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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새 출발로 아름다운 가족의 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전9:1-10절) 살아 있음의 유익(有益)
사람이 희망(希望)이 없다는 것은 절망(絶望)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사람이 자살(自殺)하는 이유도 지금 처한 상황이 고통스러워서라기보다는 희망(希望)이 보이지 않아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인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監獄)에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감옥(監獄)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슨 유익일까? 인간은 세상에서 끝임 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살지만,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絶望)한 채,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즉 평생을 감옥(監獄)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사는 것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삶을 연장(延長)하는 것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꽂고 있어야 하는 사람도 그야말로 단순한 생명의 연장(延長)이지,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끝까지 의식(意識)이 회복(回復)되지 않는다면,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것은 혹시라도 소생(甦生)할 가능성이 있을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이 죽으려는 것도 아직 혈기(血氣)가 있고, 결단(決斷)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고 싶어도 죽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연명(延命)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전도자는 절망(絶望) 중에 있는 인간들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종신형(終身刑)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나중에라도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또 중환자실에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사람도 의식이 돌아올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죽는 것보다 끝까지 견뎌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례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전쟁 때, 북한군에 포로가 된 소위(少尉)가 50년 만에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와 죽은 줄만 알았던 가족들을 만나고, 미완성(未完成)으로 끝날 뻔했던 자신의 삶을 제대(除隊)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참모총장 앞에서 귀대 신고도 하고, 모교(母校)에 가서 졸업장도 받았습니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자유도 마음껏 누렸습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자유세계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북한에 억류된 포로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거의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아무 희망(希望) 없이 전쟁 포로로 살다가 그냥 죽은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사나, 죽으나, 큰 차이가 없는 절망(絶望)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끝까지 견뎌서 탈출한 사람은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報償)받고도 남는 자유를 맛 본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전도자가 말하는 핵심(核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무의미한 절망(絶望)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감옥 이나, 중환자실에서 오래 살다 죽으나, 금방 죽으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 살면서 죄(罪)를 해결 받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죄(罪)의 감옥(監獄)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 보다 낫습니다. 즉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허무(虛無)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유리한 것은 혹시라도 세상에 살면서 죄(罪)사함을 받고, 새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회가 있기만 하다면, 아무리 인생이 비참하고, 무의미해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살아있을 가치(價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남긴 명언(名言)은‘산 개(犬)가 죽은 사자(獅子)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Ⅰ.인간이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
9:1절)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전도자는 다시 한 번 인간이 세상에서 하는 일에 대해 평가를 내립니다.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가치(價値)있고, 의(義)로운 일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칭찬받을 만한 일일까?
즉 자선기금(慈善寄金)을 많이 내거나, 다른 사람들을 많이 돕는 것은 영원히 축복(祝福)받을 만한 일일까? 전도자는 그것들이 물론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크게 칭찬받을 일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 앞에서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미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학생들은 엄마나 이모가 대신 그려 준 그림을 숙제로 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림을 딱 보면, 학생이 그린 것인지, 어른이 대신 그려 준 것인지, 알아챕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고도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어떤 아이는 그림을 잘 못 그려도 칭찬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그림에 손도대지 않고, 남이 그려준 것을 낸 아이는 정직하지 못해서 야단을 맞지만, 자기 힘으로 과제를 소화해서 내면,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세상의 일을 열심히 살펴보니, 의인이나, 지혜자가 좋은 일을 하기는 하지만, 결코 칭찬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좋은 일인데, 실제로 그들의 마음속 동기(動機)를 살펴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끌려서 한 경우가 많습니다. 즉 본인은 전혀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누가 강권적으로 이끌었다거나, 하나님이 그를 잡고 이끄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사주(使嗾)를 받아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다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여러 번 축복하는 아름다운 일을 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코 칭찬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압 왕의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저주 대신에 축복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자기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것은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민의 힘에 굴복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물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했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의(義)로운 일이나, 선한 것의 본질을 살펴보니, 정말 스스로 원해서 된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금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거금을 기부하거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돈을 내놓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라도 부자(富者)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는 것이 다행이기는 합니다.세상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억지로 선한 일을 하게 하셨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난 것일 뿐, 사람들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세상은 완전히 무법천지(無法天地)로 변할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선행(善行)들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선행(善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善行)입니다. 사람이 올바른 선행(善行)을 하려면, 나름대로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먹고 소화해서 자발적인 마음과 선(善)한 뜻으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노예가 주인이 시켜서 마지못해 일한다면, 그것은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한 일입니다. 주인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름대로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서 사랑을 실천했다면, 그것이 곧 노예가 한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없이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선행(善行)은 하나님이 억지로 시키신 노예의 선행(善行)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인사를 잘하지 않을 때, 부모가 아이의 머리를 꾹 눌러서 억지로 인사를 시키는 것은 자발적으로 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숙이는 것은 아이이지만, 실제로는 부모가 인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발적이지 않은 선행(善行)은 하나님의 선행(善行)입니다. 그렇게 선행(善行)한 사람은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집에 가서는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런 선행(善行)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이 될지, 미움이 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것은‘자기의 상(賞)을 이미 받았다’말씀하셨습니다. 즉 세상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음으로써 선행(善行)에 대한 상(賞)은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칭찬받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선행(善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한 일은 모두 당연히 해야 할 것이므로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어서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양과 염소로 나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양은 자기가 선행(善行)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옥에 갇혔을 때, 돌봐 주었고, 병들었을 때, 찾아 주었으며, 헐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고 하시자, 그들은‘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한편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염소는 그런 일이 너무나 시시해서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구원(救援)받은 사람은 자신이 선행(善行)을 행한다는 의식(儀式)없이 선행(善行)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을 의식(儀式)해서 선행(善行)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대단히 만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로(公路)나 업적(業績)을 끝까지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선행(善行)은 마치 형이나, 이모가 대신 그려준 그럼처럼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기억하지 못한 작은 선행(善行)이 혼자의 힘으로 그린 그림이며, 주님은 그것을 칭찬하십니다.
천국의 상급(賞給)이 가지고 있는 모순이 곧 이것입니다. 자기가 선행(善行)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그는 자기의 상(賞)을 이미 다 받았으며,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선행(善行)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고, 자기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상(賞)을 받습니다. 선행(善行)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사람이 생명의 양식을 스스로 먹고 소화를 해냈기 때문에 그의 선행(善行)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에서 아무리 많은 훈장을 받은 사람이라도 남한에 오면 인정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9:2절)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의인(義人)과 악인(惡人),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않은 자의 구별은 인간 스스로 세워 놓은 기준입니다. 어떤 사회든지, 나름대로 의(義)의 기준, 거룩한 것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구별했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배(船)는 1등 칸과 3등 칸은 엄격히 구별되어 서비스도 틀리지만, 배(船)가 침몰할 때는 1등 칸이라고 가라앉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지면, 똑같이 죽습니다. 사회에는 박사와 고등학교 졸업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대단한 학문적 성과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북한에서 받은 훈장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죄인으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도 인간이 만든 기준은 통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환자는 다 같은 환자이지, 박사 환자라고 더 좋은 약(藥)을 주지 않습니다. 또 무식한 환자라고 나쁜 약(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미인(美人)환자라고 수술을 받을 때, 덜 아플까?
그러면 인간의 근본적(根本的)인 문제가 무엇일까?
9:3절)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마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인간의 문제는 유식(有識)하거나, 무식(無識)하거나, 종교(宗敎)가 있거나, 없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마음에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악(惡)과 광기(狂氣)의 두 가지로 크게 요약됩니다.
먼저 사람의 문제는 본성(本姓)에 있습니다. 사람은 본성(本姓)이 부패(腐敗)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악(惡)한 생각이 마음에 흘러 들어와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마치 뚜껑이 열린 하수구(下水溝)와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곧 이렇습니다.
마치 구정물 통처럼 수시로 악(惡)하고 추(醜)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자동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 문제로 고민을 가장 많이 한 사람들이 불교(佛敎) 도(道)입니다.
이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세상을 멀리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면, 세상의 욕망(慾望)이 가라앉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세상적인 접촉을 멀리하고, 수양(修養)하면,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휘저으면, 다시 혼탁(混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생각이 항상 악(惡)하다고 말합니다.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은 물처럼 보일 때도 휘젓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시 흙탕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두 번째 문제는 광기(狂氣)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미친(狂) 짐승이 한 마리씩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때는 괜찮다가도 자극(刺戟)을 받기만 하면, 완전히 엉뚱한 사람이 되어 통제되지 않는 분노(忿怒)와 감정(感情)으로 미쳐(狂) 날뜁니다. 즉 욕망(慾望)을 억제하거나, 아픈 부분이 건드려지면, 완전히 이성(理性)을 잃고, 미친(狂人)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罪)를 짓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순간적인 광기(狂氣)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멸망(滅亡)하는 것도 이 두 가지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하나님에게 버림받게 하고, 죄(罪)의 올무에 묶어서 영원한 멸망(滅亡)에 내던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인 신분(身分)이나, 명예(名譽)와 상관없이 모두 죄수(罪囚)이며, 죄(罪) 중에 살다가 모두 영원한 멸망(滅亡)에 던져지는 운명(運命)에 처해 있습니다.
Ⅱ.살아 있는 자의 유익
인간의 불행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罪人)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것을 인간은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바로 하나님의 저주(詛呪)아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과 동시에 영원한 지옥(地獄) 불 땔감 심판에 던져집니다. 이런 인생을 비유로 표현하면, 감옥에서 태어나, 평생 감옥에서 살다가, 나중에 사형(死刑)당하는 죄수(罪囚)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얼마나 재수가 없습니까? 그런데 전도자는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사람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유익(有益)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직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9:4절)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살아있는 개(犬)와 죽은 사자(獅子) 중에 어느 쪽이 낫습니까? 당연히 죽은 사자(獅子)보다 살아있는 개(犬)가 훨씬 낫습니다. 죽은 사자(獅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아무리 힘센 사자(獅子)라도 일단 죽으면, 자기보다 못한 짐승들이 와서 살을 뜯어먹어도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개(犬)는 아직 돌아다닐 수 있고, 떡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이 비유를 드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무리 인간의 삶이 의미 없고, 허무하다 해도 죄에서 해방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기회만 노리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만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찬스를 잡으면 아무리 헐벗고, 못살아도 인생은 충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기회를 말합니까? 곧 복음을 듣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죄 사함을 받는 기회입니다. 이것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죽은 후에는 영원한 지옥에 가야하는 저주(詛呪)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영화(映畵)〈쇼생크 탈출〉에는 오랫동안 감옥에 살다가 가석방된 사람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관에서 자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감옥이 아무리 좋아도 자유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복음(福音)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회만 얻는다면, 노예나, 장애인으로 살든, 말든, 모든 고생과 설음을 갚고도 남는 축복(祝福)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한 번의 결단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것만 잔뜩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죽은 사자(獅子)입니다. 아무리 돈과 명예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죽은 사자(獅子)는 다른 짐승에게 살을 뜯기고, 형체도 없이 사라질 뿐입니다.
복음(福音)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돈도, 학벌이 없어도,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름답고 가치 있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68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얻는 것보다 큰 축복(祝福)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 있다는 것만큼 감격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자(獅子)가 아닙니다. 껍데기만 남기는 호랑이도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자유롭습니다. 얼마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축복(祝福)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꿈일까? 생시일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옥(地獄)에는 전도(傳道)란 없습니다.
9:5-6절)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이 없느니라.”
인간은 오직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뜻대로 살 기회가 있습니다. 세상에 주어진 은혜는 죽으면, 모두 거두어집니다. 그 후에는 영원한 절망과 저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옥(地獄)에서는 자살(自殺)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이것뿐입니다.
인생에 기차를 갈아 탈 기회가 있다면, 지옥으로 가는 열차에서 생명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는 것뿐입니다. 복음성가 1709장 *구원열차*
Ⅲ.하나님 뜻대로 사는 인생
사람이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할까? 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모든 길을 가 봅니다. 아직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길을 찾은 사람은 서두르거나,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곧바로 가기만 하면, 목적지가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마음에는 깊은 만족감이 있습니다. 이제 올바른 길을 찾았고,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헛되이 탕진하지 않고, 풍성하게 사는 방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9:7절)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복된 것은 부(富)와 권력(勸力)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생의 목적을 찾는 이것입니다.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삶을 받으시기 때문에 자기가 하려고 몸부림 칠 필요가 없습니다. 주어진 일에만 열심히 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길을 찾은 성도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살다보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집에 믿을 만한 청지기가 있는 사람은 골치 아프게 재산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냥 버는 대로 주기만하면, 청지기가 계산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 삶을 책임지십니다. 사실 너무나도 죄송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드려야 할 텐데, 하나님이 우리 삶을 책임지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애써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뒤만 따라가기면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앞질러 가는 일만 하지 않으면, 언제나 안전합니다. 언제나 기쁘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을 빼앗길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죄만 짓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미 축복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세 가지를 이렇게 당부합니다.
9:8절)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첫째, 깨끗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는 이것입니다.'의복을 항상 희게 하라’는 것은 행실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성도(聖徒)는 하나님이 주신 의(義)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의(義)의 옷을 더럽히면, 안 됩니다.
여성들이 흰옷을 입으면, 더러운 것이 묻을까봐 언제나 주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의(義)의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얼마나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 지느냐? 는 것보다 죄짓는 길은 아닌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지는 않는지? 에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향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언제나 성령 충만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령 충만은 명령(命令)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자신도 죄짓고, 다른 사람들도 시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9:9절)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分福)이니라.”
둘째,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어진 행복에 자족(自足)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어지지 않은 축복(祝福)을 나뿐 정권과 토개공처럼 탐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악(邪惡)한 일입니다.
또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탐낼 이유가 없습니다.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심(慾心)이 끝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면, 욕심(慾心)을 죽여야 합니다. 함께 늙어 가는 아내로 만족하고 천국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정욕대로 행하고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든지, 본인이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이 욕심(慾心)을 죽이는 것이 바보 같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현명한 일이 없습니다. 끝없이 욕심(慾心)부리면, 욕심(慾心)을 채운 만큼 지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또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더욱 주십니다. 그때 받아야지, 먼저 욕심(慾心)을 내면 안 됩니다.
물론 인간은 원하는 바를 기도로 간구할 수는 있지만, 기도 끝에는‘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좋습니다.’라고 단서를 덧붙여야 합니다.
9:10절)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犬)(獅子)(滅亡)
셋째,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그것이 곧 우리의 분복(分福)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 정반대로 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실 것입니다. 오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해도 충분히 잘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을 너무 아끼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죽은 후에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몸은 세상에 있을 때만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몸은 사용해야 좋고, 영광을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좋은 것일수록 쓰고, 새것으로 바꾸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상(賞)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몸을 사용한 경우입니다.그러므로 몸을 사용하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즉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몸으로 봉사하는 일을 하십시오. 그것이 상(賞)받는 길입니다.
몸뚱이 잘 아껴 놓았다가 뜨거운 지옥 불에 땔감이 되면, 얼마나 후회될까? 세상에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자기 몸을 사용하는 사람이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평생 썩어 없어질 헛된 것만 찾다가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壬寅年↔癸卯年 셀(cell)가족 공동체가 할 수 있는 것만 자발적으로 합시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천국의 상급(賞給)받기에 충분합니다.아-멘
찬송가 492장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새벽(冬)5-6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보물 쌓을 교갱원 創立member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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