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정영선
슬픔이 탈수된 난닝은
시들시들 마른다 방안 건조대에서
햇빛 없이
바람 없이
꿈 없이
홍콩 뒷골목 아파트
수건, 팬티가 창밖 내민 긴 막대에 매달려
아슬아슬 곡예한다
바람이 흔들고
햇빛이 잡아주고
먼지가 매만지고
에너지가 넘친다
키르키스탄 벌판, 유르트에
둘러진 밧줄에
꽁꽁 찡겨 있는
헌 내복
눈발에 적셔지다
낡은 햇살에 꾸들꾸들 말려지다
문명의 강풍이 데려가지 못하는
문명 무풍지대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 같은 거
순수예술,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시인은 자유인이며, 그는 도덕적 실천이나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의 삶의 목표는 붓 가는 대로이고, 그의 도덕적 실천도 그의 양심대로이고, 그의 정치적 성향도 그때 그때 판단하고 선택할 사항일 뿐, 그는 그 어느 당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무목표와 무의지와 무책임은 그의 자유의 실천의 ‘삼대 지주’이며, 그의 시는 자유로운 개인의 아름다운 정신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에 반하여, 참여예술을 중요시 하는 시인은 정치적 목적과 도덕적 실천을 중요시 하고, 개인의 자유를 주창하는 시인을 반사회적인 자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는 이웃을, 개인의 자유보다는 동지애를 더욱더 중요시 하고, 너무나도 분명한 목표와 그 신념을 향하여 모두가 다 함께 참여할 것을 강요한다. 정치적 목적이든, 경제적 목적이든, 종교적 목적이든지간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믿음 하나로 그 더없이 맑고 성스러운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나 하나의 목표와 하나의 의지와 그 도덕적 실천이 경직되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다’라는 스탈린과 레닌식의 전체주의를 지향하게 된다. 타인의 자유와 개성을 제멋대로 억압하고, 이미 싸늘하게 죽어버린 그 사상과 이념을 위하여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도 그 혁명의 과업은 좀처럼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예술은 순수예술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사회적 실천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예술은 때때로 개인의 자유와 꿈이 마음껏 펼쳐보이는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이 이상세계에 빠져드는 황홀함을 선사한다. 예술은 또한, 너와 내가 손에 손을 맞잡고 독재자와 악덕 자본가와 종교적 성직자들을 타도하며, 우리 모두가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이상세계를 사회적 실천의 황홀함으로 선사한다. 아름다움은 무오류성의 순수미이며, 이 무오류성의 순수미에서는 자아를 망각한 황홀함이 샘 솟아나온다. 순수예술이든, 참여예술이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이상세계이며, 우리 모두가 다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세계를 제시할 때만이 시적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된다. 브라만, 석가, 마호메트, 예수, 공자, 맹자, 플라톤, 칸트, 이태백, 김소월, 호머, 셰익스피어 등처럼 사상과 이론을 정립한 사람들만이 전인류의 스승이 될 수가 있듯이, 순수예술을 선호하든, 참여예술을 선호하든지간에, 그 목적은 다 똑같은 것이다. 모든 시와 모든 예술은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아름다운 세계에 빠져들게 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시인들은 모두가 다같이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그 모든 더럽고 추한 것을 질타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언제, 어느 때나 더없이 거룩하고 성실한 자의 편에 서서 그의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고, 그 어떠한 장애물과 사악한 인간들과도 싸울 수 있도록 무한한 용기와 가르침을 북돋아 주지 않던가? 모든 시인은 전인류의 스승이며, 그의 지혜는 무오류성의 아름다움이 되고, 이 아름다운 향기가 천리, 만리 퍼져나간다. 시는 사상의 꽃이고, 사상의 꽃은 시의 열매이다. 아름다움은 꽃이고, 꿀이고, 황홀함이며, 이 황홀함만 있으면 모든 고통을 다 잊고, 그 어떤 적과도 싸울 수 있는 천하무적의 용사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시인은 비겁하게 사는 것을 모르고, 무릎 꿇을 지를 모르고, 명예와 생명을 하나처럼 생각한다.
정영선 시인의 [빨래]는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즉, 칸트적 의미에서 취미판단과 도덕판단의 경계에 걸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경계를 넘나들며 최종적으로 순수예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그의 자유는 무목표와 무의지와 무책임으로 일관하지 않고 있는데, 왜냐하면 동서양을 넘나드는 ‘빨래의 역사’를 통해서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 같은 거”를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적 하층민들의 운명이며, 제아무리 더럽고 추한 때를 깨끗이 씻어도 그 “문명의 무풍지대”에서는 또다시 그 더럽고 추한 슬픔의 때가 끼기 마련인 것이다.
“슬픔이 탈수된 난닝은/ 시들시들 마른다 방안 건조대에서/ 햇빛 없이/ 바람 없이/ 꿈 없이”는 한국의 사회적 하층민들의 빨래에 맞닿아 있고, “홍콩 뒷골목 아파트/ 수건, 팬티가 창밖 내민 긴 막대에 매달려/ 아슬아슬 곡예한다/ 바람이 흔들고/ 햇빛이 잡아주고/ 먼지가 매만지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홍콩의 사회적 하층민들의 빨래에, 그리고, “키르키스탄 벌판, 유르트에/ 둘러진 밧줄에/ 꽁꽁 찡겨 있는/ 헌 내복/ 눈발에 적셔지다/ 낡은 햇살에 꾸들꾸들 말려지다/ 문명의 강풍이 데려가지 못하는/ 문명 무풍지대”는 키르키스탄의 사회적 하층민들의 빨래에 맞닿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정영선 시인은 이 [빨래]를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단 말인가? 한국, 홍콩, 키르키스탄 등, 사회적 하층민들에게는 국경도 없고, 계급도 없다.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권력도 없다. 그들의 경제적 토대는 가난이고,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문명의 무풍지대”에서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처럼 살아간다. 사회적 하층민들은 모두가 다같이 한 형제이며, 슬픔을 빨고 또 빨아도, 그 마른 빨래에는 오직 슬픔만이 땀과 눈물처럼 배어든다.
정영선 시인의 [빨래]는 사회적 하층민들의 역사이며, 이 사회적 하층민들의 역사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적 하층민들을 문명의 무풍지대에서 구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다운 행복을 영위하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마르크스처럼 공산주의를 외친다고 해서 문명의 무풍지대, 즉, “조국이 씌운/ 난민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슬픔이 빠져나간 난닝이 시들시들 마르고, 수건과 팬티가 창밖 긴 막대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고, 키르키스탄 벌판, 유르트에 꽁꽁 찡겨있는 헌 내복이 눈발에 적셔지다 낡은 햇살에 꾸들꾸들 말라간다. 자유도 없고, 만인평등도 없다. 이상적인 천국도 없고, 공산국가도 없다. 요컨대 너무나도 터무니없고 공허한 사상과 이념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회적 하층민들을 선동하기 보다는 이처럼 슬픔이 빠져나간 [빨래]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의 마비된 의식을 일깨우고, 그 탐욕을 제거해주는 것이 모든 시학의 근본원리이며, 모든 시인의 사명과 의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슬픔이 빠져나간 빨래, 더럽고 추한 때를 씻고, 또 씻어도 그들의 땀과 눈물처럼 또다시 슬픔이 배어들 빨래----. 정영선 시인의 이 [빨래]의 아름다움이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원한 이상세계로 인도해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영선 시인은 시를 위해 자기 자신의 온몸의 열정을 불 태우고, 그 아름다운 [빨래]를 인간화시켜 모든 인간들을 행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