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성장을 그린,
아름다운 수묵 그림책
자연과 인간을 주로 이야기 삼는 작가, 차오원쉬엔의 단편 ‘빨간 호리병박’이 요즈음 보기 드문 먹그림을 입고 그림책 『빨간 호리병박』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바다소』라는 단편집에 실려 처음 소개된 ‘빨간 호리병박’은 중국 작가 차오원쉬엔이 1995년에 집필한 단편 작품으로, 중국 내에서는 이후 여러 판본으로 출간된 바 있습니다.
글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차오원쉬엔의 단편은 그 자체로 유려한 영상미를 갖추고 있으나, 출판사의 의뢰를 적극 수용한 작가가 다시금 그림책 판본 글을 완성하고 국내 그림 작가 김세현과의 협업으로 그림책 『빨간 호리병박』을 출간하였습니다.
수묵이 풀어내는 아름다운 공간 속에, 어느 여름날의 문턱에서 마주친 뉴뉴와 완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사랑인지 무언지 모를 감정, 세상의 굳은 편견과 포용하고 흘러가는 대자연의 시간이 묵묵하게 펼쳐집니다.
뉴뉴와 완의 빨간 호리병박
큰 강을 사이에 두고 강 이편에는 뉴뉴가, 건너편에는 완이 살고 있습니다. 완의 아빠가 유명한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떠도는 작은 마을. 이 마을에서 완은 늘 혼자 노는 아이이며 완의 손에는 이곳 아이들에게 구명 튜브로 통하는 빨간 호리병박이 들려 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뉴뉴에게 큰 강은 집 앞에 있어도 들어갈 수는 없는 곳인데, 완은 그런 큰 강에서 능숙하게 자맥질을 하며 뉴뉴의 시선을 끕니다. 선뜻 말을 걸지 못하는 둘에게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이 찾아오고, 여름은 그 계절다운 온도와 빛과 소리로 둘의 이야기에 근사한 배경이 되어 줍니다.
수묵의 공간 틈틈이 보이는 빨간 점은 뉴뉴와 완의 빨간 호리병박이며, 실제의 기능은 구명 튜브이지만 여름의 기억이자, 성장의 상징물입니다. 완은 호리병박 덕분에 친구를 얻고, 뉴뉴는 호리병박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스스로 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29장의 먹그림에 담아낸
인간의 풍경, 자연의 온기
이 작품의 엔딩 그림은 석양의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빨간 호리병박입니다. 뉴뉴와 완의 여름은 호리병박과 강물에 실려 가고,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처음 생긴 친구한테 더 보탬이 되고 싶었던 완의 호의는 잘 전달되지 않았고, 그 시점에 완에게 덧씌워진 오해와 편견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뒤늦게 완의 진심을 깨달은 뉴뉴가 처음으로 큰 강을 혼자 건너게 되었을 때, 완의 오두막에는 굳은 자물쇠가 걸려 있습니다.
『빨간 호리병박』은 두 주인공이 여름에 겪은 설렘과 즐거움, 이기심, 후회와 미안함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을 붓의 필치와 먹의 농담으로 표현하고, 이들을 묵묵히 감싸고 있는 자연의 온기를 29장의 펼침면에 담았습니다.
작가 차오원쉬엔은 자연의 포용성을 배경으로 유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능숙하고, 그 이야기를 그린 김세현은 시종 원경의 시점에서 인물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작가 모두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이야기를 펼쳐냈기에 그림책 『빨간 호리병박』은 긴 두루마리 그림처럼 흑백의 담백한 흐름 속으로 관람자를 초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