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 ◈
주말 방영 중인 KBS 2TV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보다가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는 어떤 때였을까 생각해 봤어요 아마도 가장 불행한 세대는 1580년 무렵 태어난 이들 아닐까 여겨졌지요 1580년 세대는 10대 때 임진왜란(1592~1598) 7년 전쟁을 겪었고, 40대 때 정묘호란(1627)을 맞았으며, 50대 때 다시 병자호란(1636) 참화를 치렀지요 우리말의 거센소리·된소리 현상이 이때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언어마저 거칠고 드세질 정도로 참혹한 시대였어요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불행한 세대는 그때만이 아니었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조선 시대 넘어 고려 역사까지 시야를 넓혀 보는 눈을 미처 갖지 못했지요 10~11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거란(요나라)은 993년, 1010년, 1018년 세 차례 고려를 침략했어요 ‘고려거란전쟁’은 거란 40만 대군에 맞선 고려군의 분전을 생생한 전투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지요 980년 전후 태어난 세대는 10대와 30~40대 무렵 대규모 전쟁을 잇달아 겪었어요 2차 침략 때 임금 현종은 수도(개경)를 떠나 나주까지 피신해야 했지요 우리 역사상 군주가 외적 침입으로 몽진한 일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지요 ‘고려사’ 기록을 찾아보니 “근자에 전쟁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고 길가에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다”(1012년 2월)고 참혹한 광경을 적었어요
그럼 1220년 세대는 어떤가요? 이 세대는 10대 때인 1231년부터 30대 후반인 1259년까지 몽골의 침략을 아홉 번이나 겪었지요 “죽은 자는 백골을 거두지 못하고 산 자는 적의 노복이 되어 부자간에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를 보전하지 못하는” (1254년 10월) 전쟁이 28년간 이어졌어요
그런데 불행한 세대는 또 있었어요 1359년과 1361년 홍건적(훗날 명나라 건국) 침략으로 임금(공민왕)이 안동까지 피신했던 시기 사람들도 고난의 세대였지요 이때도 참혹함은 말할수 없었어요
그리고 또 20세기 초 태어나 일제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고 1950년 6·25전쟁을 겪은 분들 역시 불행한 세대였지요 이처럼 전쟁의 참화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피 비린내 나는 고통의 연속 이었어요 글자 그대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아비규환(阿鼻叫喚) 이었지요
지금 86 세대건 97 세대건 MZ 세대건 저마다 살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 행복한 세대가 아닐까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대만해협을 위협하며 미사일을 쏘면서 전쟁 의지를 감추지 않는 나라들을 머리에 이고도 대한민국은 지난 70년간 전쟁을 치르지 않았어요 며칠 전 개봉한 영화 ‘건국전쟁’은 그 까닭을 명쾌하게 설명하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세계 최강국 미국을 붙잡아 군사동맹을 맺었어요 영화는 이승만의 결단으로 맺은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되고 지금은 미얀마 수준의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북 김정은은 최근 열흘 사이 4~5차례 미사일을 쏘면서 “전쟁 준비”를 언급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국회 어느 토론회에선 “북한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관” “한반도 전쟁 위기가 실재하는 근원은 북이 아니라 한미 동맹 때문”이란 말이 쏟아졌지요 원평비전(願平備戰)라는 말이 있어요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 격언과 일맥상통하지요 망전필위(忘戰必危)란 말도 있어요 이는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이처럼 중국 춘추전국시대 경구는 고금을 관통하는 안보 명제이지요 그래서 평화는 희망이 아니라 힘으로 지켜진다는 사실은 세계사의 수많은 사례로 입증되고 있어요 히틀러와의 평화협상은 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의 6·25 남침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지도층의 한사람은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는 낫다”고 했어요 ‘더러운 평화’의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어떤 굴종적 양보를 하더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되지요 핵 공격을 대놓고 위협하는 북한 김정은 체제 앞에서 안보 태세를 허물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수 없어요
그럼 여기서 과연 누가 ‘불행한 세대’를 만드는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을까요? 사극 속에서 강감찬은 “인간이 살아서 겪는 유일한 지옥이 바로 전쟁”이라며 이를 막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막상 침략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에선 승리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결사 항전하지요 이때 강감찬 장군의 나이가 34살 이었어요 군주 현종은 항복하자는 일부 신하들에게 일갈하지요 “우리는 후손들을 대신하여 전쟁을 치르고 있소. 우리는 항복할 권한이 없소.” 그때 굴복했다면? 지금 우리는 남의 나라 말을 쓰고 있을 것이지요 모진 세월 딛고 지금 우리를 있게 한 모든 ‘불행한 세대’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있어요
▲ 6·25전쟁 당시 정훈장교로 활동했던 고(故) 한동목 중령이 1950년 8월 촬영한 `영천의 피난민 행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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