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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교사워크샵일정은 방학전 교사회의시간에 정했다.
설 전인 2월 14~15일 1박2일 일정으로 '동학농민혁명 답사길을 따라' 라는 주제를 정하고 장소를 선택했다.
날짜, 장소 등 여러가지 일들을 정할때 선생님들과 조율해서 정한다고는 하나 선생님 개개인은 통보로 받아들이는 건 아닌지
매번 고민을 하면서 일정을 짜곤 한다.
떠나기 전 '갑오동학 농민혁명답사기'라는 책을 정해서 매일 한 단원씩 읽기 시작했다.
매일아침 띵~~동 하는 알람으로 읽을 페이지를 정해주고 읽고나면 읽은 소감이나 책에서 보았던 인상적인 구절을 서로 교환하는
책읽기 방식이다. 작년에 했던 책읽기방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혼자읽기는 벅차지만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을 선정해서 매일매일 조금씩 읽어나가는 책읽기방이 이번 워크샵에서도 도움을 줬다.
2015년에는 더 멋진 선생님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워크샵을 떠났다.
제1회 경주,양산,부산을 시작으로 제 2회는 김제,정읍,전주을 다녀왔고 제3회는 경주, 제 4회는 부산,울산을 다녀왔다.
제 5회는 가까운 화성에있는 청려수련원에서 워크샵을 진행했다.
지난 2회 때 워크샵 주제인 '동학혁명의 길을 따라'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장소를 약간 변경해서 답사하기로 했다.
모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처럼 들떠있다.
14명의 교사가 아침 9시 영통 황골에서 출발했다.
답사장소는 맨 먼저 무장읍성과 객사를 시작으로 동학농민혁명모의탑, 사발통문작성지, 동학농민군 위령탑, 고부향교, 고부관아, 군자정,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황토현전적지, 전봉준의 옛집, 만석보혁파비, 만석보유지비, 태인향교, 피향정이 첫날 답사지이다.
4년전 왔던 무장읍성 주변은 많이 달라졌다. 주변에 있던 마을 민가들이 철거되었고 길도 반듯반듯 잘 정비되어있다.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반옹성이다. 진무루를 지나 읍성으로 들어서면 눈에 띄는 것이 무장객사이다.
선조14년에 건립된 객사는 궐패를 모시는 가운데 정청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 현감과 관리들이 모여 한양의 대궐을 향해 배례하던 곳이다. 그 양옆으로 정청보다 지붕을 낮게 한 좌.우익헌이 있다. 이곳은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객사로 오르는 계단 소맷돌엔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고 양옆 축대 끝에 화병에 담긴 꽃이 새겨져 있다.
객사 왼편 나무 숲이 우거진 옆에 무장을 거쳐 간 수령들의 영세불망비들이 여러개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오래된 팽나무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읍성안 서쪽의 연못도 잘 정비되어있다.
무장은 동학의 3대 두령인 손화중 포의 핵심 근거지였다.
손화중은 본관이 밀양이고 이름은 정석, 자는 화중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공부하였고 20대 초반에 처남 유용수를 따라 십승지를 찾아서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영남 지방에서는 동학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동학에 빠져든 손화중은 입교 2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를 하다가 여러포의 접주들을 만났다.
1893년 근방 여러 고을에서는 동학 접주 손화중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선운사 도솔암 암벽에 비장되어 있는 검단선사의 비결을 꺼냈기 때문이다.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 속에는 신비스러운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남접의 가장 중심 부대였고, 많은 세력을 규합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황룡강 싸움에서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2차 봉기때 공주로 가지 않고 광주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우금치전투가 패배로 돌아가고 태인에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자 그는 재실지기였던 이봉우에게
"그동안 내가 너에게 진 빛을 갚겠으니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으라"
라고 말했다.
손화중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고, 그 이듬해 전봉준과 함께 한날한시에 처형되었다.
무장객사 뒤로 내아건물이 남아있다. 예전에 왔을 때 눈이 녹은 흙바닥때문에 신발을 더렵혔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토성을 따라 진무루까지 왔다. 별생각없이 한끼 때우자는 심정으로 백반집에 들어섰다.
'역시, 전라도 음식점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모두 흡족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정읍으로 출발했다.
동학농민혁명 모의탑과 사발통문 작성의 집, 위령탑이 있는 주산리 마을에 도착했다.
주산리 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모의탑이 있다.
5층으로 된 받침대 위에 대리석 비가 세워져있다.
4면으로 된 비의 뒷면에는 사발통문에 서명한 20인의 이름이, 좌측에는 사발통문의 내용이, 우측에는 비문이 적혀 있다.
모의탑에서 주산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오면 사발통문작성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이집이 지금은 빈집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마을회관 앞에 위령탑이 있어 다음 문화유산반 아이들과 왔을 때는 묵념을 해도 좋겠다.
다음 목적지는 고부향교이다. 4년전에 봤던 고부향교는 가장 멋진 모습으로 기억될 만큼 오랫동안 남아있다.
명륜당에서 수직에 가까운 계단을 오르면 대성전이 나온다. 하지만 대성전은 삼문이 굳게 잠겨있어 예나 지금이나 들어 가 볼 순 없다. 우린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집 담넘어 기웃기웃하거나 문틈으로 안을 살펴보곤 한다.
계단을 오르면서 수없이 많은 은행알들때문에 신경쓰며 걸었다.
향교를 나오면 옆으로 고부초등학교가 나온다.
어쩌면 동학농민혁명의 발화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부관아는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초등학교 입구에 낡은 표지판만이 이곳이 고부관아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있다.
주변에 조병갑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군자정을 찾아갔다.
연못 한가운데 세워진 군자정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되어있으며 앞쪽으로는 부서진 비석들이 한줄로 서 있다.
들어오는 입구에는 널찍한 돌 3매로 다리를 만들었다. 상판 돌과 돌사이는 돌을 깎아 끼워 넣고 다리 기둥을 만든것 같다.
짧은 겨울 해를 잡아 둘수 없어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데,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냉이를 캐다 늦은 선생님이 있다. 늦게 도착했다면 빠르게 보고 다른사람들이 기다리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 부족한것같다.
동학혁명기념관과 황토현 전적지로 갔다.
기념관 입구에서 단체사진 하나 찍고 들어가서 해설을 들었다.
말목장터 감나무가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말목장터는 고부, 정읍, 태인을 잇는 교통요충지이다.
고부봉기 당시 전봉준은 말목장터에서 일대의 농민군 수천명을 모집하여 조병갑의 탐학과 비행을 열거하며 봉기의 당위성을과 목적을 밝힌 후 고부관아로 진격하여 점령하였다.
고부봉기의 첫 집결 장소 말목장터 감나무는 150여년의 세월을 견디어 냈으나 2003년 태풍을 맞아 쓰러져 보존처리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에서 나와 건너편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까지 빠르게 다녀왔다.
그곳에 전봉준의 동상이 있는데 잘못 된 것이라고 한다. 전봉준이 고문을 당한 뒤의 모습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임시 상투를 틀어 올린 것이라고 하는데 그 모습그대로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봉기를 하러 가는 대장이면 봉두난발 헛상투를 틀지 않는 다고 한다. 잘못 된 것은 빨리 고쳐 나가야한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도 평소 모습이 아닌 고문으로 퉁퉁부는 얼굴사진이 교과서에 실려 있어 사람들이 그 모습을 기억한다.
만석보 혁파선정비와 만석보유지비로 이동하였다. 가는 길에 이평면사무소 옆 말목장터를 차안에서만 보았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 농민들이 쌓은 만석보가 있었다.
만석보는 광산보 또는 예동보라고도 했는데, 만석보는 가물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에는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만석보라 불렸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석보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게 하였다. 그리고 수세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 많은 수탈을 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그래서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를 하여는데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된 것이다.
동학농민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1898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가 나머지를 철거하였다. 이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를 세웠다.
만석보유지비 주변으로 배들평야가 시원하게 펼쳐 있고, 동진강을 배경으로 기사님이 단체사진을 찍어 주셨다.
기울어가는 저녁해가 아쉬운듯 더 환하게 비춰준다. 그래서 우린 눈은 찡그리나 입은 웃고있다.
피향정이 있는 태인으로 갔다. 피향정엔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가 있다. 어스름하게 해가 질무렵 찾아간 정자는 문이 닫혀있다. 포기하고 담 넘어로 넘겨다 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관리하시는 분이 그냥 열고 들어가라고 한다. 분명 커다란 자물통이 채워져 있는데 밀어보니 자물통보다 손잡이가 더 컸던 것이다.
호남제일정자라는 현판이 눈에 띤다. 정자 주변으로 연지가 아래위로 있었는데 지금은 아래쪽 연지만 남아있다.
비석이 한줄로 서 있지만 어떻게 조규순의 비를 찾지...혹시 깨진비석이 아닌가 하며 하나둘 찾아가다 마지막 까막비석하나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원흉 고부군수 조병갑이 태인현감을 지낸 그의 아버지 조규순을 위해 세운 비석이다.
주변에서 저녁식사를 해야했다. 추천받은 식당으로 들어가 밥을 기다리는 사이 뽑기를 했다.
저녁을 먹고 짝을 찾은 다음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것인데, 우리팀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미 눈치빠른 팀은 수저를 놓자마자 뛰쳐나가 인증샷을 올렸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앞뒤로 앉았던 신영주선생님과 고경숙선생님팀이 일등으로 올렸다.
드디어 빡빡했던 답사일정을 마치고 상두산에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이미 깜깜해져 주변은 볼 수가 없다.
숙소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뒤 저녁활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둥그렇게 둘러 앉아 2015년 교사로서의 마음가짐과 해야할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안내했다.
지기학교의 살림살이는 이동옥선생님이 설명해 주었다.
지기학교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쑥쓰러워 남앞에서 말 못해요". "떨려요".
라고 말은 하지만 막상 이야기 할 기회가 주어지면 조곤조곤 이야기를 잘 풀어 놓는다.
3년차 이상 되신 신명하, 김종란, 설경옥, 고혜숙, 김민수선생님들의 시간으로
"지기학교를 통한 나의 변화"
라는 주제로 자유롭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제 끝이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래프로 그려서 자기소개를 했다. 다들 태어날 때부터 준비된 지기인들이었다.ㅎㅎ
고단한 하루를 상두산에서 마감한다.
다음날 아침 기상시간은 7시로 각방마다 취향에 맞게 맛있는 아침식사를 하고 9시 출발이다.
그 바쁜 시간에 김치전을 부쳐주는 부지런쟁이~~
상두산을 넘어 가면 칠곡에 김동수가옥이 있다.
이번 일정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무성서원을 꼽을 수 있다.
그곳에서 해설사 선생님께서
"정읍에 왔으니 정읍사 한번 듣고 가시죠"
라며 기타를 치며 직접 노래를 불러 주셨다.
이른 아침부터 감상에 빠져 들었다.
칠곡에 있는 무성서원은 2년전 국토체험으로 왔던 곳이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눈길에서 미끄러지며 버스시간에 맞춰 달려왔던 기억이 난다.
서원 밖에는 '병오창의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무성서원은 1906년 6월4일 면암 최익현, 축간 임병찬 등 38명의 유림이 창의를 일으킨 유적지이다.
당시 800명에 달하는 의병은 정읍을 거쳐 순창읍에 진출,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전주. 남원의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의병측은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 선고 받고 일본의 대마도에 끌려가 유형생활을 하다가 최익현은 그곳에서 순국하였고 임병찬은 황태자 가례의 특례로 풀려나 1914년 고종황제의 밀약을 받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이 되어 전국적인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한동지의 실수로 발각되어 다시 거문도로 유배되어 2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다음 목적지는 삼례다.
1894년 전주감영을 접수하고 집강소를 설치한 동학농민군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있었다. 이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나라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전봉준은 직속부대원들을 이끌고 전북 완주의 삼례로 갔다.
동학농민혁명이 외세와 싸우는 전쟁의 성격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삼례 2차봉기다.
삼례는 전주 북쪽의 만경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는데 서울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늦가을 삼례에 모인 농민군의 수는 1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기세는 다 어디가고 이곳 삼례엔 제대로 된 표지판이 없어 찾기가 어려웠다.
공설운동장 뒤쪽 공원으로 갔다. 너무 후미진 곳, 예전에 이곳이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란 표지석이 눈에 띈다.
이제 끝이 보인다.
우금치로 이동이다.
보국안민, 척양척왜를 외치며 서울로 진군했던 동학농민군들은 공주 우금치에서 처절하게 쓰러졌다.
농민혁명군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농민군은 주력부대였던 전봉준은 공주로, 김개남은 전주로, 손화중은 나주로 분산되었다. 반면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은 공주 한곳에 집중적으로 몰아쳐서 힘을 균형이 맞지 않아 실패했다고 한다.
우금치 고개는 야트막한 산이다. 지금은 이곳에 터널이 뚫려있다.
〔2013년 1월 4일 -국토문화탐방 글을 가져다 이번 탐방 마무리를 해본다-〕
동학농민혁명 완전정복!!
조선봉건사회는 봉건적 신분제를 상부구조로 하면서 신분제에 따른 차별적 인간관계를 옹호하는 성리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하여 성립, 유지되고 있었다.
17세기 후반 경작 기술의 발달과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은 꾸준히 늘어났다.
농민 가운데 계층분화가 일어나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유민으로 전락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한편 부농으로 상승하여 고용노동을 바탕으로 광작경영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생겨났다.
19세기로 접어들자 세도정치가 자행되어 소수 문벌집단이 국사를 좌우하는 가운데 국가제정은 궁핍해졌다.
전정, 군정, 환곡은 관리들의 돈벌이 수법으로 전락되었고, 농민은 겨우 그날그날 살아갈 뿐 희망이 없었다.
관서지방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삼남지방 임술농민항쟁 등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기라 할 만큼 전국 각지에서 농민의 봉기가 자주 일어났었다. 민중의 삶속에 스며들어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던 정감록의 예언이나 미륵신앙, 후천개벽사상 등 민중사상의 여러 갈래들은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동학이라는 큰 줄기로 모아졌다.
동학은 여러 민중사상을 수용하였고 서학으로 대표되는 외세에 대한 대응자세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1892년 서인주와 서병학 주도로 공주와 삼례에서 동학도들이 모여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교조신원)시키고 동학포교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교조신원과 동학포교의 인정 등 종교적 범위로 목표를 삼은 북접계는 전라 감사의 회유에 해산하였고, 관리와 토호의 수탈등 사회적 모순의 해결에 관심을 두던 남접계와 북접계 사이의 입장 차이는 이때부터 표면화되었다.
1893년 음력 2월에 동학도들은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엎드려 교조신원과 포교 허용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벌인다.
고종의 전교를 받은 후 상소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최시형 등 북접계의 뜻이었고, 남접계는 한양 거리에 ‘척왜양’을 외치는 괘서를 걸어 반외세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한양에서 상소운동과 척왜양운동이 있은 후 조선정부는 각지에 동학을 금지하고 그 지도자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빌미로 동학도에 대한 지방 관리의 탐학은 더 심해졌다.
보은, 원평, 밀양에서 벌어진 ‘삼남집회’ 이후 전봉준은 정부의 수배를 받게 되었고 동학 교단에서도 위험한 인물로 주목받았다.
전봉준은 척왜양운동과 삼남집회를 총괄하면서 더욱 강력하고 명확한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발화 - 고부봉기
고부는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넓은 평야와 주변 촌락을 거느린 번성한 고을이었다.
줄포, 염포, 동진, 사호와 같은 주위의 나루들을 통하여 어선과 상선이 활발하게 왕래했고 주변에서 나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이곳에 모였다. 그러니 지방 관리들의 탐학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곳은 중앙 관리들이 뒷돈과 권세를 동원하여 서로 부임하려고 노리던 고장이었다.
당연히 고부 농민들은 갖가지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며 고달픈 삶을 살아왔다.
1892년 5월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오자마자 온갖 시비를 걸어 돈을 뜯어냈다.
아버지 송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두고 각종 세금을 부당하게 받아 가로챘다.
조병갑의 학정 중 으뜸인 것은 물세를 거둬들인 것이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 농민들이 쌓아 물을 끌어다 쓰던 만석보가 있었다. 조병갑은 그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게 하였다. 이 새 만석보는 쓸데없이 높아 홍수가 지면 오히려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었다.
첫해에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수세를 걷었다.
농민들은 수십 명씩 관아로 가서 보세를 감해달라고 진정했으나 오히려 난민 취급을 받고 잡혀 들어가거나 쫓겨났다.
1893년 11월 초순, 전봉준 등 19명의 농민 지도자들은 죽산 마을에 모여 봉기의 당위성을 말하는 격문과 행동목표를 쓴 사발통문을 작성했다.
사발통문에 적힌 행동강령 4개 조항
1.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목벨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침해한 탐학한 구실아치를 징치할 것
4.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 라갈 것
조병갑은 익산 군수로 발령받았으나 뜯을 것이 많은 고부를 떠나지 않고 뭉개고 있다가 뒷돈을 써서
1월9일 고부 군수로 다시 부임했다.
1월10일 밤 배들평(이평) 말목장터에는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손에 농기구와 죽창을 든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두 패로 나뉘어 고부관아로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는 중 농민들이 합류하여 사람의 수는 늘어났다.
1월 11일 고부관아는 쉽게 점령되었지만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고부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를 고부 안핵사로 발령했다.
신임 군수가 유화책을 써서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본격적인 농민전쟁의 시작 - 무장봉기
안핵사 이용태는 전봉준이 군대해산을 하자 군사를 이끌고 왔다.
난민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고부군을 뒤지며 살인 방화 약탈을 하고 백성들을 잡아 들여 동학당이라고 돈을 뜯어냈다.
이용태의 만행은 흩어졌던 봉기 참가자들을 다시 들끓게 했다.
한편 고부봉기를 해산한 전봉준은 무장현의 동학 대접주 손화중과 태인의 김개남 원평의 김덕명 등 주요 인물들을 설득하여 손을 잡았다. 손화중은 1892년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에서 세상을 바꿀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퍼진 후 그의 포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전국 동학교단 가운데 최대의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3월 20일 무장에 모인 4천여 명의 농민군은 호남 창의소 이름으로 ‘탐학한 관리를 제거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음으로써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살려내는 것’ 이 거사의 목적임을 밝히는 창의문을 선포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무장을 출발한 농민군은 태인의 최경선 군대 300여명을 합류시킨 후 고부성을 점령했다.
이용태는 이미 달아나버렸고 농민군은 행정사무를 장악하였고 옥문을 열어 이용태가 잡아넣은 사람을 풀어주었다.
3월 25일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농민군으로 인해 백산은 사람 산이 되었다.
그들이 서면 온 산이 흰옷을 입은 사람으로 덮이고 앉으면 손에 쥔 죽창이 빽빽하였으므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관군과의 접전에서 승리하다 - 황토재 전투와 장성 황룡강 전투
고부를 나선 농민군이 주변 고을을 석권하고 있을 무렵, 전라 감사는 감영군과 보상패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고부로 출동시키고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 병정 800명과 신식무기를 주어 파견하였다.
4월 초 연합군은 약탈을 일삼으며 고부로 진격해왔다. 그러나 지역의 지형에 익숙한 농민군은 황토재로 연합군을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4월7일 새벽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완전히 승리를 하였다.
이것이 처음으로 관군과 맞붙어서 승리를 거둔 황토재 전투이다.
황토재에서 이긴 농민군은 정읍관아를 점령하고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했다.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800명의 경군은 전주성에 입성하였지만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나라 군사를 불러 들여 폭도를 진압하자고 건의했다. 정부로부터 증원군을 약속받은 홍계훈은 장성지역을 살피기 위해 선발대 300여명을 보냈다.
경군선발대는 황룡강 유역에서 농민군과 맞닥트렸다.
경군의 무기는 야포, 기관총, 소총 등 이었다.
재래식 무기로 일부만 무장한 농민군은 경군을 에워싸고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장태를 굴려 총알을 막으며 전진하여 경군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농민군은 관군에 맞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고 야포를 비롯한 신식무기를 거둬들였다.
갑오농민혁명 최대의 승리 - 전주성 점령과 공방전, 그리고 전주화약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정읍, 태인, 원평을 점령하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장악하였다.
경군은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주변의 산과 골짜기에 진을 쳤다.
5월3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경군과 농민군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5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봉준도 왼쪽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
한편 5월 5일 원병을 요청한 조선 정부에 응답하여, 청의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했다.
조선에 군대를 들여 놓을 기회를 엿보던 일본도 조선에 대한 동시 출병권을 규정한 텐진조약의 조항에 따라 곧 상륙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잠시 접고 정부와 화약을 맺기로 했다.
청.일 두 나라의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내 놓았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홍계훈은 그 조건을 전부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렇게 5월 7일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집강소 통치
전주화약이 맺어지자 농민군은 대부분 고향으로 흩어졌다. 경군은 뒷수습도 하지 않은 채 서울로 돌아갔다.
이제 봉건통치 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호남지방에서는 집강소를 통한 농민군 통치로 새롭게 시작되었다.
무장에서 기병한 이래 농민군은 점령한 고을마다 접주와 접사라는 직책을 두어 그 고을의 일을 처리하도록 해왔다.
집강소 통치는 여기서 발전한 것이다.
농민군의 독자적인 지방 통치조직인 집강소는 전라도에서는 나주와 운봉을 제외한 모든 곳에 집강소를 두어 폐정개혁안을 근거로 개혁정치를 시행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에서도 부분적으로 집강소통치가 시행되었다.
집강소 통치는 비록 전국적인 규모를 갖지 못하고 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만 실시되었으나,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자신의 힘으로 따낸 통치조직을 통해 스스로를 위한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본다.
2차 기병과 우금치 전투
일본군은 6월 21일 경복궁을 침범하여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개화파 내각을 세웠으며 7월 1일에는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농민군과 조선 정부 사이에 화약이 맺어졌건만, 농민전쟁을 구실로 출병한 청,일 두 나라 군대는 철수는커녕 오히려 우리나라를 저희들의 싸움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9월4일, 삼례에서 농민군 4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전국각지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과 청일전쟁 도발에 분개해 농민군이 일어났다.
10월 9일 호남 농민군과 호서농민군은 논산에서 합류하여 공주로 진군했다.
농민군이 남북접간의 갈등으로 삼례와 논산에서 거의 한 달을 허비하는 동안 충분히 준비를 갖춘 관군과 일본군도 남하하여 공주로 모여들었다. 농민군에게 공주성 공격의 성공여부는 서울로 진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일이었다.
관군으로서도 공주가 뚫리면 그만큼 서울까지 밀릴 우려가 커지므로 공주성 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사활이 달린 싸움이었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세력에 우금치는 뚫리지 않았고 농민군 전사자는 늘어갔다.
일본군과 결탁한 개화간당이 국권을 농락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척왜척화하여 조선민의 자주자립을 도모하려던 농민군의 큰 뜻은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꺾이고 말았다.
공주대회전이 끝난 뒤 물러난 농민군은 논산과 원평, 태인에서 벌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했다.
그 뒤 남은 것은 관군과 일본군의 소탕작전이었다.
12월과 다음해 1월에 걸쳐 김개남, 최경선, 전봉준, 손화중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재판도 없이 전주에서 목이 잘린 김개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도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29일 모두 교수형을 당했다.
첫댓글 동학은 교감샘에게 맡겨요~~^*^
경지에 오르셨군요~ 엄지 척^^
잘읽습니다~~이제조금흐름을알것같아요^^
忍冬草(인미혜) 교감샘의 인동학이라고 들어보셨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