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必 / 채상우
다시 열이틀을 꼼짝없이 앓고 나니
사는 게 꼭 귀신의 일만 같다
스물여덟 해 전이었던가
여인숙 앞마당 요강에 눈이 소복이
담기던 입춘 아침
차비가 없다던 그 사람은 무사히
돌아갔을까 여태 소식 모를 사람
입안이 비릿하다
어치가 몇 남지 않은 산수유 열매들을
쪼고 있다
- 시집 『필』 (파란, 2021.08)
* 채상우 시인
영주 출신
2003년 계간 《시작》 등단.
시집 『멜랑 콜리』 , 『리튬』 ,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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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도 『필(必)』이고 시 제목도 「필」이다. 반드시를 의미하는 한자 '必'은 심장에 칼이 꽂혀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feel'일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심장에 칼을 꽂듯 치명적이다.
심하게 앓다가 일어난 어느 날의 심상을 그린 것 같은데 묘사를 넘어 치명적인 미학을 성취했다. 멋진 시다.
요설로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서 단아한 시 한 편을 만나는 기쁨. 그 기쁨을 오늘 느낀다.
오늘은 사는 게 꼭 귀신의 일만 같다.
- 허연 (시인, 매일경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