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나무 아래서 / 박라연
겨우 성냥 한 개비의 영혼으로
두 길의 세상을 살게 된 나무가 있다
나무의 몸 자라 영혼의 가지들이
굽이쳐 흐르는 물결처럼 흐드러졌을 때
나무는 그만
또 한 세상의 풍경을 읽고 말아
이 세상에는 데리고 나올 수도
쉽게 설명할 수도 없는
삶, 하나를 놓아두고 차마, 돌아설 때마다
나무의 눈과 마음이 누설한 풍경
그 죄의 눈금이 조금씩 내려갔다
눈금이 하얗게 지워지던 날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물이 된다
잔잔한 호수에 남아
연잎을 흔들며 평생을 살 수도 있다
마음은 또 크게 크게 자라서
깊은 바닷속 외로운 산호초
그 어둠만을 밝게 비춰주며 살아도 된다
저절로 지느러미 고운 한 마리 물고기가 되는 날
보글보글보글 고운 물살 속에서 혼자 수줍은데
바닷속에도 성냥 한 개비의 영혼으로
두 길의 세상을 꿈꾸며
왼쪽만 잠이 드는 나무 하나 있어
그 나무 곁에서 나는 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싯다르타가 그리운 언덕 위
아직은 뿌리가 없는 보리수나무가 된다
- 박라연,『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문학과지성사, 1996)
카페 게시글
진달래詩선
보리수나무 아래서 / 박라연
씨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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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16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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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