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55
6월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bA3kqKK-Kc (김준정 리차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때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부르십니다!>
요즘 들어 깜박깜박하는 일이 무척 잦아졌습니다. 더불어 이것저것 잃어버리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나름 귀중한 자료들이 담긴 유에스비도 어디 뒀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 열쇠며 체크카드도 분명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 행방이 묘연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성인이 한 분 계시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이십니다.
잃어버린 물건이 생겼을 때, 안토니오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는 습관의 유래는 볼로냐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안토니오가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시편집이 한 권 있었는데, 그 책 안에는 나름 소중히 여기던 원고들과 메모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토니오는 성당의 자기 자리에 항상 놓여있던 시편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심이 컸던 그는 빨리 그 책을 찾게 해달라는 지향을 두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범인은 수련자였습니다. 그 시편집이 너무 탐이 났던 그는 그 책을 챙겨서 수도회 밖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안토니오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던지, 그 수련자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 시편집을 안토니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시편집은 오늘날 볼로냐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답니다.
1195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해서 대 성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4세 되던 1219년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런데 서품된 지 1년이 지난 1220년 안토니오 생애를 크게 뒤흔드는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포르투갈 왕은 모로코에서 선교활동 중에 순교한 다섯 명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유해를 포르투갈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토니오가 생활하고 있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된 것입니다.
안토니오는 틈만 나면 순교자들의 유해 앞으로 다가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안토니오는 깊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토니오야! 지금 잘 갖춰진 수도원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지내는 것도 좋지만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수사들처럼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도 중요하단다.”
안토니오는 용기 있게 수도원 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를 보물처럼 아끼던 원장과 다른 형제들은 가슴 아팠지만 그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를 놓아줍니다. 정들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 한 연로한 수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페르디난도! 그럼 부디 성인이 되십시오!”
주체할 수 없는 안토니오의 순교 열정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자신의 영성의 고향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는 송구스런 일이었지만 프란치스코회로 적을 옮기게 되지요. 그리고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북아프리카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페르디난도였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더 크게 쓰시기 위해, 더 충만하게 살도록, 더 큰 물로, 더 위험한 곳, 더 필요한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안토니오 역시 순교자들의 불같은 신앙과 당대 큰 영성의 흐름이었던 프란치스코 영성에 깊이 매료되어 말을 갈아타게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은둔과 기도 속에 살던 안토니오가 어느 날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우연찮게 서품식 미사 강론을 안토니오가 맡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시작하자 청중들은 갑자기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토니오가 누군지도 잘 몰랐기에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강론은 깊이가 있을 뿐더러 열정과 논리를 겸비했었습니다. 호소력까지 대단해서 그의 강론은 사람들을 완전히 매료시켰습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을 파악한 장상들은 안토니오를 이태리 북쪽 지방과 프랑스 전역의 순회 설교가로 파견합니다. 특별히 안토니오는 당시 신자들을 현혹시키던 카타리 이단에 맞서 교권을 수호하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의 명성은 자자해져서 가는 곳 마다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설교로 이단과 오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지닌 영성의 깊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안토니오 사제의 고해소 앞으로 길게 줄을 섰습니다.
안토니오의 신앙과 교회관이 얼마나 확고했으면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쇠망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강론대에서 선포하는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면 사람들은 ‘전무후무한 설교가’라고 칭했습니다
안토니오가 파도바에 가서 자리 잡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이 도시는 안토니오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특히 안토니오의 1231년 사순절 강론은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킵니다.때로 한없이 감미로웠지만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로웠던 그의 강론은 고리대금업자들을 강하게 공격했고 가난한 백성들을 따뜻이 감싸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도 당신의 특별한 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때로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도록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안토니오에게 하신 것처럼 더욱 완전히 당신을 따르도록 새로운 가치와 인생관을 선물로 주십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킬 수 있으면 지켜봐라!>
성녀 소화 데레사는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선교를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만을 위해 봉쇄 수도원에서 자신을 봉헌하는 것도 소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동시에 이룰 수 있었을까요?
우선 그녀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교회의 특별한 허락으로 갈멜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합니다.
즉 기침을 자주 해서 남들이 옆에 앉지 않으려는 수녀님 옆에 앉는 것, 앉을 때 등을 의자에 기대지 않는 것, 빨래할 때 다른 수녀님 때문에 물이 튈 때 피하지 않고 맞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런 작은 희생들 외에, 선교를 위해 다른 일은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10년의 짧은 삶을 봉쇄수도원에서 산 소화 데레사에게 ‘선교의 주보성인’이란 칭호를 내렸습니다. 직접 발로 뛰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이 선교의 주보성인이셨지만, 이젠 소화 데레사도 대등한 선교의 주보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게다가 소화 데레사를 ‘교회학자’로 임명합니다. 여자 성인들 중에 교회 학자로 임명된 분들은 시에나의 카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에디트 슈타인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분들처럼 신학서적이나 사적계시 같은 책을 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교회학자라는 칭호까지 부여받게 되었을까요?
바로 소화 데레사의 ‘지혜’ 때문입니다. 참 지혜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면 그분께서 대신 다 해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고 하다가 그분의 도움을 약화시키게 됩니다.
소화 데레사가 가장 보잘 것 없고 힘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기와 같아서 계단 하나도 오를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공로를 드리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최선을 다해 계단을 오릅니다. 그러나 자신은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릅니다.
하느님께서 소화 데레사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아시고는 그를 집어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먼저 올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그런 곳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지혜인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신자분으로부터 “그 사람이 평판도 안 좋고 돈도 갚지 않을 것 같은데도 꾸어달라면 다 꾸어주어야 하는 건가요?” 란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그러니 달라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주고 꾸어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다 꾸어주어야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됩니다.
또, 오른 뺨을 맞거든 기꺼이 왼 뺨도 대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에게 속옷을 빼앗아가기 위해 재판을 걸어오면 그냥 겉옷까지 몽땅 주라고 하십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불경한 눈으로 사람을 보아서도 안 되며, 화를 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간음하는 것이고 살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 말씀을 모두 지켜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계명을 지키려 한다면 결국 잘 지키지 못해서 구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계속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말씀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마라.”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즉, 율법을 잘 지켜 구약을 성취하여 구원받으려는 이들이 개와 돼지입니다. 그 개와 돼지에게는 거룩한 것, 진주, 즉 그리스도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 보속을 해서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피는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고해성사 때 보속을 하지 않아도 죄는 바로 용서받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는 것은 우리 행위나 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속을 하는 이유는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금 나누어 졌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자신이 그 십자가를 절대 질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을 말씀하시면서 지킬 수 있으면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 지키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키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아닌 세리와 창녀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지해야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것들도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것입니다. 바오로는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마 3,20)
즉,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이 어려운 계명들을 지킬 수 없는 인간임을 겸손하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지, 이 계명들을 열심히 지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계명들을 지킨다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바로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리처럼 모든 것을 그분 자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행동을 잘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분께서 들어오시면 그분의 힘으로 우리는 이런 어려운 것들까지 저절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마치 고정원 씨처럼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나 자신도 엄청난 죄인임을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힘으로 지킬 수 있으면 한 번 지켜봐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 “예,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38-42: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윤리를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구약성경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행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본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된(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원래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는 규정이 아니라, ‘공적인 처벌’에 관한 규정이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거짓 증언’에 대한 처벌 규정입니다(신명 19,21).> 그리고 이 규정은 ‘과잉 처벌’을 하지 말고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라는 규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원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사적인 복수’를 할 때의 근거 규정으로 악용했습니다.
구약시대를 ‘사적인 복수’가 허용되었던 시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적인 복수’는 그 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카인’의 경우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내린 벌은 사형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창세 4,11-12) (이 벌은, 오늘날의 ‘종신 징역형’과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사형을 선고하시지 않고 종신형을 선고하신 것은, 카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카인은 그 형벌이 너무나 크다고 말하면서,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창세 4,13-14) <카인은 하느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카인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아벨의 후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벨의 후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있었다면 카인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우리는 구약시대 때에 ‘도피성’ 제도가 있었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에, 사적으로 보복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식 재판이 열릴 때까지 가해자를 보호해 주는 곳입니다.(신명 19장)
예수님께서는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신 하느님의 뜻을 재확인하시면서, 그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적극적인 사랑 실천으로 악을 물리치고 악인들을 회개시키라고 가르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인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라.”이고, 이 말씀은 “악인에게 ‘선으로’ 맞서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법제도와 공적인 처벌을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법제도와 공적 처벌 제도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제1독서에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의 악행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왕과 왕비를 ‘탄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여기서 중간에 인용되어 있는 말은 잠언 25장에서 온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라는 가르침은 구약시대 때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17) 회개시키기 위해서 꾸짖고 타이르는 것도 사랑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재판 장면이 연상됩니다. 재판 도중에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요한 18,22) 그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 대신 것이 아니라, 경비병을 꾸짖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 18,23)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셨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모순이 아니라, 그 경비병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사랑으로’ 타이르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또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라는 말씀은, “그가 죄를 짓기 전에 먼저 사랑을 주어라. 그래서 그의 죄를 미리 막아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하게 된 경우에, 그를 굶주림 속에 방치한 사람들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도둑질과 강도짓을 예방하는 일이 됩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는 “사랑을 주기를 거절하지 마라.”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유튜브를 통해서 ‘미국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정학적으로 축복받은 땅이라고 합니다. 영토를 넓히는데 전쟁을 하지 않고 넓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전쟁 후 영국은 배상금으로 당시 미국 13개주의 영토만큼이나 큰 땅을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의 영토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미국의 영토는 이내 4배로 커졌습니다. 멕시코와 거래를 통해서 많은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텍사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동부에서 시작한 미국은 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동부에는 대서양, 서부에는 태평양을 바다로 둔 나라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알라스카를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하와이는 미국의 한 주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역사를 보면 짧은 시간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큰 전쟁도 없었습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은 미국을 보호하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미국과 혈맹관계에 있고, 멕시코는 미국 경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에 미국의 안보에 위험을 주지 않습니다.
축복받은 미국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상식과 이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작은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사냥입니다. 평온한 마을에 아이둘이 아팠습니다. 의사는 마귀에 들린 것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저주한 사람들을 찾아내면서 평온한 마을은 광란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마귀로 지목을 받으면 재판을 받아야 했고, 죽어야 했습니다. 흑인과 유색인종을 아무런 이유 없이 차별하고, 폭력을 가하고 죽였던 ‘KKK'단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를 벌였습니다. 선량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메카시의 열풍도 있었습니다. 반지성주의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나타났습니다. 코로나 초기에 미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의학과 과학의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였고, 백신접종을 거부하였습니다. 첨단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땅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축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는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원하면 하느님께서는 왕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사명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의 곁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셨고,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병자를 고쳐주도록, 마귀를 쫓아내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에도 반지성주의의 역사가 있습니다. 야곱은 부당한 방법으로 형인 에사오의 장자 상속권을 가로챘습니다. 다윗은 부당한 방법으로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의 부당함을 지적하였고, 다윗은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부당한 방법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에제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합도 회개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아합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반지성주의의 그물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도 깊게 드리워졌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고, 도망갔습니다.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고발하였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재판하였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간구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땅의 축복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반지성주의의는 교만과 오만한 마음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납니다. 반지성주의가 자라나는 곳은 축복받은 땅마저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감사와 겸손에서 드러납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사막에서도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감사와 겸손이 있다면 이 땅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당신은 나쁜 짓 하는 자 모두 미워하시고, 거짓을 말하는 자를 없애시나이다. 피에 주린 자와 사기 치는 자를, 주님은 역겨워하시나이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 복수법’은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한 고대 근동의 옛 법전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도 언급된(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구약의 가르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연하다고, 마땅히 정의롭다고 생각하던 기존의 가치를 넘어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시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과거의 가치관과 편견, 세상의 소리를 초월하여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악에 대해서 그저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적극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도록 하십니다.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당하기나 합니까?” 하고 반문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당신 십자가의 길에서 이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기존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소리에 파묻혀, 당한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때때로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홀로 매달려 계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그분을 조금이라도 더 닮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정황래 시몬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현명하고도 공정한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른바 ‘동태복수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이가 그것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거나 그 피해자와 화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경우, 피해를 입은 사람이 그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보복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바로 이 ‘동태복수법’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이 ‘동태복수법’은 기원전 450년 경의 로마법의 모체인 열두 개의 동판에 새겨진 법조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지만, 이미 그 이전 시대의 고대 사회의 수많은 법 규정에서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발견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된 법의 집행 방법이 바로 ‘동태복수법’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에서 드러나는 ‘동태복수법’은 어긋난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 ‘복수’는 악을 악으로 무찌르고, 하느님의 정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의 복수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확대, 적용되어 집행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수’는 정의의 궁극적인 실현자인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태복수법’의 근본취지는 하느님의 정의에 어긋난 행위를 한 이에게 그의 행실대로 똑같이 갚아주어 깨어진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고, 하느님의 정의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이 법은 사전에 범죄를 예방하는 ‘함께함의 법’이었고,
또 상대방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 이상으로 보복하여 이른바 복수’의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막는 ‘정의의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법은 ‘함께함’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 결국 범죄의 악순환만을 불러 올 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법의 완전한 폐기를 강력히 선언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네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며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라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얼굴을 헤아리다’, 또는 ‘얼굴을 밝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를 ‘용서 한다’는 것,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살피고 헤아린다’는 것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더욱 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고,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 용서를 하는 사람 모두의 얼굴을 밝게 해 줄 것입니다.
단순히 나한테 죄지은 사람, 잘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얼굴을 밝게 해 주는 ‘용서’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모두를 함께하게 해줍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를 함께 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스스로 먼저 잘못된 점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심원택 토마스 신부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주님께서 들려주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자니 난감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고 하시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고 하는 탈리오 법칙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다면 똑같은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 탈출기 21장 22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싸우다가 …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동태복수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칙은 우리 삶의 윤리로써 자리 잡고 있으며, 은연중에 이러한 논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태복수법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무자비한 율법으로 간주되어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 법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에게 사사로이 복수할 권리를 주는 법률이 아니라, 법정에서 재판관이 벌을 주되 그 형량이 그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재판관을 위한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의 배경에는 ‘복수의 한계가 거기까지다’라고 하면서 한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복수를 신중하게 제한한 것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법이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에 손을 드는 사람은 없겠지만, 누군가로부터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경우 제한적으로나마 그 댓가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이 법을 들어 말씀하시면서,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 만큼만 복수하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제한된 복수까지도 금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시면서 맞음으로 오는 모욕과 멸시까지도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손등으로 뺨을 맞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손바닥으로 뺨을 맞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손등으로 뺨을 맞을 땐 그 배 이상의 멸시와 모욕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까지도 참아내면서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으라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남아날 뺨이나 겉옷이 어디 있겠으며, 두 다리가 성할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겁나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왼뺨’, ‘겉옷’, ‘십리’는 예수님의 온유함과 평화의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온유함을 닮음으로써 참된 평화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라시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서 손해를 손해로 되갚지 않는 의인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실 남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받은 만큼 갚아주면 속이 풀릴 것 같지만 오히려 앙갚음은 내 마음을 더욱 망가뜨리고 괴롭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총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은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꾼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없는 말을 하고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오히려 희생하고 손해 보며 그 마음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주님의 의로움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광주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동태 복수법으로 알려진 이 표현은 어찌 보면 가장 공정한 법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그와 똑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나 물건으로 그것을 교환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말이 섬뜩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똑같이만 갚아 준다면 잘못된 것은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갚아 주는 것은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이 정당하지도 않고, 평화로운 방법도 아님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받은 상처는 크게 새기고, 자신이 입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똑같은 상처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주고받아야만 공정한 계산이 되는 경제적, 법적 관념에서는 한없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사랑은 사랑을 낳고, 복수는 복수대로 확대 재생산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계산기를 가지고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께서 보여 주신 죄 없는 수난과 죽음의 모범에서 찾아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무도 아프지 않게>
마태오 5,38-42 (폭력을 포기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아무도 아프지 않게>
스스로든 그 누구든
아무도 아프지 않게
나를 아프게 한 이를
똑같이 아프게 한다면
나에게든 그에게든
아픔은 있는 것
나를 아프게 한 이마저
아프지 않게 품을 때에
나에게든 그에게든
아픔은 사라지는 것
스스로든 그 누구든
아무도 아프지 않게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든데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오늘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성인 중에 한 분이신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와 성 십자가 수도회를 거쳐, 모로코에서 순교한 작은형제회 수사 다섯 명을 보고, 작은형제회로 옮겨오신 분입니다.
안토니오 성인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파도바에서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안토니오 성인의 탁월한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파도바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안토니오 성인께서 강론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성무일도, 고유독서 참조)
안토니오 성인은 사부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복음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애쓰셨고, 그래서 파도바의 많은 사람들이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성 안토니오처럼, 지금 여기에서 행동으로 믿고 행동으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를 뛰어난 설교자요 곤경 속의 전구자로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도움으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본기도)
안토니오 성인은 '곤경 속의 전구자'로 알려진 분이십니다. 무엇을 분실했거나, 혹은 영과 육의 고통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안토니오 성인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이시여, 곤경에 처한 저를 도와주소서."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1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씨의 인터뷰 기사 내용 중에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작은 역할만 맡고, 대부분 사람이 날 싫어해 고통스러웠다. 관객들이 야유하며 ‘이혼녀는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굉장히 좋아한다. 이상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다.”
이혼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금 역시 없는 것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정말로 대단했었지요. 더군다나 공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에 대한 공격은 더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윤여정 어록’이라는 글이 회자할 정도로 사람들의 사랑이 아주 뜨겁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이를 틀렸다고,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다면서 못 살겠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나를 변화시키면 그만입니다. 나를 좋아했다가도 금세 싫어하기도 한다는 것, 반대로 싫어했다가도 금세 좋아하는 것이 인간 아닐까요?
따라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그러려니…. 싫어하는 것도 그러려니. 어렵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그러려니….’ 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탈출 21,24; 레위 24,20; 신명 19,21). 상대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라는 말로 대신하십니다. 오히려 더 주라고 하시지요.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치기 위해서는 손등으로 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근동지역에서는 이렇게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는 것이 아주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대로 한다면, 나도 오른뺨을 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속옷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속옷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옷입니다. 밤에 이불로도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또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주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똑같이 반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사랑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에 대해 ‘그러려니’하며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더 멋있는 삶 같지 않습니까?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생활화生活化>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悔改뿐이다-
새벽부터 오랜만에 단비 흠뻑 내리니 새삼 농사는 하느님 농부께서 80% 지으신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이렇듯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은총중의 은총이 회개 은총입니다. 회개하는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얼굴의 성형成形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성형이 이뤄질 때 본래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한 자기를 아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회개하는 순수한 영혼들을 보면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덕聖德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덕은 회심回心과 참회慙悔의 역랑 안에서 자라납니다.”
엊그제 인용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어제 카톡을 통해 어느 자매에세 보낸 격려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죄를 안지어 성인聖人이 아니라, 죄짓더라도 용감하게 회개하고 더욱 열렬히 하느님과 이웃을 한결같이 사랑하며 자기 책임을 다하는 이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성인입니다.”
저는 중요한, 마음에 각인하고 싶은 어휘에는 꼭 한자를 병기倂記하니, 한자와 더불어 보면 마음 깊이 각인되는 느낌이 듭니다. 평소 제가 느끼는 가장 아름다운 행렬은 둘입니다. 미사전례시 가난한 빈 손으로 성체를 모시기 위해 줄 서 있는 장면이요, 매월 첫 금요일 여기 수사들의 고백성사시 줄 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겸허하고 순수한 영혼의 모습들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장점은 “I was wrong!(내 잘못이다!)”의 명수였다는 일화를 잊지 못합니다. 수십년전 읽은 대목인데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정작 필요한 것은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보다 잘못했을 때, 즉시 “잘못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라는 말임을 깨닫습니다. 구구한 변명이나 핑계보다는 이런 깨끗한 사과의 한마디 말이 일거에 마음의 앙금을 해소하여 관계를 정상화시킵니다.
“좌우左右나, 진보進步와 보수保守의 문제가 아니라 정상正常과 비정상非正常,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이 문제다!”
작금의 사회 현실을 통해 통절히 깨닫는 사실입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사자성어를 기억할 것입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일컫는다는 뜻으로 고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행위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너무나 비정상, 비상식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이요 정직하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참으로 정상적, 상식적 사고를 지니게 하는 것 역시 회개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연상됐던 이런 묵상들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회개의 생활화-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이다”로 정했습니다. 오늘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만 36세, 짧은 나이에 선종하셨지만 성인의 향기는 영원히 남아있습니다. 성인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좌표가 되면서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성인이 포르투칼의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에 입회했다가 모로코에서 순교한 작은 형제회 수사들에게 큰 감명을 받은 성인은 작은형제회에 전속하여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지니게 됩니다.
이어 모로코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병으로 인해 귀국하는 도중 파선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에 머물게 되었고 급기야 당대의 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교류하게 되었고 갑작스런 병으로 이태리의 파도바에서 36세 나이에 선종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섭리에 따른 파란만장한 회심의 여정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수많은 기적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인 전설중 하나가 되었고,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의 강론은 ‘성경의 보물창고’,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는 칭송을 들었고, 그레고리오 교황 9세는 ‘신약의 방주’라 칭찬했습니다.
그는 이례적으로 선종 다음 해 그레고리오 교황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946년에는 비오12세 교황으로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됩니다. 특히 성인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참으로 짧은 인생이었지만 성덕에 빛나는 완성의 삶을 살았던, 참으로 치열한 분투의 삶을 살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답을 주는 성인입니다. 바로 회심의 여정에 항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성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일화가 참 황당하게 생각됩니다. 어찌 이런 악행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눈멀게 하는 무지의 탐욕에다 희대의 악녀 이제벨의 악행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죽음, 무죄한 사람, 나봇의 죽음입니다. 어찌 이리 태연하게 살인의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정말 무지의 악의 폐해에 전율하게 됩니다. 다윗 임금에게 죽은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연상케 합니다.
이래서 절박한 회개의 필요성입니다. 무지로부터 정상과 상식의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무지에 답은 단 하나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회개의 생활화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회개한 겸손한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대당명제중 다섯 번째로 보복하지 말라, 폭력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다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참 대단한 내공이요 내적 힘이니 이 또한 회개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인 지혜요 관대한 마음입니다. 악에 대한 겁많고 비겁한 무저항이 아니라 적극적 선행의 실천이요 사랑의 저항입니다. 이렇게 적극적 사랑 실천의 저항으로 악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는, 무력화無力化시키는 이들이 정말 지혜롭고 겸손한, 강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옛 선인들의 지혜도 여기서 연유합니다. 악에 직접적으로 맞서 싸워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악순환惡循環의 반복일뿐이요, 괴물怪物과 싸우다 괴물怪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무지의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끊임없는 절박한 회개와 적극적 사랑 실천의 저항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한 지혜와 겸손이 악을 무장해제 시키고 악의 힘을 무력화합니다. 이래서 수도원처럼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과도 같은 기도와 일이 조화와 균형을 갖춘 일과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 시편 전례기도와 이 거룩한 공동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생활화,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줍니다.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KveHGzXKrI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맞서거나
반응하는 것이 아닌
빛으로 나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빛으로 나가는 삶은
하느님과 관계 맺는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의 삶은
물리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하느님께 내어주는
삶입니다.
우리 힘만으로
무엇인가를
바꾸려했던
교만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 없는
소모전에서
벗어나는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결단또한 중요합니다.
맞서기나
반응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분명 악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악인도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어둠은 빛 앞에서
자연스레
사라질 것입니다.
사라질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길을
악인에 맞서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도록
지키는 진정한
믿음의 힘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