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피던 왠 고조선 시대 이야기냐고 짜증내실 분도 계시겠지만, 온고지신의 심정으로 경청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1960년대 후반, 한 마을에 TV 수상기도 제대로 없던 시절, 라디오는 온 국민을 울고 웃기는 만인의 친구이자 연인이었습니다.
특히나 밤 12시 전후로 중계되는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인도네시아의 머라이언컵 축구 중계가 있는 날이면
커다란 덕용 배터리를 노란 고무 밴드로 철철 엮은 손바닥 만한 라디오 옆에 둘어앉아 열혈 꼬마 축구 팬들은 짐짓 손바닥에
땀까지 흘려가며, 긴박하게 박동수가 늘어나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달래느라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물론, 상대 팀이라 봐야, 몽몽틴 몽몽린 몽틴원 몽소틴 등, 온통 몽으로 시작하는 버마(지금의 미얀마)가 아시아에서는
우리 나라의 가장 강력한 호적수였고, 소친원이 주장을 하던 말레이시아 팀이 다크호스였으며, 솔직히 우리 프로축구 초기에
활약했던 피야퐁이 등장하기 전까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그리고 대만은 5대0 이 기본이었고, 우리 선수들 몸이 풀린 날이면
7대0은 보너스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선수들은 이회택, 김호, 김정남, 박이천, 정규풍, 이이우,이차만, 김재한, 김진국, 골키퍼 이세연과 만년 후보 변호영 선수였습니다. 그 유명한 이광재 아나운서는 늘 "고국에 계신 국민여러분, 여기는 태국의 수도 방콕,,,,,"으로 시작하며
청산유수로 경기의 박진감을 전해주었고, 가수 임재범의 부친되시는 임택근 아나운서도 이따금 매끄러운 중계로 국민적 지명도를
높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이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허구헌 날 우리에게 3대0으로 박살나던 일본의 올림픽 메달소식은 적잖이 충격을 주었고 당시 일본팀의 에이스 가마모토는 이후로도 10년 가까이 한일전에 등장하지만, 기껏 그의 헤딩골이 들어가면 2대1로
체면치레만 한 채 우리에게 지고 가던 일본이었습니다.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한 선수가 바로 차범근 입니다. 경신고등학교 재학중 청소년 대표로 선발된 차범근의 멋진 경기를
흑백TV시절 최선 아나운서와 선영제 국제심판의 중계로 접하면서 온 마을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부르며
걸출한 스트라이커의 등장에 감격해 했습니다. 특히나 선영제 심판의 "....과언이 아닙니다" 소리는 한 경기당 20번 정도를 들어야
1게임이 끝날 정도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고교야구 해설을 했던 이호헌씨(나중에 개그맨 최병서가 유행시켰던 말투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습니다.),오영일씨(권투 중계로 유명) 등과 함께 한 시절을 풍미했던 분이었습니다.
차범근, 황재만은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뒤 곧바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는 파격을 누렸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일약 국가대표가 된 차범근은 정말 미증유의 압권을 보여주며, 온 국민의 마음을 쏙 빼놓았습니다.
라이트 윙으로(당시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슬슬 페인트를 치다가 냅다 공을 차고 뛰어들어가면 아시아 일원에서는 그를 막아내는 수비가 변변이 없을 정도로 걸출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유럽인에게도 꿀리지 않는 체격과 헤딩력, 슛팅에
이르기까지 차범근의 이름은 일본의 가마모토 보다 더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전설의 게임으로 알려진 1976년 박스컵 개막전에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어이없게 0:3에 이어 1:4로 끌려가는 정말로
믿기어려운 스코어가 연출되며 후반전 10여분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그 경기를 난생처음 현장에서 관람했던 저는, 그 형언할 수 없는 허탈함에 시달리며,솓아오르는 낭패감을 달래려 어린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정말 혼자서 3골을 몰아치는 차범근의 괴력을 목격하며,대한민국 축구의 수호신이자 1970년대 아시아의 축구황제의 왕림을
보았습니다. 이후 축구 황제 펠레가 소속된 브라질 산토스 팀, 포르투갈 에우제비오가 소속된 벤피카 팀의 내한 경기도
성동 원두 동대문 운동장에서 펼쳐졌지만,(물론 방문국 팀에 대한 쇼맨십 차원의 배려가 있었지만 스코어는 늘 3;2 ^^),
우리의 차범근 선수의 기량은 전혀 꿀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애석한 장면은 1974년 서독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전 호주와의 서울 경기입니다. 당시에는 아시아지역에 단 1장의
출전자격만이 주어졌기에 한국과 호주는 여타 모든 국가를 물리치고 마지막 홈앤드 어웨이 경기만을 남기고 있었고, 두나라 가운데 오로지 한 나라만이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기에 말 그대로 한국과 호주는 전쟁아닌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시드니에서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 한국은 기적적으로 무승부를 기록합니다. 온 나라가 스위스 월드컵 이후로 드디어 국민의 숙원인 월드컵 진출이 목전에 왔다고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왠걸, 전반전이 끝났을 때 우리는 호주를 2;0으로 리드하며 마침내
꿈의 구현 월드컵에 진출한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이영무, 허정무가 허리를 맡고 차범근과 김진국 김재한이 호주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유린하며 경기를 리드했고,
중거리포가 좋은 최종덕은 멋진 중거리 슛으로 1골을 넣어, 대표팀과 온 국민은 정말 미쳐나갈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아, 운명의 45분 후반전은 악몽이었습니다. 결국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나라는 제 3국인 홍콩에서 재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한국의 골문을 지키던 이세연 골키퍼 대신에 만년 후보 변호영 선수가 그 경기의 선발로 출장했습니다.
아뿔사, 불의의 중거리포 한방으로 한국은 무너졌던 것입니다.
(계속)
첫댓글 헐 대박글인데요 이건ㅋㅋ
와.. 다음글은 언제 나오나요 언능 해주세요 ㅎ
오오...추억의 이름들.. 하두 몽몽해서 저 나라는 몽씨만있나? 했었던...오죽하면 이름까지 똑같아 누구1, 누구2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이 글쓴분 아마도 저보다 약간 나이많은분일듯..50대 초반? 74년 월드컵예선...잊을수가 없죠..ㅜㅜ 물론 그때 나갔어도 7대0쯤으로 졌을테지만..(실제 74년 대회에 9대0인가 스코어 나온걸로 기억함, 아프리카 팀이었던거 같은데..그떈 아프리카, 아시아 수준 참..)
전설의 차범근 경기..전 TV로 본 기억이...그리고, 펠레의 산토스 경기는 76년 박스컵보다 먼저 했었지 않나요? ^^ 지금 여기 주축을 이루는 회원들은 태어나기도 이전 얘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