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여행 인터넷 언론 ・ 1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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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전 노원문화재단 이사장)
내 책상 위에는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모조품 한 점이 올려져 있다. 실물 크기로 주문 제작하여 구매하였는데 모조품이긴 하나 거의 실물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기에 바라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넋을 잃곤 한다. 그래서인지 내 집무실에 들르는 사람마다 나의 백제금동대향로를 탐내는 이가 많다.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충남 부여의 능산리 절터 발굴조사에서 발견되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 61.8㎝, 무게 11.85㎏, 몸체 지름 19㎝로서 예술적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문양 하나하나마다 심오한 뜻을 품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진: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크게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똬리를 튼 용의 몸통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와 연꽃 모양의 하단부, 온갖 잡상(雜像)으로 이루어진 전설 속의 봉래산(蓬萊山)으로 이루어진 상단부가 이어진 몸통, 그리고 상단부 맨 꼭대기는 힘껏 날아오르려는 봉황,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머금은 백제금동대향로
하단부의 용은 연꽃 줄기를 입에 물고 거대한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형상을 보인다. 몸체의 하단부가 물고기와 짐승, 그리고 신선이 새겨진 연꽃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백제금동향로가 불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를 보호하는 상상의 동물인 용과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연화화생관(蓮花化生觀)을 표현한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크게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향로 덮개의 꼭대기인 몸체 상단부의 봉황은 보주(寶珠)를 딛고 서 있고, 보주 아래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도교에서는 용은 음(陰)이요, 봉황은 양(陽)이니 도교(道敎)의 음향 오행설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몸통의 상단부에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산봉우리마다 신성한 새가 한 마리씩 앉아있고 산봉우리 안쪽에는 다섯 명의 악사가 악기를 들고 연주하고 있다. 여기에는 예와 음악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유교적 예악사상(禮樂思想)과 국가와 왕실을 보호하고자 삼산오악(三山五嶽)을 중심으로 지내는 유교식 산천제의(山天祭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 아래로는 첩첩이 산을 이루고 신선들과 산신들, 갖가지 짐승과 신성한 나무, 기암과 폭포와 냇물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향불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봉황의 가슴 상단에 두 개의 구멍과 몸체에 구멍을 5개씩 2단으로 뚫어 놓았다. 이것은 도교의 음양오행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크게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상단부의 봉래산 형상은 우리의 전통무대 '산대(山臺)'를 형상화
전통공연예술 전공자인 나로서 주목하는 부분은 봉래산 형상의 상단부이다. 지금껏 백제금동대향로를 분석한 학자들이 아무도 주목하거나 언급하지 못했지만 전통공연예술을 전공한 나의 눈에는 백제금동향로의 상단부가 우리의 전통 무대인 산대(山臺)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는 서구의 무대보다 더 격조 높은 입체적인 무대인 산대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 우리 선조들의 공연예술은 뜰이나 대청마루 등에서나 이루어졌던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그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독특하고 아름다운 무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산대(山臺)이다.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를 ‘산대놀이’라 한다. ‘산대놀이’란 산대를 중심으로 하는 탈놀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으나 오늘날 연행되는 산대놀이는 ‘산대’는 사라지고 ‘탈놀이’만 남았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크게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산대(山臺)란 불교의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져 선산(仙山)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산봉우리․나무․꽃․신선이나 기계장치에 의하여 작동시킬 수 있는 인형 잡상 등 조형물이 설치된 우리 고유의 무대를 말한다. 서구가 평면적인 무대를 가졌다면,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입체적인 무대를 가졌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부는 우리 전통 무대인 산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백제 미학과 유불선의 사상이 융합된 백제금동대향로
산대의 역사는 신라 진흥왕 때 시작한 팔관회에서부터 설치되었다는 문헌 기록이 있듯이 고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33권에 실린 시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서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山臺結綴似蓬萊)’라는 구절 또한 산대의 모양이 산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조 성종 19년(1488) 3월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에 적한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시대에는 사신의 영접을 위하여 광화문 밖에 동서로 광화문만큼 높은 거대한 산대를 두 개 설치하여 그 위에서 다양한 공연으로 사신을 영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북경 중앙민족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1725년(영조 1)에 그려진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 奉使圖』 제 7폭에 모화관(慕華館)에서 행해진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연희 장면이 있는데 그림 속에 바퀴가 달린 거대한 예산대(曳山臺)의 모습과 산대에서 광대들의 연행 장면을 볼 수가 있다.
김승국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의 책상위에 놓여져 있는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모조품
백제금동대향로를 종합해 보면,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모두 어우러져 있는 예술품이다. 또한, 유교, 불교, 도교의 공존하고 보완하는 태평성대를 추구하다가 애석하게도 서기 554년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부친인 백제 제26대 성왕을 기리기 위해 백제금동대향로를 제작하게 한 아들인 제27대 위덕왕의 뜻이 담긴 작품이다.
부처님 말씀에 “가마솥에 끓는 국물을 다 마셔봐야 그 맛을 알겠는가? 단 한 숟가락의 국물만 맛보면 알지.”라는 말씀처럼 백제금동대향로 한 점만 보아도 백제의 예술과 사상이 얼마나 찬란하고 심오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문화칼럼니스트 김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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