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인간의 가식과 위선을 벗겨야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져 감독, 2023)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특이한 영화. 나치의 전쟁과 만행을 소재로 한 영화이면서 여타 영화 같이 그런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살상이나 잔혹한 만행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은 정원이다. 거대한 담을 두고 담 뒤쪽은 강제수용소, 담 바깥쪽은 아담한 집과 정원이다. 담 뒤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관객은 이미 역사를 통해 전쟁의 비극 상에 대해 상상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더구나 나치군이 행한 만행은 잊을 수 없으리라. 감독은 자신의 영화로 더는 잔혹극을 재탕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였다. 담을 경계로 전쟁과 평화가 대비된다.
전쟁과 평화, 그 허상과 실상
영화가 그리는 전쟁과 평화는 담을 경계로 보여지는 듯하다. 담 뒤쪽은 강제수용소, 높은 굴뚝, 그 굴뚝은 아마도 화장장이나 소각장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작은 강에는 시커먼 부유물이 흘러간다. 관객은 그것이 강제 죽임당한 희생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만큼 잔혹의 역사는 인간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이는 잔상을 넘어선 팩트이다. 전쟁은 권력 쟁취를 통해 정당화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괴물로 변한다. 곧 그 국가와 국민은 불의한 독재 권력 아래 탄압받는 처지가 된다. 따라서 인간의 권력은 언제나 분립해야 하고, 견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가장하여 전쟁으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치주의는 언제나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선전했다. 선거로 선출된 다수당과 당수(히틀러)이니만큼 할 말은 없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당)에 표를 던졌다. 그들의 선전 선동은 일상에까지 파고들었다. 나치당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손을 잡고 선교(Mission)에 도움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어용 신학자들까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독일 루터교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나치당은 전국에 강제수용소를 세우고 반대와 저항하는 이들을 반역자로 몰아 구속, 탄압했다. 영화는 이런 내용을 강제수용소에 압축했다. 전쟁의 광기가 굴뚝을 타고 연기로 번져 나간다.
극단적 대비: 수용소와 정원
정원은 평화로워 보였다. 겉으로는 그랬다. 온갖 꽃을 피우고 식물이 자라는 정원은 패러독스 그 자체였다. 전쟁 속 평화?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 전쟁은 평화를 보장한다? 그것도 성립할 수 없는 자기모순이다. 강제수용소는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전쟁 앞에서는 모든 생명, 사랑, 정의가 부정당했다. 오로지 무자비한 파괴와 정복만이 있었다. 그 속에 정원은 애초에 허위의 공간이었다. 굴뚝 연기와 강가에 흐르는 검은 가루들, 장교와 그들의 ‘멋져보이는’(?) 장교 복이 그랬다.
강제수용소 관리 장교 부부는 정원에서 한가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여유로운 시간에 가꾸는 정원은 허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가식과 위선을 숨기기 위한 정원이었다. 정원은 강제수용소의 잔혹 상을 위장하기 위한 가림막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가족 간의 미소도 평화가 아니었다. 이들의 일상은 전쟁을 위장하기 위한 연극이었다. 담 뒤쪽 강제수용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은 정원의 평화를 가장했다. 정원은 전쟁의 영향권 아래 신음하고 있다. 정원을 장식하는 꽃들? 그들은 희생자였다.
전쟁 속 사랑, 평화의 단서
당시 집단학살로 숨져간 유대인들. 이들이 남긴 말이 있다. “우리의 몸은 죽일지언정 영혼은 죽일 수 없다.” 여기에 전쟁광이 짓밟거나 소멸시킬 수 없는 영혼이 있다. 소망의 믿음이다. 진정한 평화는 영원한 소망이 있는 곳에 임재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소망을 품은 이들이 있다. 떨어진 사과를 주워 다른 이들에게 몰래 전하려는 소녀,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도 그 일은 멈추지 않는 영혼은 곧 평화의 자리였다. 소녀의 행위는 비록 전쟁에 과감히 맞설 수 없지만, 탄압에 스러져가는 이웃을 위한 사랑이었다. 희생적 사랑이 전쟁을 무색하게 한다. 여기서 전쟁이 부끄러워진다. 평화의 싹이다. 가식과 위선이 아니라 소망과 생명으로 가꾸어진 소녀의 정원은 전쟁광이 침입할 수 없다. 소녀의 기도는 사랑이 되고 끝내 승리케 할 것이다. 평화가 임하면 전쟁이 끝나고, 결국 나치군은 물러갔다. 하늘에서 임하는 이 평화가 온 땅에 충만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