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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3일
말씀 : 신8:1
제목 : 지성소가 필요한 이유
저번주에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과 사귐의 삶의 연속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성소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일어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연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세상을 봅니다. 세상의 시각이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의 시각과 반대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즉 하나님나라의 세계의 삶을 표현하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번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미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아그립바 왕 앞에서 결박된 것 말고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나와 같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기를 원하노라. 좀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나와 같이 미치기를 원하노라.’ 이 미친 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나라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성소를 통해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 사귐의 삶을 살면, 세상과 차단되고 하나님나라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것을 위해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그 나라의 통치를 받고 그 나라를 목적으로 해서 사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 땅의 정당함과 옳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미친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상황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핍박할 때 비상식적이고 반인륜적이라고 누명을 씌워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학살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질병에 걸리면 이 병을 하나님이 만져주시면 치유된다는 믿음을 가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온전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비상식적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감사합니다. 이 고난으로 인해 더욱 믿음의 전진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신 존재 증명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원리와 방법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로 살기 때문에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해서 그 나라의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전진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늘 강조해오고 있는데요. 즉 믿음이 성장하는 삶을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야 하며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로 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길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먼저 믿음 하면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는데요, 이 아브라함도 믿음이 바로 생긴 것은 아닙니다.
창22:1~12을 보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히11:8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믿음의 훈련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믿음의 행위가 순종인데 이 순종의 훈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창12:1에 보면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순종하라, 그러면 무엇을 주겠다고 합니까? ‘땅을 주겠다.’입니다.
보십시오,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그러면 자식, 즉 후손에 대한, 또한 땅에 대한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초보 때는 ‘순종하면 주겠다.’입니다.
그런데 창22:2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바쳐라’ 그러면 ‘빼앗겠다’입니다. 세상적 시각에서 보십시오. 아들을 하나님이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저히 이해가 됩니까? 아브라함은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던 신앙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빼앗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믿음을 동원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순종하면 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성장하는 그 과정 속에서 온전한 믿음을 시험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먼저는 축복하리라고 했고, 그리고 그 다음에 요구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독자를 바치라, 즉 빼앗겠다는 시험을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생애 삶 속에서 믿음의 연단과 단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독자를 바치는 사건은 이방 종교에서 행해지는 종교의식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방 종교의 의식 중의 하나를 요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아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네가 얼마나 나를 아느냐’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이삭 없이도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이 땅에 심고 거두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원리와 목적을 이 땅에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가치는 세상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일들이라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홍해를 건넜을 때 사건과 요단강을 건널 때의 방법이 다른 것 아시지요. 이것이 칭의 구원과 성화 구원으로 설명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홍해를 건너갈 때는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종 되었던 노예의 신분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이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널 때는 다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화적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셔야 합니다.
요단을 건널 때 하나님의 명령은 간단합니다. 언약궤를 메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안에 십계명의 두 돌판이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동식인데 그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보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앉아계시는 곳이 언약궤인데 따라서 언약궤가 먼저 요단강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서서 실제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여호와께서 요단강을 건널 때 이 언약궤 위에 친히 좌정하시고 그리고는 이스라엘을 앞서 행하셨습니다.
여호수아 3장 6절을 보면‘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고 했습니다. 먼저 발을 내딛으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되어서 건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넘치는 강에 발을 내딛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널 때와는 다른 명령이고 다른 훈련입니다. 홍해는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은 건너오라는 말입니다. 홍해는 은혜이지만, 요단강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야 요단을 건널 수 있는데, 그들이 믿음으로 순종하니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되고 장정만 60만, 남녀 약 2백만, 짐승과 함께 약 5백만이 그 요단을 건넌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재해석을 한다면, 우리가 언약궤라는 사실은 이미 강조해왔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요단강과 같은 삶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차지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악한 가나안 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 악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를 요단강에서의 사건을 통해 조명해 보셔야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땅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한다고 해서 그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땅의 차지는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언약궤를 매고 요단을 건너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물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비가 오면 비가 땅으로 스며들지 못해서 범람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물을 무서워하고 또한 물을 정복하는 신이 최고의 신으로 여기는데 하나님이 이 물을 마르게 해서 건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물을 통제하신다는 뜻이 되고 최고의 신으로 인식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올 때 이들은 이미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에서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지 못하면 하나님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아셔야 합니다.
출애굽 때는 언약궤를 매고 행진했지만 오늘날은 우리가 언약궤가 되어 지성소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을 보면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히브리어로 רֶגַע(레가)입니다. 이 단어는 ‘순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레가’의 의미에 대해 잘 나와 있지 않아서 조심스럽지만 이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첫째 순간순간 이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딴 길로 가는 존재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53: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 말씀에서 양의 습성은 리더 양이 앞서가면 그 뒤를 따라가게 되어 있는데 조금만 앞 양과 떨어지면 딴 길로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양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순간도 방심하면 딴 길로 갈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여깁니다. 두 번째로 모세 시대의 말씀이 오늘날의 ‘순간’과도 동일한 말씀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당시 말씀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의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이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할 줄 믿습니다. 물론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재조명되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빼거나 더할 수 없는 생명의 말씀임을 알고 말씀의 본질을 지킴으로 오늘날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는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3절에서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여러분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고 일주일을 먹지 못합니다. 마라톤선수들이 체력 조절할 때 일주일 동안 먼저 소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주일째가 되면 고기를 씹는 것이 아니라 고무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만나를 40년 동안 먹으면서도 지속적으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만나가 얼마나 신비한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후일 예수께서 사단의 유혹에 답변하시기 위해 인용한 구절이기도 합니다(마 4:4). 여기서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빵이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여 내시는 만나와 같은 특별한 것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대로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단에게 ‘비록 떡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선 자신의 생명을 특별한 방법으로 지속시켜 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신명기 8장 전체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는 새로운 방향은 은혜에 대한 ‘기억’입니다. 2절, 18절에서 기억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1절, 14절, 19절에서는 ‘잊어버리지 말라’ 즉, 기억하라고 하나님은 연거푸 말씀하십니다. 총 5번이나 하나님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잠시 떠나있는 사람들, 또는 인터넷을 통한 영상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다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끔씩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보면 ‘오늘’ 말씀대로 안 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안 살 뿐만 아니라 무서운 것은 대부분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세상의 풍속을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보다 세상에서 좋은 말씀을 더 선호합니다. 여기서 ‘오늘’의 의미를 다시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데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 복을 받으려면 오늘, 이 순간 지성소를 찾을 수밖에 없도록 배려해 놓으신 은혜를 다시 한번 확인하셔야 합니다.
광야의 삶이 40년입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험악한 지대와 날씨와 온도와 환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만나를 먹이는 일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이 사실을 말씀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즉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지성소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영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간증하시는 분이 많고, 또 여러분들이 간증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주시는 방향은 ‘오늘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19-2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오늘 하루가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하루 양식과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저도 입술에 파수꾼을 두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요, 순간순간 우리는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 아닙니까? 우리는 현실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의 이익이나 편리나 기회나 자랑이나 높임을 받으려는 상황에서 늘 하나님 말씀이 적용되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길 때 절에 가서 절을 하거나, 무속인들의 굿에 동참하거나 부적을 써서 문 입구에 붙이거나 하는 것만 우상숭배가 아니라 현실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에 내 생각과 마음이 빠지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 인해 세상 쪽으로 인생의 목적을 맞추게 되고 그래서 신앙마저도 세상의 것을 취하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는 오늘날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껍데기 신앙만 남아 점점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생활은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서, 십자가 복음에서 떠나있음으로 심판의 대상이 될까봐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 말씀을 늘 묵상하라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셋째, 자녀들에게 이 말씀이 이어지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을 자녀를 향한 우리의 마음에 신앙적 양육을 위한 희생이 없으면 결국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다음 세대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잊어버리면 믿음의 유산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들의 영혼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평생 받으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삶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를 알면 ‘오늘’ 앞에 온 가족이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자녀들을 향해 신앙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저들이 알아서 교회를 찾지 않은 한 강제로 신앙생활 시킬 마음이 없다는 식으로 자녀들을 대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되면, 이 땅은 어떻게 변할지 서구 유럽을 보고 아셔야 합니다. 유럽에서 500년이 되지 않은 교회는 교회 축에도 못 낍니다. 교회가 유럽을 고풍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건축양식이 유럽의 건축법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유럽의 큰 고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50년마다 보수해야 하는데 돈은 없고 방치하자니 미관을 해치고 이런 난제가 있습니다. 왜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느냐 하면 큰 교회라 할지라도 3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거의 노인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팔아야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구글만 검색해도 교회 매물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습니다. 매각된 교회는 서점, 카페, 식당, 호텔, 유치원, 극장, 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는 봐줄 수 있다 하더라도 불경스럽게 사용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나이트클럽, 스트립쇼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만 해도 1만 6천개 정도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석률이 20명도 채 안 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9000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 영국은 미국 남침례교단으로부터 선교비를 받고 있는 처지입니다. 영국이 한때 선교 중심 국가임을 감안하면 100년 사이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프랑스에만 500개 역사적 교회가 있습니다. 프랑스는 정부보조금을 교회가 받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상황입니다. 프랑스 성당의 숫자도 10명 중 1명 꼴입니다. 프랑스도 곧 교회를 팔아야 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독일도 340개 이상의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함부르크교회는 이슬람 사원이 되었습니다. 2만개 이상 되는 교회가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100개는 폐허상태입니다. 체코 같은 경우는 프라하의 800년 된 교회가 스트립쇼 업체에 팔렸습니다. 유럽 중에 가장 심각한 나라는 네덜란드입니다. 암스테르담의 유서 깊은 한 교회는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어 마돈나가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개신교회 700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가톨릭은 2/3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때 ‘기독교가 유럽이다.’라고 한 이런 곳에서 교회가 문을 닫고 성도들이 떠나는 현상이 나타난 이유 중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첫째 출산율 저하입니다. 이슬람을 보면 비교가 되는 현상입니다. 기독교관이 무너지면서 이혼율이 급상승한 것도 원인입니다. 주일이 되면 가족들이 교회로 향하던 가족관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경제적인 부입니다. 종교적 효율성이 떨어지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고소득 국가일수록 복지국가일수록 신앙관은 양극화된다는 것이 통계적입니다. 교회가 맡아서 하던 복지를 국가가 도맡아 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종교적 거룩함을 떨어트리는 성추문 스캔들입니다. 네 번째 주 5일제 정착으로 인해 야외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게 한 것도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16세에서 20세의 설문조사에서 신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자들이 체코의 91%를 비롯해 무교라고 답한 청년이 70%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영국의 종교사회학교수인 스테판 불리번트는 유럽의 기독교는 100년 내에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럽이 지금 어떻게 변화되는지, 경제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놓였는지, 학생들이 얼마나 젠더 문제와 마약에 노출되어 있는지, 얼마나 살인과 강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지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신앙적으로 급속히 유럽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지금이 지성소를 찾을 때입니다.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이 우리에게 간절함과 절박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