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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인이 제임스 본드 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제2차세계대전 때 맹활약을 한 패트릭 딜-조브를 모델로 작가 이언 플레밍이 007을 만들어냈다고 믿고 있다.
로렌스 엘리엇
이언 플레밍이 쓴 등골이 오싹한 스파이 소설 시리즈에 나오는 용감한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가 우리 가운데 섞여 산다면 그는 아마도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 해변의 한 언덕 위에서 홀로 살고 있지 않을까?
이제 백발에 허리도 약간 구부러진 80대 노신사, 말씨가 부드러운 그런 노신사가 비밀공작원 007일 수 있을까?
자, 이제 한번 살펴보자.
아, 하지만 인생은 소설보다 더 기묘하다.
플레밍을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제2차세계대전 때의 전우 패트릭 딜-조브를 모델로 007소설의 거물급 스파이를 만들어냈다고 이미 오래 전부터 믿어왔다.
물론 스코틀랜드 북부 고원지대인 하일랜드에 사는 그 노신사를 말한다.
물론 다른 여러 가지 영향도 받았다.
보드카 마티니와 손으로 만 담배를 좋아하는 본드의 기호는 사실은 작가 이언 플레밍 자신에게서 나왔다.
소설 속에서 007은 몇 페이지마다 다른 미녀와 침대에서 딩굴지만 패트릭 딜-조브는 일생 동안 오직 한 여성만 사랑했다.
하지만 여기 무언가가 있다. 주의깊게 살펴보자.
패트릭은 제임스 본드처럼 절반은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한 때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여러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나중에 이언 플레밍이 묘사한 소설 주인공처럼 화려한 모험을 서슴치 않았다.
1944년 어느 날 패트릭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이언 플레밍 중령이 근무하는 해군성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해군, 특공대원, 잠수함승무원, 첩보원으로서의 복무경력이 있었으며 아마도 육군 공수대원 자격을 얻은 최초의 영국 해군장교였다.
전직 저널리스트였던 플레밍중령은 자기는 언젠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생각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었는데 당시 노르망디상륙작전의 개시에 때맞춰 최전방 공격부대보다 한 발 앞서 작전에 들어가 적군의 비밀문서와 무기를 노획해 올, 해군 정보장교와 해병 특공대로 구성된 비밀공작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는 패트릭의 반짝이는 푸른 눈빛에서 그가 역전의 용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그를 채용했다.
플레밍과 패트릭 두 사람과 함께 근무했던 BBC방송의 노련한 아나운서 찰스 휠러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제임스 본드의 씨가 심어졌다해도 누가 놀랄 수 있겠습니까?”
패트릭 딜-조브는 1913년 미들섹스주 트위켄헴에서 태어났다.
보병장교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3살 때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용기있는 여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아들을 길렀다.
그들은 서식스 해안에서 살다가 하트퍼드셔주 버크햄스테드로 이사했다.
패트릭은 거기서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잔병이 많아 단체운동에는 서툴렀으며 학교에 출석하는 날보다 알 수 없는 고열로 집에서 앓는 날이 더 많았다.
그가 14살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스위스로 데리고 갔다.
그곳의 산악 공기가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었으며 그는 스키를 능숙하게 타게 되었다.
그는 불어와 영어로 된 책들을 광범위하게 읽었지만 그의 공식적인 교육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소년 시절에 읽은 이야기들 때문에 노르웨이에 호감을 느낀 패트릭은 24회 생일을 맞은 해인 1937년 여름에 길이 11m짜리 스쿠너(두개 이상의 마스트를 가진 세로 돛의 범선=편집자 주) “메리 포천”호를 타고 스코틀랜드를 떠나 노르웨이로 가는 항해길에 나섰다.
갑판과 내부를 자신이 직접 만든 배였다.
자기 어머니를 승무원으로 태우고 그는 2년간 노르웨이 남서쪽의 베르겐에서부터 유럽 북단 해안인 노르카프에 걸쳐 있는 황량한 피오르드(협만)와 섬들을 탐험하면서 지냈다.
패트릭의 어머니는 배를 다루는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밧줄과 쇠사슬과 도르래를 잘 다루었기 때문에 패트릭은 낡은 작은 스쿠너를 거의 혼자 힘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
곧 그는 노르웨이사람처럼 노르웨이말을 잘하게 되었고 노르웨이 서부연안 일대의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었다.
노르웨이와 노르웨이사람들에 대한 뿌리깊은 사랑은 그의 삶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복잡한 물길을 따라 항해하면서 가는 곳마다 자세한 해도를 그렸으며 만약 전쟁이 터지면 그것이 영국 해군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 해도들을 영국 해군성에 보냈을 때 당국자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3년 뒤에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했을 때 어떤 종류의 해도든 절실히 필요해졌지만 그가 그린 지도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편 패트릭은 “메리 포천”호로 북극해까지 항해해 갈 준비를 하면서 배에 또 다른 일손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노르웨이의 트롬쇠에 사는 친구들인 방순드가족에게 부탁했다.
그 집안의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흥미를 느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가장 열렬한 관심을 보여준 어린이는 13살 먹은 소녀 뵈르그였다. 푸른 눈이 크고 패트릭이 이제까지 들어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웃는 소녀였다. 뵈르그는 그해 봄과 여름 동안에 용감하게 뱃사람 노릇을 한몫하면서 쾌활하게 취사실 일을 거들고 키를 다루는 법을 익혔다.
그러던 중 9월초 라디오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메리 포천”호는 트롬쇠로 귀항했다.
그곳에서는 방순드집안 사람들 모두가 나와서 패트릭과 그의 어머니를 전송해주었다. 연안 여객선 편으로 귀국하는 모자의 소유물은 두 개의 옷가방에 넣어 가져갈 수 있을 정도로 줄어 있었다. 여객선이 어둠을 뚫고 영국을 향해 항해하고 있을 때 패트릭은 자기 베개 밑에서 뵈르그가 쓴 종이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거기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1940년 4월, 이제 영국 해군장교가 된 패트릭은 다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노르웨이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북해의 해상 교통로를 확고히 장악하기 위해 중립국인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야만적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래서 연합국은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일단의 파견부대를 북쪽으로 급파했던 것이다.
패트릭의 임무는 이 부대를 북극권 한계선에서 북쪽으로 240km 올라간 히르스타드에 상륙시킨 다음 그들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실어다 주는 일이었다.
패트릭은 친구인 노르웨이인 어부들과 그들의 친구들을 조직해서 100척 이상의 어선으로 수송선단을 편성해서 이 일을 해냈다.
공격목표는 부동항인 나르비크였는데 그곳은 독일군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철광석을 중립국인 스웨덴으로부터 실어나르기 위한 기지로 점령한 곳이었다.
노르웨이인들은 패트릭의 지시에 잘 따랐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패트릭을 신뢰했고 그가 자기네 말을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자기네들이 작전을 수행중이란 사실을 깜박 잊고 고기잡이하러 나가는 것으로 착각할 때면 패트릭이 자기 아버지가 쓰던 오래된 군용 권총을 꺼내 뱃머리 위로 주저하지 않고 발사했기 때문이다.
패트릭이 해군 중위의 계급장이 달린 군복위에 아무런 표지가 달리지 않는 외투를 걸쳐 입고 타고난 지휘관처럼 큰소리로 명령을 내릴 때면 상관들까지 그를 “장교님”이라고 불렀다. 연합군은 나르비크를 탈환했다.
그러나 그곳을 차지한 것은 잠시 동안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 너무나 열세인데다가 시기적으로도 너무 늦게 갔던 것이다. 5월말 연합군은 소수의 병력을 남겨둔 채 철수했다.
곧 나치 폭격기들이 잔류 병력을 몰아내기 위해 하늘을 가릴 듯이 밀려올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월 29일, 그의 오합지졸 어선 함대를 거느리고 나르비크 앞바다에 있던 패트릭은 주민을 소개시킬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가 해군본부에 긴급히 문의해보았더니 엄중한 명령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본부는 그에게 어선들을 예비로 유지하고 있을 것과 민간인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밤이 깊어져 자정이 됐는데도 비상소집된 시의회는 아직도 시민들을 지정된 안전지대로 철수시킬 방법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데오도르 브로치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말한다.
“문쪽에서 떠들썩한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한 젊은 영국인이 나타나서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우리가 모두 시에서 대피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철수하려 해도 배가 한척도 없다고 나는 그에게 역정을 냈습니다.” “배는 내가 가지고 있어요.” 패트릭이 말했다. “어서 철수를 단행합시다.” 엄격한 명령을 무시한 시의적절한 등장, 단호한 자신감, 불운에 빠진 한 도시의 시민들을 구출한 일, 다른 무엇이 그것보다 더 제임스 본드적일 수 있을까? 한 시간 안에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패트릭의 주도면밀한 감독 아래 어선들에 승선했다. “나는 그를 잊지 않고 있어요.” 당시 21세로 언니와 아기인 조카와 함께 피난선에 올랐던 게르드 카를손은 말했다. “육지와 바다에서는 총성이 터져 나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줄지어 서 있었고 주위는 고함소리로 떠들썩했어요. 하지만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과 다정한 악수를 나누었어요. 그가 너무나 침착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난 어디로 실려가는 지도 몰랐지만 두렵지 않았어요.” 그후 이틀에 걸쳐서 4500명의 시민들이 주변의 수로를 따라 흩어져 있는 여러 마을로 안전하게 소개되었다. 6월 2일 이른 아침, 패트릭과 브로치시장은 나르비크의 거리를 함께 걸으며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때는 군병력도 다 철수 한 뒤였다.
하지만 몇 시간 뒤 패트릭이 아직 시내를 떠나지 않았는데 나치 폭격기들이 나타나서 그 도시의 아름다운 목조건물들을 불바다로 만들어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나르비크가 연옥처럼 불타는 광경을 바라보는 패트릭의 마음은 비통했다. 그 도시엔 군사적 가치를 지닐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시민들이 사는 집만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8일, 패트릭은 영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연합군의 패배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노르웨이에 머물면서 레지스탕스(저항운동)를 조직하지 못한 것도 후회되었다. 나르비크에서 해군성의 명령에 불복종한 행위에 대해 곧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라는 연락이 와서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해군성은 군법회의에 소환하는 대신에 그에게 노르웨이 국왕 하콘 7세가 보낸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노르웨이 국왕폐하가 곧 런던으로 올 것이며 패트릭이 나르비크 시민들을 구출한 것을 치하해 그에게 몸소 노르웨이 최고훈장인 聖올라브기사십자훈장을 수여할 것이라는 전갈이었다.
그후 군법회의에 관한 이야기는 다시 없었다. 하지만 패트릭은 일련의 좌천을 거듭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배속된 배들은 상선을 군용 주정으로 개조한 것들로서 주로 남대서양을 누비면서 해안봉쇄선을 깨뜨리려는 적군의 소형 잠수함 등을 저지하거나 연합국의 화물선들을 무사히 항구까지 호송해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는 후에 자신이 집필하여 출판한 책인 “북극 눈보라에서 노르망디 흙먼지까지”에서 자신의 모험에 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이런 모든 임무는 나에게 끔찍할 정도로 단조로운 일이었다.” 그가 이제 전쟁은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루이스 마운트배튼경(卿)이 그를 런던으로 소환해 노르웨이 해역에서의 고속어뢰정(MTB)작전 임무를 맡겼다. 그것은 유난히 위험한 임무였다. 독일은 노르웨이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전력을 그곳에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패트릭은 독일군이 모르는 좁은 수로를 수없이 많이 알고 있었다. 패트릭의 고속어뢰정들은 특공대 공격, 파괴활동 그리고 선박들에 대한 공격 등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같은 작전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방어작전에 치중하게 만들었으며 연합군측 고속어뢰정의 수를 알 수 없어서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아직 대위까지 밖에 승진하지 못한 패트릭은 곧이어 소형 잠수정 파견대로 전속되었다. 1943년 9월, 패트릭은 4명의 승무원에게 독일의 전함 “티르피츠”호가 멀리 떨어진 북극해의 한 후미진 안전한 곳에 정박해 있다고 알려주었다. 소형 잠수정 3척이 적의 전함이 숨어있는 피오르드로 몰래 숨어들어가서 그 함정을 기습공격해 못쓰게 만들었다. 이 공적으로 작전참가자 가운데 2명이 빅토리아십자훈장을 받았다.
단독작전. 그 다음에 패트릭은 무전기를 휴대하고 한 노르웨이 섬에 침투했다. 혼자서 노르웨이의 운하를 오가는 독일군의 군수품 호송방식을 추적하는 정보수집임무에 나선 것이었다. 잡히면 히틀러의 특명에 따라 즉결 처형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3주간 혼자서 순전히 자신의 지혜에 의지해 생존한 당시의 경험이야말로 자기 생애에서 가장 신나는 시간 가운데 하나라고 회상한다. 미리 정해진 약속에 따라 그 섬을 떠나면서 그는 자기를 태우러 온 고속 어뢰정을 자기기 확인해둔 상선이 정박하고 있는 데로 인도해서 2발의 어뢰로 그 배를 침몰시켰다. 섬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것으로 약간은 달랠 수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고 4일이 지난 6월 10일, 패트릭은 이언 플레밍중령이 이끄는 정보타격대인 제30공격부대의 일원으로 노르망디의 유타해안에 상륙했다. 제30공격부대는 적군을 오판케 하기 위한 부대명이었다. 왜냐하면 이 부대는 전투부대로 편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명칭도 해군성의 한 사무실 변호에서 딴 것이었다. 이제 해군 소령으로 승진한 패트릭은 제4조를 지휘하면서 특별 전령을 통해서 플레밍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 제4조는 노르망디, 벨기에를 거쳐 독일에 들어갈 때까지 공격부대보다 앞서 적이 장악하고 있는 영토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독일군의 문서, 무기, 시설들이 독일군이나 연합군의 포격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먼저 손에 넣었다. 패트릭은 그의 임무에 신이 났다. 자기가 마음대로 위험의 수준을 정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전쟁이야말로 그가 싸우고 싶어했던 종류의 전쟁이었다. 그는 수많은 자료와 노획 장비를 끊임없이 본부로 보냈다. 그는 독일군이 대서양의 연합군 해상 호송단을 장거리 폭격하기 위해 만든 관제소를 찾아내기도 했고 독일군이 개발한 위험할 정도로 기동성이 뛰어난 신형 소형 잠수정을 고스란히 회수하기도 했다. 다른 연합군 부대들보다 24시간 앞서 쾰른에 도착한 그의 공작팀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거대한 슈미딩금속공장에 들어가서 시설을 점거했다. 패트릭의 대담한 행동은 때로는 숨막힐만큼 아슬아슬했다. 몇 명의 수녀들이 그에게 독일군이 사용했던 육중한 금고를 보여주자 그는 폭약으로 그걸 폭파해 열었다. 그 바람에 수녀원의 유리창이 몽땅 깨졌다. 그는 금고 안에 들어 있던 돈을 수녀들에게 줘서 유리창을 수리하게 하고 금고 속의 문서는 런던으로 보냈다. 그가 전쟁터에서 책상에 묶여 지내는 이언 플레밍에게 보내오는 보고들은 작가 지망생인 플레밍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소설의 주인공 상에 계속 살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패트릭의 가장 놀라운 모험은 아직 남아 있었다.
고속진격. 브레멘에 있는 거대한 데시마크조선소가 제4조의 새로운 목표로 정해졌다. 패트릭은 독일군 포로들로부터 그곳에 독일의 최신형 고속 잠수함이 20척이나 있을 것이란 정보를 알아냈다. 어마어마한 정보 가치가 있는 전리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선소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52로랜드사단이 제30공격부대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이 조선소를 포격으로 날려버릴 계획이었다.
1945년 4월 26일 오후, 제4조는 황량한 브레멘시의 중앙광장에 들어갔다. 초조한 표정의 독일 경찰관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제일 앞의 지프에 앉아있는 패트릭에게 오더니 지휘관이 자기와 함께 시청에 가서 거기 기다리고 있는 시장과 만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패트릭은 시장이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텅빈 시청 응접실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연합군에 전적으로 협력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경찰력을 동원해 엄격히 다스릴 것을 보장했습니다.”
패트릭은 즉각 육군사령부에 무전으로 브레멘시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났으며 연합군이 원하는 대로 따를 것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사령부에 사소한 저격을 제외하고는 브레멘시가 안전하다고 말해주었지요. 그러니 육군이 조선소를 포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육군측의 상황판단은 달랐다. 그들은 바로 그날 저녁 조선소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대로 포문을 열 것이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격분한 패트릭은 자신의 정찰차에 올라타고 혼자서 조선소를 향해 출발했다. 조선소에 독일군의 저항이 실제로 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면 육군의 포격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자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조선소의 정문 앞에서 그가 탄 정찰차가 퍼덕퍼덕 소리를 내더니 엔진이 멎어버렸다. 연료가 다 떨어진 것이었다. 무전으로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잡음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건물들 때문에 전파가 방해를 받아 무선교신이 안되었다. ‘이건 툭하면 끊어지는 낡은 영화필름 같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운명의 수레바퀴. 그는 걸어서 조선소에 들어갈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전차량이 있는 나머지 대원들이 필요했다. 무전차량이 없이 어떻게 자기가 조선소 안에 있다는 걸 육군에 알릴 수 있단 말인가? 무전기 없이 조선소 안에 들어갔다가는 아군의 포격에 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그는 몇 사람의 노동자들을 발견하고 그중 한 사람으로부터 자전거를 낚아챘다. 그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해가 지는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려 자기 부대를 찾아갔다. 아직도 저격병이 그의 등에 총알을 명중시키기에 충분한 햇빛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마지막 골목을 돌자 걱정스럽게 기다리던 부하들이 그를 자전거째 들어올려 선도차에 태웠다. 그들은 아슬아슬하리만큼 무서운 속도로 조선소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조선소 안에는 16척의 갓 건조한 신형 잠수함과 2척의 구축함이 있었다. 패트릭은 조선소의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선박들을 폭파시키기 직전에 저지할 수 있었다. 패트릭과 그의 부하들은 조선소 직원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그날 밤 늦게까지 수색을 벌여 독일 해군의 최신 연구결과를 자세히 기록한 기술문서들과 고도로 발달된 설계기술로 제작한 공작기계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육군당국으로부터 문제의 공작기계에 관해서는 그때까지 들은 적이 없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잠수함 전문가들이 이미 노획된 U보트들인 새로운 21형 고속잠수함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에 착수했을 때 한 영국 육군 참모장교가 나타나서 패트릭에게 그 노획물에 대한 인수증에 서명해달라고 요구했다. 제52사단이 그것을 노획했다는 뜻이었다. 패트릭이 고분고분 들어줄 리 없는 요구였다. 그는 조선소의 철문을 쾅 닫아버리고 이 조선소 전체가 제30공격부대의 재산이라는 뜻의 표지판을 내다 붙였다. “출입금지!” 팻말이었다.
전쟁은 그 얼마 후 끝났다. 패트릭은 이언 플레밍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영국 정부는 전시에 패트릭이 보여준 용기에 대해 단 하나의 훈장이나 표창장도 수여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이유를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는 당시 제30공격부대 사령관이었던 잰 에일언해군소장도 끼어있다. 그는 패트릭을 “제2차세계대전이 배출한 가장 모험심이 강하고 용기있고 재치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회상한다.
패트릭이 훈장을 받지 못한 이유는 복잡한 것이 아니다. 패트릭은 상관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죄”를 자주 범했는데 더 나쁜 것은 번번히 그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임스 본드처럼.
전쟁이 끝나기 바쁘게 패트릭은 사랑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6년이 흘러가버렸던 것이다. 뵈르그는 이제 19세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도 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상대방을 보았을 때 그동안 서두르지 않고 다시 만날 때를 기다려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3주 후에 결혼했다. 제임스 본드의 시대는 작가 이언 플레밍에게는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인데 패트릭에게는 끝났다. 그와 뵈르그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거기서 패트릭은 캐나다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그들의 아들 이언도 그곳에서 자랐다. 1960년 그들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헤스트하일랜드의 플록턴 근처에 정착했다. 만년을 계속 행복하게 살기 위해 준비해둔 은퇴지였다. 패트릭은 마을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으며 뵈르그는 지역사회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1986년 암으로 사망했다. 패트릭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용감하게 홀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첫댓글 젊은시절, 한때 즐겨 보았던 007 시리즈가 새삼 떠오르네요.
잘 생긴 주인공 제임스본드의 용모와 액션이 참 부러웠던 시절 이었지요.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 하기도 하고....
얼마전 어떤 분 이 카페에 올린 사진을 보니, 파파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그래도 멋 있더군요.
저는 그때 산 007 가방을 지금도 중요한 서류 보관함으로 사용하고
있답니다...ㅎㅎ
참, 우리 시절은 007영화가 최고의 인기였지요.
그러한 기억으로 지금은 폐간된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5년 판 인가에 있는 것을 컴퓨터로 옮겨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