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벗 하나가 말하길
따뜻한 손의 여인과 함께 걸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건 사내들 대개의 로망일 텐데
그런데 왜 하필 따뜻한 손의 여인일까?
어떤 글벗은 누군가를 만나면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우선 여성과의 첫 스킨십은 손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악수가 그것이요, 다음으론 잡은 손을 오래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함께 걸어가면 그게 동행인데
그 손은 아름다워야 하지만, 우선은 따뜻해야 한다.
그래야 따뜻한 감정이 전달된다.
의학적으로도 손발이 차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신호라 한다.
소위 수족냉증인데
그런 경우엔 자궁도 냉해서 임신도 잘 되지 않는다 한다.
손이 따뜻한 여성과 함께 걸어보기를 원한다면
부부의 연에 이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심정도 내포된 게 아닐까?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나의 문학 스승은 여인에게 함부로 악수를 청하지 말라 했다.(성춘복)
악수를 청했다면 그 여인에 대한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그 경구를 받아들여 여성들에게 함부로 악수를 청하지 않는다.
여성이 먼저 악수를 청해 온 경우야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변하고 변하는 게 여심, 인심이라는데
악수를 청해 만난 여심이 돌아설 때의 기분은 참담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니 어찌 함부로 악수를 청할 것인가...
그러나 요즘엔 면식 있는 여성을 만나면 덥석 손부터 잡는다.
오래 전 썼던 <손>이란 글을 가만히 꺼내본다.
여인의 손 / 김 난 석
여인의 고운 손을 잡던 날
신발 벗어들고 산으로 내달았지
봉우리 지나 계곡으로
숲을 지나 호수로
고운 여인의 손을 잡던 날
노래도 불렀지
들판에 앉아 꽃 이름 부르고
언덕에 누워 새 이름 부르고
이젠 고운 여인의 손을 잡으면
고향에 간다네
순이를 만나 감꽃 주워 먹고
점순이 만나 새알 꺼내주고
여인의 고운 손을 잡으면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리
가물가물 아지랑이
아슴아슴한 기억들.
(졸시 ‘여인의 손목을 잡던 날‘ 전문)
꽃시장에서 우연히 옛 학창시절의 동창생을 만났다.
동창생이라고 해봐야 풋내 날 뿐인 여학생이요 떨떠름한 남학생이었으니
너스레를 떨 줄 모르는 우리는 서로 메마른 기억밖에 남은 게 있을 리 없다.
방학 뒤에 하숙집을 찾아가는 버스정류장에서 손을 스치던 때 말고는
손을 잡았을 리도 없었지만
그래도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교정에서 워즈워스의 무지개를 노래하며
함께 꿈을 키우지 않았던가.
반가운 악수를 나누며 고운 스승의 길을 걸었을 뒤안길을 상상해보니
빈약한 손등에서 갑자기 연민이 느껴졌다. 세월은 어쩔 수 없나보다.
여성들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곳이 어디일까?
내리듯 치켜드는 눈빛일까? 도도한 콧등일까? 열릴 듯 닫힌 입술일까?
아니면 솜털 묻어날 듯 하얀 목덜미라 할까?
그도 저도 아니면 가녀리게 흘러내리는 어깨나 거시기한 가슴이라 할까?
이것들은 사내들의 애를 태우는 것들이니
불씨가 살아나지 않게 가만히 덮어두어야겠다.
남성들은 흔히 첫사랑의 하얀 손을 못 잊어 한다고 한다.
여인의 만감이 거기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끄러울 때는 하얀 치마폭에 손을 감추기도 한다.
여인들은 손을 제일 부끄러워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끄럼 타는 곳엔 성감대가 모여 있다고도 하니
만감이 거기 다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손을 내미는 건 무장을 해제한다는 뜻이라 한다.
허나 맨주먹의 격투를 선언하는 것이어서 으스스하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내미는 건 화해와 사랑의 몸짓이어서 따스하다.
남녀 간에 프러포즈를 할 때도 손을 내미는데
“거친 손이 애처롭다”는 건 어느 가수의 부인에 대한 애민이며
지난 88올림픽 때 “손에 손을 잡고 벽을 넘어서”자던 건
한민족의 세계인류에 대한 평화의 손짓이었다.
손목을 잡는다는 말은 남을 돕거나 좋은 마음으로 사로잡는 걸 이름이요
발목을 잡는다는 말은 남을 훼방하거나 사악한 짓거리에 매어둠을 이름이다.
그러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왕이면 발목을 잡을 게 아니라
손목을 잡고 살아가라고도 이른다.
서양 사람들이 손에 쥔다는 건 정복의 냄새가 나기에 차다.
그러나 우리가 손에 쥔다는 건 가슴으로 품어 안는 느낌이어서 포근하다.
손은 의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굳은 약속을 할 땐 양손을 들어 맹세한다고 한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어렸을 때 장난꾸러기들과 자주 어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난롯가의 석탄 한 덩이를 주워 링컨에게 주면서
“ 아이야, 손에 검정이 묻지 않게 이걸 쥐어보렴.” 했더니
어린 링컨이 금세 알아들었다 한다.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땐 손을 씻었다고 한다.
손 안엔 오장육부의 경혈이 모두 모여 있다고 하니
그것 빼고 나면 거죽만 남는다.
손은 이렇게 자신의 영육(靈肉)을 말하기도 한다.
손 중에 제일은 가녀리게 뻗은 고운 여인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든다.
거기에 사내들은 황홀하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여인네가 배꼽을 내놓거나 들여다봐도
스스럽지 않다고들 하니
점점 무뎌만 간다면 어디까지 내려갈지 걱정스럽다.
우리네의 미(美)적 심성은 은은함에 있는데 말이다.
“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손목만 가만히 쥐고 있을 게.”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보면 참 뻔뻔스런 일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다 탐하고도 능청을 떨었으니 하는 말이다.
선남선녀들이 경계하는 간음(姦淫)이란 부부 아닌 남녀가
불륜의 육체관계를 갖는 것을 이르지만
어느 종교에선 마음만 먹어도 간음이라 하지 않던가.
꽃시장에서 꽃에는 관심을 놓은 채 여인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이것도 간음(看陰)이 아니고 무엇이랴.
잡았던 손을 아쉬운 듯 놓고 두 남녀는 제 갈 길로 헤어졌으니
그곳은 아마도 흘러간 세월이 고이 고여 있는
추억과 상상이라는 곳간일 것이다.
(산문집 ’꽃눈 뜨자 눈꽃 내려‘ 중에서)
첫댓글 여인의 고운손 참
보기좋겠지요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손이 전혀 안 예뻐요
그러나 겨울에도 손은 따뜻해요 석촌님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젠 따스한 손이 좋아요.
마냥 따뜻한 정을 나누는
그런 손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손이 있어 연장을 만들 수 있고
글자를 써서 소통이 되고
좋아서 박수를 치고
싫다고 손사래도 칠 수 있는 거지요.
곱고 부드러운 손만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부지런한 여성의 손이 자녀를 키우고,
농부의 아내가 농사를 짓습니다.
남동생의 공부를 시키기 위한, 여공들의 아름다운 손도 있습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손에 거부반응을 일으켜 죄송하네요.^^
네에, 긴 글로 화답하셨네요. 말씀하시는 뜻 잘 알겠습니다.
가냘픈 여인의 손 하나에
이리 긴 이야기가 숨어 있었군요
슬픈 눈망을 한 여인이 그리도 애처롭고 사랑스럽기도 했었는데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가진 여인을 아직 먼나지 못해서 그럴까요 ~
슬픈 눈망울엔 감정이 다 빠져 들어가기도 하데요.
미술작품에서 간간 보기도 합니다만..
손 잡고 싶어
말 삼키고
침 삼키며
떨다가 멈출 것 같던
심장 소리가 기억납니다.
절창입니다.^^
살다가 그런 감정도 가져보는 거지요.
어느 분 그림이었었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몹시 투박한 손을 그린 그림을 본적이 있습니다.
깊은 울림을 주는 그림을 보며 매우 감동했던 기억이 석촌님 글을 읽으며 떠오릅니다. ^^~
네에 투박한 손이나 주름 진 얼굴은 곧잘 예술의 대상이 되지요.
가벼운 제 글과
심오한 석촌님의 글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차이가 납니다.
나때는 말야 ~
손만 잡아도 결혼해야 되는 줄 았았다는
고전같은 이야기를 요즘 애들이 이해할까요 ?
글이야 다 저마다의 특성이 있을뿐이지요.
그런데 지금 아이들이야 우리하고는 의식이 많이 다르겠지요.
아녜스님과 저와도 많이 다를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