의 사람들인데 대부분 극빈지역이다. 비싼 한국 김치를 사먹을, 돈 많은 동남연해 지역의 사람은 매운 음식을 아주 싫어하고 기타 지역도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沉菜 침채(천차이)’라는 이름이 더 실감이 날 것이다.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침채가 김치의 어원이고 조선시대 문헌에서 김치를 침채라고 하였다. 침채의 고대발음은 딤치이다. 지금 평안도 방언에서 ‘김치 담그다’를 ‘딤장’이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상도, 함경도에서 짐장이라 하는 것이 바로 침장의 한자어음이다.
아무튼 이 조선족 시장은 우리 전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널려진 약초나 버섯까지 더하니 마치 내가 지리산 밑 동네 산청에 온 듯도 싶어지고 정선 아우라지에 온 듯도 싶어진다. 세상이 달라도 같은 종족의 맛은 천년이 지나도 어쩔 수 없다는 나의 지론이 들어맞아 뿌듯함마저 생긴다. 중국 시장 통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없는 것들이 꽉 들어찬 조선인의 입맛 향연, 자고로 이 만주 땅은 고구려 이래 불고기와 콩장류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민박 아줌마가' 이 동네는 두부가 맛나기로 유명해요.' 라고 한 말이 예사말이 아니다. 양념한 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마늘을 다져 비릿함을 가시게 하고 간장을 넣어 육즙에 달착지근한 맛을 더한 우리의 불고기.
불고기는 우리 대표음식이다. 불고기는 고기를 양념하여 숯불에 직화(直火)구이를 하는 것인데, 오늘날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 직화구이의 기원이 바로 고구려의 맥적(貊炙) 혹은 맥구(貊灸)이다. (쇠)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식문화는 원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 추운지방이니 고기를 걸어두었다가 불을 지피고 칼로 먹을 만큼 오려서 바로 구워 먹는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기에 양념을 하여 저며 두었다가 직화구이로 요리하여 먹는 음식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맥족(貊族)이라고 하며 이들이 바로 고구려인들이다. 옛 중국 진(秦)나라 때 쓰여진 〈수신기(搜神記)〉라는 책에 “맥적은 하찮은 다른 민족의 먹거리이거늘 태시 이래 중국인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내놓으니 이는 외국의 침략을 받을 징조이다”라고 적고 있다.
바로 예맥족인 고구려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 수신기의 기록을 보면 중국인들은 외국의 음식이 상에 오르는 것을 외세 침략으로 볼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맥적이 중국인에게 있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고급 요리로 인기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도 불고기 기원을 알아서인지 단양이나 어디를 가면 맥적이라고 쓴 간판을 내걸기도 하고 고구려 맥적 구이라고 아예 간판을 내건 집도 있다.
맥적은 장에 그 비법이 있는데 고구려인들은 콩장유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 맥적이 통일신라 이후 목축의 쇠퇴와 고려시대 숭불정책으로 곤욕을 치루었는데 맛의 진수로서 금기를 뚫고 고려 후기에 ‘설야멱적(雪夜覓炙)’으로 어렵게 부활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고려 후기 원나라 지배기에 육식을 하는 몽고인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민간에 잠적해 있던 ‘맥적’이 새롭게 재등장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설야멱적’의 기원을 몽고에서 찾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고구려의 맥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은 중국에서는 훠궈, 우리는 징기스칸 샤브샤브라 말하는 음식을 만든 사람들이다. 무릇 식문화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종교적 이유 등으로 인하여 쇠퇴하고 변형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절되기는 어렵다.‘설야멱적’은 맥적이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에 민간에서 잠적해 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이며, ‘맥(貊)’의 음을 따서 멱(覓)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 번 맛을 들이면 결코 맛을 저버릴 수 없는 게 사람의 속성이다. 개성 지방에서 유행한 설야멱적은 고기를 굽다가 냉수에 담구고, 또 다시 굽고 하기를 반복한다고 〈해동죽지(海東竹枝)〉라는 기록에 나온다. 여기서 고기를 굽다가 물에 담가 다시 구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쇠고기는 일소를 도살하여 그 고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질기고 기름이 적었다.
육질이 질기고 기름이 적기 때문에 그 맛을 돋우기 위해 양념을 하면서 고기를 연하게 숙성시키는 조리법이 발달하였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반찬의 기본은 된장에 있었기 때문에 고기양념과 숙성을 할 때에도 장류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장류의 강한 맛을 헹구어내기 위해 한 번 구웠다가 물에 담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다른 것으로 양념을 하여 구워 먹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콩장류에 능통한 고구려인들, 그렇다면 된장이 먼저 나왔을까 아니면 청국장이 먼저 등장 했을까. 뜻밖에 그들은 청국장을 무척 좋아했다. 고구려는 콩의 원산지이며, 옛 중국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고구려가 선장양(善醬釀)이라 하여 발효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시(청국장의 원조)’의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나라의 〈박물지(博物志)〉에서 ‘시’는 외국 음식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의 원산지가 바로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에서는 어떻게 하여 청국장의 원조인 ‘시’가 만들어졌을까?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정복사업을 활발히 폈던 나라이다. 그리고 경제의 상당부분을 정복전쟁을 통해서 조달하였고, 그 결과 부경이라는 창고가 발달하였다.
고구려 병사들은 정복전쟁에서 이곳저곳을 많이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보급부대가 없이 비상식을 병사들이 직접 지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삶은 콩을 말안장 밑에 깔고 타고 다니면 사람과 말의 체온을 받아 발효하게 되는데 이것을 비상식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요리할 필요도 없으며 완전식품일 뿐 아니라 고단백질이라 적은 양만 먹어도 많은 힘을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상할 염려도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휴대식품으로서 최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전국장(戰國醬)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에서도 ‘책성지시(柵城之豉)’라고 하여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군량으로서 ‘시’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시’ 혹은 전국장이 청국장으로 변하였을까? 한국의 전통에 정통한 이규태 씨는 『한국인의 밥상문화』에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오랑캐 병사, 곧 청국 병사들의 주된 군량이었던 데서 청국장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청나라 병사들의 휴대 식품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고구려 식 구들장이 있으면 당연 청국장은 뒤따라가지 않을까. 따뜻한 방 한가운데 모셔두는 것이 콩의 발효제, 바로 청국장이다. 간장과 된장에 대해서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간장과 된장에 대해서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아는 일에 대해서는 기록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 적지 않아서 그 증거를 도시 찾을 수가 없다.
삼국시대 초기에 고구려의 ‘장’에 대한 기술이 있을 뿐 그 이후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장 담그기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 장 담그기가 일상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각 가정에서 행해지는 장 담그기 기술은 문자로 표현하여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장 담그기는 각 가문 여인네들의 기본적인 일이었고,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오랜 시간에 걸쳐 체험을 통해 전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문자나 말로써가 아니라 눈대중과 손대중 그리고 감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자로서 나타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삼국시대에 어떻게 된장이 완성되었을까? 이 역시도 상상 속에서 추론할 수밖에는 없고 굳이 알아 볼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아무튼 그 어느 누구도 고기구이에 대해서는 고구려인을 따라갈 수 없었음이다. 당연 지천에 넘치는 게 동물이니 껍질은 벗겨 모피로 쓰고 남는 육류는 풍성했다. 콩장류가 풍성한 마당 간장에 재여 굽다 말리고를 반복한다면 그 담백한 맛은 또 오죽했을까.
특히 멧돼지 맥적은 알아주었다하니 그게 바로 지금에 돼지갈비 구이가 아닌가. 숯은 또 어떠한가. 구들장을 데우고도 남는 땔감이니 당연 숯불구이도 나올 법 하다. 신라는 숯이 모자라 나중에 애를 먹었다지만 고구려는 그런 염려는 없었다. 고구려 맥적 집은 다시 그 시기를 만나 온 동네가 요즘은 고기구이집이다. 거기에 삼겹살이라는 새로운 부위가 탄생되어 날로 번창하는 맥적구이집이다. 우리가 우리 원천을 모르고 단지 달착지근하니 서양인들이 좋아하나보다 하면 큰 어리석음이다.
첫댓글 맞소이다. 동물들도 새끼들이 어미의 냄새를 잃어버리면 결국은 죽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어디를 가든 한민족의
냄새를 잃어버리순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