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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들은 1872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시스트로부터 축출되었다.
그 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아나키스트들이 예언 한대로 마르크시스트들은 권위적인 중앙집권의 권력을 행사하였고, 관료주의에 의한 또 다른 계급을 형성하였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시스트들은 그들이 경멸해 마지않았던 자본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변형시킨 것에 불과했다.
20 세기 이후 아나키즘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의 정신은 지구 상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권력 속에서도 또는 자본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말없이 자신의 역할을 해왔다.
20 세기의 파리코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잠시 동안의 소비에트 체제에서의 직접민주주의와 스페인 내전에서의 아나키스트들의 활약,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와 싸우다 이름 없이 사라졌던 수많은 게릴라들.
아직까지 남아있는 지구 오지의 전통의 부족사회, 그리고 협동조합 정신, 지방자치, 노동조합의 직접행동, 자생적으로 생겨난 도시 달동네의 공부방, 대안학교, 정부의 도움 없이 회원들만의 힘으로 꾸려나가는 시민단체, 기업의 노동자 경영권 등, 수 없이 많은 공동체 정신에 아나키즘은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
내가 현실 정치의 정당원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아나키스트로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아나키즘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구체적 실천력을 현실 정책에 단 한 줄이라고 새겨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실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속에서 아나키즘은 스스로의 역할을 해야 된다는 절박감에서였다.
아나키즘은 현실 정치에서 각 분야의 문제점과 갈등을 명쾌하게 풀어 낼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기존 정치의 매너리즘과 권위에서 자유로운 아나키즘은 새로운 시선으로 그것에 접근한다.
교육, 생태, 소비, 노동, 인권 등 진보가 고민해야 할 전 분야에 걸쳐 대안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사이의 사상사적 불연속성의 시대에 구체화된 아나키즘은 다양한 모습과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고드윈, 스티르너,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등에 의해 아나키즘의 전통이 형성된 이래 아나키스트들은 ‘뒤죽박죽의 혼란된 설교자’ 또는 ‘천진난만한 꿈의 옹호자’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반면에 이러한 아나키즘은 다양한 정치철학적 덕목들을 함께 연결시킬 수 있는 규범적 교의로서도 평가된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은 니힐리스트, 테러리스트, 부르주아 급진주의자로 비춰지는가 하면 자유주의자, 평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연주의자로 비춰지기도 한다.
아나키즘은 바다로 향하여 흐르는 강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각의 여러 구멍을 통해 스며 나오는 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땅속을 흐르는 지하수의 흐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물이 모여 연못을 이루기도 하고, 지면의 갈라진 틈새로 분출되기도 한다.
이렇게 교의로서 또는 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은 끊임없는 변동 속에서 생성되고 붕괴된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사라지지 않고 잠복되어질 뿐이며, 계기적인 맥락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아나키(Anarchie)란 용어는 종래에는 무질서, 혼돈의 동의어로서 이해되어 왔으나, 프루동이 이 용어를 역설적으로 채택하여 그의 사상을 표상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나키란 용어의 어원에 근거하여 혼돈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논쟁의 혼란을 더욱 조장하는 익살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 바쿠닌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아나키는 거대한 혼란이면서, 동시에 자유와 연대성에 기초를 둔 새롭고 안정된 합리적 질서를 표상하는 역설의 용어였다.
한국에서는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어 한동안 쓰여졌는데 이것은 일본인의 번역을 차용했는데서 비롯된다.
무정부주의로의 번역은 일제가 아나키스트를 탄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 일본에서도 무정부주의가 아나키즘을 표상하는 용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원음을 그대로 쓰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나키즘이란 원음을 그대로 쓰기도 하고 자유사회사상(운동), 자유공동체주의(운동), 자주공동체운동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제 독립투쟁기에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와 함께 아나키즘의 기치아래 독립운동을 한 우관 이정규는 해방이후 ‘자유사회운동’이란 이름으로 아나키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아나키즘은 이데올로기적 분광도에 다양하게 위치하고 있다. 이를 크게 나누어 보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상호주의적 아나키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으로 대별할 수 있다.
다양한 아나키스트 유파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들이 같은 아나키스트로 불리울 수 있는 공통적 특징들이 있다.
이것은 아나키즘 정의론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① 자연론적 사회관 ② 자주인적 개인 ③ 공동체의 지향 ④ 권위에의 저항 등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자연론적 사회관은 다양한 아나키스트를 하나로 묶는 제일 강한 끈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연론적 사회관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자유와 사회적 조화 속에서 살 수 있기 위한 모든 자질을 본래부터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아나키즘의 교의, 즉 권위의 거부, 국가에 대한 혐오, 상호부조, 권력 분산, 정치에의 직접 참여 등은 자연론적 사회관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연론적 사회관은 ‘자연과의 합치’를 강조한 우주론적, 자연론적 정의관과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자연권 사상의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개인과 자율’ 또는 ‘자주인으로서의 개인’의 문제는 아나키즘의 정의관 형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개인의 자주성과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흔들어 놓고 있다. 자주인적 개인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이 미르크스주의와 갈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아나키즘의 사회인식 체계의 밑바탕에는 ‘공동체’라는 주제가 깊게 깔려 있다.
공동체적 삶의 지향 문제는 ‘자주관리’라는 것을 아나키스트의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케 한다.
아나키스트의 집요한 국가에 대한 공격과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감도 이와 관계가 깊다.
오늘날 ‘자주적 소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아나키스트의 주장은 매우 예언적 성격을 띤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나키즘은 어떤 사상보다도 저항적인 기질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아나키스트들의 사회인식 체계의 밑바닥에는 본능적인 저항감이 깔려 있다.
그들은 우선 반항자로 규정되고 있다. 이 저항의 태도는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자유를 증대하고 전인적인 개성의 함양은 먼저 기존의 권위에 대한 저항과 밀접한 관개를 갖는 것이다.
알란 리터는 아나키즘의 목표를 ‘공동체적 개체성’ (Commual Individuality)으로 단일 명제화하고 이를 추구하려는 아나키스트들의 계획들을 분석하면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와는 다른 아나키즘 나름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자주적 개인과 공동체를 결합시키는 구도는 그것이 실천 프로그램으로 화할 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난하면서 자유주의로 남아있길 원하고,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면서 사회주의자로 남아있길 원한다.
그래서 아나키즘 속에서 환상이 가득찬 사회인식의 풍요한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리라.
교육에서는, 공교육에 대해 새롭고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공교육 대신에 교육 공동체를 주장한다. 물론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자립은 불가능하지만, 무상교육에 대한 경제적 문제는 국가에서 걷은 세금으로 해결한다. 따라서, 공교육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되겠다.
학교 등급, 초등, 중등, 고등, 대학의 구분도 사라진다. 자기의 학습 능력에 따라 마음대로 어느 학교든 들어가고 나올 수 있다.
학교의 등교 하교 시간 졸업식 입학식 조회 등도 사라진다.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이다.
단, 하나 강력한 것이 있다. 교육 공동체. 모든 것이 선생과 학생과 학부모에 의해 결정이 된다.
그 결정에 따라 교실 안에서 교사는 왕이다. 이른 바, 교권의 교실로 돌려주자는 것이다. 학습 진도나 교과 내용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교실에서 벌어지는 학생과 교사에 맡겨진다.
학교가 휴교하고 방학하는 것도 교육 공동체에서 결정한다. 국가가 하는 일은, 무상교육에 대한 경제적 지원 뿐이다.
교육 내용은 사회적인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기본 덕목뿐이다. 강요된 이념 같은 것. 한쪽에 치우친 역사 같은 것은 사라진다.
기능 교육은 학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기업이 아닌 사회적이 기업에 들어가 교육을 받는다.
예를 들어, 국가와 자본에 의해 망가진 쌍용자동차가 사회적인 기업으로 되고, 그런 회사 자체 교육 시스템으로 사회에 필요한 기능인을 양성 하는 것입니다.
기능에 대한 교육은 현지 기업에서 하는 교육이 가장 현실성 있고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생태에 있어서, 현대의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에코아나키즘(사회생태주의)으로 발전 할 수밖에 없다.
에코아나키즘(사회생태주의)는 근본생태주의가 가지고 있는 추상성을 극복하고, 생태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보고자 하는데서 출발하였다.
즉,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구체적인 사회 제도와 관행을 변혁해야만 지구촌의 환경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 문제를 사회 문제와 분리하여 접근하는 것은 환경 위기의 원인을 왜곡시킬 뿐이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서 환경 문제가 야기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에 존재하는 계층화, 계급화와 위계구조 그리고 이들 사이의 지배-피지배라는 사회적 환경이 환경위기를 초래했다고 본다.
북친(Murray Bookchin)은 오늘의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사회 모두에게 최대의 자유 영역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북친이 추구하는 생태 윤리는 바로 에코 아나키즘의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제거를 통해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종식시킴으로서 이루어 진다.
그 결과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 확보와 인간과 자연의 하나됨이다. 이것은 윗 단락에서 상술한 아나키즘의 이론이 사회생태론과 결합한 것이다.
에코-아나키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변증법적 자연론이 사회생태론의 철학적 기초로서 등장하게 된다.
자연은 생태계의 법칙에 따라 변화성, 복합성, 상보성, 자발성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 과정에는 참여와 진화라는 기본 원리가 작용한다. 이러한 기본 원리에 의해 참여 자치의 공동체와 생태친화적 도덕 경제의 실천 문제가 나온다.
소비에서는, 신자유주의 자유무역협정에 대항하는 자립경제의 실현은 아나키즘이 가지고 있는 자치정신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소비운동은 생태운동과 결합하여 자본주의에 의해 망가진 경제적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 요체는 선거의 유무와 경제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양식에 관련한 지역주민의 자치에 있다.
따라서 무역과 자급을 둘러싼 논의는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실현가능한 소비운동은 수 없이 많다. 공정무역 제품 사주기, 재래시장 이용하기, 생협운동, 도농 소비 공동체등 생태와 소비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노동에 있어서,
직접행동은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행동 양식이다. 직접행동의 대표적인 것이 생디칼리슴이다.
파업, 태업, 준법투쟁, 사보타주, 총파업 등 공장의 다양한 전투적 저항 방식과 관계가 있다.
생디칼리슴은 1870 년대 이후, 프랑스 노동운동이 생산자 조합운동으로부터 혁명을 통한 노동 계급의 해방운동으로 전환하면서 정당이나 의회활동을 불신하고 직접행동을 핵심적으로 강조하게 되어 나타난 노동자들의 행동체계이다.
자치, 노동자 경영권, 분권화의 개념들은 직접행동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현대 국가에서의 모든 분야에서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고 통제하고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며,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정을 받아 들이고 통제에 따르고 외부에서 제한하는 선택의 범위 내에서만 행동해야 한다.
직접행동의 습관이란, 우리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그들 기득권층으로 부터 되찾아오는 습관이다. 현장 노동자 경영권은 이런 결정권 공유 조치가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야이다.
노동자 경영권을 현대 산업의 규모나 복잡성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전문 CEO가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기업에서 노동자 자율 경영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사회 자산의 공평한 분배를 가로막는 장애물과 똑 같은 장애물이다.
이것은 바로 권력과 자산의 분배 체제 속에 존재하는 특권층의 이해관계이다.
그러나, 노동자 경영권이 아닌, 노조 경영권에는 반대한다. 노조 경영권은 자칫하면 회사 내에서 또 다른 권력이 들어 설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노조를 만들 수밖에 없는 번거로움이 생긴다.
그 밖에, 용산 참사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은 그나마 남아있던 도시 공동체를 완벽하게 말살 시킨다. 도시 계획은 거주민들의 의견은 무시된 위로부터의 행정 편이주의의 결과다.
도시계획이란, 부유층과 권력층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수많은 방법 중에 하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아나키즘의 직접행동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선언적 의미로서만 존재하는 스쾃운동이다.
스쿼터 공동체(집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이미 집 없는 가난한 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전락한 도시계획에 맞서는 아나키즘 실현의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거대한 틈 속에서 아나키즘의 정신은 모든 담론에 상상력을 불어 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 실현방법으로서 대안을 마련해 줄 수 있다.
진보 좌파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틈 속에서, 아나키즘은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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