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왼 손목의 일부인양 붙어있던 손목시계가 보이질 않습니다. 아마도 스마트폰이 왼손에 자리 잡고부터 아닌가 싶습니다.
손목시계 추억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 소리부터 시작됩니다.
"도둑이야~ 도둑 잡아랏!!"
어머니 아버지의 외침 소리를 시작으로 제가 두리번거리며 냅따 골목길을 뛰어나가던 흑백의 추억. 그때가 제 나이 여서일곱살 정도일 때였지요.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실 때면 아버지 머리맡에 풀어둔 은빛 반짝이는 쇠줄 손목시계가 신기해서 만지작 거리다가 주로 제가 했던 놀이는 탱크놀이였습니다.
바늘이 돌아가는 시계 얼굴을 위로 하고 쇠줄을 채워 세워놓고 상상력을 조금 보태면 영락없는 탱크 모양이 됩니다.
니스칠을 해서 반들거리는 장판 위를 요리조리 몰고 다니면 바닥 반짝 탱크 번쩍, 그 위용을 뽐내곤 했어요.
신이 나서 쿵! 슈웅~~ 쾅! 소리까지 내다보면 아버지 잠 깨울라.. 어머니 눈꼬리가 올라가곤 했어요.
어느 날, 대문 앞 공터에서 놀고 있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수상해 보이는 아저씨가 보이더니 잠시 후 골목밖으로 사라졌어요.
또래 친구들과의 놀이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 안쪽에서 몇 분 후 그 소리가 들려왔어요.
"도둑이야~ 도둑잡아랏!!"
그 아저씨가 도둑놈이구나! 생각과 동시에 골목밖으로 냅다 뛰어나갔지요. 몽둥이도 하나 안 들고. ㅎㅎ
소리 지르면 누군가 잡아주겠지 하며...
그 도둑 아저씨는 죽자 사자 달렸을 테고, 시간이 몇 분 흐른 뒤라 길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지만 저는 한참을 도둑 잡아라 외치며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그 도둑이 훔쳐간 물건은 아버지의 그 은빛으로 반짝이던 손목시계였습니다.
저의 아끼는 장난감이기도 했던...
그때를 돌아보면 참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되었던 그 땅에는 도둑질이라도 해서 목숨을 이어나가려던 많은 생명들이 있었습니다.
마당에 늘어놓은 빨래도 훔쳐가고, 눈치 봐가며 자전거도 훔쳐가는 도둑들도 있었고, 밥 한술 퍼주면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인사하는 미제깡통을 든 걸인들도, 한 손의 쇠갈고리를 내보이며 돈 달라 강짜 부리던 상이군인들도 있었지요.
대문 앞 공터에서 놀다가 그런 사람들이 보이면 다들 재빨리 각자의 집으로 달려들어가 문단속을 해야 했던 야박한 시절이 있었었지요.
그렇게 살아낸 세월, 그렇게 이어간 생명들이 있어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올림픽을 치르고, IMF를 이겨내고, 월드컵을 통해 세상에 우뚝 자리매김하더니... 이젠 경제강국 문화강국 방산강국이 되었습니다.
피 묻은 군복과 피땀 젖은 작업복, 얼룩진 하얀 간호복 위에 서 있는 나라, 멀리 떨어져 살지만 우리나라가 늘 자랑스럽습니다.
첫댓글 손목시계에서 시간을 보지 않고
세월에 묻어있는 추억을 떠올리는 마음자리 님은
아마도 어린시절엔 개구쟁이 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세월을 외면하고 싶은 건가요?
이니겠지요.
언젠가 사랑방에 가둬두고
"야 너 미국 이야기좀 해봐라..." 하고 싶네요. ㅎ
막내로 귀염받으며 자라다보니 지금도 철이 덜 들었습니다. ㅎㅎ
항아리에 미국이야기가 좀 더 삭고 맛이 들면 그때 안 가두셔도 해드리겠습니다. ㅎㅎ
지금은 그냥 탁 트인 하늘과 넓은 벌판 보며 달리는 일이 그저 즐겁습니다.
스마트 폰이 있지만 전 늘 오른쪽 손목에 시계를 착용합니다.
시간을 바로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60여년 전 제가 고향 공주 산골에 살았을 때 상이군인 들이 집으로 찿아 와 필요한 걸 구하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안되면 쇠갈고리 등을 휘두르며 사람 들을 위협 해 어렸을 때 겁이 많았던 전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몹시 무서워 하며 그 자리를 피하고는 했었습니다. ^^~
어린 눈에 상이군인들 참 무서웠지요. 가끔은 꿈에도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수피님 고맙습니다. 저는 지금껏 상이군인을 상의군인으로 알고 살았거든요. ㅎㅎ 찾아보고 얼른 고쳤습니다.
손목시계
나 중학교 입학했을때 몇명의 학생들이 시계를 차고 있는게 부러웠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거리에서 깡패를 만나서 시계를 뺐겼다는 말을 들은적도 있구
시계를 쓰리 맞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학교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올때 까지도 손목시계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나 직장생활 하기 직전에 시계를 하나 사주었는데 2년도 안되어서 망가졌습니다
그당시 중동에 있던 시절이었는데?
주머니에 돈도 있던 시절이니 당연히 시계를 하나 사서 차고 다녔습니다
그때 사서 차던 시계는 세이코 라는 시계 이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꽤 오래 찹디다
10 년을 차다가 내 아내 성화에 결혼 기념 시계인 오메가 시계를 찼습니다
오메가 시계도 10 년 차니까 망가집디다
그 이후에는 국산 시계를 차고 다녔는데 국산 시계도 5 년을 찰수 있습디다
그러다가 아마 내 나이 55살때 쯤에 또 다시 세이코 시계를 사서 차고 다녔는데?
10 년 쯤 차고 다니니까 차기 싫읍디다
핸드폰이 시간을 잘 아르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시계는 내 서랍 깁숙히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아들이나 손자가 필요하다면 물려줄 예정입니당
이상 내 손목시계 이야기 였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손목시계 변천사를 알려주셨네요. ㅎㅎ
잘 보관하셨다가 꼭 물려주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습니다. 목숨 걸고 싸운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살아서 돌아왔더니 걸인과 다름없는 신세로 방치되어 버린 상이용사들, 그 아픔과 절규가 어릴 때는 왜 그렇게 무섭던지요...
ㅎ 손목시계는 팔수품인데,
우리들 학창시절은 약간의 사치성이기도 했습니다.
여학교 시절, 이웃집 학생 공부 시켜주고 받은 돈으로
시계를 찰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소매치기, 넝마쟁이등
세무소 직원을 세금쟁이로 칭하였지요.
서울사람들을 서울내기라고도 핸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순박한 시절이었고
한편 생각하면 너무 미개한 사회였습니다.
일본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의 후유증이었지요.
그런 세월들을 지나왔기에
지금의 모습이 더 의미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랑스럽거나 창피하거나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지요.
20여년전, 엄니가 미국에 오셔서
당신 시계 사시면서, 제것도 사주신
세이코 시계 아직도 차고 있습니다.
제 시계를 사주시기 위해, 당신 것을
사신 것이었죠.
요즘 셀폰과 연결되는 편리한 시계들이
있지만, 엄니가 사주신 시계가 돌아가는
한 바꿀 이유가 없지요.
이번에 한국에 나가서 시계줄 핀이 빠져서,
5,000원주고 끼웠더니 제 손목을
빛내주고 있습니다..ㅎ
시계보다 그 시계에 담긴 사연이 더 귀할 때, 그런 시계는 손목에서 떼낼 수가 없지요.
시계를 볼 때마다 어머님 숨결이 느껴지겠습니다.
아편을 하는 사람들이
빨래를 걷어 가기도 했습니다.
간장 항아리도 밤새 없어지고
그랬지요.
지금은 그 때와 아주 다릅니다.
기억력이 참 좋으십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그림이
몇 개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요.
마음자리님의 추억 한 자락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긍정과 이해로 일관하시지요.
요즘은 하루를 살아도 별 특별하게 기억되는 것들이 없는데, 어릴 때는 나날이 새롭고 흥미롭고 특별한 그런 날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땐 자고 일어나면 별것들이 다 없어졌어요. ㅎㅎ
시계가 일종의 사치품처럼 여겨지던 시절의 추억,
아련한 느낌으로 아버님을 그려 보시는 님의
마음이 와 닿는 듯 합니다.
타국에서 몸 건강 하시고 고국 너무 그리워
하지 마세요 ㅎ. 안전 운행 !
가슴 한자락에 깔고사는 그리움이라 깊진 않아도 늘 아련합니다.
시계 추억을 떠올리다보니 아버지 코 고시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게요.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으니
모두가 궁핍하고 어렵던 시절였어요.
그런 페허를 겪어내며 반세기만에 천연자원도
지극히 빈약한 나라에서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타국에서는 보는 조국이 대견해 보이셨나봅니다.
아버지 시계를 가지고 탱크놀이 하던 개구장이 소년을
막둥이라서 부모님께서 엄청 귀여워 하셨나봐요.
코리언이라고 하면 엄지척 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신이 납니다. ㅎㅎ.
막둥이 혜택을 많이 보았지요.
저도 어린시절 상이군인이 무척 무셔웠습니다 .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지요 .
그들의 아품이 얼마나 컸을까요 ?
저는 중학교때 큰 오라버니가 첫 월급으로
손목시계를 사줬습니다 .
지금도 가끔 멋으로 차고 다닙니다 ㅎㅎㅎ
지금에 와서야 유공자들 제대로 대우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그 사이 긴 세월동안 나라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전후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저 그분들의 울분이 두렵기만 했으니.
..