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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Ligne Maginot, 1926년∼1936년)
마지노선(Maginot Line)은 1927년부터 1936년까지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프랑스-독일 국경에 설치한 대형 요새이다. 이름은 건설을 제안한 육군성 장관 앙드레 마지노(André Maginot)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건설비 16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지만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독일군이 이를 우회해 베네룩스를 거쳐 프랑스를 공격해 전쟁에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 침공에 의한 무력화로 인해 후대의 비웃음을 사는 것과 별개로, 당시 프랑스에게 마지노선의 건설은 군사전략적으로는 물론, 국가전략상으로도 매우 합리적이며 현명한 선택이었다. 후대의 비판을 받더라도 당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충분히 건설할 만한 이유가 많았다.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은 개전 첫 1달을 제외하면 전쟁기간 내내 참호전으로 유지되었다. 포병과 기관총의 화력지원 속에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상대의 참호로 돌격해 그곳을 점령, 사수하는 것이 모든 군사행동의 기반이 되었다. 20년대 군사전문가들의 사상은 모두 참호전에 기반하였으며, 때문에 참호선을 몇 단계나 강화시킨 거대한 요새선은 돌격해오는 적군에 맞서 싸우기 최적의 시설물이었다.
후대에서 공군과 기계화 부대라는 요소를 간과했다고 비판받았지만, 1920년대 기준으로 공군 및 기계화 부대 모두 초창기 수준이었다. 공군기들은 복엽기, 삼엽기가 주력이었고 폭격능력에 심각한 제약이 있었으며 기계화 부대는 탄생하기도 전이었고, 전차는 여전히 초창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인구를 가진 국가였으나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그리고 프랑스의 출산율이 저하되는 등의 이유가 겹치면서 인구가 역전되고 만다. 인구는 병력은 물론 노동력 등 생산인구, 그리고 경제와 국가조세 등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프랑스로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전 전 독일의 인구는 6천 5백만 명에 육박했는데, 프랑스의 인구는 고작 4천만 명으로 1.6배의 차이가 났다. 물론 식민지 인구까지 합치면 프랑스가 압도적이겠지만, 인도차이나 식민지나 서아프리카 식민지 사람들은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인구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프랑스로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전략은 국가의 미래를 망가트리는 무모한 짓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미래전쟁이 참호전이라고 생각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프랑스는 국가인구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젊은 청년층의 추가적인 인명 피해를 피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다가올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이겨야 한다는 딜레마에 놓였다.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방어전에 올인하여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규모 요새선의 건설이었다. 막대한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판받지만, 프랑스 미래 인구를 위한 예산 투입이었다.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은 철저히 찢겨져 나갔다. 이는 독일과의 전쟁 시 주력을 모아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총공세를 펼친다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작계(17계획)에서도 드러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자스-로렌을 되찾았으나, 프랑스인들에게 여전히 1871년의 굴욕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었고, 그때와 같은 일을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열망이 있었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바로 영토 절대사수주의로 발전하여 국경을 따라 건설되는 요새선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영토 절대사수주의는 단순한 트라우마와 자존심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주전장은 벨기에와 프랑스 동북부 지역이었고, 이들 지역은 4년여에 걸친 전화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전후복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자국 영토가 전쟁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경험한 프랑스로선 영토 절대사수주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철갑을 두른 기관총 포탑. 이런 게 마지노선 전체에 수두룩하게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한번 갈기고 난 뒤 여차하면 지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총안구를 노리거나 포탄을 엄청나게 퍼부어야 겨우 무력화할까 말까인데, 지하로 내려지기까지 하니 당시 전력으로 정면 돌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1차 세계대전의 지옥 같은 참호전을 통해 든든한 방호벽 뒤에서 아군의 소모는 최소화하고 적군에게는 소모를 강요하는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에 항구적인 방어 시설을 계획하게 된다. 원래 요새지대 설치의 기안자인 마지노는 적 공세에 대한 조기경보와 지연전을 수행 할 수 있는 단촐한 전초방어선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실제 기획자인 팽르베에 의해 다중 철조망과 대전차호, 각종 포대와 기관총좌에 지하에 마련된 지휘소, 탄약고, 식량창고, 내부철도망 등 당시의 축성기술의 정수(精粹)를 모은 최고의 시설과 상당한 종심을 가진 거대한 요새선으로 완성 되었다. 요새의 방어력은 가장 얇은 콘크리트 보루의 두께가 3.5m일 정도로 압도적인 우주방어를 자랑해, 이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군대는 당시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독일도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지노선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구스타프 열차포 같은 괴물 같은 병기를 만들어 뚫을 예정이었지만, 정작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아르덴 숲-스당을 통해 넘어와 버려서 마지노선의 병력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랑스 항복과 함께 투항,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실 마지노선의 방어력이나 방어 구조 자체는 어마어마한 거라서, 전통적인 방식의 전술로는 도저히 돌파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공격자 측에서 병력을 얼마를 집어넣든 간에 대량살육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된 독일군도 이걸 어떻게 돌파해야 되는지 굉장히 고민했는데, 만약 정면으로 뚫고 들어갔다면 천하의 독일군이고 뭐고 거기서 지지부진 하다가 이래저래 제1차 세계 대전 꼴 났을 가능성도 높다.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한심한 삽질’이란 이미지도 프랑스 입장에서 보자면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사실 프랑스도 1차 대전의 전훈을 통해 프-독 국경의 방어뿐 아니라 벨기에 방면의 방어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마지노선의 건설 계획단계에서는 벨기에 국경까지를 포함하는 프랑스 동부 국경지대 전체의 요새화가 목표였었다. 하지만 벨기에가 이를 극렬히 반대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벨기에 방면의 요새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벨기에가 프랑스의 자국 국경 방면의 요새화를 반대한 것은, 당시 군사력이 약한 벨기에는 독일군이 공격해 올 경우 프랑스군의 지원 없이는 독일군을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장차 대독전이 발발한다면 1차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할 것이 명확한데, 만일 벨기에 국경 방면에 요새선이 존재한다면 프랑스는 요새선의 방어를 고수할 것이고 벨기에는 어떠한 군사적 지원도 기대 할 수 없게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라인란트 재무장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는 독일군의 전력을 오판하여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가 완전히 독일군에 넘어가는 걸 방관한 프랑스에 경악한 벨기에는 강한 불신감을 갖게 된다.
벨기에 측에서도 나름대로 시간을 벌기 위해 독일과의 국경선에 에반-에마엘 요새를 건축하고, 전국의 철도망과 교량에 폭약을 설치해서 유사시 폭파함으로써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고 했다. 여기에 벨기에 방면의 부족한 방어를 보강하기 위해 대독 개전시 프랑스-연합군의 주력은 벨기에 령의 알베르트 운하-뫼즈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여 독일군을 방어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한편 이게 영 못미더웠던 프랑스 측에서는 마지노선의 끝단에서 이어지는 참호선을 벨기에와의 국경과 인접하게 연장하고 지뢰를 까는 등 여러모로 강화하여 이를 연장된 마지노선으로 가칭하였다.
물론 이런 조치들에 실제 마지노선을 제대로 연장한 것만큼의 방어 능력은 기대할 수 없었으며, 독일의 작전 변경으로 벨기에 방어선과 마지노 방어선의 연결 지점으로 방어가 취약한 아르덴을 돌파하여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되었다.
우선 낫질 계획 자체가 마지노선을 절대로 돌파할 수 없었기에 만들어진 계획이며, 독일군이 낫질 계획에 따른 루트를 통해 프랑스 본토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마지노선을 지키는 병력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수십만에 달하는 독일군이 계속 마지노선 앞에서 연막작전(煙幕作戰)을 해야 했다.
사실 프랑스 입장에선 마지노선의 의미는 충분했다. 독일과 맞닿은 국경은 충분한 방어시설과 최소한의 병력만으로 수비하고 나머지 가용병력으로는 벨기에에서 독일군을 요격하려 했던 것이다. 때문에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 당시 마지노선 방면으로의 공격은 포기하고 벨기에 방면 및 아르덴 산림지역으로 공세를 펼쳐야 했다.
전쟁에서 공격 측이 가지는 이점은 공세장소와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이점이 사라질 경우에는 방어측이 매우 유리해진다. 그리고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통해 독일의 공세가능 구역을 마지노선 외의 벨기에 방면 및 아르덴 지역으로 국한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엄청난 자원을 투입한 결과 독일은 대 프랑스 전쟁계획에서 상당히 제한적인 공세 루트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실책은 마지노선을 프랑스 영토 방어 수단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를 절대 사수해야 하는 목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비병력으로 15개 사단만 깔아놓아도 충분한 마지노선에 패전 직전까지 무려 40개 사단을 박아놓는 짓을 감행하였다. 덕분에 낫질 계획 1차 완료 후 프랑스에게 남은 사단은 총 65개 사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독일군이 몰려올 프랑스 북부를 방어할 사단은 마지노선과 이탈리아 쪽 국경선을 제외하면 고작 20개 사단이 되는 참상이 발생했다. 그렇게 해놓고도 밑에 따로 서술하지만 최서단 구역이 함락되었다.
“프랑스 땅은 한 뼘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국토 사상에 입각한 정치적 집착이 이런 참상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유럽의 전쟁에서는 전선의 유동성은 일상적인 일이고, 전후의 국경은 실제 전선의 배치와는 거의 무관하게 국력과 전황에 따른 외교적 협상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집착이었다.
마지노선은 완성 당시에도 그다지 완벽하게 가동되지 않았다. 당장 건설 때부터 프랑스 영토를 한 뼘 이라도 내주기 싫다는 것을 반영한 덕분에 연약한 지반위에 무거운 콘크리트 구조물을 억지로 올린 곳이 많아 침하가 상당히 심했고 지하수 침출 또한 심각한 지경이었다. 요새 내부는 항시 습기가 가득했으므로 전기계통의 고장이 잦았고 누전에 의한 인명사고도 많았다. 오수처리시설이 가동을 멈출 때가 많아 하수구 역류와 침출수가 뒤섞여 요새 내는 늘 악취가 코를 찔렀고 이는 근무하는 병사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그로 인해 가동 후 1년 쯤 될 무렵엔 요새 안에 있는 숙사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 돼서 사용금지조치가 내려졌으며, 근무시간에만 요새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당연하지만 요새에 설치된 화포 상당수도 습기 때문에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노선은 단 한 군데긴 하지만 돌파 당했다. 마지노선의 좌측방인 라 페르테 요새가 강습공병에 의해서 뚫려버렸다. 소위 ‘지하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독일군 중위 알프레드 게르머가 벙커에 폭탄을 던져서 화재가 일어났고 이 불길이 프랑스군의 화약고까지 옮겨 붙어 벙커의 강철 문짝이 찢어질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게다가 유독가스까지 퍼지자 너도나도 탈출하려고 했는데, 상부에서 사력을 다해 벙커를 고수하라고 지시해 어찌어찌 탈출을 막긴 했는데, 이로 인해 107명의 장병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더욱 비극적인 건 본래 이 공격은 스당(Sedan)의 주공을 은폐하기 위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고 작전술적으로도 전혀 효과가 없는 벙커 사수에 여러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이 흠집을 메우겠다고 독일군의 주공인 스당에서 병력을 빼내서 505장갑벙커를 구원하려고 시도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일부 구간의 보수를 거친 후 계속 운용되었다. 그러나 이미 냉전구도에 따라 동서독 경계선으로 방어선이 옮겨가 여기는 별다른 효용성이 없어진 상태였기에 196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버려졌고, 버려진 시설들은 와인 저장고나 버섯 농장 등으로 전용되거나 관광지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