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이 거꾸로 가나 싶은 한 주간이었습니다. 10월을 보내며 9월로 돌아갔나? 싶었습니다. 남부 지방에는 30도 가까이 오른 곳도 있더랍니다. 그럼에도 단풍은 익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밤낮의 기온 차 때문인 듯합니다. 이 주말에 오는 듯 마는 듯 비 좀 내리고 나면 아마도 좀 쌀쌀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대로 가야 안심이 됩니다. 이상한 짓하면 걱정되지요. 날씨도 그렇습니다. 때에 맞게 돌아가야 계절을 느끼고 보내며 바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지요. 별다를 것도 없는데 딴 짓하면 두려워집니다. 순리대로 가야 기다림을 따라 누릴 수도 있습니다. 평범함의 일상 속에서 조상 적부터 이어온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세상이 전쟁으로 시끄럽고 우리는 물가가 껑충껑충 뛰어도 그냥 살아있기에 감사하며 버팁니다. 포탄 떨어지는 현장에 있지 않다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합니까? 조금 덜 먹으면서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매일 공습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아프면서 우리의 현실에 감사하지요. 이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서로 잘났다고 아우성치고 있지만 실제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쌈질해도 잘 경계하며 하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배부른 자들이 쌈질하는 것이지 하루살이 인생들이 그럴 여유가 있겠습니까? 우리야 그러다가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우면 그것도 감사하지요. ㅋㅋ 아무튼 저물어가는 한 해를 생각하며 새해 꿈이라도 심어야 하겠습니다.
나이 들어가니 다른 것보다 몸 걱정이 우선입니다. 다 부질없는 일, 몸 죽으면 끝이니까요. 비 좀 내려도 건강하게 멋진 주말을 지내기 바랍니다. ^)^
2023년 11월 4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신명기 7 : 25)
<천박사 퇴마연구소 - 설경의 비밀>
지난 세기 어린 시절을 살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전입니다. 친척이라도 집에 와서 하루 이틀 머물고 가는 날이면 늦은 밤까지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이야기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때입니다. 보고 듣는 것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역이나 동네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를 돋우었습니다. 그런 때 외국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인기가 높지요. 경험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네 또래들 또는 몇 살 위의 형이 있다면 잠자리에 나란히 누어서 왜 그리도 귀신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귀가 더욱 쫑긋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귀신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보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먼 외국 이야기보다 더 불가능한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본 경험을 한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있으려니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과연 존재합니까?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TV에 매주 단막극으로 방영되었던 ‘전설의 고향,’ 인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오는 귀신이 대부분 여자입니다. 특히 한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그 중에는 ‘처녀귀신’도 나오지요. 때로는 동물로 환원되어 등장합니다. ‘구미호’처럼 여우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줄 압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 백성이 한을 많이 품고 살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한을 품고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것이 또 다른 한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귀신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인은 전혀 모릅니다. 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한을 무마시켜주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더구나 일단 죽은 사람은 다시 죽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막강해지겠습니까? 죽을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엇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산 사람이 결코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신나는 일 아닙니까?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동양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에도 있습니다. 우리와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기보다는 다른 영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그 사람을 조작합니다. 쉽게 말하면 본인 아닌 영이 사람이라는 육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육체의 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전혀 딴 사람 같은 언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소위 영계에 두 가지 영이 존재합니다. 선한 쪽과 악한 쪽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선은 하나님 편이고 악은 마귀, 사단의 편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쪽의 영을 ‘성령’이라 하고 악한 쪽의 영을 ‘귀신’ 또는 ‘악령’이라고 합니다.
영은 이 보이는 세상에서 스스로 활동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육체에 들어와서 그 사람을 사용하여 활동합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22 : 3 - 4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잘 아는 대로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긴 제자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사단이 들어가서 그 짓거리를 하게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즉 사단의 영이 유다에게 들어가서 사단의 짓거리를 했다는 말이지요. 사도행전 1 : 8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가서 온 세상에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상 어떤 사람을 가리켜 ‘신 들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람에게 다른 영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평소의 그 사람 본연의 언행을 하지 않고 좀 다른 행동을 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영이 두 가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좋은 영향을 주는 영이 있는가 하면 사람에게 악을 행하고 나쁜 영향을 끼치는 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부정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그 동안 많은 노력과 실험을 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영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 보인다고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모를 뿐입니다.
그냥 궁금해서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영어 제목으로 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잃어버린 부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 하기 전 어려서는 부모님이 얻어 오셔서 집안 여기저기 붙여놓은 부적들을 보았습니다. 그 부적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입니다. 어떤 깊은 의미를 담기보다는 그냥 흥미를 일으키기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퇴마’ 이야기라면 오래 전 유명했던 ‘엑소시스트’가 생각납니다. 생각만 해도 섬뜩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발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만든 것이지요. 서부활극 보듯이 그냥 재미있게 관람하면 됩니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설경의 비밀’(DR.CHEON AND THE LOST TALISMAN)을 보았습니다.
정통인가 전통인가?
이단에 대한 경계가 유난히도 많은 때를 살고 있는 듯합니다. 때가 가까울수록 그렇다고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늘 그래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에서 특히 이단 논쟁이 많고 뜨겁지요. 왜 그런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기독교라는 한 종교 안에 그렇게도 교파와 교단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한 예로 ‘장로교’라는 한 교파 안에도 200 개 이상의 교단이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오,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고 성경도 하나인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엡 4 : 5 - 6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그런데 하나이신 하나님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나누어 가지는 듯합니다. 사실 초기부터 그랬습니다. 고전 1 : 11 - 12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당시 걱정했던 일이 오늘날에는 엄청나게 확산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탄식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13절)
한 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이단의 명단에 올랐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그곳을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교단도 교인도 없는 줄 압니다. 처음에는 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가 그 후 어떻게 정통으로 인정된 것일까요? 과연 성경에서 벗어난 교리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던 것일까요? 정말 그랬다면 사실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교리가 어떻게 그 때는 이단이고 지금은 정통이 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혹 교단의 세력이 커져서 합세하기 위하여 정통으로 묵인해준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교리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세력을 키우는 것이 선결과제로 떠오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리에 다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교세를 키우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참으로 가증스런 일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이익 중심이고 기득권을 보존하려는 작태일 뿐입니다. 영역 싸움일 뿐이요, 자기의 세력 범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 입장에서는 철저한 이단이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그 영적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부딪친 것 중 하나는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켜왔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단 중의 이단이었지요. 눈에 가시 정도가 아니라 왕 가시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예수님 하시는 일에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거슬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 12 :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문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변박하는 그 말에는 대답할 말이 없다는데 자존심이 더 상했을 것입니다. 3 - 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자기 일한다고 제사를 드리는데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어떡하든 예수를 책잡으려 애씁니다. 마 12 : 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런데 이 질문에도 가타부타 말씀하시지 않고 대답하십니다. 11 - 1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렇게 도전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자존심이 꺾이고 마음이 상하고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별볼일없는 것 같은 초라한 젊은 녀석한테 대적할 말이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그렇습니다. 이런 놈은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이지요. 있어봤자 자기네들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요 8 :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아버지 곧 조상 이야기가 나오니 유대인들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39 - 40절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41절)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반박합니다. 자기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수 천 년 동안 그렇게 알고 믿고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신 있게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한 마디로 너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얼마나 황당한 말이었겠습니까? 나아가 도무지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농담이라도 마귀의 자식이란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 상합니까?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은이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셈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해가 되겠습니까? 거의 2천 년 전에 살던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며 즐거워하였다니 말이 됩니까? 57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오늘날 우리는 이 모든 지난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들을 비난만 하려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 또한 비슷한 경우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한 번 오셨던 그 분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지요. 초림 때의 문제가 재림 때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59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또한 그 분에게 다시 돌을 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는 나사렛 이단아였습니다. 행 24 :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한 귀신 들린 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요 10 :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그들이 빌라도에게 고소한 내용을 보면 또 하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눅 23 : 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자기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절대권력의 왕이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 구원자가 이런 초라한 젊은 녀석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네가 믿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지요.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자를 구원자라고 보내실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이야말로 존귀하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이제 질문해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단입니까? 지금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단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정통이라고. 그러나 당시에는 예수님이 그 백성에게 이단이었습니다. 지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들, 목자들이라 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반대하고 핍박하고 이단이라 정죄하고 예수님께 가는 것을 한사코 막았으니 백성은 그런 줄 알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일입니다. 아들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이 분명 소경이었는데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인정하면 출교당할 테니까요. 그래서 자기네는 발뺌하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지요. 요 9 : 20 - 22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이단’ 규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됩니다. 물론 그렇게 혼란스런 때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단이라고 함부로 말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확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의 핍박은 여전하였습니다. 제자들을 잡아 어떻게든 없이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그 때 지혜로운 교법사가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행 5 : 34 - 35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그러면서 제안합니다. 38 - 39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런데 오늘날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판단하고 없애겠다고들 아우성입니다.
이단이다, 정통이다 하는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오직 말씀 곧 성경인 줄 압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3 : 11 - 12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은 하늘에서 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믿지를 않습니다. 요 3 :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랬습니다. 요 8 :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백성은 믿지를 않습니다. 백성보다 먼저 당시 목자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만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백성도 믿지 못하게 막은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같이 망하자는 이 목자들은 당연히 화 받을 자들입니다.
예로부터 바른 말을 하면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행 7 : 51 - 5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전하는 자가 핍박을 받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네들이 전통적으로 알고 믿고 행하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그 좋은 예입니다. 목숨처럼 지켜왔던 안식일을 예수님은 좀 다른 기준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차원이 다르지요. 그러므로 반박은 하지도 못하면서 자기네들이 지키던 것과는 다르기에 싫은 것입니다. 또 한편 예수님은 영적인 차원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육적으로 이해하려니 수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멀리하고 딴 나라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왕따를 시킵니다.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지켜왔던 자기네 전통과 맞지 않기에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전통과 정통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통이 정통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통에 매여 있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갈릴레오의 지동설은 당시 인정할 수 없는 이단이었습니다. 과학적 증명보다는 전통이 우선이었지요.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땅의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계명을 좇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7 - 9 “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때로 하늘의 것은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자기네가 여태 믿고 살아왔던 것과 달랐습니다. 자기들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이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정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기네가 여태 배우고 알고 믿고 살아온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정통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학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입니다. 의문의 답은 언제나 성경에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의 생각과 추측으로 상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을 찾으면 됩니다. 그리고 연구해서 나오는 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계시해주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계 1 :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마지막 때 요한이 다 보고 증거하였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요한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설마 2천 년 전의 요한이 다시 나타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으니까요. 말 4 : 5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야는 예수님 오시기 약 9백 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가 다시 나타나겠습니까? 제자들도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 이야기를 합니다. 마 17 : 10 “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11 - 12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 때 비로소 제자들이 깨닫습니다. 13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다시 말해서 예언 속의 엘리아가 세례 요한으로 왔듯이 계시록의 요한이 2천 년 전의 요한이 아니라 또 다른 목자로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목자를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정통은 사람들의 이렇다 저렇다 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통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통은 아닙니다. 정통은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목자들이라 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나 율법사들이 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입니다. 장로들의 유전 곧 오래도록 이어온 ‘전통’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마 15 : 7 - 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아무튼 자기네가 가르치고 전하는 그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단이 되었습니다. 이게 정당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바라시는 신앙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일들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자기네 교단이 정립한 ‘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는 엄격히 말한다면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 속의 이치들을 나름 정리하여 만든 또 다른 법입니다. 누가 만든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구하고 상의하고 다듬어서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변의 성경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잘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목자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목자와 땅의 일을 증거하는 목자입니다. 어느 쪽이 정통이고 어느 쪽이 전통입니까? 하늘 이야기인지, 땅의 이야기인지 정도는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