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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일 목요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부잣집 대문 앞에서 지내다 죽어 아브라함 곁으로 간 가난한 라자로와 호화롭게 살다가 저승으로 가 고초를 겪는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복음).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부와 가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자는 다 지옥에 간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재물로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죽은 뒤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으며 아브라함에게 물 한 방울로 갈증을 식히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면서도, 대문 앞에서 구걸하는 라자로를 외면하였기에 그러한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올바르게 쓰는 지혜를 가지도록 권고하십니다. 재물은 한 사람이 독점하여 남의 먹을 것을 가로채려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재물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남을 도우라고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재물을 정당하고 유익한 목적을 위해 쓰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재물은 탐욕과 죄악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축복의 사다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걸할 힘도 없이 비참한 몸으로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 있던 라자로는, 죽은 뒤 아브라함 곁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분이십니다. 이 지상에서 궁핍의 고통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난 다음에 꼴찌였던 라자로는 첫째가 되고 첫째로 자부하던 부자는 꼴찌가 될 수 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믿고 의지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가 쉽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물질로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부자는 행복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하느님이 도우시는' 라자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라는 거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던 중증 신체장애자였습니다. 아침마다 동료 거지들은 그를 번쩍 들어 부잣집 대문 근처에 옮겨다 놓았습니다. 심각한 장애를 지닌 동시에 지독한 피부병까지 앓고 있는 라자로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멀찍이 피해서 달아날 뿐 아무도 그에게 동정을 베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배가 고팠던 라자로는 있는 힘을 다해 부자의 식탁 바로 밑까지 기어갔습니다. 매일 성대한 만찬이 벌어지던 부자의 식탁 아래서 가끔씩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고 필사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경우에 따라 직접 손으로 집어먹기도 했기에 부잣집에서는 빵을 사용해서 지저분해진 손을 닦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이 더러워진 손을 닦는데 사용했기에 비위생적이기 짝이 없는 빵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라자로의 비참함. 그것도 식탁 밑에서. 더욱 가관인 것은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주인 없는 개들마저 라자로에게 다가와 그의 종기를 핥았지만 그는 그 개들조차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개보다도 못한 삶이 바로 라자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런 라자로를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 라자로란 이름의 뜻은 '하느님이 도우신다'입니다. 라자로는 자신의 비참함을 한없는 인내로 이겨냈으며 자신의 미래를 전적으로 하느님 손에 맡겼습니다. 라자로는 살아 생전 자신의 비참함을 절실히 깨달으며 살았기에 오직 하느님께만 모든 희망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라자로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마련하신 천상잔치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히십니다. 재산이란 있다가도 한순간에 사라지는 뜬구름 같은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 재능, 학력에 한껏 자아도취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한순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거두어가십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우리 자세는 라자로와 같은 겸손함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제 눈은 비참함으로 흐려진 채 날이면 날마다 눈물짓나이다. 제 희망은 이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너무도 '잘' 살았습니다. 의식주 그 어느 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옷은 오로지 최고급 명품으로만 잔뜩 치장했습니다. 집은 임금님 대궐처럼 지었습니다. 매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냥 즐겼습니다. 오직 제 한몸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겼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가 진귀한 음식을 즐기고 있던 바로 그 식탁 밑에만 하더라도 라자로라는 거지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짐승처럼 엎드려서 '언제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나'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동네 개 보듯이 했습니다. 기분 좋으면 뜯고 있던 닭다리 하나를 크게 선심 쓰듯이 밑으로 던져주었습니다. 부자의 오만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어쩌면 그럴 수 있나'하는 생각에 치가 떨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자의 가장 큰 과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 앞에 겸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잘 나누어 쓰라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임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돈이면 전부인 줄 알고 가난한 사람들을 철저하게도 무시하면서 오만하게, 안하무인격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가서는 지옥불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불평등과 불의, 의인의 고통,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서러움을 우리 역시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성실히, 꾸준히,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부와 명예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분들은 훌륭한 부자들, 하느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그 모든 부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뜬구름과 다를 바 없음을 기억하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고, 작은 손길이라도 보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늘에 보화를 쌓는 넉넉한 가을이 되길 빕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작지만 큰 신앙고백, ‘성호경’
얼마 전 우연치 않게 한 신부님의 아버님을 뵙고 식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그 아버님은 성체 신심이 특별하신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그 아버님은 신앙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신을 부정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었고 그렇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일하시는 곳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버님은 그 화재를 직접적으로 입으셨고 3도 화상으로 죽은 것으로 판명이 되어 병원 영안실에 넣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영안실에 넣으려는 순간 일하는 사람들이 숨소리를 듣고 혹시 살아있는 것이 아니냐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깨어보니 병원 침대 위에 뉘여 있었습니다. 입도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코와 귀도 화재로 사라져버린 그야말로 회생 불가능 상태였습니다.
그 병원이 수원에 있는 가톨릭 병원이어서 수녀님이 “혹시 영성체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어 보셨고 아버님은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셔서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입도 벌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성체를 영하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아버님은 그 때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영성체를 하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잊고 사셨던 기도를 다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성모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모송을 바치면 주위의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제대로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처럼 방해하던 무리들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이때부터 성호를 긋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깊게 인식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밤새 기도를 하시는데 온 병원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분은 어떻게 걷고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하시며, 사람들을 깨워 피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옆 병실에 입원해 계신 모 주교님을 찾아갔는데 그 주교님은 일어나셨습니다. 불이 났다고 피하라는 그 아버님의 말에 “하느님께서 무언가 일을 하시려는 모양이네.” 하시며 아버님께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불은 그 아버님께만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아버님은 기적을 체험하십니다. 화상이 다 벗겨져 새살이 돋아난 것뿐만 아니라 없어졌던 코와 귀까지도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렇게 아침 미사에 당당히 내려가 성체를 영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 주교님께서 다 목격하셨습니다. 그 아버님보다 뒤에서 있다가 더 적게 화상을 입으셨던 분들이 지금까지 다 불구자로 계신 것을 보면 아버님의 기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아침미사에서 성체를 영하고 돌아왔더니 온 병원이 난리가 났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환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아버님께 와서 혹시 여기 누워있던 환자 못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누구도 하룻밤에 그렇게 온전해진 아버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고, 그분의 아버님, 즉 팔순이 훨씬 넘으신 할아버지께서는 그 일이 있어서 아들 얼굴이 더 잘생겨졌다고 농담까지 하셨습니다.
아들 신부는 우연히 아버지께 이런 기적이 있었던 병원에서 봉사를 하다가 지금도 실제로 이 사실을 기억하고 계신 수녀님과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그것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이후 바뀐 것은 아버님의 외모만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 전에 냉담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열심한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성체신심은 말할 것도 없고 성호경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생기셨습니다. 그 분은 성호경에 가톨릭의 모든 신비가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성체를 아무 감흥 없이 일상적으로 받아 모시는 이유는 아무 감흥 없이 성호를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믿고 계셨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님은 누구와 있건 간에 삼종기도와 식사 전후기도 할 때 성호를 크게 그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을 배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당에 나오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성호를 긋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고 배교하는 것이고 심하게는 하느님을 부끄러워하면서 성당에 나와서는 성체를 모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독성죄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버님은 건설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초창기 규모가 작을 때였는데 100억이 넘는 입찰에 도전을 해 보셨습니다. 당대 대기업 건설 회사들이 수주를 따내기 위해 입찰을 넣은 상태라 현실적으로는 입찰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버님은 입찰이 이루어지는 동안 계속 묵주기도를 바치셨고 점심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호를 긋고 삼종기도를 먼저 바치시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서류를 좀 보여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서류를 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아버님의 회사가 그 일을 따내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방금 전에 서류를 달라고 하셨던 분이 중앙에 앉아계셨다고 합니다. 그 분은 누구도 그런 곳에서 성호를 긋고 식사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며 그렇게 신앙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그 분께 일을 맡기기로 결정 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성호 긋는 것 덕분에 사업은 크게 번창하였고 전국 몇 위 안에 드는 건설회사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일에 본의 아니게 관여되면서 사업을 접고 빚더미에 앉아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님은 또 다시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셨습니다. 산에 소주 한 병과 극약 한 봉지를 들고 올라가셨습니다. 우선 소주를 좀 마시고 약을 먹으려는 순간 밥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고 합니다. 그 때 문득 처자식도 있고 이런 신앙을 갖도록 기적을 일으켜 주신 주님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다시 산을 내려오셨습니다. 성호가 또 다시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아버님은 사업이 번창하면서 소홀하게 되었던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업을 실패하게 한 것임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대자가 된 전직 목사님 4분을 포함하여 지금도 한 해에 10명 이상을 전교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성당에 다니라고 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디에 가든, 누구와 있든 항상 성호를 긋고 식사를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의 출신 본당 선교 왕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은 옷가게를 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뿐인데도 어떤 때는 일 년에 40분이나 선교를 하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톨릭교회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는 것뿐인데 관심이 있었어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좋은 연결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부끄러워하면 마지막 날 아버지 앞에서 우리도 부끄럽게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성호를 긋는 것이 사실은 작지만 큰 신앙고백이고 선교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도 큰 순교를 하기 이전에 이런 작은 증거의 삶을 사셨음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큰 업적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떳떳하게 성호를 긋고 가톨릭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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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펠릭스 3[2]세(Felix III[II])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492년
같은이름 : 펠리체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펠릭스 교황은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부제였으며, 적어도 두 아이의 아버지로 아내와는 사별하였다. 그의 두 아이 중 하나가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조상이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교황 펠릭스 2세인 그를 펠릭스 3세로 부르는 것은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 352-366년 재위) 시대의 대립교황 펠릭스가 사후 교황 명단에 펠릭스 2세로 올랐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으나, 그는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11월 10일) 스타일의 용감하고도 솔직한 로마인이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그리스도단성론(monophysitism)이 대두되어 분쟁이 있었다. 482년 동로마제국의 제논 황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총대주교 아카키우스(Acacius)의 이론에 기초한 "헤노티콘"(Henoticon)이란 일치 포고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한 칼케돈(Chalcedon) 공의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오히려 단성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2년 후 성 펠릭스 3세는 라테라노(Laterano)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아카키우스를 파문하고 정통 교리를 재차 확립하였다. 이로써 그는 세속 권력에 대항하여 교회회의를 개최한 위대한 교황으로 부각되었다. 아카키우스 이단은 약 35년 동안 지속되다가 소멸되었다. 그는 재위 9년만인 492년 3월 1일 선종하여 성 바오로 대성전에 묻혔다.
성 알비노 주교
St.Albinus of Angers
Sant' Albino di Angers Vescovo
Albino = bianco, dal latino(white man, from the Latin)
Also known as Aubin
Born:469 at Vannes, Brittany, France
Died:1 March 549; relics at the Cathedral of Saint Germanus in Paris
(Vannes, Francia, verso il 496 - 10 marzo 550 )
브리타니의 반느 교구에서 태어난 그는 잉글랜드나 혹은 아일랜드계이고,
젊어서 틴실라 수도원에 입회하여 신심이 돈독하였다.
35세의 나이에 그는 원장으로 피선되었고, 그의 지도아래 그의 수도회가 전성기를 맞았다고 전해 온다.
529년, 앙제의 주교좌가 공석이 되었을 때, 교구민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주교로 영입코자 하였다.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랑느의 주교이던 성 멜라니오의 권유에 못이겨 앙제의 주교가 되어
열심히 사목하였다.
그는 매일 설교하기로 유명하였고,항상 병자나 가난한 과부들 곁에 있었다고 한다.
노예의 대속금을 지불하느라고 자금을 마련하였고, 외교인의 개종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538년 제3차 오를리언스(블란서)공의회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다고한다.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의 반(Vannes) 교구에서 태어난 성 알비누스(또는 알비노)는 잉글랜드(England)나 혹은 아일랜드계로 젊어서 틴실락(Tincilloc) 수도원에 입회할 정도로 신심이 돈독하였다. 그는 35세의 나이에 원장으로 피선되었고, 그의 지도하에 수도회가 전성기를 맞았다고 전해 온다.
529년 앙제의 주교좌가 공석이 되었을 때 교구민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그를 주교로 영입하고자 하였다.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렌(Rennes)의 주교이던 성 멜라니우스(Melanius, 1월 6일)의 권유에 못 이겨 앙제의 주교가 되어 열심히 사목하였다. 그는 매일 설교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항상 병자나 가난한 과부들 곁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노예의 대속금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 마련과 외교인들의 개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유해는 파리(Paris)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오빈(Aubin)으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웨일스의 성 다윗(드위) 주교
St. DAVID of Wales
St. Dewi, Bishop of Mynyw
San David di Menevia (del Galles) Vescovo
c.542 at Menevia (now Saint David’s), Wales
- c.601 at Mynyw, Wales
Canonized:1120 by Pope Callistus II
Name Meaning:beloved one
드위라고 알려진 다윗에 대하여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은 11 세기에 기룩된 불확실한 그의 전기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전기에 의하면, 다윗은 사우스 웰스의 샌트 국왕의 아들로서 사제가 되었으며,
성 바울리노의 문하에서 몇 년 동안을 공부하여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브레피 시노드에도 참석하여 큰 공헌을 하였고,
550년경에 행한 그의 뛰어난 설교로 인하여 켐브리안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성지의 순례하던 중에 예루살렘의 총주교로부터 대주교로 승품받았고,
빅토리 시노드라 부르는 회의를 주재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때 그는 벨라지아니즘을 최종적으로 배격하는데 성공하였고,
브레피의 칙령을 인준하였으며, 브리티쉬 교회의 규정을 제정하는 등 교회 안팎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미니유의 수도원에서 운명하였고, 1120 년경부터 갈리스토 2세로부터 그의 공경이 허용되었다.
그의 출생과 사망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웨일스의 수호성인으로 높이 공경받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Flag flown on St. David’s Day in Wales.
Folks are expected to wear leeks or daffodils that day
작은 일
화장실 청소와 강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거룩할까?
만약 당신이 강론을 선택했다면, 성 다윗은 거룩함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재고하도록 해줄 것이다.
웨일스 지방의 수호 성인인 다윗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많이 했다.
오랜 시간 기도했고, 진심으로 죄를 뉘우쳤으며 훌륭한 강론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임종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앙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나와 함께 보고 들었던 작은 일들을 행하십시오.”
거룩함은 거창한 일을 행하는 데 있지 않다. 마더 데레사가 말했듯이 거룩함은 작은 일을 큰 사랑을 가지고 하는 데 있다.
불변하는 창조 법칙 중 하나는 우리가 행한 모든 것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그 행동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키고 이웃들과 일치시킨다.
반대로 이기심과 증오와 분노에서 비롯되는 행동들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사람들과도 담을 쌓게 만든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무리 작고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일지라도, 모든 일을 사랑 안에서 한다면 그 일들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것이다.
평범한 일을 사랑으로 할 때 나의 감정은 어떻게 바뀌는가?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겠다.(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St Davids Cathed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