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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적 예레미야 연구 동향
김학준
1) 최근 예레미야 연구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야처럼 많은 초상을 지닌 인물도 드물다. 자유주의 성서학자들은 다른 예언자들과 다르게, 예레미야에게 소위 "심리-전기적"접근법이라는 연구를 시도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생애에 대해 연대기적 설명을 제시했고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생각을 들추어 놓았다. 영어로는 존 스키너(John Skinner)의 작품이 최정점에 있다 할 이 접근법은 단지 자유주의 자신의 가정 때문만 아니라 명백히 성경 자체 내의 예레미야의 인격에 대한 비상한 관심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망한 것 처럼 보였다. 책의 "전기적"인 부분이 특별히 길고, 무엇보다 자유주의자들이 그 책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소위 "고백들"에서 예언자의 "나"가 특별히 두드러진다.
제2의 중요한 요소는 모든 자료가 확실한 연대 순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하는 상당량의 연대의 존재이다. 예를들면 특별한 탄식은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에 대한 예언자의 응답으로 확실히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극단의 심리-전기적 접근법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그것은 자유주의적 예수의 생애가 걸었던 길로 가버렸다. 최근 몇몇 학자들은, 예를 들어, 브라이트(Bright), 베리지(Berrige), 바이페르트(Weippert), 아직 예레미야를 독특한 개인으로 부각시키는데 관심이 많지만, 그들은 스키너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 많은 부분의 최근 예레미야 연구가 과거 전통에 대해 의식적이고 극단적인 반작용 속에 있다. 두가지 형태의 반론이 있는데,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1)"철저한 예배학"
첫째는 계속해서 관심을 역사적 예레미야에 중심을 둔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주의적 이해에 시대착오적적, 감상적, 개인주의적으로 도전한다. 이 견해의 최고점은 레벤트로우(Reventlow)의 "예레미야 때의 예배와 예언자의 '나'"이다. 레벤트로우의 예레미야는 성전에서 제의를 집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제목이 나타내는 것처럼 그 책에서 일인칭 단수의 사용은 예언자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편에서 "나"는 형식적으로만 요구되는 것으로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전에서의 제의적 상황을 가리킬 뿐이다. "개인적 증언은 예레미야서에서... 찾아볼 수 없고, 최소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찾으려고 하는 그 부분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런 진술에는 괄목할 만한 자료로 올라가 있는 "고백들"에서도조차."
예레미야의 고백(이하 고백)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 백성들의 기도를 표현한다.즉, "거기 나타나는 '나'는 완전히 '우리'로 넘어간다. 그것은 공동체의 표현이자 구체화의 다름 아니다." 고백들에 더하여, 레벤트로우는 심리-전기적 관점의 다른 굳은 기둥으로 그의 관심을 돌린다. 소명 환상은, 다른 성직자가 야웨의 역할을 하는, 성직 안수 예식이 된다. 그리고 민족의 운명에 대한 민감한 영혼의 고통스런 부르짖음은, 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의 탄식으로 보았다, "가뭄때의 기도"가 되는데 예언자의 직업이 그것을 읊조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의 신탁에서 예레미야의 인격에 대한 것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로마 카톨릭 신부가 하는 말을 기록한 것에서의 경우처럼.
2)예레미야 전승과 편집
두 번째 반작용이 더 널리 퍼지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다. 그것은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무엇보다 후기 예레미야적인 신앙을 가진 공동체의 산물로 보아야 하고, 이 관점으로부터만 계속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예언자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수 있는가를 물을 수있다. 니콜슨(Nicholson)의 책 제목인 '포로민을 향한 설교'는 예레미야의 산문전승 전체가, 예레미야가 죽은 후, 바빌론에서 설교 활동의 침전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포로민들에게서 경청하기를 희망한 어떠한 종교적 시작은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왜 하나님의 약속들이 거짓으로 드러났는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설명해야만 했다. 니콜슨은 주장하기를 이러한 질문에 오랜 전승으로부터, 포로기 오래전은 아니지만 신명기와 요시야의 개혁의 책을 만들어 낸,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설교한 신명기적 신학자들의 집단이 있었다. 개혁이 실패하고 포로기가 왔을 때, 그들은 작업을 계속해서 주요한 작품인 "신명기 역사서"와 예레미야서를 출간했다. 이 모든 작업의 목적은 시내 계약의 언어 내에서 이스라엘의 번영이 순종의 결과이고, 불행이 불순종의 결과인 것과 포로로까지의 처벌이 계약이 맺어질 때 야웨에 의해서 이미 경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 그러한 일이 이어났는가?"에 대한 대답은 "조상들의 죄 때문에"였다.
예레미야에게 속한 것으로 알려진 설교는 한 가지 역설을 보여 준다. 심판은 분명하다. 그러나 회개도 가능하다. 예레미야 자신의 상황에서는 이 모순은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콜슨의 견해에서 진정한 청중은 포로민이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역설의 두가지 면이 똑같이 필요하다. 포로기 전에 심판은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일격이 몰아친 후인 지금, 회개의 가능성은 희망의 유일한 근거이다. 이와 같이 예레미야는 그가 자기의 시대에 말한 것도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도 말하게 되었다. 우리는 포로민들이 의미없음으로부터 의미를 예레미야 전승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에 예레미야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산문에서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는 것은 신명기적 설교가들이 그들의 상황에 말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 개인의 소개는 포로민들의 요구에 맞춰진 한 전형으로 규정되고 있다.
상당히 중요한 차이를 가지고 티엘(W. Thiel)은 비슷한 줄기를 따른다. 그는 이 신명기적 활동을 포로사건 후 유다에 놓는 노트의 견해를 따르면서도, 현재의 예레미야서를 신명기적 활동의 산물로 본다. 그는 렘1-25장에서 예레미야 전승에 대한 매우 신중한 신명기 편집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니콜슨을 넘어 훨씬더 세밀하게, 편집자들의 배열이 산문 뿐 아니라 시문의 조직에도 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티엘의 견해에서는 그들은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자신의 언어로 뿐 아니라 더 미묘하게 예레미야 자신의 신탁의 배열로도 나타냈다는 것이다. 몇 단락으로 구성되있는 그 책의 첫 번째 절반 모두는, 그 단락들에서 시문과 산문이 서로를 설명해 주고 있다.
나콜슨과 티엘 모두 시문 신탁의 많은 부분을 예레미야 자신의 저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문 역시 다른 본문들이 취급된 방법에서 면제되어 있을 수 없었다. 게르스텐베르거(Gerstenberger)와 군네벡(Gunneweg)은 예레미야의 고백들을 편집적인 구성이라고 주장한다. 예레미야서의 많은 부분이 예레미야에게서 2차적이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견해가 아니다. 이미 세기의 전환기에 둠(Duhm)이 마음대로 수술을 실시해서 아주 적은 양의 예레미야 자신의 저작만을 발견했다. 이차적인 자료에 대한 가치평가에 아주 굉장한 변화가 일어났다.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이차적인 것들 속에 있는 예레미야 자신의 진실한 자료의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둠은 예레미야의 이차적인 자료가 지닌 종교적인 가치를 완전히 무시했다. 반면에 최근의 예레미야 전승과 그 편집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이 포로기의 신학을 밝혀준다는 면에서 이차적인 자료에 대해 극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군네벡은 태도의 변화를 확연히 증명해 준다.
학자들이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하여 그렇게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했던 이 예언자는 전승자들에 의해 그의 선포와 그것의 해석의 뒤에 우리가 전에 가정했던 것보다 훨씬더 많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손실이다. 예레미야의 예언과 또한 이차적인 해석은 심리적으로 비춰지기에는 경외심이 덜하지만, 대신에 신학적으로 이해될 더 많은 말씀을 가지고 있다.
W. Schottroff의 글은 논의를 더 깊이로 이끌어 간다. 그것은 렘2:1-3에 대한 주석인데, 부제 "예언자를 주석하는 방법에 대한 비평"은 한 짧은 절을 훨씬 넘어서는 목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예레미야의 가장 초기의 신학에 중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음에도 쇼트로프는 사실은 이 세절이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편집 후기에 한 첨가로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럴 수도 있다.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그가 이 결론을 받아들여진 방법에 대한 완벽한 역전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연구는 가정해 왔다.
예언자 자신이 썼을 가능성이 없다고 증명될 수 없는 각 단위는 그 저자의 작품인 것으로 주장해야 한다고. 편집비평적 제안은 보통 주석 과정의 마지막 국면을 형성한다고.
반대로 "예언자들에 대한 적절한 주석은 무엇보다도 편집비평을 선행해야 한다. 주어진 복잡한 본문에 대한 편집적인 공헌이 분명해질 때만 우리는 연구되어온 개별적인 전승들에 대해, 그리고 그 기원에 대해 물을 수 있다. 주석가들은 우선 주어진 절이 이차적일 가능성을 추측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주어진 예언자의 시대의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자료만을 진품으로 가정해야 한다. 그것이 예레미야의 산문과 시문의 이것 저것을 예레미야의 저작임을 의심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우리가 그러한 지식을 갖도록 강제하는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우리가 역사적 예레미야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주장은 또 아주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 편집이 우리에게 일관된 예레미야에 대한 모습을 주었는가? 어떤 연구자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G. Wanke는, 그 책의 "전기적" 부분에 대한 연구(3인칭 서술)에서, 그가 아주 다른 역사를 지녔다고 믿는 두 종류의 자료 사이에 예리한 차별화를 만들어 냈다. 그의 견해로는 그 주요한 이유는 그 둘이 양립할 수 없을 만큼 차이를 지닌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7-44장에 이르는 길게 연결된 단락의 예레미야는 가는 곳마다 그의 말이 거절당하는 인물이고, 그는 그것을 야웨의 말씀에 대한 거절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이 거절의 끔직한 결과에 굴복한다. 우리는 그를 백성들의 어리석음으로 열린 절망의 심연에 둔다. 반대로, 19-20:6; 26-29장; 36장의 대결 이야기들의 예레미야는 그의 선포가 산당에서 저항에 직면했을 때 싸움 속으로 들어가는, 그러한 이야기의 영웅이다. 사건들의 전환은 그의 혐의를 풀어주고 적들을 패배시킨다.
반케가 발견한 모순된 두 예레미야는 다른 문학 형식으로 살아 남았다. 37-44장은 예언 문학에서 독특하다. 그것들은 "수난 설화"라고 불러도 부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그룹의 절들은 "예언자의 전설"과 유사한 형태에 속하는데, 여기서는 야웨의 예언자가 특징적으로 자신만만하고, 더 나아가서는 왕에게 상담해 주는 상담자이다. 다른 문학 형태가 다른 예레미야의 모습을 제공하는 것이 있는가? 최근의 기고는, 최소한 두가지 경우에서, 제기하고 있다. "개인적 탄식"의 예레미야(즉, 고백의)는, 이 부분들의 예레미야 저작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언자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본보기이거나, 보다 일반적으로, 야웨께 충실한 인생의 표본이다.
고백들은 예레미야의 선포와 인격의 해석이다. 그것들은 탄식 시편의 전형적인 "나"의 경향을 따라 그의 운명을 해석한다. 예레미야가 고통당하는 것은 이미 탄식 공식이 표현한 것의 성취요 구체화이다. 예레미야는 전형적으로 고통당하는 의인이다.
군네벡은 고백들이 역사적인 지시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전승자들은 고백들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예레미야의 경험과 자신들의 경험 모두에 관계시켰다. 그러나 이 절들에 결정적인 빛을 던져준 것은 개인적인 탄식의 양식을 사용한 것이다. 반면 "공동체의 탄식"의 예레미야는 절대적으로 민족과 함께하는 국가를 위한, 심지어 하나님의 거절이 확실함에도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예언자이다. Hertzberg는 이것이 ,중재에 포함되지 않은, 예언자의 역할밖에 서있는 예레미야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예레미야들의 양립가능성이 어느 정도인가가 아니라 그러한 정도로 예레미야를 형상화하는 초상을 구술할 정도까지 어떤 문학 형식을 사용하였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예레미야서의 전부분에서 조리있는 예레미야를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현대의 예레미야 전기작가들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임무에 착수한 일이 있는가?
우리의 예레미야 전승에 대한 마지막 질문은 양식 비평적(form-critical)인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적어도 몇가지 힌트가 있는데, 그것은 그 전승이 예레미야 자신의 신학에 의해 예언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독특한 모습으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두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니콜슨은 예레미야가 전승에서 ,가장 명백하게는 소명 설화에서, 신명기 18장15-18절의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맞추어졌으며, 뿐만 아니라 "거짓 예언자"와의 투쟁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도 그렇다. 그의 죽음 이후에 예레미야는 가장 뛰어난 두 번째 모세로 이해되었는가? 둘째로 고난받는 사람으로서의 예레미야에 중점을 두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고백들과 37-44장에서 이미 발견했다. 예레미야서에서 어떤 구속적인 고난에 대한 교리도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예레미야가 부서진 말씀은 포로기의 생존자들에게 삶을 의미하는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어떤 주장이 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제2이사야에게 배경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군네벡과 니콜슨, 그리고 다른 이들이 후기 예레미야 공동체에 돌린 예레미야의 신학적 의미에서 강한 흥미의 관점에서는 가능성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히브리 예언서 연구
1. 인물과 시대적 배경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 말기의 바벨론과 이집트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약소 국가의 정치적 현실을 여실하게 보준다고 브루지만(Bruggemann)은 그의 「국제신학주석」(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antary)에서 이야기한다. 이 같은 상황은 대부분의 이스라엘 역사서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주전 598년과 587년 사이의 유다 공동체의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말한다. 브루거만은 예레미야서가 이같은 역사적 위기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분석과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예레미야 자신은 그보다는 신학적인 해석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예레미야의 인물에 관해서 브라이트(Bright)는 보수적인 입장을 택해 성서의 증언을 거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브라이트는 아나돗에 사는 제사장들이 거의 모두 예레미야의 친척일 것이라고 보며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소년'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의 경건한 가풍의 영향을 받고 자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면서 예레미야의 40여년간에 걸친 예언 활동은 '영웅적인 실패'이며, 이스라엘 역사 위에 그처럼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예언자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캐롤은 예레미야서가 기본적으로 편집자의 전승 발전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전제하에 예레미야의 전기를 역사적으로 운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캐롤은 예레미야서의 경우 칠십인 역본에 '예언자 예레미야'라는 표현이 4번밖에 없으나 맛소라 역본에는 26번이나 사용된 것은 역사적 현실과는 상관없이 편집자의 신학적 경향을 잘 드러내는 경우라고 보고 있다. 그래엄 올드(Graeme Auld)도 그의 '예언자'라는 용어 연구에서 맛소라 본문은 칠십인역에 비해 예레미야에게 '나비' 칭호를 붙여 그를 참예언자로 부각시키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캐롤은 최근 논의되는 문학비평의 입장에서 유다 공동체의 붕괴와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에 대한 이야기는 구체적 역사 못지않게 하나님과 인간의 실체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캐롤은 예레미야의 역사성은 예수의 역사성 구성만큼 힘들다고 보며, 예레미야서가 보여주는 예레미야는 사회적, 정치적 및 신학적 요소가 전승적으로 함께 뭉쳐 발전한 것이라고 본다. 브루거만은 위의 두 극단적인 입장을 종합하여 '인물(Persona)'의 재구성은 역사적 실체의 신앙과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브루거만은 역사적 예레미야에 대한 회상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전승사적인 재구성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전승사가들은 역사적 예레미야의 생애를 토대로 한 예술가의 '초상화'를 그려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브루거만은 역사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실체의 예레미야가 아닐지라도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예레미야의 실체를 우리는 운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근 성서연구의 경향이 본문을 역사적 주인공의 심리적 및 정신적 반향이라고 보는 대신 점차 복잡한 전승 발전의 복합체로 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크렌쇼(Crenshaw)는 예레미야의 전승을 '살아있는 전승'(living tradition)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본문이 예레미야의 역사성을 나타낸다는 전통적인 입장보다는 전승 발전과정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부각된다는 쪽으로 기울지만, 한편 예레미야의 생애와 메시지가 온전히 포로기 시대 신명기 사가의 재구성이라는 캐롤의 극단적인 입장은 배제한다. 그는 예레미야 시대이거나 아니면 포로시대이건 간에 예레미야에 관한 살아있는 전승 곧 공동체의 신학적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2. 예레미야서 형성과 구성
예레미야서는 구약의 어느 책보다 칠십인역과 맛소라 역본 사이에 현격한 차이를 보임으로 인해 그 전승 발전과 형성의 복잡성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서 형성에 관해선 지금껏 둠(Duhm)과 모빙켈(Mowinckel)의 ABC 자료설이 통용되고 있다. 여기의 ABC자료설이란 시 형태로 된 예레미야 자신의 신탁 모음(280절), 산문 형태로 된 예레미야에 관한 바룩의 기록(220절), 그리고 후대 신명기 사학파의 신학적 해석 부분이다(850절).
브루거만은 최근의 예레미야 연구는 예레미야서가 위와 같은 세 부류의 자료군으로 형성되었다는 문서 분석의 차원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면이 있음을 지적한다. 브루거만은 모빙켈의 세 자료설 이후에 논의되는 최근 경향을 세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는 보수적 입장으로 전통적 역사 비평적 방법으로 홀러데이(Holladay)와 브라이트(Bright) 등의 입장이다. 차일즈(Childs)는 이들의 입장은 C자료의 산문체가 역사적 예레미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평한다. 따라서 이들의 주석은 대부분의 구절을 예레미야 자신의 것으로 보며, 각 본문의 연대와 역사적 배경을 규명하는데 많은 신경을 쓴다고 본다.
두 번째 입장은 캐롤이나 아크로이드(Ackroyd), 그리고 니콜슨(Nicholson) 등 영국 학자들의 입장으로서 이들은 포로기에서 신명기 역사학파가 예레미야서를 편집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포로기 편집자가 신명기 전승의 영향을 받아 예레미야의 자료를 포로기 공동체에 맞도록 재해석하고 재편집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면 예레미야서 대부분은 예레미야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를 설교자로 표현하고자 하는 후대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역사적인 문제들을 경전 비평적 입장에서 수용하려는 차일즈의 견해이다.
홀러데이는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통해서 예레미야의 생애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주석작업에 앞서 예레미야의 생애를 주전 627년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새계약을 선포하고 이집트로 호송된 587년까지를 연대별로 서술하고 있다. 홀러데이는 이같은 예레미야 연대기 재구성의 서술 중에 자신은 분명히 니콜슨과 캐롤 등의 견해와는 입장을 달리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니콜슨은 예레미야서의 산문체 설교나 변론이 포로기의 상황에 맞도록 신명기 사학파가 재해석 내지 재편집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캐롤 역시 1981년 예레미야 연구에서 예레미야의 생애는 주전 6세기 포로기 상황에서 당면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공동체의 편집과정을 통한 해석이라는 견해를 표명했고, 그후 1986년 주석에서 보다 분명히 밝히고 있다. 캐롤은 본문 주석에 앞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독자는 성서본문을 신비화시켜 액면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캐롤은 자신의 입장이 신명기 사학파의 펹ㅂ작업의 시기를 반영한다고 본다. 맥케인은 예레미야 1-25장이 거의 예레미야 자신의 것이며, 이 부분의 형성은 핵심적인 본문이 거기에 대한 주석을 필요로 함으로써 계속 발전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캐롤은 예레미야서 형성에 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이론 중에서 예레미야 1-25장이 무질서한 체계 속에서 조금씩 자라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브루거만은 최근에 발간된 주석서들의 서평에서 홀러데이는 너무나 역사성에 치중하며 캐롤은 '신명기적 예레미야' 구성에 힘쓰며, 맥케인은 본문 비평에 치중한 언어학적 탐구에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평한다.
차일즈는 원래의 예레미야는 신탁부분이 포로기 신명기 사학파에 의해 재해석됨으로써 원래 부분이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나 후대의 재편집 관정이 그것을 구원신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해석한다. 차일즈는 성서본문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독립시켜 심판과 구원이라는 신학적인 메시지를 어느 세대에나 전할 수 있는 경전적 메시지로 해석하는 것이다. 브루거만은 홀러데이와 캐롤의 입장이 역사와 전승 측면만 강조하다보니 신학적인 면은 등한히 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차일즈의 입장은 홀러데이와 캐롤의 입장이 양극단인데 비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제시한다고 본다.
2.예레미야의 초기 예언
Ⅰ.요시야 13년에 소명 받음(BC 626/7)
1)북방의 적을 Scythian으로 생각하고 예언하였으나 성취도지 않아서 실망하고 예언활동을 잠시 중단하였다. "예레미야의 고백"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2)주전621년 요시야의 개혁의 기초가 되는 율법책이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예레미야도 거기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전하였다. 이것이 그의 친족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를 죽일 모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이 진행되면서 개혁이 충분히 깊이 있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여 예레미야는 개혁자들과 결별하게 되었으며, 예언활동을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3)"북방의 적"에 대한 예언이 갈대아인의 출현으로 다시 쟁점화되기 시작하였다. 예레미야는 변화된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위협에 대한 고려로 북방의 적을 다시 예언하였다.
반론들
1. C.C. Torrey
1-10장은 주전 6세기의 예레미야와는 상관없이 주전 3세기에 위경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거기서 배경이 되는 사건들은 상상으로만 관계되어있을 뿐 당시의 시대와는 관계가 없다. "북방의 적"은 알렉산더 왕의 생에를 소급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인 소급적용에 대한 가능한 동기 제공이 부족하고 렘1-10장의 예언은 당시의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괴로워하며 말한 것으로 공인(hallmark)되고 있다. 예레미야 연구에서 큰 파장을 남지기 못하였다.
2. T.C. Gordon
예레미야의 소명 시기를 요시야 13년에서 23년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 주전 616년, 요시야왕 23년에 예레미야의 소명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Scythian가설과 요시야개혁과 예레미야의 연관을 거부하고, 소명시기를 신바벨론 제국의 발흥과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 C.J.Gadd가 기존의 니느웨 멸망 연대를 주전607년에서 612년으로 변경하여 제시한 것에 그 유일한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이집트의 아시리아 원군은 616년에 이루어지고 이해에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이해에 소명을 받았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3. Horst
그는 예레미야 1:2절의 소명 시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LXX의 어형에 보면 호세아, 요엘, 미가, 스바냐의 도입구와 유사하고 이 때문에 이 본문을 후대의 편집자들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이것이 온전한 전승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며, 다른 시기를 설정할 근거가 되지도 않는다. Horst는 예레미야의 소명을 요시야의 통치 후로 본다. 렘25:3은 예언의 시작을 예언자 자신이 요시야 13년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3:6의 한 신탁에 대한 자서전적인 도입중 하나와, 36:2의 하나님의 말씀의 임함에서 그의 목회 시작을 요시야의 통치기로 나타내고 있다. 이 구절들이 다른 책에 나타나는 도입구 때문에 변경될 수 없고, 편집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
4. J.P.Hyatt
Horst의 견해를 따랐다(렘1:2, 25:3의 증거 거부). 주전 614-612년에 목회를 시작해서 요시야 통치 끝까지 예언활동을 계속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최근 Hyatt는 예레미야의 목회 시작 시기를 여호야김 통치기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요시야 13년은 예레미야의 출생연도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 또한 증명할 증거가 부족하다.
이 견해는 Scythian 가설에 대한 부인과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을 지지했다는 견해를 부인하는 것에 근거한다. 그리고 여호야김보다 더 이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예언이 없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Ⅱ.가문의 문제
도입구에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의 아나돗 제사장 가문의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다윗의 제사장이었다가 솔로몬에 의해 면직되어 그의 영지인 아나돗에 돌아왔던 제사장 아비아달의 가문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와 고전을 통틀어, 몇몇 학자들은 예레미야의 아버지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한 예루살렘 제사장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거부되었다.
Meek는 더 나아가서 예레미야가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라는 점에까지 도전한다. 그는 "제사장 가문의"라는 문구를 첨가로 본다. 분명히 예레미야가 제사장직을 수행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일반적으로 그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나 제사장직을 수행하지는 않았다고 믿고 있다. 긔의 태도가 제사장적이기 보다는 예언자적이라는데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그가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또 "제사장 가문의"라는 문구가 여기만 발견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구약 성경에서 한번 나오는 성경구절을 주석으로 배게되어야 한다면 많은 양의 것들이 배제되여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가 제사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면 분명히 이상한 서술이지만, 그 구절은 예레미야가 제사장 가문의 일원으로 기술되어 있어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제사장 가문의 일원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기술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본문상의 증거가 없고 학자들 중에서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만약 "제사장 가문의"라는 구절이 주석이라고 해도 그것은 실수가 아니다. Meek는 이 주석이 예레미야가 제사장이었다는 논리의 비약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만약 이런 경우라면 그를 제사장으로 기술하였을 것이다. 후대에 첨가되었다 하더라도 예레미야가 제사장인 것을 잘 아는 사람에 의해 기술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예레미야의 친족들이 그를 죽일 음로를 꾸민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레미야가 "게약의 언어"들을 설파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장(障)에 나타나 있다. 많은 학자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요시야의 율법책을 가리키고 그것으로 인해 예배의 중앙집중화가 뒤따랐다면, 당시의 억압받는 아나돗 지방성소의 제사장 가문의 분노는 이해할만 하다. 만약 그의 가문이 제사장이 아니라면 이 분노를 설명할 다른 대안이 없다. 우리가 오늘날 우리 앞에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서, 우리는 유력한 증거를 찾아야만 하며, 의심할 이유가 없는 기록된 사건에 대하여 빛을 던져주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보존된 증거들을 가볍게 치워버려서는 안된다.
Ⅲ. 스키티안(Scythian) 문제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았을 때, 북쪽에서 위협이 몰아쳐오고 있었다. 그가 소명받을 때 보았던 두 번째 환상인 끓는 가마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북으로부터 재앙이 이땅의 거민에게 몰아쳐 올 것이다." 이 견해가 18세기에 처음으로 심화된 이래로, 이것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약간 언급한 스키티안(Scythian)의 서아시아 침략을 언급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이 가정은 아직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지난 반세기 이래로 F. Willke의 도전을 따르는 많은 학자들의 증가로 금세기 초부터 거부되고 있다.
헤로도투스는 스키티안이 어떻게 아시아를 침략했고 메데를 정복했으며 그리고나서 아시아에 퍼져나갔는가-그들은 아시아를 28년동안 지배했다-를 관계시키고 있다. 스키티안이 이집트를 침략하기 위해 팔레스틴(Palestine)을 통과해 행군했으나 삼메티구스(Psammetichus)가 그들을 매수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은 북쪽으로 돌아가다가 아스켈론(Ashkelon)에 멈춰서 한 성전을 약탈했다. 스키티안이 앗시리아(Assyrian)에 끼친 영향에 한해서는 쐐기문자자료로부터 그들의 활동을 알수 있지만, 그들의 팔레스틴을 통과한 침략에 대해서는 헤로도투스의 이야기에만 기록되어있다. 때로는 스키티안 무리들이 니느웨를 멸망시킨 공격에 참가했다고도 하나 오히려 니느웨를 공격하는데 참가한 우만만다(Umman-Manda)가 더 이른 침략자들의 무리였을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서스테페(southern Steppes)에서 와서 메디아(Media)로 들어갔으며 지금까지 메데(Medes)인으로 섞여살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이야기 중에는 과장과 있을법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스키티안이 몇 년 동안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다니는 곳마다 공포를 뿌리고 다녔다면 몰라도 그들이 28년 동안 아시아를 지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헤로도투스가 기록한 대로 삼메티쿠스가 그들을 매수해서 쫓아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기록이 이집트 자료에도 없고 반대의 증거도 없다. 헤로도투스의 이야기가 순전히 작가의 고안물인지는 알수 없다. 아스켈론에서 스키티안 행동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작업인 특별한 조사에 기초해서 정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관심이 아스켈론의 여신을 아프로디테(Aphrodite)와 동일시 하는데 있었다는 것과 그가 당시의 아스켈론에 유행하던 전설을 받아들였다는 논의에 근거해서 그의 견해를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스켈론의 제의 전설이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통과한 약탈의 이야기와 이집트의 스키티안 매수 이야기를 창작했다는 것은 거의 가정할 수 없다.
벳샨이 그리스시대에 와서 스키토폴리스로 알려진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플리니(Pliny)와 신셀루스(Syncellus)의 말처럼 스키티안이 한때 거기 살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이 이름이 헬레니즘 시대에만 알려져 있고 벳샨 발굴에서 스키티안과 동일시할 아무것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다시 반론하기를 스키토폴리스가 헬레니즘 시대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 전시기에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요,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스키티안이 팔레스틴을 약탈하며 행군해왔다가 돌아갔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그들이 지나간 곳에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발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시리아에서 최근에 스키티안이 얼마동안 머물렀다는 증거를 고고학자들이 발견했다. 더욱이 벳샨에 스키토폴리스라는 이름이 처음 주어진 것이 언제건, 전승에서 스키티안과 전혀 관계없는 이름을 그도시에 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전승은 헤로도투스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헤로도투스는 스키티안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 도시를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그것이 헤로도투스가 적고 있는 시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러면 언제였느냐고 물을 권리가 있다. 스키티안의 또 다른 팔레스틴 침입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당시에 스키티안이 앗시리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앗시리아의 문서에 확실히 나와 있다. 기록되어 있는 침략을 그 이름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더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확신있는 것 같지 않다.
더욱이 헤로도투스의 말이 당시에 외부적인 침략으로 위기에 빠져있던 팔레스틴의 주변 정세에 있어서 예레미야서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헤로도투스는 그 침략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삼메티쿠스통치 때에 니느웨가 키악사레스(Cyaxares)에 의해 멸망되기 전 어느때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집트가 주전 616년에 앗시리아의 원조를 위해 행군했으니, 이 사건 전 어느 때였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요시야의 개혁 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 있는 요시야의 소명 시기로 우리를 근접시킨다. 학자들마다 정확한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헤로도투스의 이야기를 근거없는 것으로, 스키토폴리스의 이름을 무관한 것으로 배제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예레미야서에 주어진 예레미야의 소명시기를 배제하는 것은 논박이라기 보다는 증거의 기각이라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스바냐는 요시야 통치기에 예언하였고 그의 재앙에 대한 예언의 배경은 스키티안의 위협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요시야의 마지막까지 다른 역사적인 위험은 마음속에 없었을 것이다. 주전 612년 니느웨 멸망 전에는 누구도 바빌론(Babylon)을 서쪽으로 위협이된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심지어 니느웨의 멸망 후에도 그 자방에서 팔레스틴으로의 즉각적인 위험은 거의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집트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관통하여 유프라테스 서쪽을 점령하였고, 반면에 요시야는 이집트를 저지하려는 헛된 시도에 목숨을 잃었다. 스바냐가 이집트를 그가 예언한 약탈의 도구로 생각했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스바냐도 예레미야도 그 파괴자들에 대한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뿌리없이 유랑하는 스키티안 무리와 잘 들어 맞는다. 예레미야가 스키타안을 그의 신탁 원본에서 그 원래의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것은 근거없는 생각이고 스바냐의 신탁에 그들의 이름이 없음도 근거를 주지 못한다.
몇몇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 마음속에 특별한 적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초기 예언들은 모호한 종말론적 예언들이라고 주장해 왔다. 스바냐는 훨씬 더 일반적인 종말론적인 예언에 가깝다. 그러나 두 예언자 누구도 하나님이 곧 세계에 가져올 재난의 도구로 어떤 인간 권력을 생각하지 않고 말했을 것이다. Welch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열방의 파괴자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이 발생시킨 개념의 첫 번째 모호한 힌트"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적이었던 반면, 예레미야가 예언한 파괴하는 그 적은 그의 백성을 훈련하는 도구이고, 스바냐와 관련해서는 그것은 주의 날이고 적그리스도의 날이 아니다.
몇 명의 최근 저작자들은 아직도 스키타안 가설이 주류가되기 전에 우세했던, 예레미야에게 소명이 임한 주전 626년에 이미 처음부터 그 적이 갈대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당시에 갈대아인들은 앗시리아에 대한 반역을 시작했을 뿐이었고, 독립을위해 싸우고 있었으며, 앗시리아에 위협도 되지 못했고 서쪽에(유프라테스 서쪽) 있는 나라들은 방치해 두고 있었다. 한세기 일찍 이사야는 갈대아인들이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더 이전의 시도에 갈대아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하여 히스기야에게 경고했는데, 이때에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속에 그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주전 626년에 예레미야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소명환상의 두 번째에서 그에게 임한 메시지가 "내가 북방 왕국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이다"였다.
3.예레미야와 요시야 개혁
3) 요시야의 통치(주전 640-609년)
(1)유다의 독립
am낫세는 그의 긴 치세 동안 끝까지 니느웨의 유순한 봉신으로 지냈고, 뒤이어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몬(Amon, 주전 642-640년)은 분명히 부왕의 정책을 어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21:19-26). 아몬은 고관들로 짐작되는 몇몇 왕족들에게 암살되었다. 땅의 사람들로 지칭되는 "지방민들"이 암살자들을 즉시 처형하고 여덟살 난 왕자 요시야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요시야의 소년기의 몇 해는 앗시리아에 대해 신중한 정책을 써오던 고문들에게 맡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하34:3에 나오는 짤막한 말은 일이 잘될 것 같아 보이자 요시야 재위 제8년(주전 633/2년)에 국가의 정책을 바꾸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 같다. 요시야 제위 제12년(주전 629년)에 그 기회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부 지역에 대한 실제적인 지배력이 이미 느슨해지기 시작했던 앗시리아는 더 이상 유다에 간섭할 처지가 못 되었다. 바로 이때(참조. 대하 34:3-7) 요시야는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했고 나아가 북부 이스라엘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려고 했를 것으로 보인다.
요시야의 개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주전 622년) 앗시리아는 멸망 직전에 있었고 유다는 명실상부하게 자유국가가 되었다.
(2)요시야의 개혁: 그 주요한 특징들
유다 역사에서 가장 철저했던 요시야의 개혁은 왕하 22:3-23:25과 대하34:1-35:19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왕하 23:3에 의하면, 개혁은 성전을 수리하는 가운데 "율법책"의 사본이 발견된 요시야 재위 제18년(주전 622년)에 단행되었다. 신탁을 살펴본 요시야는 백성의 장로들을 성전으로 소집하여 율법을 그들에게 읽어 주고 그들과 함께 여호와 앞에서 그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엄숙한 언약을 맺었다. 성경은 이 율법이 여러 조치들의 토대가 되었고 모든 조치들은 같은해에 단행되었다는 인상을 준다(왕하23:23).
그러나 율법책이 발견되었을 당시 이미 성전이 수리 중이었다는 사실이 개혁이 진행중이었음을 보여 준다. 성전을 수리하고 깨끗케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개혁 조치였기 때문이다. 한편역대기 사가는 개혁이 몇 단계에 걸쳐 완수되었고 또 율법책이 발견되기 전에 수년 동안 개혁이 진행되어왔다고 이야기 한다. 실질적인 개혁사업 전체를 요시야 12년에 일어난 것으로 하고 18년에는 성대한 유월절 행사를 한 것외에는 없는 것으로 기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 8년(633/2년)에 앗시리아의 공식적인 제의를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 12년(주전 629/8년)에 신 사르 이스쿤이 왕위에 오름과 때를 같이 하여 온갖 우상숭배 관습을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 작업은 요시야가 북부 이스라엘 지역으로 진주함에 따라 그곳으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참조. 대하 34:3-8). 그후 앗시리아의 지배가 완전히 끝난 요시야 18년(주전 622년) 율법책이 발견됨으로써 개혁은 방향성을 부여 박고 박차를 가해 신속하게 종결되었다. 개혁은 독립과 병행하여 보조를 맞춰 진행되었다.
개혁의 주요한 특징들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방 제의와 관습에 대한 일관된 숙청작업을 들 수 있다. 북부 이스라엘의 제의 성소들도 예루살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한결같이 우상숭배의 온상이었으므로 요시야와 같은 열성적인 개혁자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의 산당들과 특히 예루살렘 성전과 겨루었던 벧엘 성전을 파괴하고 속화했으며 그곳의 제사장들을 처형하였다(왕하 23:15-20). 개혁의 절정은 유다 전지역에 산재해 있던 여호와의 산당들을 폐쇄하고 모든 공적인 예배를 예루살렘으로 집중시킨 것이다. 지방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으로 오게하여 성전의 성직 계급 속에서 지위를 부여하였다(왕하 23:8).
(3)요시야의 개혁: 그 내력과 의의
요시야에게 영향을 주었던 율법책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듯이 현존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신명기였다. 요시야 개혁의 조치들 가운데 상당수가 율법책의 명령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제의를 예루살렘으로 집중시킨 것과 지방의 제사장들을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통합하려고 시도한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것은 특별히 신명기에서만 요구하고 있는 조치들이기 때문이다. 유례없이 가혹하게 우상숭배자를 사형에 처할 범죄로 선언하고 있는 것도 신명기 13장의 내용이다.
다른 요인들도 개재되어 있었다. 초기 단계에서 개혁은 되살아난 민족주의의 한 면모였다. 앗시리아에서 기원한 제의들은 민족적 굴욕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면 당연히 그것을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고, 다음에는 역시 비이스라엘적이라고 생각된 모든 종교적 특징들을 계속해서 제거해 나갔을 것이다. 어울이 요시야가 북부 이스라엘의 상당 부분을 합병한 것은 다윗의 홀(笏) 아래 다시 한번 통일된 자유 국가라는 이상을 정치적으로 표방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적 측면들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시야의 개혁은 민족주의의 한 측면이 있었고, 또한 실제로 히스기야의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재천명한 것일 따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요인은 당시의 셰계 전지역에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달려왔던 고대 오리엔트 문명은 바야흐로 종말에 다가가고 있었다. 이때는 위기의 시대로 각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유다도 예외가 아니었다. 새로이 되찾은 독립에 대한 감격과 공식적인 왕조 신학에 함축되어 있던 낙관적인 분위기와 함께 심각한 불안과 심판에 대한 예감이 있었고, 민족의 안녕은 옛 전통으로 돌아가는데 있다는 감정이 퍼져 있었다.
어욱이 바로 이 무렵에 예언 운동이 새로운 활약기로 접어들었다. 예언자들은 이 나라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고 여호와의 진노를 당하게 될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개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예언한 두 예언자가 있는데, 바로 스바냐와 젊은 예레미야이다. 주전 627년에 예언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예레미야는 호세아를 거쳐 모세의 언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층 오래된 전통안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은 설교는 요시야의 정치적 종교적 정책에 대한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되살아난 민족주의의 이러한 열기와 한편으로 불안이 감돌던 분위기 속에서 신명기 율법은 사람들의 양심에 충격을 주었다. 요시야의 개혁 이전의 세대에서 재편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율법책은 결코 새로운 율법이 아니었으며 이제까지 가끔 일컬어 왔듯이 "선의의 거짓"은 더더욱 아니었고 오히려 궁극적으로 초창기 이스라엘의 법률 전승에서 유래한 설교 형식의 고대 법률집이었다. 북부 이스라엘에서 전해져 왔음이 분명한 이 율법책은 사마리아의 함락 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고, 거기서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어느 시기에 다시 정형화되어 개혁의 강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세기에 걸쳐 백성들의 생각 속에서 또 다른 언약 개념 곧 다윗의 언약에 가리워져 있었던 뭔래의 모세 언댝과 그 요구 사항들은 실로 새로웠다. 율법책의 발견은 모세의 전통을 재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혁은 백성들에게 다윗 언약에 관한 공식적인 신학의 배후에 있는 보다 오래된 언약 개념을 상기시켰고, 국가와 백성으로 하여금 옛 언약의 요구 사항들에 순종하는 의무를 부과하였다. 왕과 백성이 다같이 참여했던 이 엄숙한 언약을 통해 신명기 율법은 사실상 국가의 모든 정책을 규제하는 기본법으로 인정되었다.
(4)요시야의 만년: 개혁의 여파
개혁은 주로 종교적 폐습들을 겨냥했지만 그 개혁의 유익한 결과들은 제의적인 분야를 훨씬 뛰어넘어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개혁은 많은 사람들의 정서 속에 예루살렘을 유일하게 합법적 성소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는데, 이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계속해서 순례를 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입증된다(렘 41:5).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제의의 중앙 집권화는 격렬한 반발에 부딪쳤다. 폐지된 여호와 산당의 제사장들은 당연히 예로부터 누려온 자신으 특권들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의 제사장단돠 합치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살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다(왕하 23:9).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자기들보다 하위의 직급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이 아니라면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지방의 산당들이 폐지되자 백성들이 참여할 제의 의식이 감소되어 불가피하게 궁벽한 곳에 사는 주민들의 삶이 세속화, 즉 전에는 몰랐던 제의 생활과 일상 생활의 괴리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혁이 외적 조치들로 만족하려는 경향을 띠는 것이었다. 이 외적 조치들은 민족의 정신적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서 이제 그 무엇에 의해서도 침범될 수 없는 평화가 실현되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하였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그릇된 생각으로 제의 활동에만 치중하고 사회의 죄악들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탄식하였다(5:20-31).
요시야는 앗시리아 제국이 쇠퇴하고 몰락하던 시기에 통치하였고, 히스기야가 시험적으로 시작했던 국가 정화 및 팽창 정책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 왕의 개혁을 법률서 즉, 신명기의 율법과 상당히 닮은 형태일 것이 틀림없는 법률서가 성전에서 발견된 것과 연관시킨다. 신명기적 역사가는 몇 단계에 거쳐 진행된 개혁시도들을 뭉뚱그려 묘사한다. 이를 재구성하면 (1)예루살렘 성전 정화, (2) 변방의 성소 정화, (3) 법률서의 발견과 공포 그리고 변방 성소들을 폐쇄시킴으로써 모든 예배를 예루살렘에서 드리게 하는 예배의 중앙 집권화 결정, (4) 새로 지배하게 된 해안평야지대의 전 영역과 북으로는 사마리아까지 그리고 어쩌면 길르앗과 갈릴리까지 이르는 정화와 중앙집권화의 확대 등과 같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일련의 조치들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순서는 신명기의 제의 중앙집권화 규정보다는 신명기의 성전 정화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처음에는 더 용이했을 것이라는 개연성과도 잘 들어 맞는다. 또한, 단계적인 개혁은 해안지대와 북부지역에 대한 앗시리아의 지배권이 점차적으로 와해됨에 따라 요시야가 그 지역에 야금야금 들어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식으로 행동 영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하나의 사실로 전제한다.
신명기적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종교 개혁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신명기의 법률서는 개혁윤동에 빠뜨릴 수 없는 다양한 사회경제적/정치적 행정 조치들을 규정하고 있다.
3) 앗수르의 멸망과 요시야 치하에서의 회복
신앗시리아 제국의 거대하고 가공할 만한 패권(覇權)은 전성기에 도달하자마자 얼마 안 가서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주전 669년 에살핫돈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앗수르바니팔이 왕이 되었다. 앗수르바니팔은 정복사업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는 아카드어로 된 문헌들을 필사케 하여 쐐기문자로 된 토판들을 왕도 니느웨에 수집하여 도서관을 세웠다. 앗수르바니팔이 632년경에 죽고 앗시리아의 보위가 처음에는 그의 아들 앗수리에틸라니에게, 다음으로는 후자의 아우인 신 사르 이스쿤에게 넘겨지면서 제국은 이미 사양길에 있었다.
바벨론은 일찍이 주전 625년에 독자적인 왕조 아래서 독립하였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 접경, 유프라테스강 하구의 남쪽 땅을 본거지로 삼고 있던 갈대아 부족들이 그동안에 바벨론에 정착하여 통치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나보폴라살이라는 한 갈대아인이 바벨론의 왕이 되어 신바벨론이 창건되었다.
이란 산맥 방면으로부터는 메대인들이 티그리스강을 향하여 서쪽으로 밀려와서 이 방면에서 아시리아 세력의 중심부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키악사레스 왕 아래서 그들은 중요한 세력이 되어 고대 근동 역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남부 러시아의 스텦 지역으로부터 약탈을 일삼는 스키티아인들인 움만-만다(Umman-Manda)족의 출현하였다. 이들은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침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접경을 위협하였고 앗시리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앗수르는 이 세 세력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주전 616-609년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바벨론 연대기'는 이 기간 동안의 중요한 전투들을 기록해 놓았다. 이미 주전 616년에 앗수르의 중부 지역과 서쪽으로 인접한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 주로 전투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전투들을 통해서 앗시리아의 왕도 니느웨가 주전 612년에 바벨론, 메대인, 움만 만다족의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앗수르 우발릿이란 인물이 서부 메소포타미아의 성읍 하란에서 앗시리아의 왕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주전 610년에 바벨론인들과 움만-만다족이 하란을 정복하고 앗수르 우발릿을 축출하였다.
이집트의 바로 느고는 재위초기부터 서둘러 앗수르 우발릿을 도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과정에서 시리아 팔레스틴 지역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앗시리아의 지배가 끝이 난 후에 이 땅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런 격동의 사건들은 이스라엘 역사에도 전환기를 맞게 하였다. 유다 왕 요시야는 변화된 위치로부터 논리적인 결론들을 도출하였다. 아직 미성년이었던 재위 초기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때가 무르익자 그는 점진적으로 앗시리아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열왕기하 23장 4-20절에는 공적 예배 분야에서의 왕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왕의 정치 노선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빛을 던져 준다. 이른바 '공적 예배의 개혁'의 일환으로 그는 먼저 왕실 성소에서 앗시리아의 국가 종교의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이것은 속국관계의 완전한 청산을 의미하였다. 또한 그는 조공바치는 것을 중단하였다. 계속애서 요시야는 도시국가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 전역에 침투해 있던 온갖 형태의 앗시리아 종교들, 특히 성신(별) 숭배를 제거하였다. 앗수르 세력이 몰락함으로써 요시야는 현재 네 개의 앗시리아 속주로 나뉘어 있던 이전의 이스라엘 왕국을 중건하여 다윗 왕가의 통치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설정할 수 있었다. 우선 그는 '사마리아' 속주 가운데서 인접한 남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는 과거에 이스라엘 왕들에게 속해 있었던 유명한 고대 성전인 벧엘을 파괴하였다고 한다. 요시야는 자신의 세력을 북쪽으로 상당히 넓혀 놓은 상태였고 심지어 다윗과 솔로몬 왕국에 속하지 않았던 블레셋 영토까지도 점령하였다. 요시야는 과거의 정통적인 질서의 외적인 특징들만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개념에 따라 파악되어진 그 질서의 내적 본질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의 재위 18년(주전 621-620)에 예루살렘의 국가 성소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성소의 대제사장이 그 율법책을 왕에게 가져 왔다. 왕실 성소로부터 앗시리아의 국가 종교를 점진적으로 제거하는 일이 앗시리아를 벗어버리고자 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던 중에 "율법 책"이 발견된 것이다. 그는 왕의 권위로 이 율법 책에 국법이라는 지위를 부여 한 것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성전에 모아 놓고 예 시내산 전승으로 돌아가서 야웨와 백성들 간에 계약을 맺게 함으로써 이 율법책에 공식적인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종교 질서와 국가가 모호하게 혼합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장차 사건들의 경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이 "율법 책"은 구약에 보존되어 있는 신명기 율법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율법 책은 과거의 여러 율법 모음집들을 토대로 하여 주전 7세기에 편찬된 것으로서 잘 다듬어진 설교와 교훈을 통하여 고대의 하나님의 율법을 현시대에 맞게 재구성하여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 것이 편찬자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율법책은 모세로부터 나온 율법에 대한 해석서였다. 그리고 이 율법 및 그와 관련된 문헌으로 말미암아 , 모세는 전통적으로 율법의 중보자가 되었다.
가나안 종교에 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배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이 율법책의 성향은 고대 이스라엘의 마음가짐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단일한 예배 처소에 대한 최초의 요구는 새로운 요소로서 전에는 그렇게 요구된 적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요구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제의 동맹에 있어서 하나의 중앙 성소라는 옛 체제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주전 7세기에 정확히 어떤 진영에서 고대의 전승을 토대로 이 "율법책"을 썻는지 모른다. 또한 어떻게 이 율법책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게 되었고 그동안에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율법책은 요시야 치세 때에 발견됨으로써 역사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의도는 좋았지만 왕은 또다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 권력을 사용하여 왕정 이전의 고대의 제의 제도들의 영역을 침범하였다. 예루살렘의 왕실 성소의 제의를 이방 요소들로부터 정화하는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계약에 따라 율법을 시행하고 그일에 헌신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 자료의 맨앞에 나와 있던 예배 처소으 통일에 대한 요구 사항을 어느 정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옛날부터 신성시되어 왔고 이스라엘 지파들에 의해 계승되었던 이 땅의 지방 성소들을 훼파하고 제의를 위해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왕하 23:8). 실제로 그는 율법을 따라 이 모든 지방 성소들을 폐지하고 예루살렘 성소를 자신의 통치 영역 내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예배 처소로 만들었다.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에 새롭게 복속시킨 지역들에서 그는 계속해서 지방 성소들을 파괴하였다(왕하 23:15, 19).
그는 자신이 지닌 왕의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였지만 사실 그러한 세속 권력은 그런 일을 감당할 자격이 없었다. 그가 이스라엘의 일원으로서 또 계약의 결과로서 담당해야 했던 유일한 의무는 "율법책"의 규례들의 시행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지방 성소의 폐지는 백성들의 전통적인 종교 생활에 대한 극히 폭력적인 침해였다. 모든 제의 활동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의 유일한 성소로 제한함으로써 제의 의식들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필연적으로 이제까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일상생활과 종교 활동이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특히 이제까지 지방 성소들을 섬겨왔던 제사장들의 거취가 문제가 되었다.
"율법책"은 이 문제를 세심하게 고려하여 이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자격이 있다고 규정해 놓았다(신18:7). 그러나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기존의 제사장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왕하 23:9). 그러므로 이제 예루살렘에 이류 제사장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지방 제사장들은 전통적으로 정해진 종교세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으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야 이 열등한 제사장 계층의 지위는 보다 정확하게 규정되었다.
주전 609년 요시야와 바로 느고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당시에 느고는 앗시리아 왕 앗수르 우발릿을 하란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어쨋든 앗수르 세력의 명맥을 유지시킴과 동시에 한때 이집트의 지배 밑에 있었고 앗시리아에게 넘겨 주려 하지 않았던 시리아-팔레스틴을 다시 장악하고자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요시야는 반앗시리아 정책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요시야는 앗시리아의 멸망을 준비하고 있었던 세력들의 편에, 즉 느고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느고가 앗수르우발릿을 유프라테스로 복귀시키기 위하여 시리아-팔레스틴을 침공하였을 때 요시야는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레스틴의 해안 평지에서 갈멜산 배후의 구릉 지대를 가로질러 이스르엘 평지를 거쳐 다메섹을 경유하여 북부 시리아로 통하는 시리아-팔레스틴 관통도로가 지나가는 am깃도 근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열왕기하 23장 29절의 기록을 보면, 느고가 어떤 방법으로 요시야를 생포하여 죽이자 이스라엘 군대가 전투를 포기한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아하스는 느고가 북방에 몰두하고 있었던 세달 동안만 왕위에 있었다. 여호아하스는 선왕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느고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반란으로 생각했다. 그는 유다 땅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였고,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 거민들ㅇㄴ 가가각 자신의 수입에 따라 얼마을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왕하 23:35). 느고는 자신의 뜻에 따라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꾸고 왕으로 세웠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것은 바로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2. 요시야 왕의 개혁 설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앗시리아 제국의 내부에서 새로운 셈족 계열인 갈대아 족속이 바벨론에 뿌리를 박았다. 신바빌론 왕조의 첫 왕이 나보폴라살이 앗시리아 세력으로부터 바벨론을 해방시켰다. 같은 시대에 메데 족속도 새로운 독립적 세력을 형성하여 이란 지방의 산지로부터 앗시리아의 중심지를 위협하였다. 남부 러시아 지역에서 내려온 기사 집단과 정복자의 집단이 스키티아 족속도 제국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을 만한 일을 하였다. 앗시리아는 흔들렸으나 그를 대신하여 세계를 통치하고 조직할 만한 세력을 가진 나라는 아직 없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세는 다시 세력의 공백이 형성되었다. 요시야왕도 이러한 세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국가의 재건을 꾀하는 혁명을 성취할 수 있었다.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 한권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과 특히, 종교의 중앙집중화의 바탕이 되었다. 이 때에 발견된 율법책을 신명기 책의 원형으로 보려는 학설이 1800년 경 W.M.L. 드베테 이후로 나타났으며, 지금도 지지를 받는 학설이다. 실제로 열왕기서에 보면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신명기서의 모든 규정들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신명기 학파의 서술은 나중에 요시야의 조치를 신명기에 맞추어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종교개혁과 율법 사이에 어떤 일치점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학파의 서술과 율법 사이에 일치점이 나타났다는 것 뿐이다. 신명기가 후기에 쓰여졌다는 것을 밝혀주는 중요한 근거들이 있다. 그 중에 예레미야는 요시야만을 칭찬하여 그가 법과 정의를 실행하였다고 말하고, 종교의 중앙집중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렘22:15이하). 그렇다고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신명기 학파 기자의 창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종교개혁이 성취된 것은 오히려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종교 개혁이 과거 히스기야가 취했던 조치와 비슷한 것으로서 반앗시리아적이고, 민족 국가적인 개혁정책의 일부와 혁명의 양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 종교 개혁이 주로 대부분 앗시리아의 종교적인 상징들을 철거시켰지만 그 이외의 종교적 물건들, 특히 천체 숭배를 위한 특별한 우상들도 성전에서 제거되고 소멸되었다(왕하 23:4).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대한 보고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요시야가 유다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 개혁을 실시 하였다는 것은 그 보고문에 나오는 지명들을 통해 밝혀진다. 과거에는 이스라엘 국가 영토에 속했던 베델과 사마리아 같은 도성들도 역시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관련되어 있다(왕하 23:15-20). 이런 보고가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라면, 요시야의 세력이 과거 북왕국의 이와 같은 중심 지역에도 이쳤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연합하여 국가를 재건하는 요시야의 사업은 20-30년 이내에 실현되었다.
앗시리아는 갑자기 붕괴되었다. 성경은 이 과정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공백에 대해 소위 바벨론 연대기서 보고문들이 보충하여 준다. 바벨론 족속은 특히, 키악사레스 통치하의 메대로부터 지원을 받아 주전 612년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정복하였다(kyaxares는 아카드어 Umakischta의 헬라어 표기이다). 앗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왕인 앗시리아 우발릿이 수도를 서쪽으로 옮겨 서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하란으로 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야 그 남아있는 앗시리아 부분마저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잃고 사라져 버렸다.
이 마지막 전투에 요시야 왕도 말려 들었고 전사하였다. 이집트는 이 사이에 앗시리아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이집트의 느고가 왕이 되자마자 전쟁을 벌였다. 그것이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을 돕기 위한 것이든, 고대 이집트의 영토였던 시리아, 팔레스틴의 땅을 앗시리아로부터 상속받기 위해서였든 느고는 전쟁에 참가하였다. 요시야왕은 이를 저지하다가 죽었다. 아마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죽었던 것 같다(왕하 23:29-30). 요시야와 유다의 꿈은 깨어졌다.
팔레스틴에서 세력 공백은 다시 끝이났다.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지배한 새로운 군주는 이집트의 바로 느고(Neco)라는 사람이었다.
유다에서는 요시야의 뒤를 이어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이 후계자를 위해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역시 지방 귀족들이었다. 이 후계자에게서도 요시야의 정책이 이어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느고는 요아스를 리블아에 있는 사령부로 불러 이집트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사건에서 미래의 불행이 닥쳐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렘 22:10). 느고는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엘리아김이라는 요시야의 다른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여호야김이다.
3. 유다 왕국의 종말
이집트의 주도권은 얼마 지속되지 못하였고, 앗시리아의 세력이 사라진 후 근동의 정치 세력이 결성되지 못한 동안만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갈대아 족속과 메대 족속이 과거 앗시리아 대국의 영토 중에서 일부를 차지하였다. 본래 앗시리아의 지역과 이란과 아르메니아 산지, 그리고 소아시아에 이르기는 북서부의 지역까지 메데 족속이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 이외의 모든 지역과 시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은 바벨론(갈대아 족속)에게 돌아갔다. 이제 이집트와 바벨론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동시대의 바벨론 보고와 예레미야 46장 2절의 보고에 의하면, 주전 605년에 유프라테스 강변의 갈그미스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바벨론이 승리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권을 종결시켰다. 이때 유다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쳤을 것이다.
여호야김에 대해 열왕기서는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는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 예레미야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외국에 대해서는 무력한 봉신이었으나 자기의 국민들에게는 폭군이었다고 한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이야기는 그의 통치 시대에 시작되고 있다.여호야김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깝다는 사실을 예시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대제사장에게 붙잡혀서 학대를 당하였다(렘 19-20장). 다른 상황에서 왕은 예레미야의 재난을 선포하는 말이 쓰여진 두루마리를 직접 불에 태웠다. 왕은 예레미야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무론 실패하였다(렘 36장). 예레미야가 왕을 비난한 이유 중에서 특별히 자명한 것은 자기를 위하여 왕의 알현 창문이 달린 궁전을 건설한 사실이다.
바벨론에 대한 여호야김의 봉신으로서의 태도는 자발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집트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는 3년후 조공을 중단하였다(왕하 24:1). 598년에 바벨론은 징벌 원정을 감행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 시기에 여호야김이 죽고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다. 여호야긴은 항복하여 예루살렘의 도성의 파멸을 면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런 사건에서도 정부와 민족에게 갑자기 쳐들어오는 야웨의 심판을 인식하였다(렘 22:24-30). 여호야긴 대신에 시드기야가 왕위에 올랐다. 예레미야 34장과 37-38장에서 우리는 그가 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우 허약한 군주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시드기야는 통치를 시작한지 몇 해 후에 에돔, 암몬, 모압, 두로, 그리고 시돈과 협상하였다(렘 27-28장). 바벨론이 간섭하려고 했을 때, 시드기야는 공사를 파견하여 자기의 봉신으로서 충성심을 보여 주었다. 몇해 후에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에집트의 지지를 받아 일어났는데, 유다에게 재앙을 불러 들였다.
주전 589년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 와서, 유다 땅은 라기스와 아스가라는 몇 성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벨론에게 넘어갔다. 이집트의 도움도 끊어졌다. 예루살렘은 포위되었다. 1935-38년에 발견된 라기스의 오스트라가(사기 그릇 조각)에서 이 시대의 상황이 부분적이지만 밝혀졌다.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베냐민 밭을 사서 보유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도성을 떠나려 하다가 반역죄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예루살렘 멸망 후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석방될 때까지 예루살렘에 구류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성벽은 1년 반동안의 포위 속에서도 견디어 냈다. 느브갓네살 19년인 시드기야 11년 넷째달(7-8월) 9일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는데, 그때가 586년이다. 요르단 강 동부 지역으로 도피하던 시드기야는 여리고에서 체포되어 바빌론의 사령부가 있는 리블라로 송치되었다.
예레미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
헤르만은 요시야가 앗시리아 제국의 쇄퇴한 틈을 최대로 이용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고 본다. 그는 요시야 개혁의 성격을 앗시리아의 이방종교 숭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과 자체의 야웨 종교 혁신이라는 두 가지 면에 역점을 두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시야의 개혁은 앗시리아로부터 해방되고저 하는 요시야의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간주한다. 아크로이드도 요시야의 개혁을 유다의 독립을 꿈꾸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동조했겠느냐 하는 문제는 많이 논의되고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 자체가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관한 언급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윌슨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열왕기 하 22-23장이 보여주는 것처럼 철저히 신명기적이 되지 못하였으며, 또 그 개혁의 종교적인 성격이 백성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미비한 점들이 많았기 때문에, 예레미야 자신도 요시야가 시작한 개혁의 정신을 그 초기 예언 신탁 안에서 회개의 메시지로 전파하였다고 본다. 윌슨은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의 제의 제사장들과 더불어 북왕국의 신명기적인 정신에 입각해서 예언활동을 전개했으나, 중앙집권에 가담한 신명기 운동가들은 예레미야의 과격한 사회개혁에 반대해 그에게 침묵을 지킬 것을 강요했으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즉위시까지 침묵을 지켰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침묵을 요시야 시절에는 예레미야가 개혁을 인정하고 요시야 사후 여호야김의 등극과 더불어 개혁정신이 쇠퇴해지자, 예레미야가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진다.
아트마이언는 예레미야 11장 1-5절, 6-8절이 요시야 왕이 622년에서 그의 순국인 주전 609년까지에 발표된 것으로 보며, 여기의 계약이 요시야 계약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신탁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잗ㄹ이 예레미야가 요시야 종교개혁에 동조하여 외친 신탁을 수집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악트마이어는 예레미야가 요시야 개혁을 십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11장 6절을 근거로 예레미야가 요시야 개혁의 선포자였다고 추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혁은 왕이 시도한 것인 만큼 일개 예언자가 순회하며 설파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요시야가 율법서를 예레미야와 의논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요시야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 할 수는 없다고 단정한다. 오히려 예레미야가 아직 어리거나 또는 궁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탓으로 본다. 브라이트는 예레미야가 개혁 초기에 동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예레미야 말기 개혁의 참여자들과 그의 자녀들이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해준 일(36장)은 예레미야가 그들의 운동에 동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난 예레미야는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에 잠잠하다가 개혁이 시들해지자 다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헤르만은 예레미야의 외침이 결국은 요시야가 시도한 개혁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뉴섬도 예레미야의 침묵을 지지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을 비판하면서 그의 아버지 요시야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형통하였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렘 22:15-16) 하면서 그의 통치를 칭찬하고 있다. 브라이트 역시 이 구절을 토대로 예레미야가 요시야를 이상적인 왕으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예레미야와 다윗왕조와의 관계를 브라이트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적대관계가 아니었다"고 규정한다. 즉 예레미야가 다윗왕조가 멸망하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브라이트는 예레미야와 다윗왕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계약법전이 규정하는 약자의 공의와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한 기구로 본 것이다. 예레미야는 새 왕의 출현이 이스라엘에 새로운 희망의 되느 메시야 왕국의 도래라고 본 것이다. 예레미야는 심판을 통해 야웨의 은총을 선포한 것이다.
예레미야의 중심사상
예레미야는 그의 소명환상에서 끓는 가마가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았다. 그 환상의 의미를 야웨는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유다의 거민에게 닥칠 것이며, 이 같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를 져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죄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말한다(1:13-19).
예레미야는 그의 초기 예언신탁에서 북방으로부터의 적군의 침입에 대한 신탁(4:5-8, 13-18, 19-22, 19-31; 5:15-17; 6:1-8, 12-26; 8:14-16)의 말을 많이 하였다. 이 북방의 적군이 누구일 것이냐에 대하여 주전 626년 코카스 지방에서 밀어댝친 미디안 족의 침입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바벨론일 것이라고 보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악트마이어는 예레미야가 역사적인 적군을 의미했으나, 예언 초기에는 그 정체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보내는 심판의 재앙이라고 해석했다.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두가지 부류라고 보는데, 첫째는 이방신 숭배이고 둘째는 윤리적 타락에 대한 사회적 죄이다. 이스라엘이 살수 있는 길은 돌아가는 길이다. 톰슨은 예레미야만큼 "슈브"(돌아가다, 참회하다)란 용어를 많이 사용한 예언자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서 야웨께로 향해 돌아갈 것을 호소한 것이다(4:1-4; 31:18-19). 그러나 백성들은 돌아서지 않았다.
브라이트는 야웨의 날에 유다에게 임할 야웨의 재난은 마치 원초적인 혼돈의 지배와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다(4:23-26).예레미야는 이같은 재난이 야웨의 심판임을 천명한 것이다(13:20-23).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신의 승리이고 야웨신의 패배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신명기적인 메시지는 국난 위기에 대한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비극이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야웨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니고 아직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으로 역사를 주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거짓된 희망을 버리고 진정으로 야웨께 돌아감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브라이트는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의 심판의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라고 말하여, 예레미야는 포로기의 암흑기간 중 내면적인 종교를 불사조처럼 타버린 재를 털고 일어나는 새로운 야웨 공동체를 준비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이스라엘 포로기 신학
1. 머리말
모세의 야웨 종교 전승이 중앙 성소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다가 실로 성소의 붕괴 이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이동함으로써 그 전승이 남왕국으로 우회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폈었다. 실로 성소 붕괴 이후 북왕국에서는 야웨 전승이 지하로 스며들다가 엘리야와 아모스, 호세아 등에서 산발적으로 표출되었으며, 급기야는 북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북왕국 야웨 신봉자들이 남왕국으로 피난하면서, 히스기야-요시야 종교개혁을 이룩한 신명기 운동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시대에 예언활동을 하며 조국의 패망까지를 지켜본 남왕국의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조국을 위해 슬픈 눈물을 흘렸으나, 그 조국과 국민들은 예레미야를 무척이나 괴롭히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그의 예언 활동 때문에, 감옥에 갖히고 매를 맞으며 동료 예언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왕 및 고위관리들로부터 숱한 비난과 위협을 받으면서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고통을 혼자 당해야만 하였다. 이같은 외부적인 박해뿐 아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꼭 전해야 하는가로 고심한 내면적인 갈등과 더불어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도 외면당했다고 느끼는 극심한 절망과 고독감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다. 예레미야야 말로 고난의 종이었다.
2.인물과 시대
시대적 배경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극치를 이룬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율법서 발견이 있었던 주전 621년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패망한지 백년이 지난 다음의 일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이 바벨론에 멸망한 것은 주전 587년 요시야 사망(609년) 불과 22년 후의 일이다. 앗시리아 제국이 망하고 바벨론 제국이 패권을 잡은 지도적 세력의 교체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주변의 약소국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가정환경
아나돗이 베냐민 지파의 도피성이었다는 것은 여호수아 21장 17-19절에 의한 것이며, 이 성은 레위사람들에게 기업으로 주어진 것임도 알 수 있다(수 21:3). 그리고 열왕기상 2장 26절에 의하면, 아나돗이 제사장 아비아달의 고향으로 되어 있다. 악트마이어는 예레미야가 아비아달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며, 그렇다면 그의 계보가 엘리에게까지 소급될수 있다고 본다. 윌슨은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거주한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손이며 복왕국전승을 이어온 레위 집안의 일원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윌슨은 예레미야의 친척들이 요시야 종교개혁에 가담했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정치 및 종교 체제의 중요 구성원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근거로 예레미야의 삼촌 살룸이 아나돗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살룸 역시 아나돗 제사장 집단의 일원일 것이라고 본다. 또 삼촌의 아들 마아세야는 성전문을 지키는 사람이었고(렘 35:4), 사반과 더불어 성전 건축 책임을 맡았으며(대하 34:8),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제사장이었다.
브라이트는 아나돗이란 도시에 사는 제사장들이 모두 친척관계일 것이라고 전제하고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의 후손이며, 아비아달은 엘리의 후손이고, 심지어 그 계보는 모세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브라이트는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고대 전승이 존중되는 제사장 가문의 경건된 가풍의 영향아래 성장하면서, 북왕국의 예언과 호세아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같은 가정은 예레미야의 예언신탁의 언어와 사상이 호세아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한 발상이다.
악트마이어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결혼을 일찍하는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예레미야는 소명을 받은 직후 유다가 자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레미야는 가정이 제공하는 기쁨과 마음의 평안은 물론 공동체의 일원으로 누릴 수 있는 대인관계의 우정이나 사회적인 교류도 일체 누리지 못한 것이다. 악트마이어의 표현대로 예레미야는 인간적인 동족애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단절된 것이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생애를 통해 그의 고독과 고통을 엿볼 수 있으며, 그래도 끝까지 견디어 낸 불굴의 용기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세상적인 척도로 간주할 때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다. 브라이트는 "영웅적인 실패"란 말을 쓴다. 그래도 브라이트의 표현대로 이스라엘 역사 위에 예레미야처럼 그같이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예언자도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예레미야의 소명
예레미야가 언제부터 예언활동을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는 1장 2절에 "요시야의 다스린 지 13년에 야웨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브라이트는 예레미야의 출생을 am낫세 통치 말기인 주전 645년 경으로 보고, 예레미야가 18세인 주전 627년 앗수르바니팔이 죽던 해를 소명의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난 본문의 13년에 대한 해석에 논란이 많이 일고 있다. 요시야 13년 즉 주전 627년에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로 그 첫째는 1장 13절 이하와 4장 5-6장 30절까지에서 예레미야가 언급하고 있는 북방의 원수는 바벨론 군대로 볼 수밖에 없으며, 예레미야 1장 13절이 소명설화의 일부이니까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 이후에 소명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는 예레미야가 주전 627년에 소명을 받아 요시야 재위기간 중 예언활동을 했다면, 주전 627-609년까지의 기간 동안 예레미야의 예언 신탁이 거의 없으며, 또 예레미야가 요시야왕의 죽음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변째로 예레미야서에는 요시야 종교개혁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위와 같은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1장 2절의 13년이 원문의 23년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예레미야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것은 617년으로 바벨론의 나보폴라살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니까 북방의 원수가 바벨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밖에 요시야 13년은 예레미야 출생연대이고, 그의 예언활동 연대는 그가 성전설교를 외친 주전 609년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같은 견해는 야웨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는 것을 야웨는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자로 택했다(1:5)는 구절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홀러데이는 예레미야가 야웨의 말씀을 먹었다는 15장 16절의 표현은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한 언급이며, 36장에 예레미야가 두루마리에 신탁을 기록한 것은 율법서를 모방한 것이라고 본다. 하야트도 주전 627년을 예레미야의 출생연대로 보며, 그 이유로 북방의 원수가 바벨론 군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난 예레미야의 소명연대를 주전 627년으로 잡고 있는 입장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윌슨도 자세한 논쟁 없이 요시야 13년이란 "역사적 정확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단언한다. 톰슨도 주전 627년에 예레미야가 예언활동을 시작했다고 본다. 톰슨은 홀러데이와 하야트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제기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로서 북방에서의 원수는 꼭 누구를 지정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이며, 또 예레미야 4-6장은 요시야 통치 말기의 신탁이라고 말한다.
예레미야의 소명의 연대에 관한 시비는 예레미야와 요시야 종교개혁과의 상관관계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의 문제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것과 함수 관계가 있다. 신명기 역사서는 율법서를 발견한 뒤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잡고 있으나, 역대기 역사는 종교 개혁이 이미 진행된 과정에서 율법서가 발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역대기서의 연대를 따른다면 종교개혁의 첫 단계가 요시야 8년에 이미 시작되었고, 율법서가 발견된 18년에는 제 2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볼수 있다. 그렇다면 예렘야가 소명을 받은 13년은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의 소명설화에 관한 1장 2절의 요시야 13년이라는 본문을 23년으로 고쳐 읽는다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보인다. 왜냐하면 25장 3절에도 예레미야는 야웨의 말씀이 요시야와 13년부터 임했다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두군데서 같은 오자가 생겨났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본문의 정확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펴보자. 그런데 13년이란 본문해석에 대한 악트마이어의 반론 중 예레미야 소명설화가 신명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서의 영향이 아니라 아나돗의 전승 때문이라는 주장은 일리는 있으나 정확한 표현 같지는 않다. 악트마이어 주장 중에 예레미야 소명설화를 놓고 첫 번째 소명과 두 번째 소명으로 구분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캐롤은 예레미야 소명설화에 관한 최근의 편집사적 연구에서 1장의 소명설화는 역사적 상황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캐롤은 예레미야 1장의 소명설화를 신명기 편집자들이 모세와 사무엘이 모두 어린 아이임을 자처하며 소명을 거부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끝내는 응한 대표적인 예언자들이라고 한다. 이사야의 경우에는 소명설화가 예언신탁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데 예레미야에는 맨 앞부분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캐롤의 입장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언제 예언활동을 시작했는지 정확한 연대를 추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예레미야와 고대 에브라임 전승
암픽티오니 전승
우선 일차적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출애굽 전승이다. 예레미야는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2:6; 7:22; 11:4; 31:32; 32:21에서 언급하고 있다. 브라이트는 2장 4-8절을 대표적인 출애굽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브라이트는 위 구절이 요시야 개혁 이전 am낫세 시절의 야웨 종교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것으로 예레미야 예언 활동 초기에 발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예언 전승
윌슨은 예언자의 기능에서 모세와 예레미야를 비교한다. 윌슨은 예레미야의 소명설화에서 예레미야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신명기 18장 8절에는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예레미야 1장 9절에는 야웨께서 손을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하며, 다음 17정에서 야웨의 명령은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고 말하고 있다.
윌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백성의 중보자 기능이 있음을 지적한다. 예레미야가 백성을 위해 한탄하며 중보의 기도를 드린 것은 4장 10절, 15장 11절 18장 20절 등이다. 악트마이어는 예레미야를 가리켜 고난의 중보자라고 부른다.
홀러데이는 예레미야의 자아의식을 그의 소명설화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홀러데이는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주전 621년에 예레미야가 5세였으며,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시내산 계약의 재현이었기 때문에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통해 모세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소년 예레미야의 마음에 모세가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요시야가 죽던 주전 609년에 예레미야는 17세 소년이었으며, 예레미야가 설교를 시작했을 때 종교개혁이 외형적으로 자리가 잡혔으나, 내적으로는 도덕적 순결성이 약해졌지만 예레미야는 종교개혁을 단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확립하는 것이라고 보았다고 말한다. 홀러데이의 논문 중 모세의 탄생설화와 소명설화가 예레미야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은 쉽게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윌슨은 예레미야와 호세아의 언어적인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예레미야가 에브라임 고대 전승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브라이트는 좀더 구체적으로 예레미야가 호세아의 부정한 아내 은유를 빌어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을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계약관계는 광야에서 맺어진 결혼관계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예레미야는 호세아의 예언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에브라임 전승의 계약 준수 사항을 철저하게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에브라임 전승이 모세 계약 정신에 근거해 신명기 운동의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와 신명기 운동과의 관계도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신명기 전승
신학적인 측면에서 예레미야의 신학이 신명기 신학과 유사하다는 점에 관해서 윌슨은 예레미야가 신명기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계약에 대한 성실성을 강조하며, 이방 숭배와 "높은 곳"에서의 이방신 숭배를 저주하고 윤리적인 강령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또 신명기와 더불어 야웨의 심판은 계약 파기에서 오는 결과라는 점이다. 이러한 입장은 예레미야서가 신명기 사가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보는 클라인이나 캐롤의 입장에서 볼 때 수긍이 갈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예레미야의 어느 부분이 예레미야 자신의 신탁선포이며, 그리고 어느 정도가 신명기 편집자의 각색이냐를 가려내는 일이다. 그런 다음 예레미야 자신의 신탁 속에서 신명기적인 어휘나 신학적인 영향이 게재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모빙켈이 1914년에 예레미야의 자료를 A,B,C 세 개의 자료군으로 분류하여, A자료는 서론과 결론 공식이 결여된 예레미야 자신의 신탁모음이고, B자료는 예레미야에 관한 전기 및 역사적인 자료로 예레미야 사후 이집트에서 구성된 것이고, C자료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야웨의 말씀이라"는 서론부가 첨가된 신명기적인 문체의 모음이라고 보았다. 뮬렌버그는 모빙켈의 C자료에서 예레미야 자신의 말을 창출해 내기는 힘든 일이지만 신명기적 문체가 예레미야 당시에 유행하던 표현법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성전이나 제의에 관련된 신탁은 그같은 어법을 사용했다고 보며, 32장이나 34-35장은 틀림없이 예언자 자신의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된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하야트는 C자료가 포로기 이후 신명기 사가의 작품으로 예레미야의 설교가 신명기 신학을 동조한 것으로 보이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포로 후기설을 부정하고 포로 중반기 C자료의 산문체가 예언자 자신의 말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해도 예언자를 따르던 이들이 그의 설교를 기억한 것을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본다.
브라이트는 이들 추종자들이 신명기 운동에 동조한 이들로서 7장 1-15절의 성전설교는 예언자 사신의 설교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본다.
브라이트의 결론은 산문체에서 예레미야 자신의 말을 구분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산문체 전체를 예레미야의 전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부분의 예레미야와 산문체의 예레미야, 즉 예레미야 자신과 신명기 사가의 차이는 인정하더라도 지나친 구분은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악트마이어도 C자료가 신명기의 특수 용어와 신명기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며, C자료가 예언자 자신의 말이라기보다는 그의 신명기 운동의 제자가 예언자 자신의 설교를 그대로 반영시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자료를 예언자 예레미야의 제자가 예레미야의 말을 신명기적 문체로 표현했다는 견해와 이와는 정반대로 신명기 사가라는 편집자가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예언자 예레미야의 입에 집어넣으려 했다는 대조적인 입장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브라이트로 대표되는 전자의 경우 예레미야의 역사성의 부각되며, 예레미야 자신의 말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대로 전승되어 산문의 형태를 통해 반영되고 있다고 보지만 캐롤을 통해 새롭게 도전되는 후자의 경우는 신명기 사가의 편집활동의 더 부각되는 것이다.
클라인은 편집비평을 토대로 예레미야 사후 30년경(550) 신명기 편집자가 A.B 자료를 토대로 예레미야서를 편집 정리했다고 본다. 클라인은 C자료만이 신명기 문체라고 본 다른 학자들과 달리 예레미야서 전체가 신명기 사가의 편집이라고 본 것이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신명기 신학에 근거하여 포로상황에 적응시킨 것이다.
예레미야(247-271)
1.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북동쪽에 있는 아나돗에 살았던 한 제사장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곳에 유배되었던 아비아달의 후손이라는 것을 동일한 거주지라고 해서 이끌어낼 수는 없다. 예레미야는 소명받았을 때 젊은 청년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는 주전 650년 경에 출생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16장 1절 이하에서 밝혀진다.
그는 주전 626년 요시야의 통치 13년에 예언자로서 소명을 체험하였다(렘 1:2; 25:3). 그리고 중단되기는 하였지만 유다의 국가 멸망 이후까지 40여년을 활동하였다. 포괄적으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단락은 그의 두 번째 활동기간부터 그의 운명에 관해서 무엇보다도 그의 예언신탁들을 꿰뚫고 있는 특색들 중에서 그의 탄식시들이나 고백들 이외에 그의 인격과 내적인 품성 및 내적인 고뇌와 투쟁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요시야의 제의 개혁 때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죽은 이후 여호야김왕 치하에서 비로소 등장하였다고 하는 호르스트의 가설과 하얏트, 메이 및 휘틀리의 비슷한 노제들은 그가 체험했던 소명의 표면적인 연대 즉 3:6-13이 요시야 시애에 나왔다는 것과 2:18절에서 여호야김시대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던 앗시리아 국가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거절된다. 1:4-10절의 예레미야 소명이 제의직무의 표지행위들과 함께 서품행위인 예전적인 의식을 거친 후에 수행되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레벤틀로우), 이상과 들음의 서술과는 완전히 대립된다. 마지막으로 라기쉬 Ⅲ, 20의 질그릇 파편에 언급된 예언자가 예레미야를 뜻한다고 하는 것은 투르 시나이(Tur-Sinai) 이후에 토마스가 반대했다.
2.예레미야의 활동 기간은 4기간으로 나누어진다.
요시야의 개혁 전후의 유다 상황은 주전 609년 요시야의 전사, 유대인에게서 추대된 요아하스와 이집트에 의해 임명된 여호야김의 등국, 여호야김의 잔인한 통치와 신흥 바벨론 종주국에 대한 반란, 여호야김의 후계자 여호야긴에게 형벌로서 주어진 일차 포로(597),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통치와 바벨론인들의 예루살렘 포위와 정복, 그리고 그달랴 살해사건과 관련하여 이집트로 간 유대인 부류의 도주 등을 보여준다.
제1차 활동기간의 신탁들과 보고, 통보들이 1-6장에 나오며 예레미야의 소명에서부터 주전 622년 요시야의 개혁이 완료되기전 얼마동안까지의 시기이다. 예레미야가 처음에는 위협적인 심판의 예언과 함께 아나돗에 등장한 것 같으며(Duhm), 그 이후에 그는 즉시 예루살렘으로 갔지만, 그곳의 상황들이 더 나빴던 것으로 규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을 야웨로부턴의 타락 때문에 고발하고 있으며, 제의 윤리와 정치영역에 나타난 그 민족의 죄과를 질책하고, 때문에 위협적인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자신의 공포가 실패하는 것을 자인해야만 했을 때, 그는 자기의 임무가 끝장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임무를 야웨의 손에 되돌려버리고 조용히 물러나 오랫동안 침묵하엿다.
예레미야는 불가사의한 "북방의 적"을 심판의 집행자로서 기다렸는데, 그를 빌케(Wilke)가 근본적으로 거부하였지만, 대개는 스키티안으로 생각했으며(Duhm 등등), 드물게는 메데인(Gunkel, Gressmann)이나 갈대아인을 가리키거나, 혹은 신화적인 표상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비록 스키티안들에 대한 개별적인 보도/전달 들이 그 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해도, 예레미야가 처음에는 전혀 어느 특정한 민족을 생각하지 않았다가(Lauha, Wambacq, Rudolph), 뒤늦게 가서야 비로소 바벨론인들에게서 야웨의 형벌의 도구를 보았다고 하는 가설이 아마도 더 맞을 것 같다.
예레미야의 침묵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이방의 제도에 대한 투쟁과 사회적인 행위를 위한 참여에 철저하게 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나중에 거부하도록 하였던 염려스러운 측면들을 보았던 것 같지는 않다:제의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의 강조? 그때 그는 그의 입장을 변경하지 않았고, 신명기 및 개혁과는 반대로 처음부터 양면적/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의 두 번째 활동 기간은 주전 608-597년을 포괄한다: 그 기간에 나온 예언 말씀들과 통보들은 7-20장;22장과 25:1-14에 흩어져 있다. 거기에 이방 예언신탁들인 25:15절 이하: 46:3절 이하와 예레미야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레미야는 처음 몇 해 동안 성전과 예배를 심히 공격하고, 심판이 임박했기 때문에 다시 회개를 권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부터 격노한 적수를 만나게 된다:여호야김과 그의 비판에 분개한 제사장들이다. 그는 신성 모독 때문데 닫은 사형선고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다(26장). 함정, 음험한 계획들과 살해기도들이 , 추측컨대 그의 가문에서조차 그를 위협하고 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쇠고랑을 차고 성전출입이 금지되었다(20:1이하). 그가 자신 및 하나님과 싸우는 감동적인 탄식시들이나 고백문들은 이때 나온 것들이다. 성전 출입이 금해진 예언자는 마지막 경고로서 그의 지금까지의 신탁을 바룩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여 성전에서 낭독하도록 하였다. 바룩과 예레미야은 여호야김의 체포령 이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숨어 있어야만 했다. 이 시기에 13:1-11절에 보고된 상징적인 행동을 했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인들이 공격해 들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던 것 같다(35장).
세 번째 기간은 시드기야왕의 등극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의 시때까지이다(597-586). 예레미야의 위협이 아마도 맞았기 때문에,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의 충고들을 따르려고 하였지만, 민족적인 반바벨론적 경향에 거슬려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또한 예레미야도 27-29장에서 594년의 폭동때 국수주의적인 구원예언자들과 또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주전 588년 바벨론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이후부터 예레미야는 다시 위협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렘37장 이하가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바와 같이, 마지막 순간에 그는 죽음을 모면하였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바벨론인들의 극진한 대우와 편의제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달랴와 함께 새로운 건축을 하려고 남은 백성들과 팔레스틴에 머물렀지만, 그달랴가 살해당함으로써 중단되었다. 예레미야는 이집트로 도망가는 무리들과 함께 가도록 강요받았다.
그곳에서 예레미야는 43: 8-13과 44장이 전해주는 그의 짧은 네 번째 활동기간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집트에서 실종되었다.
5)예레미야
예레미야는 626년에 예언 활동을 시작하였고 585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수 개월 혹은 수년 동안 계속 활동하였다고 한다. 예레미야는 개연성일ㅆ게 해명하기가 어려운 긴 "침묵 기간(626-609)"을 경험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문두에 제시된 연대는 오기이거나 예언자의 출생 연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에게는 출생 때 이미 예언자로 예정되었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전제한다면 후자의 해석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여하튼 기록상으로는 예레미야의 공식 활동이 시작된 때는 609년이며 유다엣 정치 지도권의 급격한 변화를 촉진시켰던 요시야의 죽음과 연계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활동은 신명기적 개혁이 실패로 귀결된 것과 고대 근동의 패권이 앗시리아로부터 신바벨론으로 이전된 것을 전제로 한다. 앗시리아의 급격한 쇠퇴로 인해 발생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요시야가 유다의 종교적 및 사회정치적 개혁을 시도하고 신더윗 제국 건설을 기도한 것은 큰 희망을 불러 일으켰으나, 그러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함이 유다가 당할 어려움들을 막아 준다는 성전의 보호기능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는 사고가 요시야의 개혁의 주된 유산으로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렘 7:4), 백성들의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요시야의 노력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유다의 내부 질서가 너무 부패하였으므로 반드시 지도층이 회개하고 오랫동안 짓밟혀온 사회정의를 실행하지 않으면 유다는 신바벨론에게 초토화되리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사회 정의가 실행되지 않을 경우 계약 전승들과 예루살렘 제의는 안전의 근거를 전혀 제공해주지 못하며, 또한 신바벨론으로부터 유다를 구출하기 위해 이집트에 의존ㄴ하는 것도 외적인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 예레미야는 많은 경우에 회개 즉 "돌아오라"는 권고를 조건으로 사건들을 해석하면서, 가치기준과 신앙의 참된 변혁을 토대로 계약법에 의거하여 나라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요시야 치하의 유다 정부를 뒤흔들어 놓았던 사회개혁론들을 적극 실행하라고 온 힘을 다해 요구하였음을 시사한다. 예레미야의 공적 활동이 유다 지배 계층들의 적대와 반발에 부딪혔다는 사실은, 그의 심판선언에서 가능성의 저울이 유다 붕괴가 임박했다는 쪽으로 훨씬 기울었음을 의미한다. 유다의 적절한 개혁은 신바벨론에 형식상 굴복하는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예레미야는 믿었다. 예레미야는 그 후로는 백성들이 왕도 없고 성전 제의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예레미야가 그와 같은 조정/변경된 프로그램을 백성들에게 제시하려고 전적으로 의도하였다는 것은 그가 유다에 남기로 결정하고 정복자들의 임명한 원주민 출신의 총독이며 그의 옛 후원자였던 그달랴의 지휘하에 미스바에 세워진 신바벨론 재건정부에 첨여하기로 결정한 사실에서 입증된다.
예레미야의 메시지에서 심판위협과 회개촉구 기사가 정확히 균형을 이구고 상호작용하는 양상은 그의 책이 생겨난 방식에 입각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과거의 학자들은 그 자신이 시적 신탁들을 기록하거나 구술한 예레미야의 역할과, 종종 "전기"라고 불리는 예언자의 생애에 대한 구절들을 설화체로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한 그의 서기 바룩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외에도 신명기 역사가의 산문과 아주 유사한 매우 다른 문체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보도하는 산문형식의 설교들이 이러한 시들과 삽화들에 첨가되었다는 주장이 결론적으로 제기되었다.
오늘날에는 예레미야계 전승의 흐름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데 이 흐름에 포함되는 것들은 예언자 자신의 시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보여주는 설화들, 그리고 포로민이나 정치적 독립을 상실할 팔레스틴 유대인들의 상황에 맞는 설교자료와 교육자료로 밝혀진 이 예언자의 말과 주제들을 산문형식으로 "재현시킨 것들"등이다.
우리가 예레미야서에서 진정한 예레미야를 만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모든 자료를 보존하고 결합시킨 사람들이 예루살렘 멸망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당시 그들이 처한 일변한 정황 가운데서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자료로서 예언자의 말과 행동들을 끊임없이 해석하고 평가하고 부연하였다.
예레미야 저작설에서는 세 가지 유형의 자료들(시적 신탁, 설과, 산문체 설교)이 따로따로 생겨났고, 그 다음에 몇 단계 결합과정을 거치면서 책으로 완성되었다는 가정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 후에 일부 학자들이 세 가지 유형의 자료들이 수많은 "전승 복합체들"안에서 나란히 발전되었다는 견해를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예레미야의 심판 발언(1-24장)
2. 뭇민족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심판 발언 (25장, 46-51장)
3. 권력자들이 어떻게 예레미야의 발언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설화(26, 35장,<36>장)
4. 예레미야와 독립 유다 말기에 대한 비교적 응집력이 있는 확대 설화(<35장>, 36-45장)
이 전승 복합체들은 아마도 신명기적 집단 내에서 발전되고 보존되었을 것이며 마침내 최종 편집에서 복합체들을 결합시킴으로써 하나의 책으로 엮어졌다.
26-46장의 바룩이 기록한 "전기"라는 가정은 더 이상 명백한 사실이 아니다. 먼저, 바룩이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끌려갔지만, 예레미야서가 편찬된 배경은 팔레스틴적이거나 바벨론적이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예레미야서에는 진정한 의미의 전기가 없기 때문이다. 설화들은 "예언자의 삶을" 균형있게 보도하기 보다는 그의 설교에 대한 국내의 반대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던가를 명확히 하고, 그의 심판 발언들이 예루살렘 최후 함락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인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설화들이 예레미야의 수난에 관한 일종의 "수난설화"를 구성한다는 주장은 설화 전체와 관련해 볼 때 타당성이 거의 없다. 설화들에 의해 강조되는 이 심판의 교훈들을 전유한 자들은 신명기사가의 조망에 밎춰 방향을 정립한 포로민들 그리고/또는 유다에 남은 "땅의 사람들"이며, 그들은 설교 형식의 산문을 1-24장, 25장, 그리고 46-51장의 시적 자료들 사이에 삽입시킨 것처럼 설화들 사이에도 설교 형식의 산문을 포함시켰다.
좋은 무화과인 597년의 포로민들 : 597년 국외 추방 이후의 어느 환상 보도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야긴과 그 해에 추방당한 자들을 "좋은 무화과" 바구니에 비교하고 시드기야와 586년에 추방당한 자들을 "썩은 무화과" 바구니에 비유하였다(24장). 이 장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좋은 무리들과 악한 무리들로 구분하려는 속셈을 가진 포로기의 한 전통주의자가 작성하였음이 확실하다. 이 장의 핵심은 일차 반역시도가 실패했는데도 반역의 꿈을 단념하지 못한 시드기야 일파에게 그같은 기대는 썩은 과일처럼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엄중하게 경고하는데 있다.
597년의 포로민들에게 보내는 편지 : 여러 팔레스틴 국가들의 사절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시드기야와 함께 반역을 꾸미고 또한 포로로 잡혀간 몇몇 예언자들이 유다의 반란을 선동하려고 노력하던 594년 경에, 예레미야는 597년의 포로민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에게 포로기간이 길어질 것임을 예상하고 바벨론에 정착하여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라고 권고하였다. 이곳 외에도 포로민들이 해방을 기대하려면 여러 민족에 대한 바벨론의 지배기간이 70년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통치 원년을 605년 갈그미스 전투의 승리로 보았을 것이다. 예언자는 포로기간이 길어질 것을 생각했을 것이고, 인간의 대표적인 최대 수명(시90:10)을 그 기간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바벨론이 고대 근동을 지배하기 시작한 609년부터 페르시야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한 때(539)까지가 70년이라는 견해도 있다.
가족재산을 되삼 : 32장 36-41절에서는 예레미야의 구매행위가 포로들의 귀환과 관련되어 이야기되지만, 상징적으로 해석된 구매 행위가 중심적으로 가리키는 내용은 유다에서의 새로운 삶이 그 땅에 머무르게 될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바벨론인들에 의해 출범될 재건정부를 시사한다.
"위로의 소책자와"와 새 계약 : 30-31장에 수집된 재난 뒤의 구원에 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이 수집물에는 "새 계약"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약속이 제의의 증언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옛 이스라엘과 연속성을 갖는 공동체 안에서 옛 법이 실현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포로기의 예레미야계 설교자가 예언자의 사상의 여러 측면들을 종합하여 근본적인 갱신을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해석된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명, 대적자, 좌절, 그리고 자기 회의등에 대하여 일인칭으로 말하는 많은 개인 애가들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것들은 자신과 신의 대화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11,18-23; 12:1-2; 15:10-12,15-21; 17:14-18; 18:18-23; 20:7-18). 이것은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그의 사역에 관한 그의 개인적 견해와 감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적극 수용되고, 특히 히브리 성서는 그와 같은 "내적 성찰"을 다른 곳에서는 거의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편 양식 비평학자들과 전승사 비평학자들은 예언자의 언어가 전형적인 애가 언어라는 것과 예언자의 "나"는 그가 그의 백성들의 멸망과 추방을 발표하는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대리적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예언자의 고뇌를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위의 경향을 반대한다. 이들은 그의 발언은 자서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마치 그것들을 어거스틴이나 루소의 고백록과 같은 장르로 해석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경고한다. 고백록에 대한 "제의적" 해석에는, 이 모든 수난들을 예언자가 그의 백성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당하였으며, 민족사의 시련기에 공동체의 전승 해석자라는 역할이 없었다면 그에게 그러한 수난들은 전혀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정당한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예언자들이 야웨로부터 받았다는 예언이 상반될 때 에언의 신빙성에 대한 위기가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결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하나냐는 여호야긴과 포로민들이 2년 이내에 돌아온다고 예언했으나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 기간이 수십년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8장). 이 대결은 단순히 누가 미래의 사건들에 대해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 서회정치적 정보의 상당부분은 609-586년 기간 중에 예언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상반된 두 개 노선이 적대적인 정치적 구상을 중심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왕들과 대다수의 관료들, 사제들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집트의 후원을 받아 바벨론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 "자치"당을 구성하였다. 하나냐는 이 계파에 속하였다. 소수 궁중관리 집단, 예레미야, 그리고 일부 사제들이 바벨론에 계속 복종할 것을 지지하거나 또는 반란이 일차 일어 났다면 포위한 적에게 항복할 것을 지지하는 "공존"당을 구성하였다.
이 양당은 국내 정책에도 차이를 보였다. 반바벨론 "자치주의자"들은 "국가의 존립"을 현지도층 치하에서의 유다의 완전한 독립과 동일시한 반면에, 친바벨론 "공존주의자들"은 지배계급의 국내 사회경제적 정책이 백성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보았고, 바벨론에 대항하는 지배계급을 강화시킨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을 더욱 해롭게 할 뿐인 사회적 불의를 겉잡을 수 없이 촉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치주의자들은 상황의 주요 불일치 혹은 모순이 유다와 바벨론의 국가간 갈등이라고 이해한 반면에 공존주의자들은 주요 불일치 혹은 모순이 지배계급과 대다수 유다 민중의 이익이 대립되는 계급간 갈등이라고 이해하였다. 예언을 인류학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예레미야와 그의 동맹자들은 권력 담당자라는 "중심" 권력가가 되기를 추구하는 "주변" 선동자라는 위험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레미야와 그의 동료들은 그들이 내걸고 있는 기치들이 실패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국외자들"이었지만, 기존체제가 마침내 정복당하고 그 지지자들이 제거되기 전에 그들의 관점이 체제 내에 강력하게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내부인"들이었다. 예레미야의 적대자들은 그가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반국가적인 견해를 지지하도록 만들고 따라서 전쟁 수행에 요구되는 국가의 단합을 와해시킬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장기간 고난을 겪어온 유다의 농민들은 상당수가 그들의 부담을 덜어 주거나 전쟁과 역경에서 벗어나게 할 정책을 함축하거나 지지하는 대중적 설교에 공감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집단행동이나 그들의 조직적인 활동이 전혀 보도되지 않고 있다. 예레미야와 다른 공존주의자들은 예루살렘 지도층에 대하여 쿠테타를 기도하거나 반란을 시도하지 않았고, 그들이 백성들의 실제 이익을 침해하고 야웨의 뜻에 적대적이라고 판단하는 현상태를 다만 임박한 바벨론의 개입에 의존하여 타파하려고 하였다
a.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한 예언자: 예레미야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예레미야만큼 용감하고, 비극적인 인물은 없다. 유다는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과 그 파멸은 유다가 언약을 어긴데 대한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을 설파하고 또 설파하는 일이 그의 긴 생애에 걸친 운명이었다.
예레미야서에 전기적인 자료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예언자보다 잘 알려져 있다. am낫세 통치 말기에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아나돗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예레미야는 율법책이 성전에서 발견되기 5년전에 예언자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는 당시 아직 젊은이였다(렘 1:1,6)).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마 그의 가계(家系)는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던 옛 실로의 성소의 제사장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 같다. - 이것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과거와 본원적인 언약의 성격에 심취해 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요시야를 매우 찬양하였고(22:15이하) 이 왕이 이스라엘 재통일의 계획을 추진하자 회복된 북부 이스라엘이 유다와 함께 시온에서 여호와를 예배할 날을 소망하였다(3:12-14; 31:26,15-22). 그러나 그는 분주한 제의는 보았지만 옛 길들로 돌이킬 기미를 보지 못했다(6:16-21). 사람들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8:8이하). 제사장들은 언약의 규정을 어기고 범죄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제공하는 악을 범하였다(6:13-15; 8:10-12; 7:5-11). 그는 언약의 요구들이 겉치레의 제의 배후로 사라져 버렸고(7:21-23), 또한 개혁은 어떠한 회개도 가져오지 못한 피상적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4:3이하; 8:4-7).
예레미야는 결국 전생애에 걸쳐 무거운 부담이 되었던 파멸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괴로워하다가 여호야김의 치세 때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말았다. 이 왕의 묵인 아래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예레미야는 이 백성이 자신의 왕 같은 신에게 반역하였으므로(11:9-17) 여호와의 언약에서 그 규정들을 어기는 자들을 벌하려고 정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며 민족에 대한 조사(弔辭)를 설교하였다. 주전 609년 민족적 굴욕은 신명기 신학을 부정하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사건이라고 그는 단언하였다. 그것은 여호와를 버린 민족이 자초한 것이었다(2:16).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여호와는 "북방으로부터 자신의 심판을 대행할 자를 보낼 것인데, 이제 그 대행자는 바벨론이라는 것이 분명해졌고(4:5-8,11-17; 5:15-17; 6:22-26), 그들은 이 회개치 않는 민족을 엄습하여 아무도 남기지 않고 모두 멸할 것이디 때문이었다(4:23-26; 8:13-17).
예레미야는 모세의 언약의 신학에 서서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들에 대한 신뢰를 거부했다. 그는 기존의 국가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도 국가도 그 약속들을 얻지 못할 것이고, 이 나라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은 완전한 파멸임을 확신하였다. 여호와는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실로의 성소가 그러하였듯이 자기 집을 버리고 그곳이 파괴당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7:1-15; 26:1-6).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미움을 받고 조롱당하고 추방되기도 했으며(15:10이하,17: 18:18; 20:10),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해당할 위협에 처하기도 하였다(11:18-12:6; 26장; 36장). 그는 발작적으로 화를 내며 불평을 털어놓기도 하였고 그러다가 의기소침해지고 심지어 죽기를 구하는 절망에 빠지기도 하였다(15:15-18; 18:19-23; 20:7-12, 14-18). 그는 자신의 직분을 미워하고 그만두기를 갈망하였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그로 침묵하지 못하게 하였고(20:9), 그는 언제나 다시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할 새로운 힘을 얻곤 하였다(15:19-21).
주전 597 이 지나고 심판이 다 실행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 사이에 유다의 신속한 복구를 바라는 터무니없는 소망이 널리 퍼졌을 때, 예레미야는 한결같이 파멸을 설교하였다. 여호야긴이 곧 귀국하리라는 희망에 술렁일 때(주전 594년), 예레미야는 이를 비난하면서 황소의 멍에를 매고(27장) 하나님이 바벨론의 멍에를 열방들의 목에 얹어 놓았으니 이를 감수하거나 멸망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바벨론에 대한 최후의 반란의 때에도 예레미야는 동요하지 않고 최악의 사태를 예고하면서 여호와가 친히 개입하는 기적은 없을 것임을 선포했다. 오히려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고 선포했다(21:1-7). 이집트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에 희망이 되살아났을 때에도(37:3-10) 그는 가차없이 소망을 꺾어버렸다. 오히려 그는 백성에게 도망하라고 권고하였다(21:8-10).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하였다(38:19; 39:9). 그는 토굴 감옥에 갇혔고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벨론에 의해 성이 함락되었고, 바벨론은 그를 선대하여 풀어 주었다. 그에게 그 땅을 떠나든지 남든지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남기를 선택하였다(40:1-6). 그달리야가 암살된 후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피신하던 무리에게 끌려간 예레미야는 그곳에서도 백성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설교(44장)하였고, 거기서 죽었다.
예레미야의 소망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긴 죄로 여호와에 의해 멸망한 유다 왕국의 훨씬 너머에 있었다.
c. 예언자들과 이스라엘의 미래
그릇된 소망을 가차없이 꺾어버리고 민족의 재난을 여호와의 주권적인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예언자들은 신앙에 입각하여 그 비극을 앞서 설명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비극으로 말미암아 신앙이 파괴되는 것을 막았다. 이 메시지는 개인의 결단을 토대로 한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촉진하였는데, 이 공동체는 이전의 낡은 공동체가 와해된 뒤에도 존속할 수 있었다. 물론 흔히 개론서에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개인주의 신앙의 발견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극히 강력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인해 이스라엘 신앙은 결코 여호와의 언약의 율법 아래서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안 적이 없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으려면, 개개인의 결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가 낡은 공동체를 대신해야 했다. 예언자들의 설교는 바로 이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했던 것이다.
예레미야가 국가 제의를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그 제의의 희생제사 의식이 여호와의 요구들에 비추어 주변적이라는 것(렘 6:16-21; 7:21-23)과 내면의 정화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는 사실(렘 4:3이하,14)은 외면적인 제의 없이도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가야 할 날에 대비했음에 틀림이 없다.
예레미야는 아무런 소망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예레미야도 소망을 전한 예언자이다. 예루살렘이 멸망해 가고 있을 때에도 그는 부동산을 매입함으로 자기 동포의 미래에 소망을 보여 주면서(렘 32:6-15) , "사람이 이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고 선언하였다. 이 믿음은 국가의 제기에 대한 어떤 기대나 그 밖의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여호와의 새로운 구속행위에 토대를 두고 있다(렘 31:31-34). 여호와는 이집트에서 자기 백성을 불러 내었던 것처럼 다시 자기 백성을 불러내어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어 그들의 마음에 새 언약의 율법을 새겨 줄 것이라는 것이다. 국가를 단죄했던 출애굽 신학은 민족의 소망의 토대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