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루카 12,32~48)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Amen, I say to you, he will gird himself, have them recline at table,
and proceed to wait on them.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기로 맹세하였다. 지혜서는 이러한 선조들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여전히 부르시며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역설한다(제1독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항구하게 희망할 수 있다. 이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아내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면 항구한 인내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인내하며 깨어 있는 충실한 종처럼, 신앙인들도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실 때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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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7.40). 군대에서는 ‘전투 준비 태세’라는 훈련을 자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가상해서 재빠르게 짐을 싸고 무기를 준비하여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하는 훈련입니다. 저도 군대에 있을 때 이 훈련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대는 잠을 자다가도 ‘출동 준비!’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강릉에 무장 공비가 침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부대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출동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의 훈련이 없었다면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잘 모시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막상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분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지.’ ‘고난의 순간이 오더라도 잘 참고 견뎌야지.’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다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짐이 다짐으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평소에 조금씩 훈련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결정적으로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하거나 용서해야 할 때, 참으로 힘든 고난에 빠질 때 그 다짐을 잘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주인을 잘 맞이하는 충실한 종의 모습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
시작기도 주님, 사라져 버리는 현세의 보상보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당신의 상급을 바라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기꺼이 하느님 나라를 주신다는 확언으로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위로받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그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십니다.
먼저 이 제자들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나타난 것처럼 지상의 행복에만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 나라에 가 있기 때문에 지상의 물질도 그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합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부자인 사람이 되려 하기에 사람들의 필요에 관대하게 응답합니다. 그들은 내어놓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늘에 마련한 보물은 늘 새로워지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제자들의 또 다른 모습은 깨어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로 그 자세가 실제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깨어 있는 종’들은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줍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제때에 곧바로 응답할 때만 기회와 행복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곧바로 열어주려면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깨어서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유됩니다. 자고 있는 자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내적, 외적 감각도 자고 있는 것같이 둔감해져서는 안 되고 반응에 민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주님의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감각이 살아 있어도 자신의 것에 골몰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으면 소용없습니다. 또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어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해 문 여는 것을 미루면 상급은 내 것이 안 됩니다. 그분을 첫자리에 모시는 것, 이 자세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직결된 자세입니다.(루카 12,31-32)
루카는 준비된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동사들의 시제에서 동작의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주인이 밤중에도 새벽에도 올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준비되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수고는 주인이 가져다 줄 행복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이 비유는 교회 목자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답변하실 때 ‘집사’라는 단어를 쓰시는데, 이 단어는 상징적으로 하느님의 집과 하느님의 은총을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교회 직무자들을 가리킵니다. 더욱이 이 집사의 임무가 종들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라고 한 점은 양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며 베드로에게 목자직을 수여하신 면과 잘 일치합니다.(요한 21,15-18) 교회 목자들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주님을 깨어 기다리게 됩니다. 반면 주인이 늦게 오리라 생각하며 불충실하게 사는 목자의 모습은 주님 재림의 지연과 함께 그에 대한 희망도 약해지면서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루카 공동체의 한 단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루카는 엄중한 벌의 경고와 함께 지속적인 충실성을 강조합니다. 이 충실성에는 커다란 상급이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제자들의 태도에 대한 루카의 묘사가 언제나 상급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급은 희망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 충실성에 대한 강조는 오늘 제2독서에서도 명확히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고 교회를 떠나가는 상황 앞에서 하느님은 신뢰할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약속되었지만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희망은 믿음으로 확고하게 되고, 이 믿음은 그분 약속의 말씀에 대한 항구한 충실성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보상에 대한 희망은 믿음 안에서 그 보증을 찾게 됩니다.(히브 11,1) 여기서 보증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는 ‘소유권, 권리 부여, 실재, 실현, 조건’ 등의 의미도 지닙니다.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보상은 믿음 안에서 지금 ‘실재’하고,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그 보상에 대한 ‘권리자’라는 자부심을 지닙니다. 믿음을 가진 이는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에, 믿음은 희망하는 대상에 현재적 실재의 힘을 부여해 믿는 이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확실성을 줍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가 더 이상 불확실하지 않아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믿음이란 단어인 그리스어 와 히브리어ֱ에 충실성이란 뜻이 있습니다. 모범적인 인물들의 생애는 이런 믿음과 희망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예입니다. 이들은 미래를 향해 방향 지워져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살아 있는 격려요 자극제가 됩니다.
묵상(Meditatio) 가끔 내가 사용하는 돈의 내역을 곰곰이 분석해 보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는지 성찰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이런 성찰은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이 얼마나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우리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Oratio)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문을 두드리고 있는 주인과 셈을 하자…
-박동호신부-
“지금 우리가 봉헌하는 이 미사는 첫 미사요, 마지막 미사이며, 그래서 단 한 번의 고유한 미사입니다.” 꽤 오래전 영어를 못해 서럽고 힘들던 시절, 지금도 정신을 번쩍 들게 한 어느 미국 신부님의 강론 구절이었습니다. 어찌 미사뿐이겠습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이 일,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 내 머리와 마음에 떠오른 그 모든 감정과 생각들, 그 어느 것 하나 그 자체로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단 한 번의 그것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시도 때도 없이 그 말씀은 귓가에 맴돌고, 그때마다 삶을 추스릅니다.기쁨에 사로잡힐 때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슬픔과 분노에 안절부절못할 때 조용히 눈을 감게 합니다. 주제 모르고 고개 뻣뻣이 세우려 할 때 사방을 둘러보게 하고, 사방팔방 벽에 갇혔을 때 꺾인 무릎을 일으켜 세워줍니다. 한마디로 어둠에서도 눈을 떠 있게 하고, 빛 속에서도 눈을감지 않게 하여, 늘 저를 깨어 있게 해주는 셈입니다.어김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눈길을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라.” 한 서산대사의 말씀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나 자신, 내 머리와 마음과 영혼 그 안의 모든 것,내 일거수일투족, 하나도 빠짐없이 귀합니다. 어느 순간에도, 어느 처지에도, 어느 자리에서도 우리의 삶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삶은 두렵고 거룩합니다.곳곳에 하느님 흔적이 없는 곳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어찌 개인의 삶에만 한정하겠습니까? 한 공동체, 사회, 민족, 더 나아가 인류의 행적(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을 기억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억압에서 해방으로… 당신 백성에게 그 일을 펼치신 하느님의 수고가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을 가르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양 떼”인 당신 제자들에게 어둠의 밤에도 깨어 있으라고, 그것도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다고 그리스도 신앙인의 자세를 권고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삶을 꾸려갈 것을 요구합니다. 세상도 삶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 세상과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어찌 어느 한 집사만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했겠습니까? 역사는 한 사회와 집단,민족과 공동체가 그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와 집단, 민족과 공동체를 노골적으로 혹은 대놓고 핍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핍박을 경쟁 혹은 적자생존의 이치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또 어찌 사람에 대해서만 그리했겠습니까? 하늘과 땅과 바다, 산과 강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무수한 생명체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이 마치 우리 인간의 것인 양 허리띠를 풀어놓고 맘껏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해 때리지 않았습니까? 저급한 탐욕을 채우는 그것을 행복이라 그럴듯하게 포장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사회와 공동체와 인류는 등불을 밝히고 있는지, 술 취해 있는지… 오늘도 주님께서는 셈을 하자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안소근 수녀-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를 깨어 있게 하시고 삶의 모든 순간에 언제나 저희에게 말씀하시며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는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독서 오늘 복음은 여러 토막의 말씀으로 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공통된 점은 주인이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종이 주인을 두려워할 뿐이라면 어쩔 수 없이 주인의 뜻을 행할 것이고, 아버지가 집을 비웠을 때는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종들의 마음이 주인을 향하지 않고 다른 것에 머물 수 있고, 마치 주인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자기 좋을 대로 하면서 주인의 명령은 생각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류가 다른 기다림도 있습니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 달빛 먼길 님이 오시는지’ 이런 기다림이라면 어떨까요??
이렇게 기다림은 기다리는 사람과의 관계에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을 기다리는 태도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출발점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새롭게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우리를 ‘작은 양떼’?라고 부르시며 “두려워하지 마라.”?는 위로입니다.?(12,?32) 언제 심판이 닥칠지 모르니 두려워하며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당신 나라를 주기로 하셨으니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약속 때문에, 그 약속에 대한 신뢰 때문에 주님을 기다리는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 안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문맥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자녀다운 순종의 출발점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이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이 아닌 나를 위해 나에게 어떤 것을 명한다는 것을 알 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가능해집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아니, 아버지께서 나를 깊이 사랑하고 아끼시며 나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려 한다는 것을 안다면, 아버지가 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 뜻을 행하려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깨어 기다리는 종의 태도는,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주고자 하시는 아버지께 대한 응답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구체적 행동도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33절)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향하기 위해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를 주고자 하시니, 다른 것에 마음을 묶어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인이 왔을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이?(37절) 새로운 의미로 들립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몰래 기다려 본 사람은 이 종의 행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입니다. 주인이 왔을 때에 잠들어 있지 않아 주인에게 잘 보였으니 다행이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아끼시는 아버지를 오래 기다렸는데 깨어 있으면서 그 아버지를 만났으니 복된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리라는?(37절), 정상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를 벗어나는 이 말씀은 어느 순간 우리를 찾아오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말해 줍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이 없을 때에 주인의 뜻에 따라 집안의 모든 일을 관리할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은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가꾸어 나갈 책임을 지니는 기간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한적일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안다면 우리한테는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주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안다면, 지금은 불완전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완성시켜 가기를 바라시는지 안다면 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 것, ‘맡기신’ 것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와 요청이 따르는 것입니다.
성찰 미카 예언자는,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고 합니다.?(6,?8)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종의 올바른 태도인지 몰라서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보소서, 종들의 눈이 제 상전의 손을 향하듯 몸종의 눈이 제 여주인의 손을 향하듯 그렇게 저희의 눈이 주 저희 하느님을 우러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시편 123,?2)
두렵지만 말씀을 믿고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11장 1~2.8~19절)
-김기현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겠죠.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안 갚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나... 원하는 대학에 붙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회
사에 취직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승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나에게 맞는 배우자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겪는 두려움이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복음 묵상 글을 제 시간에 쓰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입니다. 하
루 중에 복음을 묵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시간 내에 쓰지
못하면 때로는 강론을 못할 수도 있고, 강론 주간이 아닐 때는 블로그에 글을 못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계속 확인하며 조급해 하고 걱정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데,
어느 날부터 시계 옆에 무심코 놓아둔 말씀 달력의 말씀 한 구절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2월 달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펴 놓았던 것인데, 최근에야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 말씀은 마르코 복음 5장 36절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급하고 쫓기는 마음에 시계를 보면, 항상 시계 옆에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마음
속에서 시간 내에 쓸 수 있다는 잔잔한 신뢰와 믿음이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매일 두 가
지 감정을 체험합니다. 하나는 복음 앞에 섰을 때 막연한 느낌과 함께 ‘묵상 글을 제 시간에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쓸 수 있을 거
야...’ 하는 믿음의 감정입니다. 결국 완성된 묵상 글을 보며, 믿음이 결실을 맺는 다는 것
을 매일 체험 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른 두려움은 ‘하반기에 실천할 계획들이 잘 될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 5일 동안
대구에 있는 연화리 피정의 집에서 개인 피정을 했습니다. 피정 하는 동안에, 상반기에 부족
했던 모습들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보완하는 일들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 이름 외우기, 청년 모임 활성화 하기,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고 대화하기,
미사 분위기를 좀 더 밝게 하기, 아이들이나 중고등부 학생들, 그리고 청년들에게 들릴 수 있
는 강론을 해 보는 것들입니다. 나름대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긴 했는데, ‘힘들어서 포기하
면 어떻게 하나... 아무런 변화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 사람들이 안 모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발견한 성경 구절인데, 하느님이 늙은 사라에게 이사악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
시며, 사라가 믿을 수 있도록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말씀이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내 마음에 들어와, 희망하고 긍정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곤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좋은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들을 말씀으로 극복해 봅시다. 두렵지만 말씀을 믿고 주
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봅시다.
"멀리서 그것을 보고" .......
-김상조 신부-
요즘 성당마다 에어컨 없는 곳이 있을까?
덕분에 열대야의 무더운 날에도 시원하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신자분들도 성당에 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 맞으며 미사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발걸음이 훨씬 가벼울 거 같다.
이런 기대감 같은 것이 믿음이다.
2독서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자.
“형제 여러분,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
증입니다.
-시원한 바람 맞으며 미사드릴 수 있다는 바램과 이마에 흐르던 땀이 멈추는 현실
은 참으로 우리를 기분좋게 만들어준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
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
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믿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나
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딸랑 아들 하나만 보고 죽었다.
또 다른 아들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 아들은 몸종인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이다.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수 없이 많은 후손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
려운 자식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것을 2독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약속된 하느님의 축복을 살아생전에는 누리지 못했지만
굳은 믿음으로 멀리서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하지만, 우리 제자들에게 이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
다.
그렇게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폭도들의 우두머리로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부활하신 뒤에는 많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아 돌에 맞아 죽어야 했고,
이방 민족들에게 전파되기 위해서는 수천 수만명이 박해를 받아 죽어야 했다.
참으로 하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것 같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죽고 난 뒤,
어쩌면 억만겁의 시간이 지나야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
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하느님이 계신 곳이 하느님 나라라면,
그분의 아들 예수님이 계신 곳도 하늘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우리가 상처입힌 사람에게 용서받을 때
그분이 함께 계신 것을 느낄 수 있고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일 것이다.
죽어야만 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
그래서 지금 당장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보상받지 못하고,
악인이 잘 되는 꼴을 보는 것이 괴로울 수 있지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써 “멀리서 그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허리에 띠를 띠고”
목마른 사람을 찾아가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찾아서 입을 것을 주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장차 예수님이 허리에 띠를 띠고 우리들을 시중들어주실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 제사를 바치기 전에 이미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서
이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멀리서 그것을 보고” 기뻐할 일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그 어떤 고통이라도>
주변에 마라톤 마니어가 된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훈련시간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꼭두새벽부터 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단꿈에 젖어있는 이른 새벽, 그 달콤한 새벽잠마저 포기하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맵니다. 대회가 다가오면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기대감에 설렙니다. 더욱 열심히 훈련에 매진합니다.
저도 한때 좀 달려봐서 조금 아는데, 마라톤 그거, 보통 힘든 운동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입니다. 한번 코스를 뛰다보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수 백 번도 더 포기하고픈 유혹을 느낍니다. 그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몸무게가 꽤 나가는 분, 그래서 움직임이 좀 둔한 분은 ‘뛰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달리는 것일까요?
완주했을 때의 그 충만한 성취감, 목표에 도달했을 때의 그 환희 때문입니다.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 그것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참 묘합니다. 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대상을 획득하기 위해 부차적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기도 합니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밤송이 안에 들어있는 맛있는 밤을 얻기 위해서 가시 좀 찔리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날카로운 우럭 지느러미에 손이 시큰거려도 ‘대물’을 잡은 기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머지않아 당신에게 다가올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예수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에 몹시 당황해하고 슬퍼합니다.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더 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 최고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예수님의 고난은 필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인류구원을 위해 예정된 십자가 죽음, 명분은 참으로 그럴 듯하나 현실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피해갈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잔혹한 방식의 죽음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의연하게, 너무도 당당하게, 단 한 치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이 험난한 산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더 큰 행복, 더 큰 기쁨, 더 큰 환희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기꺼이 견뎌내십니다. 당당하게 맞서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더 큰 행복, 더 우선적인 목표, 곧 하느님 나라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했기에, 부차적인 대상들에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피 4장 11-12절)
삶이란 때로 혹독합니다. 삶은 시작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환상을 깰 것을 요구합니다. 삶은 점차 우리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의 쓴맛을 맛보도록 인도합니다.
다가오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고통에 고통으로만 엮어진다하더라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만일 우리네 삶이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그저 곧 썩어질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땅속으로 인도함뿐이라면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을 사는 사람은 고통 너머에 참된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참 신앙인은 더 큰 가치관, 더 큰 희열, 더 큰 희망을 얻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모든 것들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강하다는 건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이수철신부-
오늘 강론 역시 몇 가지 예화로 시작합니다.
얼마 전 병원 진료 후,
마침 어느 지인을 만나 모처럼 점심식사로 삼계탕을 먹었습니다.
즐기진 않지만 지인의 성의가 고마워 먹음직스런 삼계탕을 들었습니다.
“먹긴 먹었는데도 영 먹은 것 같지 않습니다.”
삼계탕을 든 후 허전하여 조용히 지인에게 말하였더니
지인 역시 공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 다른 곳에서 먹어 봐 당장 비교가 됩니다.
정말 먹을 것이 없습니다. 뭔가 속은 느낌입니다.”
발라 낸 뼈도 조금이고 살도 질기고 얼마 되지 않아
먹고 난 뒤에도 배가 고프고 영 마음은 허전하고 씁쓸했습니다.
이어 꼬리를 물고 여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말도, 글도, 행동도, 만남도, 선물도, 삶도 이럴 수 있겠구나.
들을 때는 그럴 듯 했는데, 듣고 나니 공허할 뿐이고,
마음 부풀어 글을 읽었는데 읽고 난 후 배신감 비슷한 씁쓸함을 느끼고,
호들갑스런 행동으로 맞이해 주었지만 웬 지 공허함을 느끼고,
반가운 만남이었는데 여전히 허전하고,
선물을 받았는데도 고맙기는커녕 쓸쓸한 마음일 수도 있겠구나.
삶도 그렇겠다.
삶의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충만한 삶의 느낌보다는 살긴 살았는데
뭔가 산 것 같지 않은 공허한 느낌만 가득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줄줄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몸의 언어, 마음의 언어인 진정성은 누구나 직감합니다.
얼마 전 제 말에 제가 상처 받고
한참 동안 괴로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적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이 더 잘 알기에 상대방을 아프게 하기 전
본인이 먼저 자신에 좌절감을 느끼고 아파하게 됩니다.
과연 진정성 넘치는 진실하고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저절로 진정성 넘치는 삶에
자신은 물론 함께 하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묵상하다 보니 전 주일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
주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이 진정성 넘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믿어 주님을 닮아가니 진실할 수뿐이 없습니다.
살아가는데 신뢰보다 큰 자산은 없을 것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라 재기하기가 참 힘들 것입니다.
사실 모든 불행은 불신에서 시작됩니다.
불신에서 불안, 의심, 두려움이 꼬리를 물고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믿을 만한, 신뢰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길은 주님을 믿는 길뿐입니다.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 내려야 산 같은 안정과 평화입니다.
성경에서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님을 감동시킨 것은
언제나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진정 마음의 큰 병은 ‘불신의 병’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세상 그 누구도 아닌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믿어야 허무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초연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선미 세상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믿음의 끈을 놔 버릴 때, 안팎으로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오늘 2독서 히브리서의 아브라함은 진정 우리 믿음의 모범입니다.
믿음의 욕심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요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니
믿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순종하여 떠났고,
믿음으로써 그는 약속 받는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렸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하느님의 사람들,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참 축복된 죽음입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으며,
자기네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사실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현세에 살면서도 늘 그 넘어 하느님께 눈 길 두는 믿음입니다.
이방인이며 나그네라는 신원의식이
이 현실이 전부인양 집착하지 않게 했으니 바로 이게 초연한 믿음입니다.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지상이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늘 본향이 우리의 원고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하늘 본향에 대한 갈망이 믿음이요
하늘본향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게 해주는 천상잔치 미사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사람!
하느님께 믿음을 둘 때 저절로 초연한 삶이요
하늘에 사랑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세상에 쌓는 보물이 얼마나 부질없고 헛된지 알아
하늘에 보물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진정 부자입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돈 많다고, 지위 높다고, 권력 잡았다고,
큰 집에서 산다고 행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국민소득 높아도 행복지수가 낮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말 행복하십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아야 참 행복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한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끊임없는 사랑의 실천이,
끊임없이 나누고 섬기는 삶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늘 은행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정말 안전하고 끊임없는 기쁨과 활력의 샘이 됩니다.
하여 마음은 늘 하늘에, 하느님 곁에 있으니
마음은 깨끗하고 초연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울 수뿐이 없습니다.
끝없는 욕심입니다.
세상 은행에 돈은 가득한 부자들,
사랑 실천 없어 하늘 은행이 텅 비어 있다면 허전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 갔을 때도 하늘 은행에 저축된 사랑을 보실 것입니다.
살았어도 산 것 같지 않고 허전한 것은
하늘 은행에 사랑의 저축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준비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주님께 믿음을 둘 때,
하늘에 사랑 보물을 쌓아 갈 때
저절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에 이은 희망의 삶입니다.
깨어 주님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이게 바로 종말론적 역동적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뿐 아니라 죽음도 사고도 병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옵니다.
그러니 깨어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삶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유별난 삶이 아니라 언제나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평범한 일상에 충실한 삶입니다.
다음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이런 주님의 종이 진정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보아 주든 말든 자기 맡은 소임에 충실합니다.
이게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고 있으며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진정 복된 선종입니다.
늘 제 자리의 주어진 삶에 항구한 삶입니다.
바로 우리 정주 영성에 이에 해당됩니다.
매일 깨어 주님을 기다리고 바라면서 새롭게 노력하며 살지 않으면
우리의 정주는 무기력한 안주의 늪으로 변해 버립니다.
며칠 전 수녀원에서
어느 수녀님에게 고백성사 보속 준 내용이 생생합니다.
“오늘 주님의 변모 축일입니다.
보속은 오늘 하루 종일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늘 하느님을 그리워할 때 저절로 주님께 믿음을 두게 되고,
하늘에 사랑 보물을 쌓게 되고, 깨어 주님을 기다리게 됩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부르시어 영광스럽게 해주십니다.
하여 늘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가 그렇게 좋습니다.
영성생활도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하느님 사랑, 믿음, 희망, 많이 말해도
하느님과의 구체적 친교의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지 않으면
다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날이며 날마다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 이름 영원토록 찬양하리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미사와 성무일도 기도로 함께 하느님을 찬양할 때
우리의 믿음도 사랑도 희망도 끊임없이 성장, 성숙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다 당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믿음과 사랑, 희망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얼마 전, 이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발을 해주시는 자매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지요.
“아저씨, 휴가는 언제 가세요?”
“글쎄요. 제가 요즘 시간이 없어서 한 10월쯤에 갈 예정입니다.”
“아니, 그러면 아내와 아이들하고는 같이 안 가세요?”
이 자매님께서는 제가 신부인 것을 몰랐거든요. 그냥 동네 아저씨로 본 것이지요. 그리고 저 정도의 나이면 아내도 있고 자녀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사실 아직도 제가 무척 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저를 총각으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문득 어느 유명한 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사람은 20~30대까지는 목표를 세우고, 그 후부터는 완성된 목표를 가지고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목표만 세웠지 정작 그 완성된 목표를 가지고 남을 위해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베풀고 나누는 삶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됩니다. 즉, 혼인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를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잘 준비하는 충실한 종에게 주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맡기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 불충실한 종에게는 재산을 맡기지 않는 것은 물론 매를 맞을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항해하던 배가 파선이 되어서 선원 한 사람이 파도에 밀려 어느 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추장 앞으로 데려 갔지요. 이 선원은 ‘내가 이제 저들의 손에 죽게 되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자기를 임금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앉아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되었지만, 이상하고 불안해서 그들에게 물었지요. 그랬더니 이 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왕을 세웠다가 1년이 지나면 그 왕을 다시 무인도로 보내 그곳에서 죽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원은 깜짝 놀라서 ‘내가 살 길이 없을까?’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좋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는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배를 한 척 지어서 그 배에 온갖 곡식과 과일 나무를 싣고 무인도로 가서 심으라고 했습니다. 임금의 명령이므로 그들은 모두 순종했지요.
드디어 1년이 지나자 그들은 임금을 무인도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임금으로 있을 때에 살 길을 준비했던 까닭에 여생을 안전하게 그리고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내 자신의 구원을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혹시 지금의 한 순간만 집착해서 정작 중요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충실한 종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구원의 날에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비로소 소통한다(한나 아렌트).
단순함과 충실함
- 김희준 신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가 자신의 교구에서 사제가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을 찾아가 농부 한 사람을 잘 가르쳐 사제로 서품하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주교관으로 돌아온 후,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이 농부 출신의 사제가 미사를 어떻게 봉헌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몰래 그곳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성당 기둥 뒤에 숨어 미사를 지켜보던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기도드리고, 짧은 강론에 열정을 쏟고,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제를 일찍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끝난 후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제단으로 나아가 그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당신처럼 열정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를 일찍이 본 적이 없소.”라고 말하며 축복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주교님, 다르게 하느님을 섬기는 법도 있습니까?” 많은 현자들이 인생의 목적을 행복으로 꼽습니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행복을 향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세상에서 이해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이란 재물을 많이 갖는 것, 다른 사람보다 위에 올라가는 것, 명성을 얻고 인기를 누리는 것이 아닌 ‘참된 종으로 주님을 만나 뵙는 것’입니다.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단순함과 충실함이 요구되어집니다. 농부 출신 사제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자신이 해야 할 바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연중 제 19 주일
-김찬선신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 누구라고 하면 다 아실만한 분이 저의 부대 사단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대의 인사 부관 하사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단장이 전방 지역을 불시에 시찰 나오곤 하셨는데 그때 보초를 서다가 “충성”하고 큰 소리로 경례를 잘 하면 부관을 시켜 휴가를 보내라고 연락이 옵니다. 그래서 저는 사단장이 저희 부대 시찰을 나올 때마다 휴가증을 끊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단의 병사들은 사단장이 시찰을 나오면 잘못한 것만 지적을 하고 심하며 영창을 보내기 때문에 사단장이 자기 부대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데 저희 사단 사병들은 사단장이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고 오늘 복음에서 주인을 깨어 기다리라고 하신 것처럼 정말로 졸지 않고 깨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잘 서지 않거나 지시사항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엄한 벌을 내렸기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도 깨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훌륭한 Leadership은 이렇게 상과 벌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하느님도 우리에게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깨어 있으라고 하시면서 두 가지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주인이 오실 것을 대비하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다른 하나는 도둑이 올 것을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하나는 상급이나 칭찬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는 경우이고 하나는 벌을 받거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기다리는 경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바라시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무섭고 두려워서 우리가 깨어 기다리기보다는 원하고 갈망하기 때문에 깨어 기다리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얘기하며 깨어 기다리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기다리면 주인이 종의 시중을 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보통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데 하느님과 우리의 사이는 주인과 종의 관계임에도 주인이 우리의 시중을 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러한 관계라면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차라리 엄마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어렸을 때 밖에서 실컷 놀다 어둑할 때 집에 오니 어머니는 들로 일 하러 나가시고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는데 어두워지니 무섭기도 하고 배도 고파 어머니가 오시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곤 하였고, 한참이 지나 어머니께서 오시면 참으로 기쁘고 안심이 되곤 하였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들에서 힘들게 일하시어 피곤하실 텐데도 제가 굶고 있는 것이 애처롭고 미안하시어 당신은 씻지도 않으시고 서둘러 밥을 지어 저를 먹이십니다. 그래서 그 밤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고맙고 그 밤은 더 행복하고 더 평안한 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사랑의 오심이고 우리의 기다림도 사랑의 갈망이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준비, 나누어 가난해지는 것
-전삼용신부-
이태리 한 본당의 장례식을 갔는데 폭염으로 40도 가까이 되는데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성당을 가득 메웠고 바깥 뙤약볕에도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평상시 주일교중미사보다 5배는 더 장례식에 온 것 같았습니다.
그 자매는 암으로 3개월을 선고받고 3년을 살았습니다. 물론 병원에 있으려하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려고 주일학교 교사에서부터 갖은 봉사활동 등을 하며 매일을 마지막같이 살았습니다. 임종 직전의 편안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남편이 아내가 죽기 2-3일을 제외하곤 3년 동안 기적적으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분은 그렇게 가진 것을 다 주며 죽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하인처럼 깨어 있다가 주님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라고 하시며 자선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는 곧,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라고 하시며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눌 줄 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읽으면 순간 재밌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생활비를 다 바친 그 과부는 굶어 죽었을까?
세상 계산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줌마입니다. 그 돈도 작지만 하느님께서 먹을 것이라도 사라고 준 것일 수 있는데 모조리 다시 바쳤으니 굶어 죽어도 자신의 탓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부가 굶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당장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다른 이야기를 통해 짐작을 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똑 같은 상황이 구약에서도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시돈지방 사렙다 마을에도 구차하게 사는 과부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아내와 함께 바알신을 섬기고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다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자신이 입을 열기 전에는 이스라엘에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도망쳤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이방 시돈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의 가난한 과부와 머물게 합니다.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는데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마실 물과 떡을 청합니다. 그 과부는 조금 남은 밀가루와 마지막 남은 기름 한 방울로 떡을 만들어 아들과 마지막 남은 것이라도 먹고 죽으려고 나무를 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엘리야는 구운 빵을 먼저 자신에게 주고 나머지를 아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 과부는 미련하게도 낯선 엘리야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다른 곳에는 가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어죽어 갈 때도 그의 뒤주와 기름병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과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부족하지 않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이나 신약의 하느님이나 다르게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하느님께 바치면 하느님께 바친 것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지고 있던 것들도 거룩하여져서 더 많은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만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렙다의 과부는 죽은 아들이 살아나게 되는 은총도 얻게 됩니다. 아들이 갑자기 죽었지만 엘리야는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 아들을 살려냅니다. 하느님께 아낌없이 바칠 줄 알았기에 하느님께서도 아낌없는 은총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주는 것은 사랑인데 그 여인에게 사랑이 있었으니 그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시게 된 것이고 그렇게 은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갖게 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눌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과부는 가뭄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중에 가장 나눌 줄 아는 여인이었고, 결국 자신과 아들까지도 그 나눔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그것은 마지막까지도 나눌 줄 아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나눌 것이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주는 것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돈 백 원도 나누어주기 싫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눈도 주고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나눌 것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은 모으기만 할 것입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지만 나누지 않는 사람은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도 계시지 않고 그래서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당신께서 먼저 갈릴레아로 가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갈릴레아가 생명을 상징하고 유다 땅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레아에 계셔야지 유다지방에 계실 수 없습니다. 비록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유다로 내려와 죽임을 당하셨지만 다시 갈릴레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할 기회가 있으시다면 이것을 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갈릴레아에 있는 호수가 갈릴레아 호수이고 유다지방에 있는 호수는 사해라고 합니다. 죽은 바다라는 뜻입니다. 온통 염분뿐이기 때문에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주위도 온통 소금밭이어서 아무것도 경작할 수 없는 사막과 같고 바람까지 짜게 느껴집니다. 말 그대로 죽은 바다입니다. 왜 그렇게 됐는가 하면 사해는 수심이 바다보다 400m나 낮기 때문에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모아들이기는 하지만 나누지 않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죽고 주위사람들도 죽입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이와는 반대로 많은 물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요르단강을 통해서 사해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항상 물이 흐르니 썩지 않고 많은 물고기가 살고 주위는 마치 에덴동산처럼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곳도 이 곳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신 것도 이 곳이고 부활하셔서 다시 돌아오려 한 곳도 이 곳입니다. 이곳은 하느님나라를 상징하고 에덴동산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는 사랑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눌 줄 알기 때문에 자신 안에도 생명이 풍성하고 주위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갈릴레아 호수는 마를 줄 모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잘 나눌 줄 아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잘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에덴동산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운전병을 했습니다. 병장이 되어 시간도 남고 다시 학교에 복학도 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잘 때 영어로 잠꼬대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춘천에 군견과 군견 병을 운송하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8개월 만에 처음 접하는 세상은 너무 좋아보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한 여 선생님과 유치원 아이들이 걸어가는 것을 쳐다보다 그만 신호를 보지 못하고 나오는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군용차는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습니다. 17m를 미끄러져 자가용의 앞부분을 쳤습니다. 워낙 큰 군대 차였기 때문에 자가용은 날라 인도로 떨어졌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사람을 실어갔고 저는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진술서를 받는데 뼈에 금이라도 가면 진단이 최소 3개월 이상이 나오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구속감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어디 부러진 곳이 없었고 차가 떨어진 인도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차도 폐차 직전의 후진 프라이드였고 운전자도 가톨릭 신자라 잘 이야기가 되어 300만원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돈 싸들고 처음으로 저에게 면회를 왔습니다.
저는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차 앞바퀴 쪽을 치지 않고 30cm 더 뒤쪽을 받아서 운전석을 쳤으면 운전자는 아마 죽었을 수도 있었고, 혹은 차가 날아가 인도를 덮쳤는데 그 곳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면 큰 사고가 될 뻔하였고, 그랬다면 나의 인생이 종칠 수도 있었겠구나!’
그러면서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웠던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손에 달려있는데 혼자 잘 해 보겠다고 영어 단어만 열심히 외우고 있었구나. 다 부질 없을 뻔 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더 살 수 없고 단 일원도 더 벌 수 없는 것이구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쉬워집니다. 내가 벌었으니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누기가 아까운 것입니다. 굶어 죽는 나라에 태어나지 않고 한국에 태어난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면 굶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갓 사제가 되어 이동하기 전에 출신 본당에서 이런 강론을 하였는데 한 자매님이 끝나고 나서 왜 그것을 미리 깨닫지 못했는지 자신을 한탄하셨습니다. 며칠 전에 집에 불이 나서 다 타 버렸다는 것입니다. 보험도 들어있지 않고 해서 많은 돈을 날려야 했지만 그래도 깨달은 게 많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는 매를 대서라도 깨닫게 만드는 법입니다. 사랑하니까 깨달으라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읍시다. 첫 번째 해야 할 것이 십일조고 그 다음이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웰빙보다 더 좋은 것이 잘 죽는 것이라고 하듯이, 잘 죽기 위해서는 끝까지 나누지 못해 내 손에 양심의 가책이 될 것을 쥐고 있지 말아야겠습니다. 나눌 때 죽음은 생명이 됩니다.
새벽을 열며
여름에 본당에서는 많은 캠프가 있습니다.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교리교사, 청년……. 어제는 우리 본당 청년들이 MT를 안면도로 떠났습니다. 저는 며칠 전부터 이것저것 열심히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보였고, 또한 50명이 넘는 많은 청년들이 함께 간다는데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보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하나 될 수 있는 시간, 이로써 본당의 더 큰 발전을 가져올 테니까요.
그런데 직장인인 청년들이 많아서 주말밖에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당연히 제가 청년 캠프에 함께 할 수가 없네요. 왜냐하면 저에게 있어서 주말은 많은 미사와 행사로 인해서 본당을 비울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혹시 청년들이 고리타분한 제가 함께 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주말로 시간을 정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서 문득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놀부 심보가 제 마음에 생기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청년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지요.
“이번 MT. 재미있을 것 같지? 내가 안 가는데 재미있겠냐? 아마 MT 기간 내내 비가 올꺼고, 천둥번개가 쳐서 민박집에 불이 나가서 아무것도 못할 꺼야. 너희들 알지? 하느님께서 내 기도 잘 들어주신다는 거. 내가 오늘부터 밤낮으로 기도할 꺼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기도를 바쳤겠습니까? 좋은 시간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하나 되어서 본당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정말로 주말에 비가 온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그냥 농담으로 말한 것뿐인데, 정말로 비가 많이 오고 지역에 따라 천둥 번개를 동반한다고 일기예보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비가 온다면 청년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렇게 비가 오는 것, 다 본당 신부 때문이야. 자기 못 간다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바칠 수가 있어?’하면서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말 잘 못했다는 후회와 함께 시간 날 때마다 좋은 날씨를 달라는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었지요.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된 말을, 즉 후회할 말을 참으로 많이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상대방에서 크나큰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적도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런 실수를 줄일 수 있을 텐데, 그 순간에는 왜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종말에 대한 준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 하나하나가 종말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내 가족 안에서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네는 것, 지금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함께 나누는 모습들……. 그 모든 사랑 담긴 모습들이 바로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채운 다음에 남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채워지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빈말이라도 나쁜 말은 절대로 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복음 선포의 중심에 선 환자
-양승국신부-
아주 특별한 본당이 있었습니다. 신자들의 영성생활은 너나 할 것 없이 출중했습니다. 그 누구도 불평불만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 본당에 잠시 일손을 도와주러 간 손님 사제가 그런 ‘특별한 분위기’에 의아해하자, 주임신부님은 한 여교우 집을 방문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본당의 특별한 분위기는 모두 그녀 덕분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그 여교우를 처음 대면한 사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은 보통 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설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통증이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통증이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애로움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여교우는 사제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제가 겪고 있는 슬픔과 병을 통해서 저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께 충분히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하느님의 구속 사업에 협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를 방문하고 나온 그 사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병을 앓고 있는 이 교우가 제 강론이 필요 없을 정도로 복음 선포의 중심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제는 바로 헤링 신부님입니다. 그 역시 생의 거의 대부분을 병고와의 투쟁에 몸 바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끔찍한 고통을 굳건한 신앙으로 잘 극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큰 수술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한번은 수술 후 생사여부가 불투명한 대수술을 목전에 두고도 평온한 얼굴인 헤링 신부님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어떻게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가 있습니까?”
식도암 수술이었기에, 그는 말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조그마한 서판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순전히 은총 덕분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계속 은총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면 이 행복은 즉시 사라질 것입니다.”(베른하르트 헤링 저, ‘나는 네 눈물을 보았다’, 가톨릭 출판사 참조)
언제 하느님께서 데려가실지 전혀 예측 못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굳건한 신앙을 간직한 채,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분명히 그분들은 자신들의 병고로, 자신들의 생활로, 자신들의 얼굴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일상을 벗어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대단한 것을 준비하라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씀이겠지요. 고통이 있는 사람은 그 고통 잘 견뎌내는 일이겠습니다.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은 그 슬픔을 잘 이겨내는 일이겠습니다. 십자가가 무거운 사람은 그 십자가를 끝까지 잘 지고 가는 일이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항상 감사드리는 일이겠습니다. 그것이 구원받는 일입니다. 그것이 치유되는 길입니다.
오늘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은총이 역경을 뒤따른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고통의 육중한 짐이 없이는 절대로 은총의 정상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은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느님 본성에 긴밀히 참여할 수 있고, 하느님 자녀의 영광과 영혼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물의 분량은 노고의 분량에 비례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십자가 아니고는 천국에 오를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세상 떠나는 마지막 날 하고 싶은 바로 그 말 한 마디를 오늘 표현하며 살아가십시오.”
고마워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최고예요,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
꽃이 되어 새가 되어(나태주)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이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하늘가로 스치는 새들도 본다
내 마음은 어디에
-임문철 신부-
얼마 전 사제연례피정 중 성당에서 모처럼 잠심에 들어가려는데, 모기가 귓가에서 앵앵거렸습니다. 손으로 쫓아내고 다시 고요 속에 머무르려는데 금방 또 앵앵거리며 떠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산책길에 나섰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문득 제 자신이 모기만도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기는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데, 손으로 쫓는다고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저는 내 생명의 원천이며 주인이신 주님을 찾는 데 금방 싫증을 느끼고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 다른 생각이란 게 대단한 게 아니라, 고작해야 제가 좋아하는 운동인 경우가 많습니다. 몇 주 전부터 윈드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파란 바다에서 바람을 맞으며 물살을 가르는 맛에 흠뻑 빠져들어 있는 찰나였습니다. 윈드 서핑을 하려면 바람의 상태가 좋아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성당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지부터 먼저 살필 정도로 열성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주님 생각하면서 잠이 들고, 아침에 눈 뜨면 처음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어야 하는데,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좋은 경치를 대하면 함께 거닐고 싶고,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제일 먼저 주님과 대화를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야말로 “살아?주님과 함께, 죽어도 주님과 함께”가 되지 않겠습니까?
깨어 있기
- 김영국신부-
학창시절에 시험 때가 되면 밤잠을 포기하고 공부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제대로 실행한 적은 없고,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하며 며칠씩 밤낮으로 깨어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복음 말씀을 포함하여 오늘의 모든 성경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깨어 있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기는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음으로써 눈앞에 다가온 ‘현실’의 이면까지도 꿰뚫어 보고 올바르게 대처함을 의미합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었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그 밤”(지혜 18,6)에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지시에 따라 떠날 준비를 하였던 것은, 파라오라고 하는 절대 권력자의 지배 하에 강요되던 노예생활이 ‘현실’의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느님만이 참된 ‘현실’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제2독서(히브 11,1-2.8-19)는 깨어 있는 삶은 혹독한 시련의 삶이기도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을 약속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히브 11,8) 길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어렵사리 얻은 외아들을 봉헌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깨어 있는 삶을 살았던 구약의 수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믿음만으로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히브 11,13)처럼 살다가 떠난 이들이지만 이들은 결코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복음 역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 다른 관점에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사를 받아 교회 안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크고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하는 말씀도 있습니다(루카 12,41-48).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언젠가 돌아오실 주인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셈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 삶의 바탕인 시간은 어느 순간이나 하느님의 영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은 이 사실을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른다”,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합니다(루카 12,39-40). 하느님은 언제라도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잘잘못에 대해 판결하실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섬세한 감각’을 통해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희망하며, 영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기다림
- 홍승모 신부·-
지난 주 복음이 재화(富)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이번 주 복음은 시간(기다림)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제시하십니다.
첫번째 비유는 혼인 잔치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태도에 대해, 두 번째 비유는 집에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집주인의 태도에 대해, 세 번째 비유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을 다스리도록 책임 맡은 관리인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는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들 모두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어떤 기다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이런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의 기다림 속에서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녘에 오든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루가 12,38). 기다림 속에서 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의 현존을 맞아들일 준비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준비 행위는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이 상징하듯 우리의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하는 우리의 그릇된 욕구를 거슬러,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 기다림은 미래의 시점을 가리킬 뿐 아니라 현재의 시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루가 12,42-44). 기다림은 막연한 것만은 아닙니다.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 쌓이면 확고한 희망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현재의 순간에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요한 묵시록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 3,20).
주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과 만남, 생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에 지쳐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내고”(루가 12,45) 있지는 않습니까? 권력에 대한 남용,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무절제, 시간에 대한 허비와 게으름 등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만 기다림 속에서, 이런 본능에 지배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이것을 극복하고 주님을 향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
- 이기양 신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더왕은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뒤에 동방 원정을 시작으로 유럽과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세계 문명의 조류를 바꾸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까지 호칭되기에 이른 그도 32살 나이로 바빌론에서 운명을 달리하였지요.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한 알렉산더는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내가 죽은 후 나의 시신을 관에 넣어 묻을 때에는 내 양손을 밖으로 내놓아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라." 놀란 신하들이 되물었지요. "아니,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분부를 내리십니까?"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도 죽을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통일한 뛰어난 인물도 결국에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단지 재산 관리인에 불과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다시 거두어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고 심판에 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란 그 사람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지요. '왕이 왜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것일까?' 겁에 질린 그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함께 가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제일 친했던 첫번째 친구는 부탁을 꺼내자마자 못 가겠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가긴 가는데 왕궁 앞까지만 같이 가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함께 가주겠으나 왕의 대전까지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친구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갈 것을 흔쾌히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소환에 기꺼이 함께 응하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갈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 첫번째 친구는 평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재물입니다. 재물은 죽는 바로 그 순간 나를 떠나버립니다. 왕궁 앞까지만 간다고 말한 두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구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무덤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덤에 같이 묻힐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같이 간다고 했지요. 그는 우리의 육신을 말합니다. 무덤 속까지는 같이 가서 썩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왕 앞에까지 함께 가겠다고 나선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그가 평소에 가장 멀리했던 자선과 선행이었습니다. 자선과 선행은 내가 심판을 받을 때 끝까지 하느님 앞에까지 함께 따라와 나를 변호해 준다는 것입니다(탈무드). 심판을 준비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나는 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을 얼마나 쌓고 있습니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는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무서운 말씀으로 심화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 가르쳐 드려야할 것을 제가 공연히 가르쳐 드렸나요? 아니지요. 우리에게는 알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늘 깨어 준비하여 언제든지 주님 앞에서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항상 깨어있는 삶
1. 성서이야기
지혜서는 집회서와 더불어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입니다. 제1독서 지혜 18,6-9는 이집트 맏아들들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의 젖먹이들을 수없이 죽인 죄로 징벌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의 중재로 재앙을 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 11장은 그 유명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반영하는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근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믿음의 빛에서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2,32-48에는 다섯 가지 각기 다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33-34절)의 의미는 마르 10,21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을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35-38절)는 주인이 언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든지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듯이 제자들 역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입니다. '도둑의 상징어'(39-40절) 역시 인자가 도둑처럼 생각지도 않는 시간에 오실 것이니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청지기 종의 비유'(41-46절)는 하느님 나라 비유로써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모르니 항상 깨어 봉사할 준비를 갖추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루가가 지도자들에게 새롭게 적용한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종의 상징어'(47-48절)는 예수께서 율법에 정통한 율사들과 율법에 무식한 백성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 율법을 잘 아는 율사들이 백성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늘 깨어 있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루가는 청지기 종의 비유에서 한 사람의 종이 충성과 불충 둘 사이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며, 이 종은 결국 자신이 결정한 행동에 따라 주인에게서 전혀 다른 보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루가는 이 비유를 지도자들에게 적용합니다. 예수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지도자들은 결코 게을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비유가 마태 24,45-51에 나오는데 여기서 마태오는 지도자들에게 "제 때에 교우들에게 양식을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제 때에 교우들에게 주어야 할 양식은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종말 지연을 핑계로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예수 재림의 지연은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을 가려내는 시금석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인들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지키는 일에 게을리 행동한다면 비유에 나오는 불충한 종과 같을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준비하지 않고 행하지도 않는 종이 주인의 뜻을 잘 몰라 행하지 않는 종보다 벌을 더 받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몰라서 행하지 않는 일반인들보다 엄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48절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누구든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더욱 더 청하실 것입니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겠다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
- 조욱현 신부
오늘의 주제는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은 하느님께서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준비하시고 실현시키시며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느 때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서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제1독서: 지혜 18,6-9: 하느님의 약속을 분명히 깨달았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일어났던 일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역사’의 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수백 년 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믿음’에 근거하고 믿음으로부터 계속적인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모든 이를 위해, 역사를 통해 완성돼 나가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직 도래하여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다.
복음: 루가 12,32-48: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 역시 지난 주일복음과 같이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고 이 세상의 재물에다 자신의 보증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다(32-34절). 이렇게 재물과 재화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내용은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르는 ‘집주인’을 깨어 기다린다는 내용(36절)과 연결되고 있다. 즉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현실적으로든 미래에 있어서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지상의 재물로부터의 자유보다도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에”(40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순간에 나타나게 될지 모르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자유롭고’ ‘깨어있는’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마치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라”(35-36절).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여행이나 일을 하려고 준비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즉 움직이기에 편하도록 하는 것이다. ‘등불을 켜놓는 것’은 한 밤중에 갑자기 주인이 돌아올 때 필요하다. 종들의 이러한 태도는 겁이 난다든지, 염려스러워서 취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그 종들의 시중을 들어주리라는 사실이 입증하듯이 기쁨에 차서 취하는 태도이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그 주인은 띠를 띠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예수님은 특히 수난사에서 ‘야훼의 종’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쁨’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40절)는 이 권고말씀은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오는 그 빛에 기쁘게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어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다.
충실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주인이 한 관리인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는 사람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이겠느냐?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 종은 행복하다. 틀림없이 주인은 그에게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들을 때려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종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을 것이다...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1-48절).
이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관리인처럼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함으로써 진정한 ‘주인’에 대한 기다림이 이미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권위라는 것은 봉사를 위한 것으로 항상 종말론적 ‘심판’ 아래 놓여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8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내용이 그들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 자체가 지배와 권세의 도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제2독서: 히브 11,1-2.8-19: 아브라함의 신앙 2독서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의 약속을 인내로이 기다릴 줄 알았던 믿음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선조들의 믿음은 그 ‘약속 받은 땅’이 장차 얻게 될 천상 고향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다림의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다. 항상 우리에게 오시고 계신 그분을 우리가 항상 알아 모실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질 수 있는 삶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항구한 신앙으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과 같이 우리의 삶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깨여 준비한다는 것은!
- 이상선 신부 -
중국 당나라 때에 노생(盧生)이란 사람이 세상을 유랑하다가 ‘한단’이라는 마을의 주막에 머물게 되었다. 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노생은 어여쁜 처녀를 만나 결혼하고 자녀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출세도 하여 재상(宰相)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렇게 신나게 살고 있는데 귓전에 ‘어서 일어나 식사하라’는 말에 깨어보니 꿈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밥 먹으라’는 소리에 그토록 생생하던 현실같은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음식이 나오는 잠깐 사이에 그는 인생을 다 산 셈이 되었다. 노생은 얼마나 황당 했을까. 흔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하듯 노생의 일화에서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 유래한다.
요즘 ‘웰빙’(well-being)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사전적으로는 ‘복지’(福祉)의 개념이지만, 몸과 마음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시켜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다양한 노력에 관한 문화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인간에게 최적의 상태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생활로 웰빙이 오인되기도 한다. 몸이 허약한 사람은 건강을 돌보아야 하고,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은 때때로 일손을 놓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휴식해야 한다. 생사가 달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템포에 맞춰 삶을 평화스럽게 유지하려는 내·외적 노력은 현명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오늘 복음말씀의 묵상은 짧게 ‘깨어 준비하라’로 요약된다. 종말에 다가올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도 가르치지만, 예수님께서 굳이 비유를 들어가시며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원한 삶을 위하여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을 원하시는 사랑의 권고 말씀이다. 의롭고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농부가 이른 봄에 일년 농사를 준비하는 것만 보아도 매사에 합당한 준비는 마땅한 삶의 원리이다. 살아가면서 한두 번쯤 준비의 부족으로 낭패를 본 경험은 있지 않을까? 하물며 구원을 향하는 신앙인들에게 ‘깨어 준비하는’ 삶의 자세는 필요충분조건이라 할만 하다. 찬미와 기도와 감사와 봉헌과 봉사가 몸에 배인 신앙인은 남의 말이나 행동에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대처한다. 준비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삶이 질서 있고 마음에도 여유가 있어 사랑을 베풀게 된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은 날’에 오신다는 말씀은 긴장과 초조 속에 살라 하심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헤아려 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삶에 깊이 현존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 날’은 그 언젠가가 아닌 지금 살고 있는 현실과 일상이다. ‘한단지몽’에 매이거나 재물과 명예만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그릇된 가치관에 편승하지 않고, 참신한 영성생활의 일상 가운데 살아간다면 주님 보시기에 ‘깨어 준비하는 삶’이라 하겠다. 때문에 균형 있는 영적건강(spiritual health)과 화목한 인간관계의 성장을 경주해야 한다. ‘깨어 준비하는 삶’이란 영혼과 육신이 건강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며, 냉담하지 않는 복음적 생활이 아니겠는가.
믿음은 기다림의 준비
-강길웅 신부-
오늘 1독서에 봉독된 지혜서의 저자는 에집트에서 살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지금은 고국이 그리스의 속국이 되어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언제고 이루어진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처럼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믿었으며 지금 당장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백 년 후, 아니면 천 년 후에라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성취되리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그런 애절함 때문에 숭고한 것입니다.
2독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사람은 진정 무엇을 바라보고 또 희망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가치 가 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인 그리스도께 우리의 미래를 걸고 있을 때 우리는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용기를 갖게 됩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하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약속이 성취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충실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준비는,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 등불을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 주인이 가져오실 위대한 선물 때문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즉 보다 높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 보다 낮은 재화를 나누고 베푸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결혼이나 회갑처럼 미리 날짜와 시간을 받아 놓고 기다리는 것이며 둘째는 어떤 돌발적 인 사고나 죽음처럼 시간과 날짜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첫째의 경우는 정도 이상으로 준비하지만 두번째의 기다림에는 또 대단히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여름밤에 시골길을 운전하다 보면 개구리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것들이 길가에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지나가는 불빛 때문인지 달리는 차를 향해 펄쩍 뛰어듭니다. 그래서는 깔려 죽습니다. 이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갑자기 달려드는 일이기에 미처 피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괜한 욕심을 내다가 자기 명을 헛되게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으며 자기 판단이 옳다고 자신하다가 그만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숱한 교통사고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 그런 식으로 마지막 시간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선하게 살면서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은 언제 무슨 일을 당해도 떳떳합니다. 당당하며 자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를 살아도 천 년을 사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그 날을 미리 알았다 해도 선하게 살지 못했던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기만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며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언제고 잃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필요한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어려운 본당, 정말 가난한 공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재물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물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자들과 어려운 본당은 다 우리의 소중한 재물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천 원씩만 더 헌금할 수 있다면 매년 수백억 원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시골 본당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 돕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입니다. 살아가며 그때그때 돕는 것입니다.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들고 불우 이웃을 찾는다면 그는 정말 멋지게 기다리는 길을 아름답게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성실한 기다림의 자세를 갖도록 합시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 서공석 신부-
“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유별나게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점점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지엄하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전제 군주들과 같이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인권이 소중하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높고 무서운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언어는 과거 봉건시대나 전제 군주시대에 통용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오늘도 하느님은 높고 두려운 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언어가 복음적 체험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지극히 높고 심판하실, 무서운 분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야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도 내세를 보장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그런 분이면 오늘 복음의 말씀,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신앙 진리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생각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이어받아 삽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라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대인에게 자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명을 이어받았지만 독자적으로 사는 생명체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반대되는, 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당신 자녀로 키우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오늘 우리를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마음도 함께 들어 있어야 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예수님이 하셨듯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자상한 생명을 살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혹은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다음 만나는 환상적인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높고 무서운 분으로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입니다. 높고 무서운 사람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무서운 존재입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무섭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군 지휘관이나 재판장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하늘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가르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의 나라 혹은 그분의 ‘함께 계심’을 은혜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받들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자녀답게 변하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그 ‘함께 계심’을 철저히 사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은혜롭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베풀어서 은혜로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향해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기 위해 준비된 모습으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재물이나 지위를 자기가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사치스럽게 살기도 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재물과 지위는 자기 한 사람이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재물을 사용하고 지위가 요구하는 봉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한 사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아버지 앞에서 가지는 자세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 백석을 바쳐야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심청전의 용왕과 같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여 이루어드리는 것이 자녀 된 사람의 기쁨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도 부모의 뜻을 삶으로 실천하여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자기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의 삶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베푸심은 은혜로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높고 무서워서 빌고 바치지 않습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베푸시기에 우리도 베풀고, 그분이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고치고 살리기 위해 힘씁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 실현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사는 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 : 항상 ‘의식’하며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 홍금표 신부-
알츠하이머병으로 5년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의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분은 자신의 시한부 처지를 축복으로 이야기하면서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존재다』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우선 그동안 무심하게 행했던 모든 일들에 신경을 쓰게 되지요. 하찮은 걸음걸이에서부터 집안의 작은 꽃 한송이까지 의식하게 됩니다. 즉,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내 서랍을 다시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물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임을 자각함으로 좀 더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 분은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우리의 성취와 계획,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아버리면 우리는 좀 더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삶을 놓아 버리면 역설적이게도 좀 더 충실하게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기에, 삶에 충실하기 위해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이를위해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지난 주 복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모아야 할 곳은 지상의 창고가 아니라 하늘의 창고요, 하늘 창고에 보화를 저축하는 길은 자선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후반부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뜻하고 종들은 우리 신앙인들을 뜻하는데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결혼 풍습에 대한 대강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의 혼인은 약혼기간이 끝나고 혼인날이 되면 저녁 때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집을 방문하여 신부와 손님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신랑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잔치는 일주일 정도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배경입니다.
그러기에 이때 혼인잔치에 참석한 주인을 모시고 있는 종들이라면 주인이 돌아올 때 까지 밤낮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준비해야 하는데 이를위한 준비를 복음에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는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허리에 띠를 띤다는 것은 일할 준비, 즉, 자신의 역할을 언제든 할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하고, 등불을 켜 놓는 것은 밤에도 주인을 맞이할 수 있는 태도를 뜻하기에 언제든 주인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할 사실은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종들의 이러한 자세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요 기본적인 임무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임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놀라운 칭찬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일 자체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의식함에서 우러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똑같은 행위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에 칭찬을 받는 밤중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은 것도 만일 주인이 돌아와 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행동은 의미를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기름낭비 또는 게으르다는 이유로 책망받을 수도 있는 행동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사실은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언제」 하느냐가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매일의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처지가 종들과 비슷하기에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밤중이나 새벽녘이라는 표현은 「재림의 지연」을 뜻하기도 하고, 「뜻밖의 시간」이란 의미로써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한 말입니다만 이는 오늘날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 파묻혀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경고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는데, 어떻든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는 분명한 현실이기에 현실에 안주하는 불충한 종(46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함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요, 하느님 앞에 서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매일 반복되는 나의 일상과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의식함. 아마 예수님을 맞이해야할 우리가 갖추어야 할 띠와 등불이 아닐까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옳게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 유영봉 몬시뇰-
묵상 길잡이 신앙이 없는 사람은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신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안다. 그분의 뜻대로 살려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참된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것이다.
1. 졸면 죽는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은 보초를 설 때 ‘졸면 죽는다.’는 표어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후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전방 철책선 근무를 하는 사람이나, 전후방의 구별이 없는 월남전이나 게릴라전에서는 너무나 절실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적(敵)을 먼저 발견하고 숨거나 선제공격을 해야 살 수 있다. 누가 먼저 적을 발견하느냐가 생사를 결정짓는 유일한 조건일 때가 많다. 매복을 할 때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째 조건은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敵)이 있는지 없는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깨어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깨어있음이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아니겠는가?
2. 내 인생은 참으로 나의 것인가?
누구나 어릴 때에는 부모형제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식주를 책임져 주고 갖가지 배려를 하며 지켜준다. 그러나 점차 성장할수록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찾고 일자리를 구하는 등 자기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각자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안목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 남자로 또는 여자로, 어떤 소질과 어떤 외모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한 바가 없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내가 언제 죽게 될지,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철저한 불확실성에 쌓여있다. 한마디로 우리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나 자신의 모든 조건에 대해서 전혀 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의 삶은 참으로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신앙인은 인생을 제멋대로 살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간다. 여기에 인생을 사는 자세의 근본 차이가 있다.
3. 진정한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오늘 복음은 세 가지 비유를 전하고 있다.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 하인을 맡아 다스리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관리인의 비유가 그것이다. 모두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를 일깨우는 비유들이다. 그리고 나의 삶이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 언젠가는 셈을 바칠 수 있도록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관리인에게 중요한 것은 일을 맡기신 분께 대한 충성과 성실이다.
누구나 유비무환의 자세로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깨어있는 삶인가? 많은 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신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삶이 알차고 깨어있는 삶인 양 생각한다. 물론 게으르고 소극적인 삶보다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목적지를 잘못 알고 엉뚱한 곳으로 달리거나, 함께 뛰는 사람을 걸어 넘어뜨리면서 달린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기 살기로 하다 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은 진정 깨어있는 태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깨어있는 삶을 위해서는 가끔 멈추어 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장 완전한 거울이신 주님 앞에 우리를 비춰 보아야 하고, 진리이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 ‘깨어있음’은 진정한 유비무환이 아닐 것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조카의 대부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또 길을 가던 대학생이 이야기 중에 친구를 한 대 쳤는데 맞은 사람이 넘어지면서 뇌를 다치는 바람에 숨졌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침에 건강하게 나갔던 사람을 시신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을 사고 순간에서 5분만, 아니 단 1초 만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사고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서쪽으로 달려가서 지는 해를 붙들어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루카 12,39) 만약 내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안다면, 그래서 내게 단 하루 24시간이 남아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소중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분도 있겠지요. 이 세상을 떠날 사람은 남아 있는 가족이 너무 상심하지 않도록 해주고, 남아 있는 가족은 떠날 사람이 마음 편히 갈 수 있도록 해주면서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관계가 ‘만약’이라는 가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관계 면에서 깨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ㄱ) 그런데 집주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올까요? 김수환 추기경은 ‘새벽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웃 사람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일 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무지막지한 직장 상관의 모습으로, 일을 제대로 못해 애를 먹이는 동료의 모습으로, 지성·감성·의지·외모·부까지 다 갖추어 질투 나게 하는 잘난 사람의 모습으로, 출근길에 마구 끼어드는 얄미운 운전자의 모습으로, 마주쳐도 인사 한번 하지 않는 이웃 사람의 모습으로, 불친절한 점원의 모습으로, 피곤한 아내(남편)의 모습으로, 말썽 피우는 자식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볼 눈이 있다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모습’으로 오시는 주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때 만났던 한 자매님의 나눔이 떠오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저녁, 기도모임에 참석한 뒤 고속도로로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답니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시멘트 계단은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한 멕시칸 노숙자가 15달러만 주면 어디 가서 잠을 잘 수 있겠다며 구걸을 했습니다. 자신의 주머니에는 50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 있었지만 그 돈은 꼭 쓸 데가 있어 줄 수가 없고, 잔돈은 하나도 없어 난감해하다가 내려오던 교우들에게 그 사정을 말했답니다. 3명이 5달러씩 내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리고 5달러를 빌려 달라고 했는데, 교우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며 서둘러 가버렸답니다. 자매님은 순간 화가 났답니다. 기도모임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자기 식구들을 위해서는 미사예물 20달러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자매님은 그만 앞뒤 생각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노숙자 손에 50달러를 꼭 쥐어주면서 ‘이런 대접받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오늘 밤 따뜻한 곳에 가서 쉬라.’고 사과했답니다. 노숙자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매님은 그에게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는 차를 타기 위해 황망히 물기 젖은 마당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얼마 안 가 바닥에서 100달러 지폐를 주운 자매님은 그것마저 그 사람한테 주기 위해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더군요. 그날 그 자매님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노숙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ㄱ) 어떤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히브 11,8) 아브라함은 오랜 기다림 끝에 사라한테서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그는 기쁨의 아들, 약속의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믿음이, 기다림이 최고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련을 즉각적인 순종으로 통과했습니다.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히브 11,9)에서 보듯 아브라함의 삶의 자세는 언제나 하느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즉시 응답할 태세를 갖춘 준비된 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순종은 하느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듯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즉시 문을 열어드립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ㄱ)
사랑 나누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 배광하 신부-
믿음의 기다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동물들이 불이 붙어있는 둥근 고리 속을 통과하는 장면입니다. 대개의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불을 무서워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동물들이 자신의 큰 두려움인 본능을 뛰어넘어 불이 타고 있는 고리 속으로 달려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같은 놀라운 힘은 불 속에 뛰어든 후에 주어지는 보상이나, 혹은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훈련이나 체벌이 아니라,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의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물에게는 이제껏 조련사가 훈련시키는 대로 해서 목숨이 위험했거나 손해를 당한 적이 없다는 믿음, 죽을 위험으로 내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불 속으로 뛰어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체험을 합니다. 누군가 가족들과 언짢은 일이 있은 뒤 성당에 나왔는데, 그날 따라 성경 말씀이나 강론 말씀이 가족 간의 사랑과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면, 그 말씀이 꼭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다는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꼭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다”가 아니라, 분명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매일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삶의 조언과 생명의 길을 안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 위험에 처할 명령이나 손해 볼 일들을 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 ,8)
동물들도 조련사를 믿고 그의 명령에 본능을 뛰어 넘어 따릅니다.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명령과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따라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랑의 기다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 35~36)
그런데 이 같은 기다림에 앞서 하신 말씀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 33) 입니다.
참된 기다림이란 무턱대고 넋 놓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이며, 그럴 때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같은 실천적 의미의 사랑의 기다림에서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박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분은 1940년 방글라데시 치타공 시에서 태어나 치타공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반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 뒤 조국 치타공 대학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 1974년 방글라데시에 엄청난 기근이 몰려 왔을 때, 그가 강의하던 치타공 대학 인근 조브라 마을의 참상을 보며 마을 주민 42명에게 주머닛돈 27달러를 빌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1983년 방글라데시 말로 ‘마을’이란 뜻인 ‘그라민’ 은행을 설립합니다.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담보나 보증 없이 소액 융자를 줌으로써, 지난 26년 간 방글라데시의 인구 10%를 넘는 240만 가구가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무하마드 유뉴스’ 교수는 대학 강단을 뛰쳐나와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동거동락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죽는 데에도 여러 방식이 있지만, 굶어서 죽는 것처럼 끔찍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경제학 이론을 가르치면서 보였던 그 열성을 기억한다. 그리고선 이 모든 이론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늘 주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 하신 것은, 진정 사랑의 실천으로 당신을 기다리라 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준비할 기다림인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위한 준비와 기다림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기 전에 지난주일 복음의 내용을 잠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지난주일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12,15)는 것이었다. 재산은 오히려 탐욕을 불러와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할뿐만 아니라, 탐욕이 극에 달하면 영원한 생명은커녕 현실의 생명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를 들어 잘 가르쳐 주셨다. 부자가 자신이 가진 재물의 힘으로 현재의 삶은 보장받을 수 있으나 미래의 삶은 자기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래는 하느님의 손에 있을 것이며, 누구든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빈손으로 그분 앞에 서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예수의 아버지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지만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받을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이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서 기꺼이 주시려는 하느님의 나라를 합당하게 영접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 방법은 준비와 기다림의 두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는 준비로서,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는 하늘의 창고에 재물을 쌓는 방법이다. 하늘에 재물을 쌓아야 하는 이유는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기 때문이며, 그 방법은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선(慈善)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선은 기도와 단식과 함께 신앙인의 기본 덕목이다. 둘째는 준비하고 있는 기다림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잘 기다려야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소홀함이 없이 잘 수행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의 질문(41절) 전(前)과 후(後)에 배치된 두 가지 예화에서 더욱더 잘 드러난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준비하는 종의 모습과 자기에게 맡겨진 일과 책임을 잘 관리하고 수행하고 있다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돌아올 주인을 맞이하는 종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준비와 기다림은 특정한 누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영접할 모든 백성들, 특히 그 백성을 지도하는 책무를 맡은 자는 준비와 기다림에 더 큰 정성을 쏟아야 한다.(48절)
오늘 복음을 지난주일의 복음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준비와 기다림은 분명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인자의 재림을 위한 종말론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오늘 복음은 금방 있을 줄 알았던 인자의 재림이 지체되는 현상을 보이자 초조한 마음으로 우왕좌왕 했을 초대교회에 진정한 준비와 기다림을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분명한 사실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창건과 세상심판을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38절)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림의 날과 시각이 아니라,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그분을 맞이할 준비와 기다림인 것이다. 준비와 기다림은 다가올 미래를 위한 것이지만 준비 속에는 다가올 것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으며, 기다림 속에도 기다림의 대상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다. 이는 곧 준비와 기다림이 막연한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이미 현실 속에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믿는 이의 태도는 준비와 기다림뿐이다. 교회는 그 동안 2,000년의 긴 세월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고, 최종적인 그 날과 그 시각을 향하여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세월동안 사라져간 사람들 안에서 그 날과 그 시각을 보았다. 이 말은 한 인간의 죽음이 바로 그 날과 그 시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죽음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자선을 통하여 하늘에 재물을 쌓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산다는 비유의 뜻은 항상 근면하게 일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등불을 켜 놓고 산다는 비유는 자신 안에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게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뜻한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생(生)을 마감할 때,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그를 기쁨과 평화의 식탁에 초대하여 도리어 그에게 봉사해 주실 것이다.(37절) 그렇다면 재림하실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한 매일의 준비와 기다림은 우리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
첫댓글 감사합니다~~♥
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