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사순 제3주일) 하느님께로 성경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듣게 되는 하느님의 이름은 “있는 나(탈출 3,14)”이다. 매우 어색한 이름인데 그 뜻은 명확하다.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 분이다. 그런 하느님과 나와는 무슨 관계인가? 그분이 검찰이나 단속 경찰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지금 바로 내 옆에 계셔도 내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하느님이 모세에게 당신을 그렇게 소개하신 이유는 노예 생활에 신음하는 당신 백성, 즉 이스라엘을 보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계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고(마태 1,23) 우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있겠다고 하시면서(마태 25,40),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마태 28,20).
왜 가장 작은 이들이 하느님이 계시는 곳일까? 그것은 나약하고 작은 것에 약해지는 우리 본성 때문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연민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을 거다. 하느님이 애정결핍 환자라 우리에게 사랑받으시려는 게 아니라 사람은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다워지고 완전해진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게 하셨다. 이제는 아드님 예수님을 따라 우리가 죄와 그리고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하게 하신다. 사랑은 남을 위한 삶, 그래서 자기로부터 탈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이 하나로 요약하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은 율법의 요약이며 율법의 근본정신이고 전부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성당이나 산속에서 기도에 전념하라는 게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세속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라는 부르심이다. 그렇게 하기에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
예수님은 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말씀하신다(루카 13,6-9). 포도밭은 아주 잘 가꾸어지고 관리된 밭이다. 그런 곳에는 아무 나무나 푹 꽂아놔도 잘 자라고 열매를 맺을 거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열매 맺지 않는 나무가 있다면 나는 그 나무는 본래 열매를 못 맺는 나무였다고 생각하고 배어버릴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 더 기다려보자고 하신다.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신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포도 재배인 마음이 곧 하느님 마음이다. 하느님은 우리 구원을 위하여 더 이상 하실 게 없다. 외아들까지 제물로 내놓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은 우리가 회개해서 복음을 믿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하느님 말씀이 곧 진리이고, 그분 품이 아닌 다른 곳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주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제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내년에도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셔서 저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수난의 동정녀이시니,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 중에도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