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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매화(蟲媒泫)
전 광 용
그 여인이 올 시각이 가까워왔다.
충은 시험관(試驗管) 속에 담겨 있는 정액 (精液)에서 아직 남아있는 체온의 감촉을 느끼면서 한 방울 슬라이드 글라스에 떨구어 현미경 받침판 위에 올려놓았다. 반사경 (反射鏡)의 각도를 맞추고 확대 장치를 조절하면서 렌즈 속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다.
심장의 고동이 주는 충격에서 가벼운 압박감을 느낀다. 여느 때의 실험이나 검사에서처럼 냉정하여지지 않고 문구멍으로 방 속을 엇보는 것 같은 호기심이 호흡을 촉급하게 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렌즈 속에 도드라지는 원형 (圓形)은 선명한 둘레에 비하여 중심부는 보얗게 흐려져 있을 뿐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염색체(染色體) 메틸렌 블루로 첨색(添色)하여 커버 글라스를 덮은 다음 다시 렌즈 속을 뚫어질 듯이 응시하고 있다.
염색체(染色體) 메틸렌 블루로 첨색(添色)하여 커버 글라스를 덮은 다음 다시 렌즈 속을 뚫어질 듯이 응시하고 있다.
초점(焦點) 속에서 유동되는 반응, 충은 왈칵 치밀어 오르는 환희에 가까운 충동에 가벼운 전율마저 느껴졌다. 살아 있는 정충(精蟲)의 충동을 스스로 목격한 안도 그것임에 틀림없다.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불안에 감싸여진 미지의 자물쇠를 열어보는 순간의 조바심이었다.
이 순간 충은 자기가 의사라는 직업의식마저 거의 잊고 있었다.
외톨박이로 외롭기만 하던 자기 자신이 외롭지 않게 많은 자기 속에 싸여 있는 것만 같은 환각마저 느꼈다.
그날 밤은 공교롭게도 정전(停電)이 여러 번 거듭되었다. 여은 전등이 켜지기 전에 진찰실로 들어왔었다.
타진(打診)¹이나 청진기(聽診器)에 의한 건강 진단 정도의 의무적인 진찰이 대충 끝난 다음 환자를 진찰대 쪽으로 인도했다.
초저녁의 기온은 좀 싸늘했기에 진찰대에 누워 있는 여인의 몸뚱이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복부 전면에 걸쳐 압진(壓診)²을 마치고 난 충은 스탠드의 각도를 돌려 고촉의 직사광선을 환자의 노출된 하복부 쪽으로 곧게 비추었다.
이러한 진찰의 경우 언제나 그러는 것이지만 환자의 흉부를 계선으로 하여 내리 드리워진 새하얀 휘장으로 자기와 환자 사이는 차단되어, 피차의 표정이나 몸짓은 서로 알 길이 없는 것이 쌍방에 다 지극히 다행한 일이었다.
천 조각 한 장 사이에서 서로의 외면적인 체면이나 마음속의 겸연쩍음이 엄 폐되고 적당히 무마되어진다는 것이 쑥스러워 충 자신도 처음 얼마 동안은 낯간지러운 고소를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세척(洗滌)이나 외부 치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부를 확대하여 내진(內診)하는 경우란 더욱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확대기를 집어넣는 순간 가느다랗고 토막 난 신음 소리에 겹쳐 여인의 몸뚱이에서 오는 완곡한 비비 꼬임을 느꼈을 뿐 충은 기계 같은 동작으로 차례차례 진찰을 진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 찰나에 불이 꺼졌다.
다시 불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여인은 자기 주변에 얽힌 고충의 일단을 토로했다.
촛불을 사이에 두고 충과 여인은 마주 앉았다.
“글쎄요. 지금까지의 진찰 결과로는 별다른 이상은 발견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충은 진찰 적전에 기록해둔 환자 카드를 훑어보며 말을 건넸다.
“그래요?”
여인의 말소리는 실망과 의아에 찬 어조였다. 차라리 불치의 무슨 고질이라도 있다는 선언을 바랐음인지도 몰랐다.
“다 얘기들은 같군요.”
“무어 말씀이신지요.”
“아니, 진찰 결과요.”
“여러 군데서 진찰을 받으셨던가요?”
“네.”
여인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이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허지만 참 이상해요.”
“무엇이요?”
“고장이 없다는 게 말이에요.”
충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 자신의 입에서 참고적인 얼마간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도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새로 병원을 차리고 나온 충이지만 종합 병원에 있을 때부터 그 역량에 신뢰를 받아온 젊은 의사의 한 사람이요, 특히 새로운 치료법의 시험적인 성공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그럼 이상이 없으신 게 좋으시지, 고장이 났다는 것이 좋으시겠어요.”
“그렇지만…….”
여인의 말끝에는 아직도 무엇인가 진찰 결과에 만족이 가지 않는다는 여운이 풍겨져 있었다. 그러나 충은 그 이상 환자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일 난자(卵子)의 기능 검사를 끝내야 최종적인 확언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밖의 이상은 현재로선 없는 것 같습니다.”
충은 환자가 믿을 수 있게 어느 정도 자신 있는 어조로 말에 힘을 주었다.
“그 검사도 해보기는 했어요. 괜찮다나 봐요.”
“그러세요?”
“네, 그런데 왜 임신을 못 할까요?”
“글쎄요…….”
충은 경험에서 얻어지는 암시에 문득 육감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여인에게서 외면한 대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나 임신은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짓궂은 대답이었다고 다소 미안쩍은 바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그대로 속이 개운했다.
순간 여인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충은 놓치지 않았다.
여인은 이튿날 밤 다시 찾아왔다.
“그 미국에서 요새 유행된다는 인공 수태(人工受胎)라는 것이 혹시 가능한가요?”
혈액 검사용의 피를 빼고 소변과 그 밖에 국부의 분비물의 검사 재료를 채취한 다음 소독수에 손을 씻고 돌아서는 충을 보자 대뜸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이었다.
첫날보다는 구면이 되어서 서로의 대화가 비교적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간격은 트였지만 여인의 대담한 말씨에 충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 자신도 늘 느껴온 일이지만, 한번 자기의 알몸뚱이를 진찰대 위에 내던진 여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다음부터는 수줍음은커녕 돌변하여 대담해지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던 것이다.
체면이고 예절이고 하는 이성 간의 외형적인 간격의 최후의 신비는 성(性) 문제에 그 관건이 있는 것이라고 거의 단정을 내리게끔 된 충이다. 나체 그대로의 인간 교제 그 속에서는 거의 외부적인 절차나 형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단까지 내려지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인간 생활의 고초를 모조리 한 몸에 겪은 어머니의 시속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얘, 아무리 한다 하는 계집치고도 사내 앞에서 요강에 털썩 주저앉게 되면 그때는 벌써 다되는 때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성의 노출에는 인간의 허식적인 가면이 완전히 벗겨지는 것이 분명한 성싶었다.
군의관으로 있을 때에도 충 스스로 겪은 경험이 있다. 유엔군 상태의 매춘부들을 검진했을 때의 일이다.
“체, 체면은 무슨 체면. × 팔구 살아가는 년이 오죽해서…… 죽인대두 두려울 것 없어.”
그것이 이십 안짝의 단발머리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저희끼리 주고받는 농조의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확실히 인간의 전습적인 계율이나 허식과 부패의 독소로 만신창이가 된 현실을 저주하는 비수가 품어져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 같은 삶의 막다른 고역의 경험을 겪지 못한 인간의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환자의 자궁 진찰을 할 때마다 아직 미성숙한 그 소녀의 과도한 성교로 기형이 된 국부와 더불어 그 독을 품은 말토막이 섬광처럼 비껴져 충 자신을 몸서리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에 못지않게 이 여인의 대담한 제의는 충의 머릿속을 오랫동안 감싸고 돌았다. 너무나 당돌한 제안에 충 쪽에서 오히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뇌하수체가 장생 불로초 이상이라고 날개 돋처 유행되다가 거품처림 사그라진 것도 바로 작금의 일이요, 안면의 미용 정형 수술이 옷감 빛깔처럼 인기를 끌다가 허다한 애꾸눈의 병신만 만들어놓은 것도 그와 비슷한 경우의 일이었기에 충은 그 말에 별로 흥미나 관심이 가지질 않았다.
“글쎄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실험 단계로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첫째, 그에 따르는 시설두 완전한 건 아직 없구요.”
새로운 약품이고 치료 방법이고 할 것 없이 신문에 광고나 기사가 보도된 것만 보아도, 전문적인 의사를 앞질러 환자 측에서 먼저 서둘러 물어대는 경우를 수시로 접하는 근래의 일이기에 충은 의례적인 대답으로 메워버렸다.
더욱이 인공 수정이란 기술면에 있어서의 무리 없는 성공 여부도 하나의 난점이려니와, 혈연(血緣)관계에 직결되는 유전 문제를 비롯하여, 윤리 및 도의 면에 직접적인 파문을 야기시킬 중대문제라고 생각되어, 그것이 의학 전문 잡지에 발표된 것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충에게는 적지 않은 의아심을 품게 한 난문제의 하나였다.
그것은 마치 자기의 분신(分身), 즉 자기와 같은, 핏줄기가 모호한 사회적 기형아를 더 만들어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려면 안 될 것두 없지 않아요?”
그러한 심각한 문제가 이같이 여성 자체의 입에서 흰 고무신이 싫으니 옥색 고무신으로 바꿔보았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가벼운 심정으로 토로되고 보니 충은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충은 맥 빠진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여인은 더 말을 계속하려다가 너무 대담했던 자기 자신이 무색했던지,
“아무튼 검사 결과도 알 겸 다시 한 번 들르겠어요”
하고, 암시적인 숙제를 남겨놓고 돌아갔다.
사흘 후 여인은 또다시 찾아왔다.
밖에서 다른 환자가 없는 기미를 다지고 들어오는 것인지 몰라도, 번번이 병원 안이 비교적 한산한 시각을 잘 맞추어 찾아오는 것이었다.
“오늘은 좀더 자세한 실토를 해야겠어요.”
충에게서 전날 채취한 혈액과 그 밖의 분비물에 대한 반응에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를 듣고 난 후, 한참 망설이다가 여인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허두를 떼었다.
의사도 하나의 접객업인 만큼 환자에게는 가능한 대로의 친절 제일이어야 한다는 것은 충의 개원 첫날부터의 신조였고, 그는 또한 그것을 자기의 열등의식에 대한 자위책의 하나로서 실천에 옮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의사인 자기의 전문적인 부문에 대해서까지 환자가 지나치게 간섭하려 들거나 필요 이상의 봉사를 강요할 때에는 오히려 반발심이 솟구침을 어찌하는 수 없었다.
이 여인의 경우도 그러한 전문 분야에 대한 지나친 간섭의 한 예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충은 거의 마이동풍 격으로 받아넘겼으나, 상대가 몇 차례씩 거듭하여 내심을 토로하고 그 타개책의 강구를 호소하여오는 데는 전연 아랑곳없다는 태도만을 취할 수도 없다는 심정이 짙어져갔다.
“어서 말씀하세요.”
충의 고즈넉이 들으려는 표정에 여인은 적이 용기를 얻었음인지 만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인은 남편에게 다졌다. 남편이라야 아버지 같은 연배다. 전처가 자식을 낳지 못해 무진 애를 쓰다가 난소 수술을 한 것이 부대 염증이 생겨 세상을 떠난 후에 후처로 들어왔었다.
남편은 사변을 전후해서 제분업으로 일확천금을 한 거부의 한 사람이었다. 여인은 대학 출신의 이십 대의 젊은 나이로 신랑감을 찍어 고르듯이 튀기다가 삼십이 넘어서야 제 쪽에서 신물이 나 알총각을 찾던 자부심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늙은 상처꾼인 강 사장에게 낙착이 되었다.
거기에는 강 사장의 거액의 재물이 이 혼인을 성립시키는 데 적지 않은 매개물이 되기도 했다.
결혼 후 벌써 칠 년. 여인은 눈앞에 사십을 바라보게 되었다.
남편의 자식에 대한 기다림도 컸지만 오히려 여인 편에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새봄에 접어들어 남편의 외박은 부쩍 잦아졌다. 거리에 나선 계집들과의 접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느 여사무원을 남몰래 하숙시켜놓고 밤이면 찾아간다는 어렴풋한 소문도 떠왔다.
여인은 불안해졌다. 여러 군데서 진찰을 받았고 한약 신약 할 것 없이 좋다는 약은 닥치는 대로 써보았다.
관상도 보고 점도 쳤다.
그러나 태기는 없었다. 다만 자기의 건강에 대한 의사들의 증언만이 일루의 희망을 간직하게 해줄 뿐이었다.
남편이 지방으로 출장 간 지 사흘째 되던 날이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 남편에게 연락하여달라고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사장은 자리에 안 계시달 뿐 출장 간 일은 없다는 사환의 대답을 들은 때부터 치민 부아는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남편의 정이 자기에게서 떠져가는 것이라는 계산이 점점 비중을 더해갔다. 자기 배를 가르고 나온 자식이 없다는 것이 더욱 허황해졌다.
밤을 꼬박이 새고 아침에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당신 오늘 병원으로 좀 같이 갑시다.”
남편은 객지가 어떻더라고 어리벙을 떨면서도 아내의 기색만을 살피고 있는 판에, 그러한 겉수작에는 시치미를 떼고 불쑥 내미는 아내의 말에 좀 무색해졌다.
필경 꼬리를 잡힌 것이라 생각되어 남편은 오히려 태연을 가장하면서도 속으로는 양심이 꼬여옴을 어쩌는 수 없는 눈치 였다.
“늘 바쁘게 쏘다니시기만 하니 어디 시간 낼 수가 있어요? 출장갔다 와 이렇게 숨 돌리는 사이에 병원엘 가봅시다.”
아직도 아내 마음속의 과녁은 뚫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는 또 왜? 가끔가다 그거 이상하군.”
남편은 너털웃음으로 어색 한 장면을 얼버무렸으나 아내의 기세가 곰곰치 않음을 깨달았다.
여인은 끝끝내 남편의 외박에 대한 마지막 공격의 방아쇠만은 당기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다만 이 기회에 남편의 약점을 타서 시원히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오랫동안의 계획을 기어코 실천하리라는 생각만을 굳게 다지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같이 가보아요.”
“멀쩡한 사람이 병원에는 왜?”
“멀쩡하기는 뭐가요?”
“그럼 멀쩡하지 않고.”
육십이 가깝다고는 하지만 머리의 반백에 비하면 듬직한 체구에 불그레한 살결이 아직도 삼십 대를 연상시키는 정력을 발산하고 있어, 오히려 젊은 아내 편에서 이끌려 드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었다.
남편은 앙탈을 하는 아내를 덥석 들어 더블메드 위에 쓰러뜨리고는 한낮의 태양이 부시게 쏘아 드는 유리창에 블라인드 커튼을 내렸다.
어두컴컴한 방 안은 색등 불빛에 엷은 등나무꽃 색깔로 채색되어 갔다.
능글맞은 헛웃음이 남편의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감도는 순간 여인의 독기를 품은 듯한 날카로운 눈매는 남편을 도사려 보면서도 어느 사이엔지 입술은 헤벌어져갔다. 남편은 아내의 볼기짝을 한 대 갈기고는 유유히 침대로 올라갔다.
비단 이때뿐이 아니라 세상만사에 능숙한 남편은 자기의 외박을 비롯하여 젊은 아내와의 상호 관계에서 좀 어색하거나 미안한 자책을 느낄 때에는 상투적으로 이런 수법을 써서 그 장면을 수시로 무마하는 것이었다.
“그럼, 오늘은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할래요?”
“응 그래그래 .”
남편은 아내의 입술을 슴새어 나오는 엷은 웃음에서 가벼운 승리감을 느꼈고, 아내는 아내대로 간밤의 계획 진행에 제대로 마음속의 주판을 놓고 있는 것 이었다.
부부는 병원에 나타났다.
충은 진찰실로 들어서는 그들을 보면서 전날 여인이 남기고 간 부탁을 상기했다.
남편에게 여하한 증세가 있든지 본인에게는 직접 알리지 말고 자기에게만 전하여 달라는 이야기를.
진찰은 끝났다.
혈액, 요도, 배설물, 엑스레이, 그 전반에 관한 것은 사후 검사가 끝나는 대로 알리기로 하고 남편만 먼저 도망치듯이 병원을 나갔다.
실험 결과를 보고 충은 자기의 추측이 적중되었음을 깨달았다.
“완치는 되었지만 지난날의 악성 성병 관계로 주인의 생식 능력은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그래요?”
여인은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그네도 또한 자기의 예감과 어느 정도 부합되었다는 심정 속에 그렇게 절망적인 충격은 받지 않은 성 싶었다.
“전연 가망이 없어요?”
“기적을 바라기 전에는 거의 가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선생님?”
여인의 다그쳐 묻는 말끝에는 선생님 한마디에 힘이 들어 있었다. 무슨 구원의 신에라도 의지하려는 것 같은 애원도 섞여 있었다.
“글쎄요.”
충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러한 부부간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상의의 대상이 되는 경우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자기로서는 의사로서의 직책을 다할 뿐 그 밖의 더 깊은 내부 문제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근래에 허다한 난륜(亂倫)⁵ 관계를 풍문으로나 신문 보도에서 듣고 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 당사자들의 육체에서 직접 목격하는 충으로서는, 그리 대단한 일로 여겨지는 것도 아니었다. 참말 자식이란 그렇게 절실하게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느껴본 적도 없는 그이기에 그 이상 확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선생님?”
이번의 선생님에는 애원보다 육친의 친밀감 같은 것이 서려 있음을 느끼면서도 충은 면역체처럼 글쎄요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원상 복구는 전연 가망이 없지요?”
“현재의 상태로서는 우선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특수한 치료법이라도 없을까요?”
“글쎄요.”
“환자의 생애가 좌우되는 중대한 문제인데 어쩌문 그렇게 태연하세요?”
여인의 말은 약간 힐난하는 어조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다수의 불치의 환자에게서 받을 수 있는 거의 공통적인 호소나 반문이기에 충은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무슨 좋은 수가요?”
“글쎄요.”
계속 반응이 없는 무의미한 대답만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여인이 돌아간 후도 그 문제는 계속적으로 충의 머릿속에 켕겨들었다. 다른 환자를 진찰할 때에도 그 여인의 모습이 환영으로 겹쳐져 떠올라왔다.
‘이 기회에 한번 엉뚱한 실험을 해볼까?’
인공 수정에 대한 학구적인 호기심이 충의 새로운 의욕을 격렬하게 자극해 왔다.
집에 돌아온 여인은 자기의 전정을 곰곰이 계산하고 있었다.
‘자기가 설령 남편에게 그 무능을 알려준다 해도 남편은 그의 꺾이지 않는 자존심에서 수긍하려 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일 수긍한다 쳐도 그 방탕은 더욱 조장되어 자기에게서는 점점 멀어져가고 새로운 여자에게 열중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자기는 벌써 폐물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다. 만약 불행하게도 그 여사무원인가 하는 것이 어떻게 아기를 가지게 되면 남편의 정은 완전히 돌아설 것이고, 그 다음 이 집의 재물도 전부 그리로 넘겨질 것이 아닌가?’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낙타 보료를 뒤집어쓰고 누워도 잠은 좀체 오지 않았다. 앞날에 대한 불길한 생각만이 꼬리를 물고 엄습해왔다.
생각은 점점 비약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느 하나가, 만일 자기의 경우와 같이 남편의 무능을 알고, 어디에서 받은 씨라도 마음대로 당신의 자식입네 하고 내밀 때 남편은 즐겨서 받을 것이 아닌가?’
“어린애가 날 때까지 우선 고아라도 하나 데려다 기릅시다. 그렇게 선심을 쓰면 그 덕으로 쉬 임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남편이 취중에 무턱대고 내뱉던 말토막이 거센 힘으로 머리에 휩쓸려왔다. 어쩌면 남편은 자기의 무능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일발, 그 기생이라는 것은 남편의 재산을 노려 무슨 수단을 쓸지도 모른다. 그 여사무원이란 것도, 새파란 계집애가 무엇을 보고 저 늙으대기를 순순히 따랐을 것인가? 결국에는 남편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앞이 캄캄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가 허전해서 견딜 수 없었다. 꼭 하나 자기의 피붙이가 곁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절실한 감정이 곁들였다.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혼자 중얼거리는 여인의 얼굴에는 결의에 찬 표정이 깃들었다.
여인은 또 병원으로 뛰어왔다. 마음속에는 이미 결심이 되어 있었다.
“그 인공 수태 말이에요, 간단하게 금방 나온 정액을 직접 주입하면 되지 않을까요?”
충은 말문이 막혔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더니, 이거는 정말 몇 푼어치 안 되는 지식이 사람을 곯리는구나 싶었다.
“여하한 희생도 감당하겠어요, 되기만 한다면…….”
충은 창밖을 내다보며 묵묵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착잡한 생각들이 밀려왔다. 일방적으로 거절만 하기에는 거의 발광하다시피 하는 상대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여인이 지불한 치료비도 청구액의 몇 갑절이 된다. 왜 이렇게 내느냐고 거절해도 계속 치료를 받을 것이니 우선 받아두라는 것으로 그대로 맡아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경제적인 문제는 잔액을 반환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새로운 실험에 대한 호기심은 차츰 짙어가는 동정과 곁들여서 자기 자신을 거듭 유혹하는 것 이었다.
“선생님, 꼭 부탁해요.”
여인은 충의 옆으로 다가앉으면서, 애원에 어린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되든 안 되든 한번 시험해볼 수는 있으시지 않으세요?”
너는 가능한 시험의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왜 시치미를 떼느냐는 기세로 약간 강압적인 어조로써 다그쳐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비밀한 곳까지를 진찰하고 난 후의 여성이란 이성으로서의 매력이나 애착이 거의 가시어지는 것이 충으로서의 직업적인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러한 문제로 한 환자를 계속하여 여러 차례 접촉하게 됨에 따라, 육체적인 혐오나 호기심을 떠난 인간적인 정다움이 조금씩 싹터옴을 부인할 수 없었다.
애수를 띤 눈동자 속에 깃든 애원하는 표정은 여인의 짙은 화장품 냄새에 삼켜져 풍겨오는 체취와 더불어 충을 조금씩 여인 쪽으로 이끌려가게 함을 어쩌는 수 없었다.
‘그 실험을 한번…….’
충은 입 속에서 혼자 뇌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큰숨을 내쉬었다.
“두고 생각해봅시다. 내일 이 시간에 한번 들르시지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쇠사슬에서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인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병원 문을 나가는 것이었다.
여인이 다녀간 후 다른 환자가 들어왔다.
“이리 앉으시오.”
충은 환자에게 진찰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그러나 부인은 몹시 수줍어하며 망설이고만 있었다.
“어디가 나쁘신가요?”
“저……”
부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하고 충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진찰하시지요?”
“네, 사실은 수술을 할까 해서요…….”
부인은 말끝을 흐리면서 머리를 숙였다.
“알겠어요. 몇 개월이신가요?”
“두어 달 됐나 봐요.”
“몸이 쇠약하신가요?”
“아니요.”
이러한 수술의 대부분의 경우, 불의의 씨를 잘라버리려는 불순한 동기가 많으므로, 충은 가급적 환자의 괴로운 곳을 찌르지 않기 위해 평범한 질문으로 유도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시면 혹 다른 이유라도?”
“사실은 주인이 얼마 전에 실직이 됐어요.”
부인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피로에 찬 눈알만이 유독 크게 보였다. 그네는 숨이 가빠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애들은 칠 남매예요. 위에 다섯이 학교엘 다니구요. 그래서 죄는 되지만…….”
“네……”
“다 제 먹을 복은 타고난다지만, 이젠 힘에 겨워서요. 큰애는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제대로 공부도 못 시킬 바에 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참 주인 양반은 집에 계신가요?”
충은 부인의 감정이 격하지 않게, 침착하고도 나직하게 물었다.
“네, 앓고 누워 있어요¨”
“거기엔 바깥주인의 동의가 필요한데요.”
“여기 써가지고 왔어요.”
부인은 철이 늦은 옷을 뒤적여 종이쪽지를 꺼내었다.
늘 많은 환자를 대하지만 이같이 정반대의 두 가지 환자를 전후하여 대하고 보니, 직업적으로 거의 만성이 된 자기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경우가 아까의 여인에게 생겼다면 서로가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하고 전연 무연한 두 가지를 결부시켜보기도 했다.
“경비는 얼마나 드는지요?”
부인은 그것이 몹시 걱정인 성싶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싸게 할 수도 있어요. 다만 소파 수술을 항간에서는 아주 간단한 것으로 착각하고들 있지만, 인공으로 다가서 해산시키는 셈이 되니까 뒤에 조섭을 잘해야 합니다.”
부인을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충은 소독을 끝냈다.
기구를 갖추어놓고 마취제를 놓으려는 순간 환자는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돌발적인 사태에 충은 주사기를 놓고 환자를 붙잡았다.
“왜 이러세요?”
“좀 일어나겠어요.”
“왜요?”
“아이, 조금만.”
부인은 수술대에 일어나 앉았다.
“집에 가서 좀더 생각해보겠어요. 아무래도 죄 되는 것 같아서…….”
충은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미안합니다.”
부인은 옷을 주워 입으면서 연방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할 뿐이었다.
“아니, 괜찮아요. 다시 잘 생각해서 오도록 하시오.”
충은 멋쩍었다. 짜증을 낼 수는 물론 없었다. 오히려 가여운 생각이 들어 타이르듯이 달래었다. 살아가는 현실의 복잡한 축도가 자기 진찰실 속에 그대로 부조되는 것만 같은 절박감을 느끼며, 진찰료로 내어놓는 지전을 부인의 손에 억지로 쥐여 돌려보냈다.
노크 소리에 충은 현미경에서 눈을 떼었다.
“시간이 다급해 미장원에도 들르지 못하고 이렇게…….”
여인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추술러 올리며 권하는 대로 진찰대에 걸터앉았다.
“특수 시설도 없이 저것을 오래 방치해두면 안 되니까, 이리로 오세요.”
여인은 충을 따라 수술실로 들어갔다. 자기 집에서 잠자리에라도 들듯이 여인은 술술 속옷을 벗어젖히고, 속치마로 하반신을 가린 채 수술대에 누웠다.
“이거, 원시적인 실험입니다만, 그저 소원이나 풀어드릴까 하구 한번 해보는 겁니다.”
반듯이 누워 있는 여인은 사이에 막혀 있는 휘장 한쪽에서 아무 대답도 없이 혼자 미소를 지었다.
관장기에 넣은 액체는 여인의 자궁 깊숙이 주입되었다. 이날 여인은 사뭇 만족한 표정에 아무 말도 없이 수줍어하면서 가버렸다.
충은 아버지를 본 일이 없이 자랐다. 어머니의 말대로 한다면 유복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밖에 직접 어머니의 입에서 얻어 들은 것은 없다. 그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거슬러 올라갈 족보가 그것으로 끊어졌다.
대학은 해방 후여서 그것이 결정적인 치명상은 주지 않았으나 합격 후에 제출해야만 하는 호적 등본 때문에 교무과에서 얼마동안 말썽거리가 되다가, 어머니와 누이 오빠로 지내는 언론 기관의 중진인 김 선생의 힘으로 간신히 해결된 형편이었다.
외가(外家)라고 뚜렷한 명색을 붙일 곳도 없는 것을 보면, 어머니도 자기와 같은 사생아(私生兒)의 동기(童妓)로서 인생을 출발한 것이나 아닌가 하고 충은 자기 자신이 장성해감에 따라 추측하는 것이었다.
사생아.
이것이 충에게 있어서 이가 갈리도록 저주스러운 이름이었다.
국민학교 입학은 아직 철들기 전이어서 그 자세한 사단은 알 길이 없다. 중학교 입학에서 처음으로 그 쓰라림을 호되게 맛보았다.
아버지가 분명치 않은 아들, 이것은 당시의 소위 일류 중학교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겨우 이류 학교에 입학했다. 이러한 충이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으로 택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장안의 손꼽는 명기(名妓)였던 어머니가 만년에 최후로 몸을 의지한 남편, 즉 충의 계부가 노경에 든 고참 의사로 어머니의 말대로 한다면 자식에게 남겨줄 이렇다 할 유산도 없을뿐더러 문벌이니 권력이니 하는 세속적인 바탕이 될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바엔, 그 시설이나마 살리자는 심정이 아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얼마간의 구실은 되었었다.
그러나 충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운명이 휘감고 있었다.
소아마비 (小兒痲痺).
뚜렷한 병명을 달아 확실하게 진단이 붙여진 것은, 다리가 거의 고질화되어 걸음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뒤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육체적인 불구에서 오는 열등감이 교실이나 거리에서의 외톨박이를 만들었고, 나중에는 자기의 모호한 혈통에 대한 비굴감이 여기에 겹쳐 이중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게 졸라매어 들었다.
중학교에 입학이 된 얼마 후 신입생 환영을 겸한 소풍날이었다. 무척 망설이던 끝에 정복 정모의 대열에 끼여 교외를 벗어나 십리 길을 걸었다. 심하게 절룩거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급생들의 모든 눈총이 멸시의 덩어리로 한데 엉겨 자기에게 쏘아지는 것만 같게 느껴졌다.
신입생으로서 입학 후의 첫 행사에 억지로 참가한 것도 하나의 자기 반발이었지만, 그러한 무모한 반발의 결과가 오히려 제 자신을 더 나무라는 증오로 들끓어 올랐다.
충의 이 같은 행동들은 심각한 고뇌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단순한 감정의 충격적인 반발, 이러한 것도 적잖이 포함되었었다.
그날 밤 충은 다량의 금계랍(金鷄蠟)⁶을 마셨다. 이때부터 그의 자학적인 집착은 점차로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신음 소리에 어머니가 눈을 뜨고, 급히 의사를 불러 미수로 끝났다.
그러나 그 후 충은 늘 신변의 위협이 절박해지는 경우, 안온한 도피보다는 도전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말하자면 해방 다음 해, S국립대학 창립에 대한 국대안(國大案) 반대 운동⁷이 각 대학에 파급되었을 때 그 선봉에 나섰다든가, 6·25 사변이 발발되었을 때 첫 고비에서 군의관으로 나갔다든가 하는 것은 그러한 자기 학대의 연장이기도 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자기에게 야유나 멸시의 눈총을 보내는 모든 사람들을 증오하고, 결국은 자기 이외의 사회적인 인간관계의 모든 것이 적같이 느껴지는 순간, 그는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급격히 치밀어 대외적인 적의가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로 변하고, 그것이 또다시 죽음에 대한 반발로 급변하는 미묘한 심리의 움직임을 어떤 이론적 근거에서보다도 체험의 과정에서 의식하는 것이었다.
자살 미수, 모험에서의 생환(生還), 이러한 거듭되는 생명에의 강인성은 악착하게 살아보겠다는 반대 의욕을 유발하게까지 만들었다.
문학 서적만 탐독하던 중학 시절, 사지가 자유롭지 못한 불구자에게는 앉아서 일하고 살아가는 방법, 그러한 서글픈 희망이 예술에 대한 취미나 기호를 넘어서 더 강렬하게 작용했었다.
한때는 신분 관계에 대한 사회의 기성관념에 반발하여 법률이나 경제학을 택하려는 반항적인 의지가 얼마 동안 충의 머릿속을 사로잡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할 무렵에는 급박한 삶에 대하여 미적지근한 방관자적인 문학보다는, 그리고 관념에 휩싸이기 쉬운 법학이나 경제학보다는, 차라리 직접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과 대결하는 의학, 이런 것에, 더 피부에 부딪는 마력 (魔力)을 느껴, 결국 그의 전공 선택에 하나의 박차를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성의 문제, 이것도 충에게는 애정보다는 적대적인 반발이 하나의 정복욕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기에 그는 굳이 매춘부의 소굴로 찾아갔다. 거기에서 성적욕망을 충족한다기보다 차라리 상대자를 쾌락 속에서 마음대로 학대하고, 그 반응을 자기의 감관 속에 직감하는 것…… 그는 자기의 ㅎᅟᅳᆼ분보다는 상대의 흥분 과정을 감응 측정하는 것으로써 오히려 만족을 느꼈다. 상대자의 숨소리, 심장의 고동, 경련 같은 안면 근육의 수축, 눈동자의 흐려져가는 과정, 사지의 긴장, 오히려 흐느낌이나 울음에 가까운 기성 같은 데서……
여러 차례의 혼담도 있었다. 이쪽에서 거절한 횟수보다는 저쪽에서 거부해온 경우가 더 많았다. 육체적인 불구와 사생아라는 면통의 불순, 이것이 결국 모든 승패의 최후 분기점이 되었었다.
진정으로 어떤 부대조건이 없이 서로가 사랑하는 경우, 그러한 때 이 두 개의 큰 장벽은 무너뜨려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현실적인 치열한 생활 여건 속에서는 풋내 나는 그러한 낭만쯤은 거품처럼 묵살하여버리는 것을 충 스스로 너무도 뼈저리게 느껴왔었고, 사실 충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계산 없는 사냥이란 실지로 있어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학 연구실에 있을 때의 일이다. 병동마다 만원이 되어 누워있는 각종 병환의 입원 환자들, 진찰실과 복도에까지 우글거리는 외래 환자들, 가슴 속이나 뱃속이나 입 안, 골속, 심지어 생식기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의 병신 아닌 놈이 별로 없다고 느껴졌다. 다만 자기처럼 밖에 나타나는 딱지 붙은 병신이 아닐 따름이지…… 이렇게.
네거리로 나왔다.
앞을 스쳐 바쁘게 쏘다니는 사람, 신형 승용차에 점잖게 기대어 달아나는 기름덩이, 다방에서 의젓하게 나오는 신사 숙녀, 그 어느 하나도 벌레 먹은 날도둑놈 같은 소갈머리를 가지지 않은 것이 별로 없는 것만 같게 여겨지는 순간, 다만 밖에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모두가 병신투성이인데 하고, 충은 이런 때에 한 가닥의 초라하고도 서글폰 자위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선희와의 혼담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왔다.
김 선생이 선희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에 있고, 또한 김 선생 자신이 이 혼담의 직접 매개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좋은 조건의 하나였지만, 그보다는 당사자인 선희 편에서 충의 불구에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 중요한 관건(關鍵)이기도 했다.
또 다른 각도로 생각하면, 선희의 전공한 약학이 충의 직업과 연관된다는 점 이 관계자들 간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산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충과 선희는 만나는 횟수가 거듭됨으로써 서로의 의사는 소통되어갔고, 피차의 이해도 깊어갔다.
충에게서 인간에 대한 적의나 반감이 다소나마 감축되어가는 경향이 의식되어진 것은 선희와의 인간관계에서 얻어진 오랜 상처의 회복이 그 직접 계기였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충의 심리에는 선희로 말미암아 대인 관계의 변화가 점차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충이 선희와 만나는 기회에 가능한 한 걷는 시간을 단축하고 차를 이용하는 것도, 모처럼의 호의로 접해주는 선희의 심정에 불쾌나 비굴감을 가급적으로 연장시키지 않기 위한 세심한 배려에서 였다.
그 선희에게서 긴급히 만나야만 되겠다는 속달이 왔다.
충은 여인에게 인공적으로 주입된 정액의 그 후 반응에 대하여 궁금증을 반복하고 있는 때였다. 과연 그러한 실험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고.
임신이란 쌍방의 생리적 계기가 필수 조건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모체에 있어서는 배란기를 기준한 시간 제약이 거의 절대적 키포인트가 되어 있기 때문에 충은 그 가능적인 확률에 큰 기대는 갖지 않고 있었다,
충은 진찰 카드를 뒤적거리며 여인의 월례적인 생리 변화에서 수태 가능 기간을 다시 한 번 측정해보았다.
그 후 벌써 삼 개월이 지났다. 수태가 되었다면 지금쯤은 모체에 확실한 변이가 일어나고 있을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인은 그 일이 있은 후 아직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의 원시적 실험 결과에 대한 엽기적인 호기심이 여인을 만나고 싶은 충동을 자극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임신이 되는 경우, 그 윤리적 책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인은 자기 자신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의로 강요하여 저지른 성과에 대해서 만족한 희열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편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충은 왈칵 치미는 구역질 같은 자책을 그대로 되삼킬 수는 없었다. 태어나는 산아의 경우는 어떠할 것인가. 피·핏줄기·혈통, 그런 것이 그렇게 소중할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삶의 필수 조건이라면 과학에 의한 또 하나의 사생아는 태어나는 시간부터 자기처럼 슬픈 운명의 그물 속에 감겨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충 자기는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났고 아버지를 모르며 성장해오지 않았던가.
혈통에서의 고아…… 아니 인간으로서의 고아. 충은 혼자 뇌까리며 건 가래침을 휴지에 뱉어 아무렇게나 뭉쳐 던졌다.
그러나 순간 충은 실험 결과에 대한 해답의 반응에 겹쳐, 자기 피에서 싹틀 하나의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에 엷은 조소를 짓궂게 날려 보내고야 마는 것이었다.
진찰실 소독장 속에 늘어놓은 표본들이 담배 연기를 거쳐 충의 시야로 차례차례 모여들어왔다. 일 개월, 이 개월, 삼 개월…… 의 유리병에 표시된 딱지들. 사지를 웅크린 틈바구니에 머리를 틀어박고 요동을 못 하는 태아들이 알코올 속에 담겨져 절어가고 있다. 그것들이 적출된, 모체의 영상들이 어슴푸레 망막을 스쳐가고 있었다.
큰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는데 이제 임신은 무슨 망령이냐면서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간신히 수술이 끝난 것은 오 개월의 카드가 놓인 병,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반도호텔 여사무원인가 하는 것이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사산한 것은 팔 개월의 병, 맨 끝의 자궁 균종(菌腫)을 보자 충은 머리를 홱 돌렸다. 저 무거운 혹을 뱃속에 달고 다녔으니…… 그러나 오십 대의 비대한 여인은 기적으로 살아났다.
전쟁고아인 혼혈아 삼십 명을 실은 비행기가 김포 공항을 떠났다는 석간 보도의 사진 기사를 보면서 충은 혈연과 애정, 혈통의 순수성, 이런 문제를 다시 곱씹어보는 것이었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보군요. 속달까지 뗀 것을 보면…….”
충은 선희의 약간 초조 어린 눈매를 돌아보면저 말을 건넸다.
“조용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요.”
다방에서 나와 자동차 쿠션에 기대어 어깨를 맞닿아 앉은 선희에게서 풍겨오는 체취에 충은 자기를 만나려는 용건의 궁금증보다는 오히려 전에 없이 이성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속에 놓여 있었다.
조용한 음식점의 외딴 방에 들어와 앉을 때까지 둘은 별로 말이 없었다.
충은 술을 청하여 큰 컵으로 계속 몇 잔 들이켰다. 닥쳐올 사태의 예감에 대한 고의적인 항변이기도 했다.
“집 안에 돌연한 사태가 벌어졌어요.”
선희는 침착한 어조로 또렷또렷 이 말을 시작하였다.
“무슨 사태 가요?”
충은 자기의 예감이 적중되어가는 첫마디에 대하여 가벼운 반문을 던졌다.
“저 선생님의 일신상에 관한 문제예요.”
“무어 족보를 따지자는 건가요?”
닥쳐올 이야기의 실마리가 훤한 것이기에 충은 앞질러서 선수를 썼다.
“말하자면 그렇죠.”
“그게 대체 어떻단 말이오?”
“아니, 아버지께서 무슨 들은 얘기가 있었기에 김 선생에게 따진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김 선생님께서 내용 이야기를 실토하셨나 봐요.”
“그래 선희는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요?”
반문하는 충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꽤 거센 어조였다.
선희는 빤히 충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최후의 단안을 내리려는 판관의 날카로운 눈동자와도 같이.
“원래 혼담이 김 선생을 통해서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으니까요.”
“그럼 선희 자신도 아버지 의사에 동조한다는 말이지요?”
“글쎄, 우선은 그러한 각도로 생각해보았어요. 하지만……”
선희는 머리를 떨구었다. 충은 술을 또 한 컵 들이켰다. 자기 자신이 저지른 행동 이외의 책임, 특히 자기 자신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선대(先代)의 죄과에까지 소급해 혈통의 책임을 혼자 져야 한다는 것,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부담이라고 생각되었다.
충은 침통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선희 자신의 결정에 달렸소. 내 자신이 결혼이라는 것을 그렇게 방관하다가, 이 경우에만 이렇게껏 적극적인 이유를 나 스스로도 모르겠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충은 긴장 속에 선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좀더 생각할 시간의 여유를 주세요.”
다급한 자리를 회피하려는 여자의 잔꾀가 아닌가 하고 의아심이 품어지면서도 충으로서는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충 자신으로도 이러한 마당에 구걸하다시피 하여 이 혼인을 성립시키고는 싶지 않았다. 다만, 지금껏 꺾여왔던 자기의 자존심이 이때만은 거세게 머리를 치켜들고 일어나옴을 의식 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반발과 자존심, 그것마저 좌절되려는 분기점에서 충은 선희의 의사대로 다음 날 다시 만나겠다는 제의를 호의로 승낙했다.
거리에 나선 충은 선희를 차에 태워 보내고도 얼근한 술기운 속에서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저 막 통곡하고 싶었다.
병원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그 여인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충은 상기되는 술기운을 누르면서 서 있는 여인에게 앉기를 권했다.
“선생님, 태기가 있나 봐요.”
자기 주위에 별로 거리낌 없는 여인의 성격 그대로였다.
충이 무슨 말부터 먼저 끄집어내어야 할까 하고 생각을 더듬고 있는 동안, 선손⁸을 쓰는 여인의 태도는 차라리 자연스러웠다.
“네, 그러 세요?”
충은 거센 쇼크를 받으면서도 극히 담담한 어조로 여인의 말을 받았다.
“선생님도, 어쩌문 그렇게 무관심 하세요?”
“무엇이 무관심이란 말입니까?”
“어린애가 생겼다는데두요.”
여인의 눈길은 충을 뚫어질 듯이 주시하고만 있었다.
“……”
“임신이 됐어요.”
충은 실험 결과에 대한 종합 보고에 마음이 끌렸으나 너무도 능동적인 여인에게 오히려 지질려 외면을 하고 진열장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태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쩌문 선생님은 아무 반응도 없으세요.”
이것은 분명 남의 속을 꿰뚫어 보며 꼬치꼬치 캐는 눈치임에 틀림 없었다.
“잘되셨군요.”
역시 맥 빠진 대답이었다.
“주인도 ㅍᅟᅥᆨ 기뻐하세요.”
충은 ㅎᅟᅳᆼ 하고 코웃음이 나가려는 것을 참았다.
“오늘은 제가 초대할 테니 저녁 식사나 하러 나가십시다:”
“저녁은 먹었는걸요.”
충은 공격에 대한 수비 태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약주나 좀 하시지요.”
“술도 웬만큼 했어요,”
거절은 하면서도 이 허탈하고 당돌한 여인에게는 악의가 가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이 여인은 그 실험으로 벌써 둘 사이에는 육체적인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십시다. 환자도 없구 한데……”
충의 팔을 잡아끄는 여인의 동작이 오랜 지기라도 되는 듯한 친숙감을 느끼게 자연스러웠다.
충은 문득 아까 선희와의 장면이 떠오르자, 괴었던 불쾌와 증오가 솟구쳐, 여인에게 팔을 잡힌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간밤 일을 더듬어보아야 기억이 몽릉하다. 커다란 두 가지의 일이 한데 얽혀 선희의 환상 위에 그 여인의 모습이 겹쳐서 머릿속을 횝쓸고 지나갈 뿐이다.
그 여인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신 기억까지는 비교적 선명하다. 맥주, 양주 할 것 없이 되는대로 마셔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심한 갈증에서 눈이 뜨였을 때는 자기 옆에 여인이 누워 있었다.
“이제 정신이 좀 나세요?”
여인은 잠이 들지 않고 있었다. 슈미즈 하나만의 여인의 몸뚱이가 푸른 전등 불빛 속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포개쳐 있었다.
“누우세요.”
“대체 여기가 어딘데?”
“글쎄, 누우시래두요.”
이제는 거의 명령조다. 여인은 충의 목을 끌어 자리에 도로 눕혔다. 여인의 팔은 충의 목을 점점 거세게 죄어왔다.
“선생님, 좀더 확실하게 임신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충은 약간 정신이 맑아져왔다. 유리로 된 시험관과 주사기를 통하여 수태가 되는 경우, 그것은 육체적인 교접으로 생기는 산아와의 사이에 어떠한 윤리적 차이가 생길 것인가 하고, 충은 전등 스위치가 이미 틀어진 베드 위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결국 쾌락의 유무의 차이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생식의 기계화. 인간은 그러한 책임을 현대 과학에 떼밀고 자기 합리화를 꾀한 것 임에 틀림없을 성싶었다.
저만이 살겠다는 것, 제 좋은 각도로 해석하는 것, 저만의 목적을 위하여서는 제멋대로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극도의 메커니즘에서는 모든 인간은 사생아임에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자, 옷이나 벗고 누우세요.”
처음에 충은 기계처럼 여인이 시키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창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훤히 먼동이 터왔다.
충은 창 앞의 활짝 핀 꽃 덩굴에 엉겨드는 나비와 벌 떼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침놀에 비낀 하늘을 향하여, 큰숨을 내쉬었다.
다리에 흩날리는 꽃가루가 어느 꽃술에서 어느 꽃으로 옮겨지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벌 나비의 세계는, 잉잉 소리 그대로 환희의 난무와 찬가에 충일된 그것임에 틀림없는 양 싶었다.
모든 것을 백지로 환원해달라는 선희의 최후통첩 이 전신에 감겨들어 좀처림 분노가 가라앉질 앉았다.
자기 이외의 모튼 인간에 대하여 반감과 적의를 가졌던 자기에게서, 세상사에 순종하려는 평범성, 특히 미워하던 모든 대상에 관용이 대치되고, 그러한 일들을 선의의 각도로 해석하려던 마음의 싹이 순간 완전히 모진 구둣발에 짓밟혀지고 만 것 같았다.
‘행여 내 울부짖은들, 뉘라 천사들의 계열에서 내 소리를 들으리……’
「두이노의 옐레지」 첫 구절이 떠오르는 대로 충은 읊조려보았다.
그러나 역시 가슴속은 개운치 않았다.
중태의 환자가 찾아왔기에 충은 다시 진찰실로 들어갔다.
앳된 여학생 환자를 진찰실에 눕혔다. 괴롭게 신음하면서도 치켜 올려진 제복 스커트 자락을 반사적으로 내리려는 것을 보고 충은 고소를 머금었다.
“키니네를 먹었어요.”
숨을 헐떡이며 같이 온 남학생은 설명했다.
“왜? 자살하려구?”
“아니요, 사실은…….”
“사실은 뭐야?”
말끝을 흐리는 남학생의 교복 단추를 쏘아보며 충은 반문했다.
“임신을 했어요.”
“임신!”
충의 말 속에는 경악에 겹쳐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급히 응급 치료를 가한 다음 태아의 맥을 짚어보았다. 태아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제는 모체를 구출하는 길밖에 없다. 환자의 기력이 극도로 쇠약하여졌으므로 수술 후의 생사를 보장할 수가 없었다.
“모체를 구하려면 부득이 인공 유산을 시켜야겠어.”
“네?”
“태아가 죽었으니까 끄집어내야겠단 말이야.”
“아무튼 살려만 주세요.”
“어린애 아버지는 누군가?”
충도 짐작은 하면서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 도중에 환자가 죽을지도 모르겠으니, 부모나 누구 책임있는 사람이 입 회 해야겠어.”
“제가 책임지지요.”
동정은 가면서도 당돌한 것이 얄미웠다.
“이 여학생의 부모를 불러오란 말이야.”
“부모님께 알리면 안 돼요.”
“왜?”
“저희들끼리만……”
인생으로서 충은 이들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뒤를 이어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반발적인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위급한 환자를 앞에 놓고, 자기의 책임 회피에 예비적인 절차로 시간을 지연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간호원에게 준비를 시켜놓고 자기도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
수술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이었다. 진찰실 쪽에서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간밤 호텔을 탈출하는 순간은 자기의 용감성에 쾌재를 불렀으나, 지금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혼자 도주한 사실이 비굴감과 함께 여인을 모독한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 빈사의 상태에서 누워 있는 여학생도, 그 상대인 남학생도, 그리고 선희도, 그 여인도 떳떳하게 제 의지로 살아가는데, 자기 혼자만이 세상을 꼬여 보고 비뚤어지게 생각하고, 결국에는 열등의식의 테두리 속에서 수음적인 방법으로 혼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만 같게 여겨졌다:
남들이 둘러놓은 울타리 속에 스스로의 장벽 하나를 더 치고 자기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술이 끝나 환자가 떠나간 후까지도 충은 멍하게 수술대 옆에 서 있었다.
핏줄이나 자기의 불구에 대하여 멸시를 보내는 바깥 세계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이 애써 고수하는 자기의식의 한정된 장벽부터 헐어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바깥 세계에서 자기에게 둘려진 아성은 자기 자신의 내적 장벽보다 더 여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기에……
“어젯밤은 죄송했어요.”
깜짝 놀란 충은 비로소 자기의식으로 돌아왔다. 여인이 자기 곁에 와 서 있었다.
“아무 불순한 동기도 없었어요. 기실은 좀더 정확하게 애기를 갖고 싶었을 뿐…….”
충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감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애정도, 유혹도 아닌 생산체로서의…… 말하자면 종모우(種牡牛)⁹ 같은……’
그러나 그는 발에 힘을 주어 버티었다. 계속해 일어나는 일들에 심신이 피 로하여서였다.
“선생님, 지난번 인공 수정이 사실은 수태가 안 됐나 봐요. 어저께는 거짓 말을 했었어요.”
“뭐요?”
“꼭 어린애를 낳고 싶은 그것뿐이에요.”
여인은 충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충의 머릿속은 헷갈리는 여러 갈래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참 제비도 더럽게 뽑았지, 하필 나 같은 것의 종자(種子)를 받으려구…….’
그는 중대한 결의라도 한 것처럼 입술에 경련을 일으키고 눈에도 살기가 등등했다.
‘피동 아니라 능동으로, 이 여인에 게 정확한 수태를 시켜야지.’
충은 성난 이리처럼 여인을 끌어안고 절름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침실로 통하는 도어를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끝-
2016년 7월 5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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