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계절, 이 시집____함종호
자연과 생활의 경계
──나호열의 『촉도』와 이현승의 『생활이라는 생각』에 대하여
함종호
1.
한때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의 감각은 온통 자연을 향해 열려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자연이요, 귀에 들리는 것도 자연이요, 맛이나 향기 등도 모두 자연을 경험하는 것에 바쳐졌다.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지닌 사람들은 시인들이다. 하여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의 시인들은 자연물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 결과 감각적인 인상의 세계를 시적으로 새롭게 창조해내곤 했다. 적어도 그 당시에 시인들이 시로 읊었던 자연은 인간세계와 조화를 이뤄 하나의 일체된 세계를 구성했다. 바라보는 주체도, 보이는 대상도 하나로 혼융된 세계였던 것이다. 즉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고, 인간의 삶과 생활의 터전 또한 자연이었다.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에 균열이 가해진 것은 비단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자연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 비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대한 균열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급기야 이제는 자연의 붕괴와 소멸을 걱정해야 할 위기에 놓여 있다. 이제 자연과 인간 간의 조화와 융합의 모습은 엄격하게 분리되었고 이에 발맞춰 자연은 인간세계에 종속된 채 그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인간)와 보이는 대상(자연) 간의 뚜렷한 구별이 이루어졌고, 보이는 대상은 인간의 사고와 인식 결과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해졌다. 이는 시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의 시인들은 자연물로써의 대상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의 몸으로 느끼고 체화했다. 그러나 자연세계와 인간세계가 철저히 구분되고 분리된 현 시대에서 자연물은 시인의 사유를 따라 관념의 한 끝자락을 잡고 의미의 표면을 미끄러지며 부유한다.
나호열의 시집 『촉도』에 등장하는 자연물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편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자연물은 어디까지나 보조관념으로써 주어져 있으며, 이는 시인의 사유와 인식을 가져오는 매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편에 등장하는 자연물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전통적인 상징성을 위반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때 집이었고
기둥이었던 폐기물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둔탁한 광물의 알 속에서
밤새 얼룩진 기도를 마친
순례자처럼
붉은 눈물의 태양을 향해 솟아오른다
누구는 스모그라 하고
누구는 먼지라고 호명하는
새들의 뒤를
몇 점 구름이 수호자가 되어
뒤따르고 있다
버려진 폐기물들은 다시 한 번
더 버려진다
구름의 집이라는 낭만의 집
그러나 구름은 집이 없다
몸통은 없고
날개만 퍼덕이는
하루살이처럼
──「구름의 집」 전문
자연적인 대상에 천착한 시들은 그것 안에 고유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때의 상징적 의미란, 대개 전통과 관습에 기반을 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나호열의 경우, 자연물은 오히려 일상적인 삶의 현장을 대변하는 보조적인 수단에 해당하며, 생활세계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역할로 존재한다. 가령 위의 시 「구름의 집」에서 자연물인 ‘새’는 ‘폐기물’ 더미 위를 날아가고, 그런 ‘새’를 뒤따르는 ‘구름’은 그 실체가 ‘스모그’ 또는 ‘먼지’인 것이다. 전통과 관습의 차원에서 ‘새’와 ‘구름’ 등은 자연세계를 배경으로 자연에의 관조 내지는 자연과의 합일을 그리는 주요 소재로 흔히 등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묘사된 시편의 경우 흔히 자연물과 시적 화자 간의 물리적인 거리는 어느덧 상쇄되고 동일화가 일어나곤 한다. 그러나 위 시의 경우 이들은 자연세계와 대척점에 선 산업사회와 같은 인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이나 들과 같은 자연적 배경이 아닌, 폐기물 더미 위를 날아가는 새의 모습에서 부조화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그 새를 뒤따르는 것이 ‘스모그’와 ‘먼지’ 등 산업화된 생활세계의 잔재들인 것으로 보아 과거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에 관습적 상징의 체계 안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낭만’의 요소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산업화된 생활세계를 배경으로 하늘을 나는 새는 비극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강남 이 편한 세상에 그가 왔다
검은 제복 젊은 경비원이
수상한 출입자를 감시하는 정문을 지나
대리석 깔린 안마당에 좌정했다
몸이 반쪽으로 쪼개져도
죽지 않고 용케
당진 어느 마을 송두리째 뭉그러져 사라져도
용케 살아남았다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 주고
비바람 막아 주며 죽은 듯
삼백 년 벼락 맞고도 살아 있더니
이 편한 세상에
한 그루 정원수로 팔려 왔다
푸르기는 하나 완강한 철책에 둘러싸여
손길 닿지 않는 그만큼의 거리
저 불편한 세상과
이 편한 세상 사이에서
눈이 멀고
귀가 막힌 침묵의 우두커니
새 한 마리 깃들지 않은 이곳
집과 무덤 사이의 어디쯤이다
──「이사」 전문
나호열의 시편에 등장하는 자연물이 비극적인 정서를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자연물이 자연세계에 놓여 있지 않고, 인간의 인위적인 생활세계와 직접 관계하기 때문이다. 「구름의 집」에서의 자연물 ‘새’가 ‘버려진 폐기물’을 배경으로 날아오를 때, 그것은 ‘스모그’와 ‘먼지’들과 관계한다. 이 과정에서 비극적 정서가 야기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사」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저 불편한 세계’로 대표되는 자연세계로부터 ‘이 편한 세상’─이는 획일화된 인간의 주거공간(아파트)의 특정 브랜드를 연상시킨다.─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생활세계로 나무 한 그루가 ‘이사’를 왔다. 이사 오기 전 그 나무는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 쓰다듬어” 줄 정도로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능동적인 소통을 꾀했던 것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 편한 세상’으로 이사 온 후로는 ‘완강한 철책’에 가로막혀 “눈이 멀고”, “귀가 막히”는 등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감시, 그리고 편안함을 가장한 억압과 통제 등이 ‘이 편한 세상’으로 이사 온 나무에게 놓인 상황인 것이다. 「이사」에서의 이와 같은 시적 정황은 우리로 하여금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회의를 갖도록 만든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감시, 그리고 편안함을 가장한 억압과 통제 등은 우리네 삶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천형은 아니었다
머리 함부로 내밀지 마라
지조 없이 꼬리 흔들지 마라
내가 내게 내린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뿔 달린 머리도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채찍 같은 꼬리도
바늘구멍 같은 몸 속으로 아프게 밀어 넣었을 뿐
지상을 오가는 더러운 발자국에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으려고 지하생활자가 된 것은 아니다
주변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외톨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햇볕을 좇아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향일성의 빈손보다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 옆에서
거추장스러운 몇 겹의 옷을 부끄러워했을 뿐
제자리를 맴도는 세상에서
빠르거나 느리거나 오십 보 백 보
허물을 벗을 일도
탈을 뒤집어쓰다 황급히 벗다 얼굴을 잃어버리는 일도 내게는 없으나
온몸을 밀어내며 나는 달려가고 있다
이 밝은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으로
온몸을 꿈틀거리며 긴 일획을 남기며 가고 있다
──「지렁이」 전문
앞서 소개한 시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호열의 시편에 등장하는 자연물은 더 이상 아름답거나 자족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비천하고 비루한 것에 더 가깝다. 여기서 시적 대상에 내재된 비천함과 비루함은 자연물이 본래 가지고 있던 속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연세계와 인간세계 간의 명확한 분리와 구분, 그리고 그러한 경계 짓기의 철저함 속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마치 “허물을 벗”거나, “탈을 뒤집어쓰”는 일 없이 “밟혀도 꿈틀거리지 않”는 ‘지하생활자’로서의 ‘천형’을 살아가는 ‘지렁이’처럼, 이때의 비천함과 비루함은 숙명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지렁이’에게서 “악착같이 흙을 물고 늘어지는 뿌리의 사유”와 같은 존재의 심연으로 끊임없이 빠져든다. 그것은 적어도 부끄러운 삶은 살아가지 않겠다는 일종의 ‘약속’인 것이다.
사그락거리는 내 몸이 배운 단어들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별이다
모래시계 속에서 낙하하는 별들을
또 한 마디로 더 줄이면 바람이다
바람 속에 숨어있는 둥지 안에는
아직 내가 배우지 못한 단어가
부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낡아가고
그 알은 익어가고
단어장에 마지막으로 배운 그 말
푸른 잉크에 묻혀나올 때
푸드득 무한을 향해 날아가는 새
먹물 같은 그림자를 남긴다
사랑이라는 말
──「낡아 가고…… 익어 가고」 전문
이 시 「낡아 가고…… 익어 가고」에서 부끄러운 삶을 경계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별’, ‘바람’, ‘새’ 등의 자연물과 관계 맺으며 변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화자의 태도는 ‘푸드득 무한을 향해 날아가는 새’처럼 지치지 않고 영원히 경주되며, 자신이 몸으로 배운 한 마디의 단어인 ‘사랑’을 지향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품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지향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이는 그 말이 “푸른 잉크에 묻혀 나올 때”, “먹물 같은 그림자를 남”기기 때문이다. 왜 하필 ‘푸른 잉크’이고, ‘먹물 같은 그림자’일까. 시적 화자가 관조하는 ‘새’, 그리고 ‘새’로 대표되는 자연물로써의 시적 대상은 아직 자연세계와 인간의 생활세계가 철저히 분리되고 구분된 세계의 경계선에 서서 이 두 세계 사이를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2.
나호열의 시편들이 주로 자연물을 대상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면, 이현승의 시편은 생활세계를 대표하는 사물을 대상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과거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에는 자연이 곧 삶과 생활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이현승이 생활세계를 대표하는 사물에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자연을 상실한 현 시대에 시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은 생활세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에 시인들이 자연물을 대상으로 시를 읊었듯이, 이제 그 자리를 생활세계의 사물들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보온병의 원리는 간단하다. 빛과 열이 전달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 내용물을 진공으로 둘러 접점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보온병만 보면 왕따 생각이 나는 걸까? 속은 화끈거리는데 그걸 나눌 나군가가 없다면 틀림없이 따돌림을 받는 거다. 내가 학교 다닐 땐 병을 깨서 자기 팔뚝을 긋는 애들은 못된 놈들도 안 건드렸다. 말하자면, 이상한 놈이 못된 놈들보다 쌨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상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과 통하고 종종 순수한 애들은 이상한 애들과 친했다. 그건 보온병 속의 내용물이 그 열을 그대로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완벽한 차단이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깥은 끓어오르는데 혼자 냉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긴 안겨 있는데 하나도 안 따뜻해지는 것도 이상하지. 보온병 말이다.
──「보온보냉」 전문
‘보온병’은 생활세계가 그토록 욕망하는 편의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활세계를 대표하는 사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호열의 시에서 시적 화자가 자연물로서 주어진 시적 대상과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현승의 시에서도 시적 화자는 생활세계의 산물인 시적 대상과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는 ‘보온병’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긴밀히 연관된다. 본래 그것은 “빛과 열이 전달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보온병을 구성하고 있는 표면에 의해 안과 바깥의 경계는 분명해지고, 경계가 분명해진 것만큼 안과 바깥 사이의 교감과 소통은 요원한 것이 된다. 한편 이 시에서 ‘보온병’에 부여된 ‘순수함’과 ‘이상함’의 요소도 이와 관련이 깊다. 그것은 안과 바깥의 경계가 분명하다는 점에선 순수한 것이지만, “열을 그대로 보존할 수 없다”는 점에선 이상한 것이다. 순수한데 교감과 소통은 요원하고, 그렇다고 해서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상한 것.
‘보온병’은 생활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네 삶과 매우 많은 부분 닮아있다. 우리네 삶 또한 외부와 뚜렷이 경계 짓지만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고, 그렇다고 해서 외부와 적극적인 교감과 소통을 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네 삶과 생활은 이 시의 ‘보온병’처럼 어쩌면 경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현승에게 있어서 경계 그 자체로써의 삶은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죽을 힘으로 살고 사는 힘으로 죽는다는 생각”(「부끄러움을 찾아서 2」)이 바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고, 또한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 「생활이라는 생각」) 그 자체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삶과 생활은 “가야 할 길은 멀고 남은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수수께끼’(「씽크홀」)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내 손은 두 개뿐인데
잡아야 할 손은 여러 개다.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회전문 안에서
우리의 스텝은 배배 꼬이고 뒤엉킨다.
회전과 와류를 빠져나가지 못해
우리는 빨래처럼 잔뜩 뒤엉키며 물이 빠진다.
아무나 막 목을 조르고 싶다.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을
남에게 웃음거리가 됐다로 번역하면서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슬픔을 팔고 있다는 수치의 감정이
우리를 화나게 한다.
손안에 쥐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움에서 시작해 뜨거움으로 가는 악수.
내 손은 두 개뿐이지만
여러 개의 손을 잡고 있다.
──「저글링」 전문
선택에 대한 포기의 비용을 기회비용이라고 하고
그것은 장사꾼에게 이문이 남지 않는 일을 하느니
돈놀이를 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지만
철수가 미자 대신 순자를 사랑해서
순자를 선택하고 미자를 포기해서 얻는
이익이란 이익의 관점일 뿐이다.
삶이란 언제나 선택의 편에서 포기를 합리화하는 일이므로
계산 자체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
……
참새들은 내게 맡겨라.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공들인 옷에 똥칠이나 한다고 비웃지 마라.
허수아비 어깨와 팔에서 쉬도록 하여
참새들은 편안함으로 가두는 것도 넓게 보면 큰 이문이다.
참새야 너무 무서워는 말고 조금 무섭게
너무 친하지는 말고 조금 멀리,
그렇게 같이 살자.
──「허수아비 디자이너」 전문
이현승에게 있어서 순수하고도 이상한 삶과 생활,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종의 수수께끼와 같은 삶과 생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관계의 복잡성에서 오는 선택의 어려움에 기인한다. 먼저 관계의 복잡성은 「저글링」의 경우 “내 손은 두 개뿐인데/ 잡아야 할 손은 여러 개”로 표상된다. 즉 생활의 고단함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관계성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발생한다. 이로 인해 “우리의 스텝은 배배 꼬이고 뒤엉”킬 뿐만 아니라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을/ 남에게 웃음거리가 됐다”고 여기며 ‘자존심’이 상하게 되고 급기야 ‘수치심’까지 맛보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삶의 패턴과 의미 해석 코드만이 시적 대상에 부여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인간)와 보이는 대상(자연) 간의 상호 교감과 소통의 차원 또한 아무런 오해 없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연물을 인위적인 생활세계 내 사물이 대신하게 되면서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는 복잡해졌고, 그러한 관계 양상의 다양한 수만큼 주체와 대상 간의 심리적 거리 또한 멀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손안에 쥐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움에서 시작해 뜨거움으로 가는 악수”라 지칭된 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다. “내 손은 두 개뿐이지만/ 여러 개의 손을 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저글링」에서 살펴본 관계의 복잡성은 다시 선택의 문제에 가로놓인다. 이것은 「허수아비 디자이너」에 오면, ‘기회비용’의 측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래 ‘기회비용’이란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발생하는 합리적인 선택의 문제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는 다분히 경제적인 차원으로의 접근을 의미한다. 그리고 합리적인 선택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보다 효용적인 가치이다. “삶이란 언제나 선택의 편에서 포기를 합리화하는 일”이라 할 때, 이 시에 반영된 삶의 효용적인 가치의 측면은 ‘참새’들을 “편안함으로 가두”고, “너무 친하지는 말고 조금 멀리”에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와 견주어보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에 자연물은 삶과 생활의 터전이자, 삶과 생활 그 자체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자연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 주체 사이에는 동질성이 그 바탕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자연이 상실되고 그 자리가 인위적으로 가공된 생활세계의 사물로 대체되면서 어느새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에 효용적 가치와 같은 경제 논리가 가로 놓이게 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 ‘기회비용’을 가지고 선택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효용성과 합리성을 보장받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 스스로 우리네 삶과 생활에는 “미래가 없고 영원이 없고 낙관이 없으며 추억이 없다”(「무임승차」)고 진단내리고 있는 것은 어떤 관계이든 무조건 효용적 가치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태도가 가지고 있는 병폐 때문인지 모른다.
3.
어쩌면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를 막연히 회고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 시대에 자연물이 주체의 시각에 포착된 세계의 전부를 의미했듯, 오늘날 생활세계를 대표하는 인위적인 사물이 세계의 전부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막연한 동경은 맹목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고도로 편리해진 생활세계를 버리고 다시 과거의 자연세계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그러므로 매우 어리석은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가령 자연세계와 생활세계는 근본적으로 분리되고 구분되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어쩌면 자연은 시대의 변화 양상에 맞춰 그 범위를 스스로 넓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호열과 이현승의 시편에서 살펴본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 양상은, 여기서 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자연세계의 것이든 생활세계의 것이든 상관없이, 분리와 구분의 경계 짓기에 대한 반성과 회의의 시각을 깊이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이들의 시세계에 대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과거 자연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의 시인들에게 감각적인 인상을 중심으로 자연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 그들의 소명으로 놓여 있었다면, 현 시대의 시인들에겐 이를 변주시켜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소명으로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나호열과 이현승의 시편에서 바로 그것을 본다.
함종호 / 문학박사. 서울시립대학교 강의전담교수. 저서 『시·영화·이미지』, 『글쓰기 차별화 전략』(공저)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